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4월20일 [(백) 파스카 성야]
제1독서 창세기 1,1―2,2
제2독서 창세기 22,1-18
제3독서 탈출기 14,15―15,1ㄱ
제4독서 이사야서 54,5-14
제5독서 이사야서 55,1-11
제6독서 바룩서 3,9-15.32―4,4
제7독서 에제키엘 예언서 36,16-17ㄱ.18-28
서간 로마 6,3-11
복음 루카 복음 24,1-12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활이 있는 죽음, 부활이 없는 죽음
2019년 다해 4월20일 2019년 파스카 성야
<부활이 있는 죽음, 부활이 없는 죽음>
복음: 루카 24.1-12
세상에는 수많은 죽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죽음이 다 부활을
맞지는 않습니다. 가리옷 유다의 죽음은 부활이 없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이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한 건물의 입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얼굴에
주름이 많고 옷차림도 허름했습니다. 그러나 밝은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한번은 건물의 주인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시나 보지요. 표정이 항상 밝아 보여요.”
그러자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제 걱정을 트럭에 담으면 아마 100대 분량도 더 될 것입니다.”
부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까?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나요?”
할머니는 부자에게 행복한 삶의 비결을 들려주었습니다.
“내게 특별한 비결이 하나 있어요. 저는 고통이 닥치면 예수님께서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사흘을 생각하면서 사흘 동안 기다립니다. 사흘
뒤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해가 뜬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죽음을 감내하는 힘입니다. 사흘만 참으면 거의
모든 근심이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 부활신앙입니다. 어쩔 수 없이
사흘을 참는 것과 사흘 후면 반드시 변하게 될 것이라 믿어 참게 되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고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은 27년간의 수감생활을 하고 나올 때가
72세였습니다. 그런데도 젊은 사람 못지않은 건강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진 박해 속에서도 이 고난의 시간 뒤에 반드시 부활이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팔순이 다 되어 남아공의 첫 유색인종 대통령이 되었고 내전
분위기가 있었던 나라를 안정시켰습니다. 이런 삶이 부활신앙으로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이 있다고 믿으면 모든 고난이 의미 있게 되고 실제로 부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맞아야 하는 고통과 죽음은 부활이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당해야 하는 작은 죽음들과 희생들에 반드시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미시켜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뒤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음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이전에 수차례나 당신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어도
예수님은 확신하셨습니다. 즉, 부활을 믿는 죽음이 부활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기도가 부활신앙에 따른 죽음입니다. 기도를 위해서도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합니다. 기도하고 나면 성령의 은혜가
충만할 것을 믿기 때문에 또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죽음인 것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은총이 주어질 것을 믿고 내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고 죽는 것은 부활을 맞을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죽음은 반드시 부활을 맞게 됩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향해 항해할 때에 선원들은 모두 그를 죽이려고
했다고 합니다. 자신들을 죽게 만드는 선장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콜럼버스의 말을 믿지 못하고 절망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자신의 항해가 고통의
연속이지만 언젠가는 부활의 영광이 있다고 믿어 전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만이 참 부활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다고 믿는다고 다 부활을 맞는 것만은 아닙니다.
가미가제 자살 특공대나 빈 라덴에게 속아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힌
테러단원들도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알라신에게 받을 상이 크다고
믿고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사랑만이
생명력이 있습니다. 사랑 없이 새로 태어나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위한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죽음이어야지
생명을 죽이는 죽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 자체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랑이 아닌 곳에서 솟아나는 부활은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죽음이 아니라면 부활을 믿어도 부활하지 않습니다.
구소련에 속해 있던 아르메니아에서 무려 5만 5000명이 참사를 당한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9층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스잔나라는
엄마와 네 살 난 딸 가이아니가 철근과 콘크리트 틈새 속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갇혀 있었는데 가이아니는 엄마 옆에 누워서
“엄마, 목말라”라는 한 마디 말을 계속 토해냈습니다. 움직일 수도
없었던 엄마는 딸의 목을 축일 방법을 고민하다 조난당한 사람들이
먹을 것, 마실 것이 없을 때 피를 나눠 마시던 TV 장면을
기억해냈습니다. 어둠 속에서 엄마는 손을 더듬어 깨어진 유리조각을
하나 찾았고, 지체 없이 손가락을 찢어 흐르는 피를 딸의 입술에 축여
주었다. 이렇게 두 주일이 지났고 그들은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엄마는 딸에게 피를 주었기 때문에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부활을 위한 죽음은 반드시 생명을 위한 죽음이어야합니다. 부활을
시켜주시는 분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은 부활을 믿더라도 부활할 수 없습니다.
부활을 위한 죽음이란 첫째, 부활을 믿는 죽음이어야 하고, 둘째 생명을
위한 죽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 교회가 탄생할
것임을 아셨고 또 당신은 반드시 부활할 것임을 믿으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수많은 죽음과 부활로 엮여집니다. 생명을 살리는 죽음, 생명을
낳는 죽음은 반드시 부활이 뒤따름을 의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활을
믿고 생명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할 때 매일이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나날이 될 수 있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부활 성야: 다해|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20일 부활 성야: 종말론적 사건 부활
부활 복음: 루카 24,1-12: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다
이 거룩한 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풍성한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 복음 말씀들은 아들과 성령과 함께 아버지께서 가지신
영원한 구원계획이 실현된 역사적, 예언적, 지혜의 말씀이다. 여기서는
중요한 테마를 보도록 하겠다.
안식일이 지났다. 이는 “하느님의 안식”(창세 2,4 참조),
“일곱째 날”이다. 이제 “주간 첫 날” 즉 “제8일”이 시작되었다. 안식일
다음날로 표현된 이 8일은 상징적 숫자이다. 7은 충만을 의미하며,
1은 충만의 새로운 시작의 의미가 있다. 이 날은 계시와 役事의 마지막
날이며, 새로운 날이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첫째 날에 계시하시고
행하신다( 창세 1,1-3; 에제 1,1). 또한 이날은 “종말론적”인 날이며,
“더 이상” 그 후에는 있지 않을 날이다. 영원히.
주님께 유일하게 충실했던 여인들이 등장한다. 남자들, 특전을 받은
사람들, 선택되고 축복 받은 “제자들”은 “그 때, 그분을 버리고, 모두
도망쳐 버렸다”고 마르 14,50은 상징적 문헌을 보고하고 있다.
여인들은 이 순간부터 공동체와 관련된 의미에서 항상 주님 부활의
“표징”에 대한 受託者들이 된다.
부활 복음은 오늘 이 밤 그리고 항상 무엇보다도 먼저 충실한 여인들을
돌아보고 그리고 남자들을 돌아보게 된다. 사도들이 세상에 대해 홀로
전적인 “증거자들”이 되더라도 말이다(사도 1,1-4.21; 10,41). 그
기능에 있어서는 같다.
묵은 옛 어두움은 여명 앞에 사라져 가고, 약속된 우리의 “정의의
태양”(말라 4,2:불가타), “빛나는 아침의 샛별”이(묵시 22,16)
떠오른다. 주검에 발라 시체가 천천히 썩도록 하는 묵은 향유가
준비되었으나,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여인들은 “무덤을 보고”, “향유를 바르려” 가고 있다. 그러나 돌은 이미
치워졌고, 무덤은 비었으며, 시체는 거기에 없었다. 여기서 여인들은
위대한 神現을 체험한다. 천사 혹은 부활의 천사들을 만나게 된다.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말한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5절)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 한다.
우리는 수없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찾는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즉 우리의 삶속에
구체적으로 살아계신 분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과거의 한 인물로,
성경에 나오는 분으로 묶어두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셨고, 그 부활은 당신의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얻으신 영광된 부활을 우리가 잘 알아듣고 우리의 삶 전체가
부활하신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일상생활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는, 인간 존재가
완전히 변모하는 것이다. 부활은 승리의 신비이며, 죽음과 모든 부패의
힘에 대한 완전한 승리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살아나다.’
‘되살아나다.’라는 말의 의미이다. 이를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사도들에게 전했을 때, 사도들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은 유대인들에게는 부활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하여간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에게 보여주신
가장 큰 계시요, 인류를 위한 가장 큰 역사라고 할지라도, 이 부활사건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활하신
주 예수의 모습은 바로 영광스럽게 될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며, 그
부활의 신비는 우리 안에서 드러나야 하며, 선포되어야 하는 신비이다.
영광의 주님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큰
대가가 지불되었던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새로운 삶이 되어야
한다. 이 새로운 삶은 죄와 죽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완전히
참여하는 삶이다. 그 삶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끝까지 사랑하신
사랑,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한 사랑으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가 되셨다. 우리도 그분과 같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함으로써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며 실천함으로써 더욱 완전한 삶을,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삶을 받아들여 살아야 한다.
우리가 전할 부활의 신비도 우리 자신이 지고 가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는 부활 메시지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5절) 이 미사 중에 우리의 삶이
참으로 부활의 신비를 힘차게 선포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하도록 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 6)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20일 토. 파스카 성야.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 6)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습니다.
꽃들이 활짝 피어 부활을 함께 기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일상이
다시 싱싱한 일상의 갈릴래아로 되살아났습니다.
되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상처로
상처많은 우리를 다시 껴안아주십니다.
위대한 사랑의 힘이 바로 우리를 살게하는 부활이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어제의 아픔이 오늘의 기쁨이 됩니다.
부활은 싱싱한 오늘의 기쁨입니다.
절망에서 무덤에서 부활을 만납니다.
희망이 되살아났습니다.
사랑이 되살아났습니다.
맑고 뜨거운 예수님의 부활이 지쳐있는 우리모두를
위로하여 주십니다.
슬픔과 미움 아픔의 자리마다 기쁨과 용서로 채워질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모두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부활은 사랑의 순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의 부활로 당신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수도회] 그분께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실 때...
2019년 다해 4월20일 파스카 성야
그분께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실 때...
루카 복음 사가에 따르면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절정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표현됩니다. 만일 그분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직도 죄와 어둠 속에 잠겨 있을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그분의 부활로 죽을 운명, 필멸(必滅)의 존재인 우리 역시
불사불멸의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눈만 뜨면
감사드려야 하고, 백번 천번 감사드려야 할 은총의 대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사도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인물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발현하셨을 때,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루카 복음 24장 37절 참조)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무덤에서 시신을 찾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정원지기로 착각하여, 그분을
어디에 모셨는지 가르켜 달라고 청하기까지 했습니다.
(요한 복음 20장 15절 참조)
물론 살아계시던, 돌아가셨던 예수님을 향해 여인들이 한결같이 지녔던
초지일관된 태도와 지극정성은 탄복할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골고타
언덕 위에서 숨을 거두신 후, 여인들이 마음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생각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안식일 전날,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 예수님의 장례절차가 너무나
무성의하고 졸속적으로 처리된 것에 대한 송구스럽고 안타까운 마음,
그것이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무덤으로 달려가, 피투성이인 예수님의
시신을 깨끗이 닦아드리고, 값진 향유를 부어드릴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그리도 신새벽 길을 달려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인들 역시 예수님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예수님 시신에 대한 깍뜻한 예우,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
그분의 부활에 대해서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는 제자들과 여인들,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영적이고 내적인 준비가 얼마나 부족했던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이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부활 신앙을 지니기까지 얼마나
긴 여정을 걸었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경천동지할
대사건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의 부활 앞에 그들이 보인 최초
반응은 경악과 놀라움, 의심과 불신이었습니다.
이천년 세월이 지난 오늘 우리 역시 예수님의 부활 앞에 제자들과
여인들이 겪었던 똑같은 갈등 앞에 서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살아계신 분’(루카 복음 24장 6절),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영역이자 천상 영역에 속하신 분, 결국 지상 영역을
초월하시는 분이기에, 더 이상 우리 육안으로 뵐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며, 자신을 드러내(계시해) 주셨을때, 비로소 영적
시야가 활짝 열렸으며, 부활하신 그분의 참 모습을 알아뵙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뵙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실 때, 그분께서 우리들 세속의 눈을 영적인
눈으로 밝게 조명해주실 때, 우리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뵙게
될 것입니다.
결국 관건은 부활 예수님을 향한 우리 인간 측의 무조건적이고 순수한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극복하고 예수님께로 건너가겠다는 확고한
결단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4월 20일 (토) - 예수를 바라보자
오늘은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써의 무섭고
두려움보다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크기에 십자가에 고통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당히 이겨 승리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하나 이루기를 위하여서는 쉬운 것이
없습니다. 어려워집니다. 힘들어집니다. 고통스러워집니다. 더 나은
시간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는데 쉽게 주어지지 않지요.
혹 누가 나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땀 흘린 것이 아니라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에게는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대신해 주시고 가셨기 때문에 바로 그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성도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죽어야 할 그 고통, 내가 어려움을 당해야 할 그 고통을
예수님이 대신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가는 그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다른 그 어떤 것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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