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4월25일 [(백)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제1독서 사도행전 3,11-26
복음 루카 복음 24,35-48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믿음의 시너지 효과
2019년 다해 4월25일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믿음의 시너지 효과>
복음: 루카 24,35-48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한국은 골프의 불모지였습니다. 그러다
1998년 박세리 선수가 미국 여자프로선수권대회와 미국 여자오픈
대회에서 잇달아 우승을 합니다. 바로이듬해에 김미현 선수가 혜성처럼
출현했고 뒤를 이어 세계 골프계에 돌연 한국 여자 선수들이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2006년에는 11승, 2009년에는 12승,
2010년에는 10승을 기록했습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자메이카 육상선수들이 무려 11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인구가 겨우 280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섬나라가 인구가 100배나 더 많은 미국을 돌연 앞지르게 된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케냐 선수들이 어느 날 갑자기 마라톤을 석권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역도계에서는 250kg이 인간의 한계라고 여겨졌습니다.
혜성처럼 나타난 러시아의 슈퍼헤비급 역도선수 바실리 알렉세예프의
신기록 행진도 250kg에서 멈춰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심리학자가 그의 트레이너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역기 위에 251kg을 올려놓고 알렉세예프에게는 249.5kg이라고
말하세요.”
알렉세예프는 예전처럼 251kg을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그러자 한 달
내 다른 선수 4명도 연거푸 250kg의 벽을 깼습니다. 알렉세예프 자신도
그때부터 7년 동안 무려 80차례나 세계기록을 경신했습니다.
1마일 경주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십 년간 내로라하는
세계최고의 선수들이 1마일(1609m)을 4분 안에 돌파해보겠다며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의사들은 4분 안에 들어오는 일은
불가능하다며 폐와 심장이 파열될 것이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옥스퍼드대학의 의대생 로저 배니스터가 4분 벽을 깨버리자 한 달 안에
다른 선수 10명이 4분 벽을 깼습니다. 1년 후에는 27명이, 2년 후에는
300명의 선수들이 무더기로 4분 벽을 돌파했습니다.
[참조: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나와 똑같은 사람이 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김상운, 21세기 북스]
사람은 자신이 자기 자신을 정한 한계 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를
자존감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자기충족예언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스스로가 평가해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이
되어 믿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 믿음을 깨면 자신도
믿음의 한계가 바뀝니다. 그리고 그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수록 한
사람이 믿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믿게 됩니다. ‘1 더하기
1은 2보다 크다’라는 것을 시너지 효과라 합니다. 두 사람이 각자 하는
것보다 협동해서 하면 각자 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는
뜻입니다.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각자의 믿음이 하나로 모아질 때 그
각자의 믿음이 퍼져서 가져올 수 있는 효과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세상 누구도 죽었다가 스스로 부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하니 실제로 아무도 부활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당신이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죽음도 이기실 수 있다고 믿으셨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교회라는 공동체에 모으셨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나
그 밖의 여인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부활한
예수님을 사도들 앞에서 증언하였습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사도들도 조금씩 믿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사도들에게 나타나 그 믿음이 퍼져나가게
하지 않고, 이미 퍼져있는 믿음들이 사도들을 중심으로 모이게 하셨고
그 믿음을 그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개인들의 믿음이 아닌 ‘교회의 믿음’을 형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믿음이 공동체를 만들고 그 공동체가 같은 믿음을 지닐 때 믿음은 더
빠르게 퍼져나갑니다. 사람은 소속되고 싶은 본능이 너무나도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환경과 믿음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땅콩을 쪼개는 더 높은 기술을 습득한 침팬지 무리에
있던 침팬지가 그보다 열등한 기술을 가진 무리에 속하려고 자신이
가진 높은 기술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1950년대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는 실험을 통해 아주 간단한 문제도 온
공동체가 다 틀리게 대답하면 자신도 뻔히 아는 답을 틀리게 대답한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를 ‘상황의 힘’이라 합니다. 그 믿음이 선하고
강력할수록, 그리고 그것을 믿는 이들의 수가 많을수록, 그 무리의
믿음은 더 넓고 빠르게 확장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 부활에 대한 믿음이 몇몇의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부활은 새벽에 하셨지만
사도들에게는 거의 맨 마지막에 밤에 나타나십니다. 사도들은 낮 동안
예수님을 본 많은 이들의 증언만 들어야했습니다. 이는 부활신앙이
성직자들의 신앙이 아닌 교회의 신앙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본당의 신앙은 본당 신부님이나 수녀님의 신앙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들의 신앙이 모아진 신앙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신앙은 또한
성당에서 만날 수 있는 한 할머니의 믿음입니다. 나의 작은 부활체험들이
모여 교회의 믿음을 형성하고 그것이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탄생을 위한
선교의 힘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체험들이 교회 안에서 공유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러한 체험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거나
자신을 교만하게 하는 것이 아닌 이상은 오늘 사도들 앞에서 자신의
체험을 증언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함께 나누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믿음들이 모여 교회의 믿음을 형성하고 또 누군가가 교회 안에서 그
믿음을 전수받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교회에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의 믿음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25일 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
복음: 루카 24,35-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아직도 스승을 잃은 실의와 좌절에
잠겨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나누시고 구운 생선을
잡수시면서 당신의 부활을 증명해 주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장면인가?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을 믿고 있었다. 이미 무덤을 보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서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39절)
하셨다. 제자들은 즉시 그분을 만져 보았고, 잡아 보고 그분 숨결을
느끼고 확신했다. 그들은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죽음을 이긴 사람들이 되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잡수시고 마시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말해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b). 어떤 개인의 환상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한 부활은 상상조차 못하고 실의와 의문에
차 있던, 그리고 부활하셨다는 소식도 믿지 않고 두려움에 차있던
제자들에게 실재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것이다.
이렇게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신 것은 당신 안에서 죽음을
이기셨고 육체의 부패를 떨쳐 버렸음을 증명하신 것이다. 당신의
부활하신 몸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몸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게 하시고자 하셨다. 이렇게 하시려고 그분은
문 닫힌 방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이 행적을 통하여 당신 안에 신성과 인성이 나뉘지 않고 결합되어
있으신 분임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심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의 수난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말씀을 깨닫게 해주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44절)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46절)고 말씀하셨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즉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산 증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47절)하는
사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48절)
바로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이 바로 사도로 선택된 이들이
하여야 하는 것이며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신비를 알고 체험하는
우리들이 증인으로서 전해야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같이
체험하고 전하여 왔는가를 생각해 보자. 이제 매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그 체험을 이웃에 전할 수 있는, 나눌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주님께 청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 24, 41)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25일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 24, 41)
부활 체험은 밥의 체험입니다.
허기를 통해 먹을 것을 통해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됩니다.
먹을 것을 통해 함께하는 소중한 사람을 다시 보게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함께 먹고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다시 맛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언어들을 뛰어넘는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끼의 식사를 함께 하는 행복입니다.
오늘 여기 우리 앞에서 먹을 것이 펼쳐집니다.
우리 삶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함께 하는 식사로 우리와 모든 순간에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밥처럼 부활처럼 서로를 받아들이는 부활 축제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부활의 증인이 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4월25일 주님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루카24,35-48)
부활을 선포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로부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당황되기도 하지만 개인의 생각을 전제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직자의 얘기이기 때문에 사적인 얘기로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모르면 모른다고 답하고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은 기대를 채워줄 수 없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섣불리 아는 척 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보아라,”
“만져 보아라.” 고 하셨습니다. 혹 눈으로 환상을 본 것 같으면 직접
만져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제서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드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음식을 잡수신 것을 보면
부활한 몸이 실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닙니다. 나타나셨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시고 하는
것을 보면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오고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눈을 열어 주셔야
그분을 알아볼 수가 있는 법입니다.
주님을 알아 뵈려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맙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
결국 유령으로 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주셨습니다. 옛날의 허물을 들추어낼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좁은 분도
아니셨고, 그저 믿음을 키워주지 못한 것이 안쓰러울 뿐이었습니다.
저 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
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예수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학생에 머무르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는 증인, 순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4월 25일 (목) - 귀한 성도
오늘은 ‘귀한 성도’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 16절 말씀에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만난 하나님을 서로 교제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지친 마음을
위로받는 곳입니다.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성전을 성전으로 여기는 사람이 자꾸
줄어가고 있습니다. 성전을 놀이터로 생각하는 이가 있고 성전을 한번
잠시 들렀다 가는 정거장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께서 성전에서 술을 팔고 양을 팔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을 향하여 크게 분노하십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다 쫓아내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심이 넘치는 곳, 기도하는 곳,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성전을 소홀히 여기는 성도 되지
마십시오.
성전을 귀하게 여기는 만큼 귀한 성도가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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