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4월27일 [(백)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제1독서 사도행전 4,13-21
복음 마르코 복음 16,9-15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일치의 중심은 예수님이 아니시다
2019년 다해 4월27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일치의 중심은 예수님이 아니시다>
복음: 마르코 16,9-15
어느 교사가 40여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야외수업을 위해 잔디밭으로
나갔습니다. 교사는 반장을 사회자로 세우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자를 중심으로 학생들 스스로의 안건을 선정해
토론을 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학생들이 저마다 한두 마디씩 두서없이 떠드는 통에 분위기는
시끌벅적해졌습니다. 보다 못한 교사가 사회를 보던 학생을 불러
질서를 잡아나가도록 종용했지만 어지러운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그 학급에서 말썽꾸러기로 소문난 한 학생이 일어서더니
이렇게 크게 외쳤습니다.
“아하!”
학생들은 모두 말썽꾸러기가 드디어 중요한 말을 할 것이 있다고
믿었는지 그를 바라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학생은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뚝 떼더니 사회자를 향해 찡끗 윙크를 하였습니다. 사회자는
다시 자신에게 집중된 분위기 속에서 훨씬 수월하게 토론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구로산 강요식의 스피치 리더십 예화’, 구로친구넷]
각자가 자신의 주장만을 내다보면 한 주제로 토론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회자가 중심을 잡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자도
힘든 상황일 때 누군가는 그 사회자에게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한 사회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친구들이 많아질 때 그 공동체의
일치의 힘은 더욱 강력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교회가 단합이 되도록 이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
제자들에게 나타나 당신의 부활을 알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일곱 마귀나 들렸던 여자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둘은
여자들의 증언을 듣고도 실망하여 시골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나타나셔서 당신 부활의 확신을 주신 다음 다시
제자들에게 알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도망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그들의 모든 증언을 듣고 있는 열한
사도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완고한 마음과 불신을
꾸짖으시고 그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하며 파견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과 ‘사도들’ 간의 묘한 대비를
나타냅니다. 보다 신앙이 강한 것은 제자들 중에서도 여자들입니다.
사도들보다 먼저 제자들이 예수님을 봅니다. 그러나 복음을 선포하도록
그들이 아니라 믿음이 부족한 사도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시는 사도들은 지금의 교황과 주교들입니다. 크게는
성직자들을 모두 포함한다 할 것입니다. 성직자들의 믿음은 분명
신자들보다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신자들의 믿음이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먼저 모이기를 원하셨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 받은 이들은 성직자들입니다. 신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그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모이게 하여 교회가 하나가 되는데
먼저 협력해야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한 명에게 하느님 나라의 열쇠를 맡기시어
나머지 사도들이 베드로 한 명에게 모이게 하신 이유와 같습니다.
하늘나라 열쇠의 힘이 베드로로부터 세상으로 퍼져나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도 물줄기가 넷이 있었지만 결국 하나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에제키엘서 47장에 등장하는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한 군데서 시작되지만 나중엔 세상을 모두 적실 양이 됩니다.
복음전파의 힘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5)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구심점이
있어야합니다. 질서가 있어야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한다고
가족의 머리가 둘이어서는 안 됩니다. 남편이 머리이고 아내가
몸입니다. 머리를 통해 몸이 움직이는 것이 정상입니다. 질서가
허물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히려 질서를 존중합니다. 성자께서는 성부와 같이 하나의
머리가 되려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머리는 성부이시고 몸은
성자이십니다. 이렇게 공동체가 모였을 때 하나의 머리가 형성되고
그로부터 더 높은 머리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흘러나오는 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공동체의 모습인 것입니다. 각자가 주님과 맞닿은
사람들인 양 교회가 분열되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 선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치의 구심점을 아는 지식입니다. 자칫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하느님께서 원하신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일치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모든 행위는
그리스도의 뜻에서 벗어납니다.
개신교는 교회 일치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뽑으신 이들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 당신에게 다가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야 한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한 교회가 혼인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라는 말을 좋아하는 이들은 일치가 마치
샐러드처럼 각양각색의 과일들이 서로 버무려지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일치는 마치 여러 과일이 잘라져 하나의 샐러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릇이 없으면 그 샐러드는 다 쏟아져버립니다. 일치는
과일들이 한 바구니, 한 접시에 담기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담겨야
하는지 그 구심점을 올바로 아는 이들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27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제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심
복음: 마르 16,9-15: 말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시편 118,24)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은 주간 첫날이며 바로 주일이다.
만물이 빛에 휩싸인 날이다. 이날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이날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사도들 위에 내려오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태초에 죄의 주인공이었던 그래서 죽음을 처음 맛본 여자가 부활의
처음 본 사람이 된다. 남자에게 죄를 전해 주었던 여자가 이제 은총을
전해 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11절) 예수님께서 전에
미리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제자들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스승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크게 실망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빵을 떼어 나누면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체험한 일을
전하였는데도 그 말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자기들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는 그런 완고함을 보이고 있다.
수난하시기 전, 그들과 함께 계실 때 당신은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다음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다 알려 주셨지만, 그분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은 그들의 기억을 송두리째 없애 버렸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분을 보고 너무나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분의 가르침도
잊어버리고 부활을 기대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당신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사도들로 하여금 스승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신앙이 없음을 책망하고 계신다. 예수님과 그토록 가깝다고
하는 제자들까지도 아마 주님의 부활을 믿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다.
이렇게 부활 사건은 하나의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현실적인 삶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불신과 주님의 책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받아들인 부활의
신비를 이제 전하도록 선포 사명을 주님께로부터 받는다.
제자들의 신앙이 비록 약하였으나 주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의 신비를 온 세상에 전하라고 사명을 주신다. 이제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고통과 죽음을 불사하면서 이 부활의 신비를
전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되었던 것이다.
신앙이 약한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교회의 초석이 되게 하시고 구원을 전하게 하셨다. 이제
그러면 우리들의 신앙은 어떠한가?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감사하면서 사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비록 나 자신의 신앙이 강하지는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같이
나를 당신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하도록 노력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비록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와 우리 가정에 언제나 함께 하시면서 당신의
뜻에 맞게 인도해 주시도록 은총을 청하면서 기도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마르 16, 14)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27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마르 16, 14)
늘 믿음의 본질을 놓치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연두와 초록의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불신과 완고한
우리 마음을 다시 비추어주십니다.
다시 믿음입니다.
믿지않고서는 부활에 이를 수 없습니다.
믿음과 분리될 수 없는 부활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믿음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생명의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생명의 믿음은 부활을 일구어내는 원천입니다.
멈출 수 없는 우리 믿음의 여정입니다.
부활로 우리의 믿음을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믿음으로 다시 열리고 다시 보이게 되는 부활의 길입니다.
끝내 믿음의 길이 우리의 불신과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치유하여 열리게 할 것임을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복음을 선포하여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4월27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마르16,9-15)
복음을 선포하여라.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다양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성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만남을 이루는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과의 선한 관계가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 말이 있듯이 은총이 풍부해도 담을 그릇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 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이미 예고해 주었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16,15). 완고한 마음은 말씀이 전달되는 것을 막고
부활이 선포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 마음이 거칠어지고 굳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완고해진 내 마음을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고쳐주시길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야 말로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줍니다. 어떤 기회를 특별히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매 순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큰 사랑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어영부영, 양다리 걸치기는 증거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몫입니다. 우리도 누구의 말에 구애 받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러나
사람의 눈에 들기보다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효과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4월 27일 (토) - 기도에 힘쓰는 성도
오늘은 ‘기도에 힘쓰는 성도’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 말씀에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부에 힘쓰는 학생은 공부를 잘합니다. 그림에 힘쓰는 학생은 그림을
잘 그리지요. 운동을 힘쓰는 사람은 운동을 잘합니다.
이들의 그 결과는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학자가 되고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은 화가가
되고 운동을 잘 하는 학생은 운동선수가 됩니다.
이들이 전공을 하는 것으로 인하여 한 두 번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직업이 되고 자식들에게 심지어는 후대에 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성령을 받기 위하여 집중 기도를 하는 것, 그래서
성령을 받는 것, 그래서 후대에게까지 전하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집중기도를 한 번 하고 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집중적인 기도로
성령을 받고 성령 받은 성도들은 평생을 기도하고 승리의 삶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로 인생을 변화시키고 기도로 후손들에게
희망을 물려주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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