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17. 성삼후 15주일. 성령은 적극적인 용서를 하게 합니다.
성령은 적극적인 용서를 하게 합니다. 이는 성령을 지닌 사람의 삶을 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손이 있는 곳에는 풍요한 삶이 자비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손이 없는 곳에는 자비가 없는 갇히는 몸이 됩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의 용서로 인간 삶의 최대치의 용서를 제안하지만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씩 용서하라면서 용서하는 삶을 제안하십니다. 용서가 없는 삶이 갇힌 몸으로 사는 것으로 과거로 사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용서의 삶은 현재로 사는 길을 제안하시는 것입니다(마태 18:21-22). “복수심에 불타는 자는 주님의 복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The vengeful will face the Lord’s vengeance. 그러니 믿는 공동체에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기억하라"고 반복해서 권고합니다(외경의 전도서 27:30-28:7).” 인생의 끝을 기억하고 적대감을 제쳐두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복수심으로 도망쳐 보배로운 피로 씻을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를 찾습니다. 죄인은 분노와 진노를 붙잡고 과거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가증스러운 것들을 놓아버리고 지금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시편 103편(8-14절)은 용서에 대한 최고의 시편으로 “네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시편 103:3)”라고 선언하시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로 다가가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그 일을 행하면 됩니다. 그것은 한결같은 사랑을 즐겨 행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로 하느님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리는 것입니다(미가 6:8).” 용서의 삶으로 인생의 앞길이 열리는 삶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각자 개인으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인소유자로 교회에 나오니 문제가 됩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하느님 뜻대로 하는 것이지 내 의를 주장해 하느님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불편해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필립 3:8).” 바우로가 자신의 선교능력이 끝날 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니 대단한 사도입니다. 주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전달하는 우리 생애의 성령의 프로잭트에 있는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그분의 뜻대로 사용하실 자격이 있으며, 우리 각자는 바로 그 점에 대해 하느님께 자신에 대해 답변해야 합니다. 로마의 유다인과 이방인인 모인 로마교회 안에서 삶의 방식 차이로 인해 분열하지 말기를 바라며(로마 14:1-12) 결국 우리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상기시켜 주며,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고 다스리는 성령의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하게 됩니다(본기도). “오 하느님, 당신 없이는 우리가 당신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의 성령이 모든 일에서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고 다스리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와 영원토록 한 하나님이신 성령과 함께 사시며 다스리시느니라. 아멘.”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다른 사람에게 보복을 가할 기회를 찾는 우리의 죄 많은 본성을 봅니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 넘는 돈이니 6000일치의 돈입니다. 일당 10만원이면 6억원이 1달란트이고 1만달란트라면 6조원어치입니다. 하느님에게서 6조원어치의 빚을 진 나인데 내게 몇만원, 몇십만원, 몇백만원을 손해끼쳤다고 분노한다면 말도 안 된다는 말씀이 마태복음 18장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용서에 비해 세상사에서 용서는 당연히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용서는 늘 하는 용서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용서는 짧고 분노가 긴 인생에게 용서가 길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미워하는 사람을 풀어주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양성, 포용성, 형평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을 용서의 길로 예시해 주신 예수님을 오늘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