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6월14일 [(녹)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제1독서 코린토 2서 4,7-15
복음 마태오 복음 5,27-32
◈ [서울]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2019년 다해 6월14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지구에서 가장 크고, 뜨거운 사막은 ‘사하라 사막’입니다. 60도가 넘는
뜨거운 열기와 수시로 불어오는 모래 폭풍은 생명이 살기 어려운
조건을 만들고 있습니다. 사하라 사막은 인류가 상상력을 키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사막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상상력은 타조 알에 물을 담을 수 있게 하였고,
상상력은 타조 알을 모래에 묻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상상력으로
사막을 건널 수 있었던 인류는 문명과 문화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극한의 환경 때문에 인류는 커다란 위험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온 ‘흑사병’은 많은 사망자를 냈습니다. 그러나
흑사병은 사하라 사막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치명적인 병원균도
사막의 열기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에 있었던 ‘사막’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힘으로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사막의 수도원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남들이 외면하였던 지하묘지에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신앙은
삶의 시련과 고통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삶의 시련과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것입니다.
요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넘어야 할 ‘사막’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율법과 계명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삶은 쉽지 않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넘어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삶은 더욱
어렵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식욕, 수면욕, 성욕을 억제하는 삶은
어렵습니다. 불은 잘 통제되면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불이 통제되지 않으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무서운
힘이 됩니다. 우리의 욕망도 조절되고, 통제되면 예술과 문화로 꽃피게
됩니다. 그러나 욕망이 조절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으면 바벨탑처럼
무너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욕망이 나쁜 것이 아니라, 욕망은
조절되고, 통제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컵에 남은 물이 반이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반밖에 남지 않았구나!’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직도 반이나 남았구나!’ 신앙인은 어쩌면 발상의 전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 살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소유와 풍요가 넘쳐나는 세상에 나눔과 희생의
가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늘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도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면서도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주님께로 가야 할 운명입니다. 어떤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늘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많습니다. 시인은
봄이 되면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습니다. 봄처럼
부지런 하라는 말, 봄처럼 꿈을 가지라는 말, 봄처럼 새로워지라는
말입니다. 전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봄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봄처럼 부지런하다면, 우리가 봄처럼 꿈을
간직한다면, 우리가 봄처럼 늘 새로워진다면 거친 들판에서도, 고독과
절망 중에서도, 시련과 아픔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연중 제10주간 금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14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5,20-26: 살인하지 말라
복음: 마태 5,27-32: 악의 유혹을 끊어버려라
분노는 살인의 어미이듯이, 욕정은 불륜의 어미이다.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내는 사람은 실제로 그를 죽이지는 않았을지라도 마음은 그를
죽이고 있다. 뜻을 중요하게 보시는 하느님 보시기에 그것은 살인이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28절)
가음을 저질렀다고 하신다. 행위보다 의지를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간음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이유 없이 이웃에게 성내는 일을 죄로 여기지
않는다. 또한 여자를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도 그것을 행동으로만
옮기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의지를 존중하는 사람은 그것을 큰 죄로 여긴다. 그것은 사람의
행동 뿐 아니라 마음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큰 죄이기 때문이다. 그
욕구를 잘라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게 하는 지체가 있으면 뽑아 버리고 잘라버리라고
하신다(29-30절). 이 말씀은 옳지 못한 사랑이나 우정이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그것을 잘라 버리라는 말씀이다. 눈 하나나 발과 같은
지체가 옳지 못한 사랑 때문에 지옥과 협력하는 관계로 이끄는 길이
된다면, 차라리 그 지체가 없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마음도 잘라 버릴
수 있다면, 마음이라는 지체도 잘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체를 잃더라도 몸을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의 지체의 일부를 없애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온갖 악의
근원이나, 죄를 짓도록 하는 그 원인을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들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영원한
불행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을 모두 거부하는 삶이 중요하다.
그래서 범죄케 하는 것들을 과감히 끊어버릴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혼장을 써주는 일에 대해서는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마태 19,8)고 말씀하시며 이혼장을
폐지하시고 당신이 처음에 세우신 법을 되살리신다. 당신이 세우신
혼인법은 풀 수 없는 법으로 순결한 혼인관계를 지키라고 하신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6).
그리고 오늘 복음에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혼을 금하시면서 또한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32절)라고
하신다. 여기서 “불륜을 저지른 경우”라고 하는 것은 부부간의 신뢰를
저버렸다는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에서 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이신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를 말한다. 다른 신을 섬기거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을 금하게 되었고, 그럴 경우에는 관면을 주어 혼인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이다. 관면을 받지 않고 결혼을 하게 되면 그것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가 죽는 것은 욕구가
죽는 것
2019년 다해 6월14일 연중 10주간 금요일
<내가 죽는 것은 욕구가 죽는 것>
복음: 마태오 5,27-32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의
제자 카이흔이 하루는 신에게 “신이시여!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 있는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신이 사제를
통하여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라는 대답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소크라테스는 상당히 놀랐습니다. 자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신은 자기를 세상에서 제일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이유를 알아보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튿날부터
아카데미에 있는 모든 학자와 정치가와 예술가를 방문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일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들 역시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내 생각에는 ... ”이라고 시작하며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제야 신이 왜 자신에게 가장 지혜가 있다고 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렁이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밟아보는
것입니다. 꿈들 거리면 산 것입니다. 오른 뺨을 맞았는데 째려보면 산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자는 자신을 온전히 죽일 줄 아는
자입니다.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척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덜 죽였다는 것이고 그만큼 미성숙했다는 뜻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길 때 진정 자신을 죽인 사람이고 그 안에서 신이 살게
됩니다. 신이 되려면 인간이 죽어야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으면 예수님의 죽음은 항상 내 몸을 짓누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내가 죽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어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으려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려면 내가
죽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어야한다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행동만 죽으면 된다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리사이-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간음하지 않았으면 자신이 하느님 때문에 죽은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행동이 아니라
욕구가 죽어야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는 주님의 기도에 따른 삶입니다. 유혹에 빠진다는 말은 자신
안에 그런 유혹의 욕구를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음욕을 품은
상태에서 그것을 이겨내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음욕이 생기지
않게 기도해야합니다.
예수님은 행위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는 만약 그렇게 하려면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잘라버리고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죄 지을 때마다 이렇게 한다면 손발이 천 개라도 모자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을 죽이는 것은 잘라버리는 것인데, 행동
위주로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은 결코 자신을 죽이는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란 뜻입니다. 대신 마음으로부터 올라오는 욕망을 잘라버리면
손을 자르거나 눈을 뽑아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욕구를 끊는다고 끊어질까?’라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새로 태어나면
됩니다. 나비로 새로 태어났다면 애벌레 때의 욕구는 사라집니다.
어른이 되었는데 아직도 이유식을 찾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더
맛있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새로 나면 죄의 욕구를 끊을 수 있습니다. 은총과 진리로 새로 태어나면
됩니다. 은총과 진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아기가 두 발로 걷기
위해 수없이 넘어지는 노고를 해야 하는 것처럼 믿고 나아가다보면
이전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복음처럼 아내를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며 또 남에게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음욕 때문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나의 싸움이 대상이 욕구여야지 행동이어서는 안 됩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우리는 연약하지만 그분은 강인합니다. 우리는
무능하지만 그분은 전지전능하십니다!
2019년 다해 6월14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우리는 연약하지만 그분은 강인합니다. 우리는 무능하지만 그분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수많은 성경 등장 인물들 가운데, 바오로 사도처럼 갖은 우여곡절과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이 다시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생애와 족적을 따라가며 묵상해보니,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과 감탄사를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바오로는 타르수스 태생, 디아스포라 출신에다, 벤야민 지파,
바리사이계 유다인이었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금수저 가문 출신을
능가하는데, 거기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타르수스 시민권과 로마
시민권까지 물려받았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0.01% 상위에 들어가는
해외유학파 정도라고 할까요.
부모님으로부터 철저한 유다교 신앙 교육을 받은 바오로는 유다교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율법학자가 되려는
꿈을 꾸었는데, 당대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가믈리엘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습니다. 학업 성적은 언제나 동료들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뼛속까지 유다교 신자였던 바오로에게 그리스도 신자들의 출현은
눈엣가시 같았습니다. 마음 깊숙히 그리스도교인들을 향한 적개심으로
이글거리고 있던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교인들을 체포하러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참 묘하십니다. 때로 짓굳으십니다. 눈에 불을 켜고
당신 교회를 박해하고, 교우들을 몰살시키러 가던 적대자 바오로에게
다가가십니다. 잘 나가던 그를 깊은 나락으로 떨어트리십니다. 그를
당신 뜨거운 사랑의 용광로 속으로 밀어넣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당신의 일꾼, 당신의 오른팔로 그를
재창조하십니다.
엄청난 혼돈과 고통을 수반한 극적인 주님 체험이었지만, 그 체험은
너무나 찬란한 것이었기에 바오로는 그만 눈이 멀어버리게 됩니다.
주님 체험이 얼마나 황홀한 것이었던지, 바오로 사도는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을 일말의 미련도 없이 내팽개쳐버렸습니다.
극적인 회심 이후 바오로의 생애는 그야말로 행복한 것이었지만, 즉시
따라오는 것이 끔찍한 고통과 박해였습니다. 동족들로부터 받은
배신자라는 낙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 받은 불신으로 가득한
눈초리, 로마인들로부터의 박해, 이방인들로부터의 미움...
그 와중에도 바오로는 탄식하다가도 사랑하고, 절망하다가도 용서하며,
홀로 울다가도 위로하며, 그렇게 교회를 위해 몸바쳤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모습이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코린토 후서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2코린토 4장 8~9절)
오늘도 바오로 사도는 쉼없이 흔들리며 방황하는 우리를 당신 팔로 꼭
붙드시며 더없이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건네주고 계십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2코린토 4장 7절)
우리 모두 한없이 나약한 죄인이며, 상처투성이의 보잘것 없는
피조물로서,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우리 안에 영원히
숨쉬고 살아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그분은 강인합니다. 우리는 무능력하지만
그분은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분의 힘과 에너지로 인해 우리는 그 어떤
세상의 고난을 기꺼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을 당신 은총의 도구요 그릇으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비참하지만 우리 안에 머무시는 그분은 고귀하기에,
우리 역시 든든한 예루살렘 성채요 살아있는 감실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 28)|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14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 28)
성적 욕망으로만 살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성적 욕망과 사랑은 결코 동일시 될 수 없습니다.
내 몸이 소중하듯 상대방 몸도 더더욱 소중합니다.
인격에 대한 존중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현실과 분리된 욕망은 언제나 자기파괴로 이어집니다.
사랑은 언제나 자기책임과 질서를 동반합니다.
진정한 질서의 시작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존재를
하느님 안에서 성찰하는 것입니다.
성적욕망도 성찰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올바른 성찰은 서로를 위한 결단과 결심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의 성적욕망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바로 세우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위선과 집착의 음욕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관계로 이어져야 합니다.
소통과 교감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두는 사랑의 마음에서 시작됨을 기억합시다.
진정한 사랑은 추하지 않으며 서로를 치유하는 맑은 선물이 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끝까지 사랑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6월14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마태 5,27-32)
끝까지 사랑하라.
‘여자는 결혼할 때까지만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남자는 전혀 걱정 없이
살다가 결혼하고 나서 걱정이 생긴다.’는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자기가
베푼 만큼 상대가 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깁니다. 상대를
통해서 덕을 보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닐진대 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결국 사랑한다고 혼인을 하고서도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엮어진
혼인계약을 일생 동안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부부가
일심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동상이몽이 더 많게 느껴집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의 관심을 서로 다른 곳에
두면서 화목하고 행복하기란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하지 말라’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잘못에서
벗어나기를 강조하시며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네 오른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버려라”하고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더 사랑해야 할 것은
덜 사랑하고, 덜 사랑해도 될 것을 더 사랑한다면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에게 마음을 두어야지 다른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기대한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속이 지옥이면 멀쩡하게 잘 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죄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이혼은 갑자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또 참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빌미를 줄 수 있는
마음단속을 미리 잘해야 합니다. 원인제공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동상이몽’이라는 말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이혼의
전조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이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이혼을 금지하는 것은 결국 가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지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통해 후손을 이어가야 합니다. 사실 후손의
번성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쉽게 이혼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가정이
불행해지고 자녀 또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제발, 이혼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의
신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뢰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자주 해야 합니다. ‘구지 말을 해야 알아듣느냐?’하는 분도
있지만‘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힘내라, 수고했다’는 등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말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읽힙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고와 땀 없이 좋은 열매를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원하는 만큼 서로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만남을 통해 부족함을 채워주고 좋은 점을
키워가며 닮아가고 만들어 가는 것이지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기대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하며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서두르지 말 것이며
충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또한 부모도 삶의 경륜 안에서 얻어진
가르침을 자녀에게 잘 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배우자를 선택하면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성격이나,
경제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인가? 허물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워줄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봤으면
합니다. 준비가 소홀하면 그만큼 힘겨워합니다. 그러므로 준비된
희생을 감당하는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서로에게
덕을 보려고 하지 말고 서로에게 복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6월14일(금) 성막은 나침반
오늘은 ‘성막은 나침반’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출애굽기 29장 42절 말씀에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은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삶의 모형이며
어떻게 살아야 함을 보여주는 산 교훈의 현장입니다.
광야 40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향하여 가는 삶이 성도들의
삶이며 영적으로는 천국을 향해 가는 삶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낙심하는 우리에게 갖가지 증거들을
보여줍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홍해바다를 가르는 것으로
아말렉 군사와 싸워 이기는 것으로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신 모습을 언제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철저한
신본주의 삶을 지향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너무나도 값진 이 복음을 세상 사람들은 하찮은 표정을 짓고
교회나가는 성도를 보고 안타깝게 여기고 입을 삐죽이고 있습니다.
그 어떤 이유로 하나님을 나의 나침반으로 삼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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