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맨발을 벗고 다니던 하나님의 사람.
지리산 눈보라 속에서 십자가의 노래를 부르며통곡 하던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은 목사도 아니요 장로도 집사도 아니 었다.
교리에 관한 교육도 받지 못하던 분이다.
그는 성자로 서품 받은 일도 없고
한국 기독교 사회에 이름이 알려 지지도 않았다.
인간 이현필은 비겁 할때도 실패 할 때도 있었으나
올바른 길을 위하여 걸음 걸음 피흘린 사람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르는데 생사를 걸었던 사람 이었다.
그는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죽는날 까지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에
일보의 후퇴도 없었던 사람 이었다.
하나님이 중요시 하는것은 성공 그 자체 보다도 노력의 과정 이라고 볼때
분명 이현필 선생은
타오르는 정열로 그리스도를 따른 분이었다.
이현필 선생의 약력
1913 년 1월 13 일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용하리 에서 농사 하는 이승노 어머니와 아버지 김오산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총명 하여 주위 사람들 에게 장래를 촉망 받다.
1925 년 ( 13 세 )
전남 영산포에 있는 교회의 일본사람 목사 관파 라는 분에 의해 처음 으로 복음을 받는다.
그 목사는 어려운 시절 구제도 많이 했고 전도도 열심히 한 사람 이다.
1929 년 ( 17 세)
서울 기독청년 학관 에서 영어와 성경 공부를 한다. 이때에 원경선 선생과 서로 알게 되어
서로의 교우는 계속 된다.
1933 년 (21 세 )
전남 광주 신동안 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다. 이때 백춘성 장로와 알게 되어, 백장로는 일생을 통하여 이선생을 도왔고, 동광원 사람들과 교제케 되었다.
1934 년 (22 세 )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동광리의 숨은 성자 이세종(李世鍾) 어른을 알게 되어 그분 으로 부터 가르침을 받고 그에게서 성경을 배우며그의 생활에 감화를 받아 일생의 신앙노선이 결정 됬다.
그후로 부터 이선생의 생활은 세속을 떠나 수도자 로서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세종 선생은 성경 이외는 어떤 책도 읽지 않으며 하루 한끼로 살아가며 아내를 누님 이라 부르며 기혼자 이면서 철저히 순결생활을 하신 분이다.)
1935 년 (23 세 )
황여사와 결혼 하다. 서로는 순결을 지키며 남매 같이 살기로 했으나 , 여사는 끝내 이선생의 이상을 따르지 못하여 많은 갈등이 있었으나 결국은 이선생을 존경 하며 이선생의 정신을 따르는 제자 처럼 살았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그러 하였다. )
1936 년 (24 세 )
전남 광주 에서 강순명 목사가 지도 하는 독신 전도단에 가담 하여 활동 했고, 또는 기독 청년회간사 에비슨씨가 창설한 농촌 강습소에 드나들며 잠시 기독교 사업 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얼마후 그만 두다.이때에 얻은 경험은 뒷날 이선생 활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37 년 (25세) ~ 1940 년 (28세)
전남 화순군 도암 화학산에 들어가 기도생활을 하고, 이세종 어른의 지도를 받으며 깊은 신앙생활을 체득 한다. 이때 선생의 모습은 완전히 청빈한 탁발 수도자 자체 였고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모습 으로 , 닮아 갔으며, 자비롭고 겸손한 성자의 풍모를 보였다.
1941 년(29세) ~ 944 년(32 세)
전북 남원 지방에 가서 지리산 서리네골과 갈보리 등지에 주로 거하면서 기도생활을 하였는데 , 남원지방의 신자들이 선생 주위에 많이 모여 들게 되어 후일 동광원의 모체가 이때 형성 된다.
그는 수시로 제자들을 거느리고 홈실, 웅실, 매산, 곧실 등지를 순회하고, 남원읍내 오북환 집사의 목공소에 많이 거처하게 되니 이곳이 그의 집회소가 되었다.
오집사와의 교제는 가장 가까운 신앙의 벗으로 일생 계속 됬다.
1945 년 겨울 (33세)
제자 몇 사람을 인솔하고 광주에 진출 하여 해방후 재건된 광주 기독 청년회 구내에 머무르면서
Y총무 정인세 선생과 사귐을 가지게 됐다. 그후 여러해 동안 청년회를 중심으로 설교와 생활지도를 하면서 여러 층의 사람들과 사귀게 됐다. Y회장 최흥종목사 총무 정인세 선생과의 교제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그후 사업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긴밀이 서로 협조했고 이교재는 일생을 지속하다.
1946년(34세)~1947(35세)
남원 서리내에 있던 남녀 청년 성격공부반을 광주청년회 구내로 옮겨 오고 오북환 서재선 집사 등은 이선생의 지도 밑에 무안에 목공소를 시작했고 여제자들은 전도와 심방을 하면서 이선생의 지도를 받았다.이 사업은 그후 정인세 선생이 Y총무직을 사임할때까지(1952년, 3년경) 계속됐다.
이선생의 교훈은 믿음과 사랑의 실천이였으며 그 영향은 광주를 중심으로 호남 일대에 널리 그리고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됐다.
이 무렵, 김준호 선생이 학생의 몸으로 이선생을 따르기 시작했으며 그후 일생동안 가장 가까운
제자로 선생과 동거동락 했다.
1948년(36세)
봄에 서울 삼각산의 철인 유영모 선생과 서울 Y총무 현동완 선생이 광주로 이선생을 방문하여
여러날 묵으면서 집회도 가지고 서로 담화하며 교제 했다. 이때부터 세분의 사귐은 서로 아끼고 존경하면서 일을 계속했고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1949년(37세)
수도원의 모체가이해 봄, 현동완 총무의 초청으로 이선생 제자의 일부는 서울로 진출 삼각산과 능곡 등지에 머물게 된다. 그때 서울 YMCA 후원으로 경기도 능곡에 오원(吳園)을 창설하고 남녀 청년들이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이것이 이선생 운동의 서울이나 경기도 고양등의 복음전도의 기지가 됐고 후에 계명산 됐다.그 때 학생들은 농사를 짓고 때때로 탁발을 하며 항상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데 주력케했다. 이 해 여름 전도대를 조직하여 남원 순천 여수 완도 강진 해남 광주 등지를 순회 전도했다. 전도단은 헌옷에 맨발을 벗고 걸식 탁발 전도를 했고 때로는 교회 중심으로 집회도 가졌다.
1949년 가을 ~1950 봄 (37세~38세)
여수반란 사건이 일어나 많은 고아 과부가 생겨 광주 청년회를 중심으로 각계 유지들이 모여 대책을 강구하는 중에 사회사업 동광원을 창설하게 되매 이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이 운동을 투신하여 지접 그 지도에 전력을 다했고 그러는 틈틈에도 자주 화학산에 들어가 극도의 금욕절제를 하면서 기도를 했다.
1950년 여름(38세)
6.25 사변이 일어나 인민군들이 남침해 오므로 이선생은 동광원 식구들을 인솔하고 화순군 도암면 청소에 일부가 피난하고 일부는 화학산에 피난하였다.수백명의 피난민 중에는 유화례 선교사와 전도사 몇사람 교계의 유지 여순경 등이 끼어 있었다.그들의 식량문제 생명보호 그들의 신앙 지도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도 했으며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는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솔선해서 담당했다. 그의 비상한 신앙과 놀라운 사랑 그리고 능력 지혜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해 겨울까지 산중에 남아 있으면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 김준호 선생이 끝까지 이선생 곁을 떠나지 않았고 이 피난 생활을 통해 유화례 선교사와 생사를 같이 하면서 사귐을 가졌다.
1951년(38세)~1955년(40세)
결핵환자를 간호하다가 자신도 폐병에 걸려 일생을 이병으로 앓다가 결국은 세상을 떠나게 됐으나 이선생은 이 병을 감사하고 심지어 결핵균에게도 사랑을 고백하고 병약한 몸으로도 여전히 엄격한 수도생활을 계속하며 많은 내방자들의 영적지도와제자들의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이런중에 그의 감화는 널리 퍼져 그 교훈과 사업이 확대되고 선생의 지도를 받은 수도단체가 전국의 이곳 저곳 10여 곳에 생기게 됐다. 이수도단체는 공동생화을 하며 순결 청빈 순명 사랑 봉사 노동을 서원하고 농업으로 자립생활을 하며 기도 성경공부 구제사어베 힘쓰고 있다.
동광원은 해마다 두 차레씩 총회를 갖게 되니 그럴 때는 이선생은 병약한 몸으로도 종일 설교를 계속했고 수도생활의 세밀한 데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도를 했다.
1956년(44세)
병으로 마침내 제중병원(현 광주 기독병원)에 입원하다. 원장 고허빈 선교사의 정성어린 치료를 받았고 두사람 사이의 영적교제는 날로 깊어져, 병원운영 환자 지도의 문제에까지 선생은 협조를 했다.
이미 이 때 와서는 동광원은 사회사업을 중지하고 순수한 수도가관이였는데선생은 누워있으면서도 식구들의 지도 및 제자들을 시켜 전도와 구제사업에 힘쓰게 했다. 병원 안에서는 간호원
미화원 매점 청소부일까지도 제자들을 동원해 협력토록 했다.
1957년~1960년(45~48세)
사회 각계 각층의 많은 저명인사들이 찾아오게 되니 그 중에는 목사 국회의원 관리들도 있었다.
선생은 그들을 일일이 친절과 사랑으로 대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믿음으로 살라고 부탁했다.
1962년(50세)
선생의 병세는 매우 악화 되어 후두 결핵병 으로 고생케 되니 말을 못하고 몸소 필담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래도 선생은 종일 글을 써서 가르치는 일을 쉬지 않았고 찾아오는 사람 들에게 일일이 필담(筆談) 으로 가르쳤다.
이 무렵 에는 주로 무등산 삼밭실에 가서 계셨는데 각혈이 심해서 심한 고통 속에서도 생명의 세계, 은총의 세계, 평화의 세계에 대해 눈으로 보는듯이 가르쳤다.
1963년 (52세)
제중병원에 다시 입원 하시다.
병상에 누워 게시면서도 무의탁인 들을 돕는 일작운동(一勺運動) 이란 것을 일으켯다. 그것은 한끼에 한숫갈씩 양식 모으는 운동 인데 그것을 모아 남을 돕자는 운동 이다.
이것이 귀일원(歸一園)의 운동 시작 이다.
1964 년 (52세)
병원에서 퇴원하고 서울로 갈 것을 결심 한다. 광주 방림에서 마지막 긴 수양회를 마치고...
태극호를 타고 상경 했는데 조정은 수녀가 선생을 모시고 함께 갔다.
능곡에 가서 하룻밤을 머물고 거기서 떠나 벽제 계명산으로 갔다.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임종 하신 자리는 경기도 벽제군 계명산속, 동광원 분원에서 5백 미터나 산중 으로 더 들어가 옛날 현동완 선생의 산장자리 에서 였다.
별세 하기 전날 새벽에 나이 어린 조정은 수녀가 밖에서 선생이 몸을 씻으시게 물을 끓이느라고 불때고 있엇다. 방에는 이선생 혼자 계셨는데 이상 하게도 이선생이 누구하고 이야기 하는 소리가 자꾸 들렸다. 밤새 그랬던것 같다.
" 예. 예, 저는 죄인 입니다...예..." 조정은 수녀가 이상 하게 생각 되어서 불을 때다 말고 슬쩍 일어서 문틈 으로 들여다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이현필 선생이 혼자 일어나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않아 천정을 쳐다 보면서 계속 누구하고 대화 하듯이 " 예 " 가겠 읍니다. 예, 죄인 입니다 " 혼자 독백을 하고 있었다. 조수녀는 소름이 끼쳤다.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 면서 물을 데워 들고 서는 유리창 너머로 선생의 동정을 살피다가 선생이 눕는것을 보고서야 "선생님 물 데워 왔읍니다. "
그러나 이선생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누워서 " 할렐루야, 할렐루야 " 찬송만 계속 불렀다.
얼마후 조수녀는 물을 들고 선생방에 들어가 " 선생님 아까 새벽에 누가 왔읍니까 ? "
물어 보았다. 이선생은 웃으시면서 " 주님께서 내일 새벽 3시에 오라고 하셨읍니다. " 고 대답 햇다.
다음날 산장의 새벽은 너무 고요 햇다. 이 평화스런 산속 에서 한 성인이 마지막 숨을 거두려 하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읽어본 분이면 기억 하겠지만 임종의 모습이 어찌 그리 흡사 한지 모르겠다. 아랫목에 선생이 왼편에 계명산 수도원장 김한나 어머니 오른편에는 김준호 선생, 그밖에 김희옥 수녀, 조정은 수녀 등이 방 구석 구석에 않아 있었다.
최후의 순간이 가까와 오면서 선생의 숨은 금방 막힐듯 했다.
그런 속에서도 그는 기도 하기를 "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 하고파 무척 애썼읍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 하고자 할때마다 주님은 저를 피하셨읍니다. 주님 ! 저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 잠시 쉬었다가 일분여 뒤에숨이 막혀 오는 중에서도 이상한 기쁨의 물결이 밀려 왔다.
" 오, 기쁘다 ! 기쁘다 ! 오, 기뻐 오메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 !" 숨이 가라 않았다가 다시 돌아올때 다시 " 아이고 기뻐 ! 오, 기뻐 ! 못 참겠네.이 기쁨을종로 네거리 에라도 나아가서 전하고 싶어. "
제자들 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신다. "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 " 하고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고 않은채로 얼굴을 하늘을 향하여 쳐다 보면서 임종 하셨다.
이 모습을 김희옥 수녀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시는 예수님의 성화 모습과 비슷 했다고 말했다.
1964 년 3월 17일 새벽 3시 정각 이었다. 조수녀 에게 말한 그 시각에...나이 53 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