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일요일 밤 EBS 한국영화특선 시간에 대괴수 용가리를 놓쳤다고 낙담하지 마시라.
31일 새벽 0시30분, 그러니까 대략 앞으로 몇시간 후면 다시 재방송을 해줄 것이니 그때 본방 사수하시면 된다.
1967년에 만들어진 국내 몇 안되는 괴수 영화로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주는 수작이라 하겠다.
일본과 합작으로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용가리가 등장하는 특촬 부분은 일본쪽 스텝 들이 담당하여 제작한 것 같더라.
도에이 쪽 스텝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좀 깝깝하긴 하다.
625전쟁이 끝난지가 채 20년도 지나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기반 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시절이었지만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었는지 그 열정은 어디서 생겨 났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60년대 일본의 수많은 특촬물과 괴수영화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때에야 비로소 미니어쳐를 어떻게 만들고, 괴수는 어떻게 작업해야 하며, 촬영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등등
그 기본 바탕이 정립되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오영일, 남정임, 강문, 이순재 등과 같은 당시를 주름 잡았던 배우들이 출연했으며 연기는 수준급이었다.
용가리가 등장하지 않는 나머지 드라마 부분은 굉장히 매끄럽게 잘 다듬어져 있으며 지금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아무런 내놓을 것 하나 없는 나라였는데 그런 갈증을 해갈하고 싶어하는 열망도 담겨 있다.
우주로 로켓을 발사하여 조종사를 무사 귀환 시킨다는 내용은 많은 공학도 들에게 자발적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뜬금없이 갑작스런 지진과 함께 용가리가 인왕산을 뚫고 솟아 오른다.


똑똑한 소년이 용가리를 계속 쫒아 다니면서 열에서 에너지를 얻는다는 것을 밝혀 내는데 이 역시 당시 시대적 흐름이었다.
미래의 주역이 될 어린이에게도 중요한 역할을 부여해준다는 것. 그들은 현재 이 나라를 이끄는 중년으로 성장했다 ㅎㅎ
단순히 유치한 특촬물 정도로 폄훼하면서 재미없어를 연발한다면 이 영화 안에 담긴 다양한 메세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30대 시절, 처음으로 대괴수 용가리를 봤을 때와 40대가 되고서 다시 이걸 보고 나니 점점 그 의미가 새로워 지더라.
그리고 하나 더, 용가리 통뼈 라는 말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에 대해서도 되새겨 보시길 바란다^^
출처: EBS ( http://home.ebs.co.kr/ebsmovie/board/15/500685/view/10008508082?hmpMnuId=100 )
첫댓글 디오라마가 확실히 서울이네요. 옛 서울시청에 서울시 의회 건물에 남대문까지. 이전 용가리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저정도로 힘쓴 것인 줄은 몰랐네요.
저도 여러번 보고서야 눈에 들어 오더라구요.
아쉽게도 저 당시 미니어쳐는 일본쪽 스텝들이 전담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개념 조차 생소했던 시절이었으까요.
마침 지금 보고 있는데... 영어버젼이네요^^;
우리말 버전은 48분 분량만 남아 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