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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17)*선생의 심판
야고보서 3장1-2절 / 신윤식 목사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너희가 아느니라. 2. 우리가 다 많은 것에서 실족하나니 만일 어떤 사람이 말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면 바로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요 능히 온 몸도 제어하는 사람이라.”(약 3:1-2 KJV)
<說敎> 본문 말씀을 보면 그 내용을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권면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야고보는 그런 차원에서 본문의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말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의 실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의 실수를 사람이 조심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고 해도 자신도 모르게 쏟아지는 것이 말이기 때문에 결국 실수하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을 하는 혀가 비록 사람의 몸에 붙어있는 인체의 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생각과 의지로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혀를 사람이 통제하고 다스릴 수 없다면 결국 말의 실수도 사람이 조심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조심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어느 정도는 말의 실수를 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조차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때부터 말은 이미 본인의 통제권 밖에서 제멋대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이러한 경험을 수없이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야고보는 왜 말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말씀, 즉 복음 가르치는 일
➤1절을 보면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너희가 아느니라.”고 말합니다. ‘선생 된 우리가’라는 말을 보면 야고보는 자신을 선생의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선생 된 위치에 있는 야고보 자신이 선생의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보다는 더 큰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말에 있습니다. 선생이란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야고보가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하게 그리스도의 말씀, 즉 복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가르치는 자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오류가 무엇인가 하면 자신이 가르치는 바를 자신이 순종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서 떠나지 않는 고민일 것입니다. 결국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면서 내가 더 심판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선생이라는 위치에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선생은 랍비로 불리면서 존경을 받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으면 랍비를 찾아갈 정도로 랍비는 유대 사회에서는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존경받는 랍비라는 위치에 마력을 느껴서 랍비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겠습니까? 오늘날도 목사를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고 목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사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도에게 그대로 전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되어 돌아오든지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만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목사를 교인들에게 대접받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과연 복음과 연관된 것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에는 그 사람의 욕망과 사고방식이 그대로 담겨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이 말에 그대로 묻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본성과 욕망은 그 누구도 벗어버리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선생이라고 해도 악한 본성과 욕망이 담긴 말이 흘러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말들이 말씀을 듣는 자에게는 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선생이라는 위치는 더 큰 심판을 받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이 이렇다는 것을 안다면 선생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인데 오히려 선생이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선생이라는 위치에서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복음을 전하는 위치에 있지만, 왜 목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계속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가 받을 심판
어찌 보면 목사를 생계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라고 스스로에게 묻기도 하지만 그런 면이 없다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만약 하나님이 그동안 제가 전한 말씀을 놓고 저를 판단하신다면 저는 누구보다 먼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전한 말씀을 그대로 행하고 살아가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제가 버티고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용기도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에 있습니다.
복음은 내가 행한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을 덮어주신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증거 하는 것임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목사는 절대 매력 있는 직업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대중으로부터 대접을 받는 것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큰 착각일 뿐이며 큰 심판을 쌓는 것일 뿐임을 알았으면 합니다.
선생의 말은 실수가 많다.
지금 야고보는 ‘선생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인데 말을 많이 하다보면 실수가 많다. 그렇게 되면 더 큰 심판을 받게 되니까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많이 해서 실수가 많으면 말을 줄이면 실수가 없어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말을 줄인다고 해도 말에 실수는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말에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라면 말은 하면 할수록 실수 역시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2. 우리가 다 많은 것에서 실족하나니 만일 어떤 사람이 말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면 바로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요 능히 온 몸도 제어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온전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많이 하는 선생이 되는 것에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복음을 증거 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목사들이 잊고 있는 것이 바로 이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복음에 대한 관심보다는 교회를 향한 관심으로 목사가 되기 때문에 오직 교회를 크게 하기 위해 복음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말에 실수이며 더 큰 화를 자초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생각이 그리스도에게로만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말이 다스려질 수 있습니다. 관심을 세상에 두고 있다면 분명 그 말도 세상과 연결된 말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말을 조심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우리의 모든 마음과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집중하자는 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성도로서의 말의 실수는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신자로서 나와서는 안 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천국을 소망한다면 그에 따라 천국을 얘기하고 세상에서 벗어나는 삶이 그 말에 묻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말하는 입으로 세상에서의 자랑과 탐욕이 묻은 말을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성도의 말의 실수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관심이 그리스도로 집중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성도로서 어떤 말의 실수를 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로서의 말이 나오는지 아니면 세상 사람과 동일한 말이 나오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과 동일한 말을 하신다면 그것은 성도로서 합당치 않은 말, 즉 말의 실수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마음이 그리스도로 집중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말은 가볍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말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담아 전달하는 도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온 마음과 생각이 그리스도를 향해 있는가를 점검하십시오. 우리가 어떤 말을 하며 살아가는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심령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충만함으로써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말을 할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예수님좋다오
첫댓글 아름다운 꽃길을 걷노라면 자연이 주는 축복에 감탄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항상 반복되는 생활이지만 마음과 생각이 통하여 작은 것에도 감사를 하면서
웃음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날은 행복한 날입니다.
내리는 봄 비를 보면서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멋진 날 열어가세요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복음에 대한 관심보다는 교회를 향한 관심으로 목사가 되기 때문에 오직 교회를 크게 하기 위해 복음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솔직하신 글 감사합니다. 제가 왜 자료실에 올라온 글을 이제야 봤는지 참 안타깝습니다. 모든 교회에서, 성도들이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