▣ 2019년 다해 4월8일 [(자)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제1독서 다니엘 예언서 13,1-9.15-17.19-30.33-62
복음 요한 복음 8,12-20
◈ [서울] 사순 제5주간 월요일
2019년 다해 4월8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제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입니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서 서울 강동구 천호동으로 왔습니다. 큰비가 와서
봉천동으로 이사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 교구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 적성, 명동, 토론토, 시흥5동,
양주, 용문, 명동, 제주에서 지냈습니다. 지금은 중앙동으로 이름이
바뀐 예전의 봉천동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어디에서 지냈는지
장소라는 의미에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배우고, 신앙에서 자라고, 삶으로 의식이 생겼습니다.
신학, 역사, 정치, 사회, 윤리, 문화, 예술이라는 면에서 제가 어떤 곳에
있는지 성찰한 적이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고, 의식이 어디에 있는지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찰하신 것은 4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타볼 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도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과 통하기 위해서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여겼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저분은 하느님의 어린양입니다.
저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저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꿈을 알아보았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나의 의식과 함께합니다. 많은 사람이 지금 곁에 있는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셋째는 ‘성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성서를 읽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저의 서품 성구는 시편 126장의 ‘눈물로 씨 뿌리는
이가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입니다.
넷째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38년간 베짜타 연못으로
들어가려 했던 환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물에 들어가면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간절한 믿음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으며, 더는 죄를 짓지 말라며
용서해 주셨습니다. 율법과 질서도 중요하지만, 용서와 화해가 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나의 삶이 어떤 표징이 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오늘 우리는 제1 독서에서 ‘수산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억울하게 거짓 증언으로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은
수산나의 누명을 ‘다니엘’이라는 젊은이를 통해서 벗겨주었습니다.
수산나는 수치스럽게 목숨을 연명하기보다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당당하게 죽음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수산나를
사랑하셔서 거짓으로 증언을 한 간악한 사람들을 벌하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가리는 것은 필요합니다.
정의가 실현되고, 억울함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에 덧붙여 한 가지 더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는 아쉬움이 없습니다. 파란 풀밭에 나를 뉘어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내 비록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수레바퀴를 벗어나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고통 중에도 희망을 품을 수 있고, 죽음을 앞두고
새로운 출발을 생각하며, 헤어지는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영원한
삶으로 나갈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빛으로 오신 주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세상의 빛: 헌금함 옆의 예수
2019년 다해 4월8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세상의 빛: 헌금함 옆의 예수>
복음: 요한 8,12-20
어제 ‘세상의 빛’을 묵상하며 꾸르실료 차수지도를 들어와 계신
이종덕 가밀로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아, 그래.
이것이 세상의 빛이겠구나!’라고 느낀 것이 있어서 소개해드립니다.
이종덕 신부님은 신학생 때 휴학을 하신 적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의왕에 있는 성 라자로 마을에서 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라자로
마을은 나환우들을 위해 만들어진 동네였습니다. 그때 한 작은 방에서
움직이기도 어려운 나환우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손은 다 뭉그러졌고
얼굴도 녹아내리는 초처럼 되어버린 할머니였습니다. 묵주를 쥐기 힘든
손으로도 그분은 작은 방에서 묵주기도만 바치고 계셨습니다.
이종덕 신학생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천당 가시려고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의 대답이 이 신학생의 뒤통수를 때리듯 충격적이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학사님, 제가 너무 받은 게 많아서요. 뭐라도 보답을 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네요. 제가 감사해야 하는 분들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드리려고 기도하는 거예요.”
어쩌면 이종덕 신부님이 신학생 때는 자신이 천당에 가기 위해 기도를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남을
위해 바치고 있다는 것에 놀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남을 위해 사는
사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빛이 없으면 앞이 보이지 않아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라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나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집착하는
것들입니다. 만약 애인을 사귀고 있다면 그 애인이 떠날까봐
두렵습니다. 만약 돈을 좋아한다면 돈이 사라질까봐, 가난해질까봐
두렵습니다. 자녀에 집착하면 자녀가 안 좋은 일을 당할까봐
노심초사합니다. 이것이 어둠을 걷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라고 하십니다.
빛은 바로 보게 합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계신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알면 아버지도
알 수 있다고 하시는 말씀은 당신이 아버지를 볼 수 있게 하시는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되면
저절로 세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집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종덕 신부님은 할 할머니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삶을 본 것입니다. 그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고 그렇게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을 다시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빛이 되는 길은 빛을 바라보고 따르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이시고 그 빛이 한 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복음 사가는 마지막에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곁에서 하신
말씀이다.”
도대체 당신이 빛이시라고 증언하면서 헌금함은 왜 등장하는
것일까요? 요한복음은 창세기의 해설서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에덴동산에 헌금함이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헌금함에 바쳐야
했던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선악과입니다. 자신의 소출 중에
일부를 바치며 참 주인은 하느님이시라 고백하는 것이 헌금함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참 주님으로 보게 만들어 주님께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선악과나무의 옆에는
‘생명나무’도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당신을 주님으로 인정하여 봉헌하는
이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 바로 당신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종덕 신부님은 서품 받을 때, ‘내가 왜 여기 있지?’라는 생각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소에 대한 확신을 가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때 제대 앞에 예쁜 꽃꽂이가 보였다고 합니다. 무슨
꽃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척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기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그 빛이란 내어줌을
좋아하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려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 빛을 본
이들은 교회 옆에 있는 헌금 통에 자신이 가진 것을 봉헌하며 세상
것에서 시선을 떼어 하느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사순 제5주간 월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8일 제5주간 월요일
복음: 요한 8,12-20: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공공연히 당신 자신을 소개하신다. 당신이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세상의 주님이심을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12절) 여기서부터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반대의 표적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13절) 말씀이신 그분은 빛과 생명을 가지시고 그것을
베푸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니 그분께 다가와 빛을 받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부끄러움이 없도록 참 빛을 받아야 한다.
이 사순시기는 새로운 탄생의 시기이다. 빛에 가까이 가 완전한 빛,
완전한 빛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어두움을 물리쳐야 한다.
예수께서 바로 ‘빛’이시다. 그분은 본성상 빛이신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나오신 본성상 빛이시다. 또한 그분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의 빛이 아니라 ‘온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12절) 라고 하셨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제 자랑을 하는 것 같은 “당신의 증언은 유효하지
않소.”(13절) 라고 한다. 당신은 인간이시면서도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표현하셨다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여도
나의 증언을 유효하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다.”(14절) 즉, ‘나는 하느님이다. 나는 하느님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느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격 있는 증인이다.’
라는 뜻이다.
캄캄할 때, 우리는 전등을 밝힌다. 그러면 우리는 쉽게 물건을 찾을 수
있게 빛을 비춘다. 우리는 전등을 보기 위해 전등을 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건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물건들을 보면서 동시에
전등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등이 자기 자신을 보여주든,
물건을 보게 하든, 전등의 존재이유는 확실하다. 빛이 다른 것들을
보게 한다면, 자기 자신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빛이시므로 당신 자신에 관해 자격 있는 증인이시다.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15절) 유대인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신 것은 믿지도 않았고 알아보지도
못했으며, 인간으로만 보았던 것이다. 육에 따라 사는 것이 잘못 사는
것을 의미하듯, 육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잘못 판단하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그렇게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임을 알려주신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그 심판을 미루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심판은 언제나
유효하다.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16절)
“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은 유효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로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관하여 증언하신다.”(17-18절)고 하신다. 여기서는 아버지의 증언도
아드님의 증언도 확실하다. 그런데 아들은 바로 당신 자신에 관해
증언하시기 때문에 두 사람의 증언이 아니다. 즉,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는 말씀은 당신과 아버지는 같은 분이며, 당신은 아버지 외에
다른 증인이 필요치 않다는 말씀이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소?” 하고 묻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19절)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 정도로만 알고 있는 그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말씀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셨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말씀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셨고 우리를 위해
육이 되셨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예수님을 낳으신 분이
누구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을 모르기 때문에 그
아버지도 모르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당신 자신을 공공연히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친자관계로 표명하시게 되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음에로 몰아가려고
서로 협력관계를 갖게 된다. 예수님이 잘못 말씀하신 것은 없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사고에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없어 보이지만 당시
율법주의에서는 전혀 옳지 않은 면을 드러낼 수 있다. 주님께 올바른
신앙의 고백과 함께 사랑을 드릴 수 있도록 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8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 12)
깨어난 봄꽃들이 다시 빛안에서 기도처럼 빛납니다.
결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빛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관계를 비추는
관계의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관계의 빛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하며
우리를 주님께로 돌아서게 합니다.
주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관계의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생명의 빛은 모든 활동의 원천이 됩니다.
세상의 빛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되찾아 주십니다.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합니다.
구원의 출발점이며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십니다.
세상의 빛을 진실로 믿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삶을 깨어나게 하는 세상의 빛이 우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생명의 빛을 얻으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수도회] 과거 없는 성인(聖人) 없고, 미래 없는 죄인(罪人)
없습니다!
2019년 다해 4월8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과거 없는 성인(聖人) 없고, 미래 없는 죄인(罪人)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대하게 지내는 축제들 가운데 ‘초막절’이라는
축제가 있습니다. 이 축제는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들이 광야를
횡단하던 오랜 세월을 기억하는 축제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던 백성들의 기나긴 순례 여정, 광야에서의 그 기나긴 밤들을
인도했던 불기둥은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었습니다.
초막절 축제 기간 동안 매일 저녁 성전의 ‘여성 구역’ 네 곳에는 엄청난
크기의 등이 설치되었습니다. 밤새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성전지기들은
계속 올리브 기름을 채웠습니다. 백성들 각자의 손에도 등불이 들려져
있었고, 동이 틀 무렵까지 가무(歌舞)가 계속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막절 기간 내내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는 커다한 황금 촛대들에 불을
켜놓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언덕이 온통 환한 빛으로 밝혀진 그 모습이 꽤나
장관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어둠 속에서 환히 빛나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현존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크고 환한 등불, 성전을 환하게 밝히던 황금 촛대들,
백성들 손에 들려있는 등불...이 모든 것은 어둠 속에 헤매는 백성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을 표현하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적용되었던 빛의 상징을 당신
스스로에게 적용시키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복음 8장 12절)
하느님 현존의 표시가 더 이상 등불이나 촛대 등과 같은 상징이 아니라,
예수님 존재 자체로 드러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일심동체이십니다.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뵈었다면 아버지 하느님을 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정체와 신원에 대해서 더 이상 돌려서
말씀하신다든지, 은유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스스로 당신을 드러내시고 알리신, 일종의
자기 계시를 하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바로 구원이고 영생인데, 그 간단한 길을
거부했습니다. 그토록 은혜로운 구원의 계시를 배척함으로서 스스로
심판을 자초한 거입니다.
밝은 빛으로 다가갈수록 있는 그대로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깊은 상처와 굵은 주름, 부끄러운 과거와 엄청난
과오, 나약함과 유한성이 낱낱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송구함에 가슴을 치게 됩니다.
나 자신의 한계와 부기력을 실감하며 더 겸손되이 주님 현존 안에
머물고자 노력합니다.
깊어가는 사순 시기, 보다 자주 환한 빛이신 예수님께로
다가서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수
있습니다. 우리의 숱한 죄와 방황, 악습과 부끄러운 과거를 낱낱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가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하느님의 자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과거 없는 성인(聖人) 없고, 미래 없는 죄인(罪人)없습니다!” 또 다시
용기를 내서 구원의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주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 갈수록, 그분의 뜨거운 사랑 앞에,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는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녹아버릴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눈높이를 높여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4월8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요한 8,12-20)
눈높이를 높여라.
빛은 어둠을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고 죄와
악의 어둠을 비추어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빛을 따라가면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어둠을 좋아하는 사람은
빛을 피합니다. 결국 스스로 죽음의 심판을 받고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육적인 욕망을 채우려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라는 것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인간의
마음을 현혹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논리나 가치에 해박한
지식으로 종교를 ‘비과학적’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세상 것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는 절대자 하느님은 알지 못합니다. 이 세상만을 쳐다보는
한계성 때문에 결국 하느님 아버지도 그 아들 예수님도 알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그들은 무지합니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세상 것에만 매여 있으면 세상 것밖에 다른 것이 보일 리
없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알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왔고, 아버지 하느님께로 갈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 세상에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천상의 것을 이 세상에 옮겨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세상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 천상의 것을
보기가 너무도 어렵습니다. 잠시 세상 것에서 한 발 물러서서 하늘의
신비를 바라보면 모두를 얻을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합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면
내가 현실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눈높이를 맞춰주러 세상으로 오셨는데도 그분과
소통을 하지 못한다면 어느 정도 내 눈높이를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이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러 오셨기에
우리의 생각을 바꿔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에 마음을 두면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는 일이 잘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일이 잘되고 못되고는 우리의 결단과 실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품어주시고 생명을 가지고
기다리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더 이상 내 것을
고집하거나 세상 것만을 쳐다보는 일은 없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당신을 믿습니다. 하오니 저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인식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세상에 살면서도
여기서부터 천상의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 빛이신 예수님의 빛을
받아 세상을 빛나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해 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4월 8일(월) -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
오늘은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에 대하여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 말씀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늘 우리가 힘을 얻고 늘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모든 문제를 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허물을
위하여서 예수님이 찔려주셨고 내가 지은 죄를 위하여 예수께서 온
몸이 상하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아 우리가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태어나셨고 나를
위하여 태어나셨습니다.
세상에서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죽을 수도 있지요. 존경하는 사람을
위하여 죽을 수도 있지만 죄인 된 나를 위하여 이렇게 죽으셨다는
사실, 참 놀랍기만 합니다.
정말 여러분 같으면 여러분이 그토록 미워하는 원수를 위하여 죽을 수
있습니까? 정상적인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오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까지 다 가져오고 우리를 편히 쉬라고 말씀하시면서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조용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을 한다면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터치하기만 한다면 이 위대한 예수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게
될 것입니다.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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