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書院撤廢)
조선 왕조 말기 흥선대원군(재위 1862년 - 1872년)의 주도하에 조선 양반 및 유림들의 학당(學堂)인 전국의 서원들을 강제로 철폐하였던 일. 서원 철폐령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서폐령(書廢令)이라고도 한다.
본래 서원은 조선 왕조 유림들이 학문에 정진하고 선조들을 배향하며 충효예를 가르치던 곳으로 성균관, 향교와 함께 유림의 3대 학문의 전당으로 꼽힌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대학교 및 대학원급에 속하는 교육기관이며 성년이 된 유생들에게 충효예의 교육과 선현에 대한 존경과 배향 그리고 유교의 전통성을 가르쳤던 곳이기도 하다.
초기의 서원들은 유림들의 인재 양성, 충효예 교육, 선현의 배향 등을 목적으로 삼았으나, 신분제도가 고착화되고 붕당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가문, 학연, 지연, 사제에 관계된 온갖 비리와 부패가 난무하게 되면서, 한 사람을 중복해서 모시거나 모실만한 인물이 아닌데 가문의 명예를 위해 무리하게 모시는 경우, 산 사람을 모시는 경우 등의 폐단이 심해졌고, 더구나 이들은 성현을 모신다는 이유로 농민들에게 과도한 수탈을 일삼았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을 서원으로 끌고 가 사사로이 처벌하였으며 심지어는 이를 말리던 지방관이 서원에 끌려가 곤장을 맞는 등 막장이 되어버린다. 이쯤되면 성현들이 지하에서 울겠다.
이 문제가 조정까지 전해지게 되면서 숙종 조(재위 1674년 - 1720년)부터 사사로운 목적이나 착취 목적 등으로 서원을 세울 경우 제재를 내리고 관련 유생은 과거 시험에 대한 제한을 두게 했으며 일부는 훼철화되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 시절에 한 사람을 중복하여 둔 서원 등을 적발하여 철폐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서원 설립이 주춤하기는 하였으나 조정에서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단속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서원은 자꾸 늘어서 숙종조의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이후 영조가 금지령을 더 강하게 재확인해야 했을 정도였다. 거기에 서원들 사이에서 유림 및 양반들의 텃세가 날로 심해지고 폐단이 더욱 심해져 서원은 이 때를 계기로 학문 목적의 기능을 일부 상실하고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악덕 집단으로 낙인되어 민중들의 지탄과 비난을 받게 되었다. 양반들의 텃세가 심할수록 민중들의 고통도 더해졌으며 일부 서원은 이를 빌미로 민중으로부터 향세(鄕稅)를 과다하게 징수하기도 하는 등 병폐가 심해지기도 하였다.
이후 1863년 고종(재위 1864년 - 1907년)의 섭정을 맡게 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게 되면서 서원의 텃세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조 대비의 권위와 입을 빌어 서원의 폐단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나가면서 서원 철폐의 명분을 쌓아나갔고 만동묘를 철폐한 것을 시작으로 병인양요 이후 온갖 텃세와 병폐 그리고 비리로 얼룩진 전국의 서원들을 모두 철폐시키고 서원에 관련된 양반 및 유림은 퇴출하도록 하는 강경한 대응책을 내놓으며 서원과 유림들을 압박하였다. 서원 유림들과 양반가들은 만동묘 철폐 때까지만 해도 상소를 올리고 매우 강렬하게 반발했지만 고종이 매우 단호한 의지를 보이며 철폐 반대소를 꾸짖자 곧 사그라들었고 유생들이 한강에 몰려들어 통곡했다는 야사와는 달리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던 순간엔 흥선 대원군의 명분이 워낙 확고했던 터라 유림의 반응은 표면상으론 오히려 조용했다. 유림들의 대응은 다소 소극적이었는데 흥선 대원군의 조상인 인평 대군을 모시는 서원은 만들고 서원을 철폐하란 명에도 순간을 모면하려는 방법을 썼는데 대원군은 인평 대군의 서원도 가차없이 철거하고 부실하고 비리가 많은 불량한 서원은 조사를 통해 완전 철폐하도록 하고 나머지 일부 서원은 존치하도록 하였다. 또한 철폐된 서원의 예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토록 하였고 퇴출된 서원들은 건물 자체가 강제 훼철되어 소실되었다.
1865년에는 우암 송시열이 세운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시작으로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든 서원이 철폐되었으며 남은 서원들 마저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으로 일부는 소실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원군의 권위와 명분에 유림 세력이 굴복하긴 했어도 서원을 600개나 닫아버린 대원군의 강단에 불만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고 대원군 반대파들은 수시로 상소를 올려 서원을 마구잡이로 닫아버린 것의 폐단이 심하다고 비판하곤 했다. 이후 대원군이 실각한 이후 유림들은 고종에게 서원 복구를 대대적으로 청했는데 서원의 폐단이 심했던 것은 유림들도 알고 있던 터라 600개 다 복구해주세요~라고 하는 정신나간 양반은 없었고 화양서원, 만동묘같은 상징적인 서원들의 복구 요구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고종은 만동묘만 복구해주곤 나머지 복구 요구는 씹었다. 그나마 만동묘 복구도 제사를 국가가 주관하게 함으로 예전처럼 만동묘 좨주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다. 유림들은 지치지 않고 복구 상소를 올렸지만 고종이 "너넨 서원이 없으면 성현을 존경할 줄 모르느냐?"라고 비웃으면서 결국 시들해졌고 유림이 곧 한국사의 주도 세력에서 탈락하면서 서원 복구 요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본래 서원의 수는 650개였으나 나머지는 흥선 대원군 집권기를 넘겼지만, 사실 대부분의 서원들이 일본 강점기 시절 현지 유력자의 의지로 소리소문없이 복구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 중 소수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파괴로 사라졌고, 광복 직후 남북분단으로 인해 일부는 북한으로 넘어갔고 한국전쟁 때 폭파로 일제 강점기 시절에 복원된 서원들이 대부분 사라졌으므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현재는 한반도에 47개 서원만이 남아있는 편이며 남한의 경우 36개가 남아있고 북한의 경우 11개 정도가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는 80개 정도로 늘어났는데 이는 현재 유림들이 복원했거나 복원을 추진 중인 것이다. 그 외 나머지는 관련 유림도 없는 데다가 기록도 완전히 소실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일부는 서원 터만 남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