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7월6일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제1독서 창세기 27,1-5.15-29
복음 마태오 복음 9,14-17
◈ [서울]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2019년 다해 7월6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수학시간에 점, 선, 면, 공간, 사차원을 배웠습니다. 점은 선이 가지는
특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점은 혼자 있지만, 선은 점들이 모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은 면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선은 오직 한 길만
알지만 면은 여러 길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면은 공간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면은 길은 알지만 그 위에 존재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공간은 존재하지만 역사가 없습니다. 시간이 있어야
공간은 역사가 되고, 시간이 있어야 공간은 신화가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공영방송인 BBC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이
가지는 특별한 이유를 보도하였습니다.
첫째는 형식의 파괴입니다. 국가 간 정상의 만남은 의전, 경호, 의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외교적인 형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
만남은 트위터로 제안했고, 북한이 응답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둘째는 쌍안경입니다. 역대 미국의 대통령은 군사분계선에서 쌍안경을
통해 북한을 보았습니다. 쌍안경은 편견과 적대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있는 그대로 북한을 보았습니다. 편견과 적대감 없이
북한을 보았습니다.
셋째는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북한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10미터 정도 걸어갔지만 이는 평화와 화해를 위한 첫걸음입니다.
앞으로 이 길을 따라서 미국의 물건이 건너 갈 수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서 평화가 건너가고, 화해가 건너올 수 있습니다.
넷째는 남, 북, 미국의 정상이 함께 만난 것입니다. 남과 북의 분단이
우리의 의지로 이루어지 않았듯이, 한반도의 평화와 한반도의 통일도
우리의 힘과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강대국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성서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비슷한 일들이 있곤 합니다. 이사악은
큰 아들 에사오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미리 알아챈 어머니 레베카는 둘째 아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작전을 꾸몄습니다. 이사악으로서는 몇 가지 확인 절차를
거쳤습니다. 손을 만져 보았고, 냄새도 맡아 보았고, 에사오가 맞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쳤으니 야곱에게 축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절차에 따라서 축복을 준 이사악, 형의 축복을 가로챈
레베카와 야곱, 자신에게 올 축복을 빼앗긴 에사오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성서에서도 그렇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약은 청지기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약은 청지기는 잘못을
했지만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은 청지기의 비유를 마치면서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영리하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혜를 모으고, 하느님께 청하면 결코 이루지 못할 꿈도
아닙니다. 4차원은 결국 점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점이되고, 우리가
선이 되고, 우리가 면이 되고, 우리가 공간이 되고, 우리가 역사와
신화가 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새 포도주는 성령이시고 새 부대는 예수님이다
2019년 다해 7월6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새 포도주는 성령이시고 새 부대는 예수님이다>
복음: 마태오 9,14-17
광해 8년, 왕위를 둘러싸고 권력 투쟁이 심해지고 하루하루 목숨을
위협받는 현실에 왕의 히스테리와 분노는 날로 늘어갑니다. 그리고
반대자들이 탄 독으로 인해 광해는 의식불명이 됩니다. 허균은 정세가
어지러워질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질 것을 각오하고 왕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임시 왕으로 앉힙니다.
임시 왕은 궁녀로 팔려온 아이의 사정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부자에게 세금을 더 내도록 하며, 쓸데없는 군사 파병을 막습니다. 그는
껍데기는 왕이지만 속은 백성이었습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백성을 보니
백성을 섬기는 정치를 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명나라의 사신이 온다고
최고 극진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말에 열이 받은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이 말하는 사대의 예, 나에겐 사대의 예보다 내 백성들의 목숨이
백 곱절 천 곱절 더 중요하단 말이오!”
신하들도, 백성들도 모두 이 가짜 왕이 진짜이기를 바라게 됩니다. 꾸민
이야기라 하더라도 만약 이런 식으로 광해가 계속 집정을 하였다면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란 것이 영화의 메시지입니다.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두려워하며 다른 이들을 적으로 여기며
백성을 바라보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백성을 바라보느냐는 큰
차이입니다. 백성의 자리에서 바라보아야 백성의 마음을 알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입니다. 참 왕은 자리만 지키려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옷을 가장 보잘 것 없는 백성에게 넘길 수 있는 왕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 자리에 맞는 그릇일 것입니다.
사제도 신자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라 여기며 신자들을 바라본다면
참으로 겸손한 사제가 될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해도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언제나 사제 옷을 입고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고 또 그 모습에 속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으로 자처하시고 당신의 자리를 가장 작은 우리가
앉도록 높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참 왕의 그릇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엔 야곱과 에사우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성경해석을
잘못하는 바람에 애꿎은 에사우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에사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참 왕으로써 자신의
장자권을 우리 하찮은 예물인 빵과 포도주를 받고 넘겨주시는
분이십니다.
에사우는 붉다는 뜻인데 그 이유는 당신의 가죽을 벗겨서 우리에게
넘겨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를 덮어줄 수
있는 유일한 의로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심으로써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옷을 우리에게 넘겨주어 우리가
왕이 되게 하신 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으로써의 그릇입니다.
하늘나라의 상속은 바로 성령을 받음으로써 일어납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악은 하느님을 대표하는 심판관으로써 눈을
감고 계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은 야곱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레베카는 교회로써 야곱에게
에사우라고 우기라고 하면서 에사우의 옷을 입혀줍니다. 에사우는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위해 저주받기로 예정된 분이십니다.
레베카는 에사우가 우리에게 장자권을 주더라도 자신의 장자권을
영원히 잃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에사우만이 껍질이 벗겨지더라도
하느님께 사랑받을 유일한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이야기의 맨 끝에 야곱이 아무리 축복을 많이 받아도 결국
에사우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처지로 에사우를 만나게 됩니다. 어쨌건
야곱이 에사우라고 끝까지 우겨야하는 이유는 에사우만이 이사악이
주려는 상속을 감당할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 이 믿음만이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 9,17)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당연히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헌 가죽 부대에 담으면 감당이 되지 않아 성령도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못쓰게 됩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성령을 받아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 새로 태어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와의 혼인을 통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라고 하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삼고 교회가 신부가 되면 그분과 한 몸이 됨으로써
우리가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혼인이
완성되는 시간이 성체성혈을 영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신랑의 도리를 완성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분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란 믿음도 없으면서 단식과
같은 계명을 지켜봐야 소용이 없음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법을
지키는 것보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가장 작은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왕의 자리를 주기위해 나의 옷을
벗어 넘겨주는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새 부대란 성령을 담을 합당한 그릇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령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나의 위치로 끌어올리고 내가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고 나의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것!|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7월6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9,14-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유다인들에게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영향을 받아 자주 단식을
하였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별로 단식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4절)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결혼식을 예로 들어 설명하신다.
그들의 결혼은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과 달라서, 그들은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집에 있으면서 일주일 동안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기쁨의 축제를 지냈다. 이때에는 모든 율법의
의무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즐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때에는
단식의 의무에서도 해방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신랑에,
제자들은 신랑의 친한 친구들로 비유하신 것이다. 그러한 잔치에서
슬퍼하며 단식할 수 없다. 그 때는 단식할 때가 아니고 즐기는 때이다.
지금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을 빼앗기고 슬퍼하는 것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신랑을 빼앗기고 난 후 단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죽으시고 영광을 입으시고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가시고 나서 제자들은 단식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쁨”이요 “잔치”라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있는데 슬픔과 어두움이 있을 수 없겠지만, 만일에 그렇다면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주님을 모시고 항상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하며, 내 잘못으로 주님을 모시지 못했을 때는 우리는
기도하고 단식하며 자선을 베풂으로써, 주님을 다시 모셔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에 매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을 들을 때,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 말씀 때문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16-17절).
수축이 강한 새 천을 찢어서 헌 옷을 깁는 사람도 없지만, 새 포도주도
발효가 심하기 때문에 수축작용이 거의 없는 가죽부대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의 고정화된 나 자신의
틀이라고 하는 헌 옷이나, 낡은 가죽부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
마음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새로운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노력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7월6일 토요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 17)
새로운 삶이 이제 시작 되었습니다.
새 부대를 가득 채우는 것은 언제나 새 포도주입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새롭게하십니다.
새 포도주로부터 새로운 삶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맛보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오늘을 가리키듯 새 부대를 원합니다.
새로운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새로운 삶의 맛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맛보게 하십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관계이듯
새로운 관계가 새로운 삶을 만듭니다.
우리의 삶안에 담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삶을 맛들입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강생과 종말 사이, 첫번째 오심과 재림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 교회!
2019년 다해 7월6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강생과 종말 사이, 첫번째 오심과 재림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 교회!
언젠가 깊은 속병이 들어, 본의 아니게 한 일주일 강제로 단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이틀은 그런대로 견딜만 했는데, 사흘이 지나가니
정말이지 돌아버리겠더군요.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식사 시간보다는
야식(夜食) 시간이었습니다.
밤 9시 반만 되면, 이 병실 저 병실 분산되어 있던, 약간은 ‘날리리성’
분위기가 풍기는 환자들이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뭔가 대단한 비밀
작전이라도 수행하는 듯, 의료진 몰래 둘러앉은 그들은 미리 준비해온
통닭이며 족발을 꺼내놓고 낄낄대며 뜯어대곤 했는데, 그 냄새하며,
소리하며, 정말이지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때 당시 제가 느꼈던
철저한 소외감과 고독함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발적 단식이라는 것,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본인 스스로
억제시킨다는 것, 보통 의지로 해내기 힘든 일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 위대한 인물들은 대체로 단식을 했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께서도 장장 40일간 단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라든지 대 예언자 엘리야도 대단한
단식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단식과 관련해서 둘째 가면 서러워할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밥먹는 것 이상으로 단식을 자주 실시했습니다. 철저한
신앙인들이었던 바리사이들 역시 일주일에 두번 꼬박꼬박
단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식과 성덕은 늘 함께 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 가까이 서 있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은 영혼이 육체를 통제하고 지배함을 뜻합니다. 단식은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단식하는 동안 한 인간은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은총에 민감해집니다. 단식을 통해 한 인간은 악과
유혹을 억누르고 영혼을 드높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대축일 전에
신자들을 단식에로 초대했습니다. 영성가들은 단식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단련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이토록 단식이 영성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과는 별로 상관없이 살아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오 복음 9장 14절)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대답, 너무나 뜻밖인
대답이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럼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오 복음 9장 15절)
예수님께서는 부차적인 측면, 비본질적인 내용들은 생략하시고, 곧바로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에 촛점을 맞추십니다. 서론을 생략하시고
곧바로 결론으로 들어가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지상에 머무시는 기간은 하느님과 인류가 혼인을 맺고
잔치를 벌이는 시간임을 선포하십니다. 혼인 잔치 기간에 어울리는
것은 음주나 가무, 노래와 축제이지, 단식이나 고행, 슬픔이나 곡소리는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신랑이신데, 그 신랑이 지금
신부를 선정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이름은 ‘부름받고 선정된 이’라는 의미를 지닌 에끌레시아
(Eclesia, 교회)인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지상 교회를 신부로 맞이하시고, 이제 신부와
함께 혼인잔치를 시작하시는데, 제자들와 신자들은 이 장엄한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너무나도 당연히 즐겁고
유쾌해야 합니다. 갖은 인상을 다 쓰면서 단식할 것이 아니라,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할 것입니다.
다만 혼인잔치가 끝난 다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셔서
신부의 집을 마련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로 선정된 교회는
아직 결정적으로 신랑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교회는 강생과 종말 사이, 첫번째 오심과 재림 사이에 끼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기쁨과 슬픔, 획득과 미획득, 축제와
단식이 거듭 교차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미래지향적인 삶|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7월6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마태9,14-17)
미래지향적인 삶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중요하지만 과거의 허물이 또는 옛 생각이
오늘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하기
위해서는 오늘에 충직해야 하고, 오늘에 충실 한다는 것은 희망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만큼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
오늘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옛 것에 매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늘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마음 써야 합니다. 껍데기에
치중한 삶이었다면 알맹이를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스승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사실 단식은 그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단식을 하는 것은 밥을 굶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식할 합당할 이유가 있어서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식을 한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잔칫집에서는 함께 웃고 축하하는 것이요, 상가에서는 함께 울고
슬픔을 나누면 됩니다.
슬픈 일이 생기고, 새 삶의 시작을 위해서,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웃과의 나눔을 위해서라면 단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을 통해 새 생활의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
(에페4,22-23).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흔히 말하는
다이어트와는 분명 다릅니다. 단식의 정신은 주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를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분별없이
외적인 형식에 매여 단식을 논하였습니다. 형식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내용이 중요하고 지향하고 있는 바는 더 소중 합니다. 누구 마음에 들기
위해서 단식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에
악에 대해서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침묵 중에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말씀하시면서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말씀은 사랑이요 자비이고 용서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은 심판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구원됩니다. 만일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저는 단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그분에 의한 단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내리는 단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하시며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2013년 3월 29일 콜로세오 십자가의 길에서 행한 연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7월 6일(토) - 순간의 승리자
오늘은 ‘순간의 승리자’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시편 90편 4절 말씀에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밤에 한 순간 일뿐입니다. 이전 개역성경에는
밤에 한경 점 같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즉,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인생을 지나기 전에는 기대와 설렘이 가득하지만 한번 지나고
나면 어찌 그리고 순간적이고 허망한지 겪어본 사람은 정말 탄식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한 순간일 뿐이지만 이
한순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느냐에 따라서 이 한순간을 가장 값진
순간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이 간다는 카피처럼 누구라도 세월의 흐름을 피할
수 없고 또 그 세월은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바람 같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들에게는 한 순간 뿐이라 하지만 이 한순간
안에 어마어마한 기회가 언제나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순간마다 다가오는 이 기회를 활용하고 선용하여
순간의 승리자가 될 때 하나님이 그 순간 승리자를 통해서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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