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시는 글은 📸 스마트폰(smartphone) 화면으로 볼 수 있게 조정하였습니다.
주를 공경하는 성도
요한복음 5장 22-24절 / 김병덕 목사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것은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2-24 KJV)
➤잠언 31장 26-31절에 “26. 그녀는 지혜를 가지고 자기 입을 열며 자기 혀 속에 친절의 법을 두고 27. 자기 집안의 길들을 잘 살피며 게을리 얻은 빵을 먹지 아니하나니 28. 그녀의 자녀들은 일어나서 그녀를 가리켜 복 받은 자라하고 그녀의 남편도 그녀를 칭찬하기를, 29. 많은 딸들이 덕스럽게 행하였으나 그대는 그들 모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 30. 호의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주}를 두려워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으리라. 31. 그녀의 손의 열매를 그녀에게 주라. 또 그녀가 직접 행한 일들이 성문 안에서 그녀를 칭찬하게 할지어다.”
주님을 공경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 교회당에 나온 모든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모습, 기도 하는 모습, 찬양하는 모습, 그리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의롭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전혀 아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 자세하게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고운 것과 아름다운 것을 탐하게 되어 있습니다.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사람이 고운 것과 아름다운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교회당에는 나와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은 많이 하지만 실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정의 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위해 나왔는데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그것처럼 난감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는 나와 있지만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하고 경외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나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나 생각해 보시고 혹시라도 나는 고운 것과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안았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그것처럼 희극적인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욥기 28장26-28절을 보면 “26. 그분께서 비를 위하여 법령을 정하시고 천둥이 칠 때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으니 27. 그때에 그분께서 그것을 보시고 밝히 드러내시며 예비하시고 참으로 샅샅이 살피셨으며 28.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보라.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곧 지혜요, 악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지혜가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 안에 지혜가 없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가 내 안에 있어야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인데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가장 깊은 영성을 스스로 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를 나누기 보다는 고운 것과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모습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을 나타내려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혜는 내 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운 것과 아름다운 것은 외적인 것으로 우리 눈에 보여 지는 것입니다 지혜를 나누기보다 자기를 더 곱게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거짓되고 헛된 것이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혜를 나누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 공부를 하고, 설교를 듣고, 찬양을 부르고, 교제를 하는 중에서도 우리는 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들이 전혀 지혜를 나누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바른 지혜라 말할 수 있습니다. 고운 것과 헛된 것을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그런 행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된다면 우리는 굳이 지혜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기 보다는 선하고 의롭게 사는 것에 더 마음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렇게 선하고 의롭게 사는 곱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가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19절을 보면 “19. ¶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지내더라.” ➤베드로전서 3장3-4절을 보면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땋고 금으로 치장하며 옷을 차려입는 그런 외적 단장으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의 감추어진 사람으로 하되 썩지 아니하는 것 즉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 장식으로 할지니 그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지극히 값진 것이니라.”
고운 것은 바로 행위입니다.
부자는 율법의 의로서 자기가 만든 고운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입혀 주시는 구원의 옷을 입기 보다는 자기가 만든 율법의 고운 베옷을 입고 연락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부자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예수님께서 부자로 비유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고운 옷을 입고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이 부자가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음부에 있을 때 아브라함을 보고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스스로 고운 것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잠언에서는 고운 것도 거짓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눈으로 볼 때는 정말 흠 없는 율법의 의로움를 입고 있었지만 그것이 거짓이 되고 보니까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너무도 곱게 보이는 율법의 의는 모두 거짓 된 것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런 행위를 보면서 자기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는 거짓된 것을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하는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면서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믿음으로 통하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부자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면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육적으로는 그런 삶을 살았지만 실제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없었기 때문에 그 고운 것이 거짓된 것으로 변하고 만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자기 눈에 곱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는 신앙생활이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헛되고 거짓 된 것을 따라가다 보면 부자와 같이 음부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한 부자는 이스라엘 전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들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르고 자기들이 행하는 율법의 의로움을 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말씀을 하니까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브라함이 아버지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운 율법의 의로움을 입고 있다가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한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도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외모가 아름답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 행실이 참 좋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행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당 안에서 아름다운 행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행실이 나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는 정말 아름다운 옷을 입은 것 같은 고운 베옷을 입은 것 같은 선하고 의로운 행실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행실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 라고 잠언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지금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잠언 14장27절을 보면 “26. {창조주}의 두려움 속에 강한 확신이 있나니 그분의 자녀들에게는 피난처가 있으리라. 27. {창조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생명 샘이라 사망의 올무들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혜가 있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지혜는 생명을 줍니다. 그 지혜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는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이유는 내 안에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혜를 아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를 잘 해서 정말 고운 옷과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구원받을 것 같은 사람일지라도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은 결국 거짓되고 헛된 것을 쫓아 가다가 사망에 이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누는 일은 생명 샘으로 나아가는 아주 바른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를 나누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혜가 충만해 지고 그런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당에 다닌다고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사람은 고운 옷과 아름다운 옷을 입으려 노력하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자기 안에 지혜를 충만하게 하려 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냐 하면 내 안에 지혜를 충만하게 해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내 안에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지혜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잠언 2장1-6절을 보면 “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내 말들을 받으며 내 명령들을 네게 감추어 두기를 원하여 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고 네 마음을 명철에 쏟으며 3. 참으로 지식을 따라가며 외치고 명철을 얻으려고 네 목소리를 높이며 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고 감추어진 보화들을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5. 그때에 {창조주} 두려워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아는 것을 발견하리니 6. 이는 {창조주}께서 지혜를 주시며 그분의 입에서 지식과 명철이 나오기 때문이니라.”
➤출애굽기 30장 11-14절을 보면 “11. ¶ {창조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따라 그들을 계수하여 그들의 총수를 조사할 때에 그들은 각각 자기 혼을 위하여 {창조주}께 대속물을 드릴지니 이것은 네가 그들을 계수할 때에 그들 가운데 재앙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 13. 그들이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곧 계수된 자들 가운데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에 따라 반 세겔을 바칠지니 (일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반 세겔은 {창조주}의 헌물이 될지니 14. 계수된 자들 가운데 드는 자 곧 스무 살이 넘는 자는 다 {창조주}께 헌물을 드릴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인구 조사를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명령을 하시고 인구 조사를 할 때는 그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 인구 조사를 하는데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이스라엘에 온역이 생겨서 백성들이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리고 인구 조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인구조사를 하려면 반드시 그 생명을 속하는 속전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서 인구조사를 해야 그 백성 중에 온역(瘟疫)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그래서 인구 조사를 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거의 모든 왕이 인구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인구조사를 했습니까?
사무엘하 24장을 보면 다윗이 인구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면서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생명의 속전을 드리지 않은 이스라엘에 온역이 발생했습니다. ➤사무엘하 24장15절에 “15 ¶ 이에 {창조주}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이스라엘 위에 역병을 보내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백성 중에서 칠만 명이 죽으니라.”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인구조사를 할 때는 반드시 생명의 속전(贖錢)을 하나님께 드려 온역이 없게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무엘하 24장에 있는 말씀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지금은 속전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실제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였는데 이스라엘에게 온역이 발생했습니다. 24장 1절부터 보시면 어디에도 하나님께 생명의 속전을 드렸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언약을 이스라엘은 지키지 않아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발생해서 칠만 명이 죽었습니다.
칠 만 명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모두가 죽었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인구 조사를 하려면 반드시 생명을 속하는 속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면서 그 생명의 속전을 드리지 않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속전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사무엘하24장에는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아서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생겼다고 직접적으로 기록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치 다른 이유로 요압이 인구 조사를 진실 되게 하지 않아서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내린 것처럼 기록이 되어 있으나 실제는 인구조사를 하면서 출애굽기에서 명령하신 생명의 속전을 드리지 않아 말씀하신 그대로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내린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셔서 상징적인 숫자의 인구를 죽이셨지만 실제적으로는 이스라엘 인구 전체가 죽은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속전이라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바로 그 생명의 속전이 은(銀)입니다.
➤출애굽기 30장 13-14절을 보면 “13. 그들이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곧 계수된 자들 가운데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에 따라 반 세겔을 바칠지니 (일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반 세겔은 {창조주}의 헌물이 될지니 14. 계수된 자들 가운데 드는 자 곧 스무 살이 넘는 자는 다 {창조주}께 헌물을 드릴지니라.”
세겔은 은(銀)의 단위입니다. 이스라엘인 언제든지 인구조사를 하면 성소의 세겔대로 반 세겔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십 세 이상 모든 사람은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이 성소의 세겔대로 반 세겔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사람은 온역이 발생해서 죽음을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던 이스라엘에 인구조사가 시작이 되면 모든 이스라엘 사람 이십 세 이상은 하나님께 생명을 속하는 속전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온역에서 피할 수 있고 자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사무엘하에서 다윗이 인구조사를 할 때 실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할 때 이스라엘이 칠만이나 죽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생명을 속하는 속전 반 세겔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모두가 온역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상징적 숫자가 바로 칠 만입니다.
➤출애굽기 30장 15-16절에 “15.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려고 그들이 {창조주}께 헌물을 드릴 때에 부자들은 반 세겔보다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들은 덜 내지 말지니라. 16.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죄 돈을 취하고 그 돈을 회중의 성막에서 섬기는 일에 쓰도록 지정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창조주}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념이 되어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리라.”
생명의 속전을 내는 기준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간난한자와 부자와 차이를 두셨지만 이 생명의 속전만은 하나님께서 부자라고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해서 덜 내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속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만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제사나 규례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를 두시고 힘이 안 되면 그것을 감해 주셨지만 생명을 속하는 속전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반드시 반 세겔을 내게 하셨습니다. 생명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부자의 생명이나 가난한 자의 생명이나 차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부자라 해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 해서 덜 내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는 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부자라 해서 넘치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미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가난해도 반 세겔을 낼 수 있게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너무 가난해서 반 세겔을 낼 수 없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구약의 생명의 속전은 그림자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반 세겔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신약에 가서 보면 우리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누가 도와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도와 줄 수 없고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반 세겔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자라 해서 더 낼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떤 일을 더 하면 구원이 더 커질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속전은 반드시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반 세겔을 드려야 합니다. 이 반 세겔을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구약에 생명의 속전을 드리는 반 세겔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같이 우리는 신약에 생명을 속하는 속전 은을 구해야 합니다. 만약 그 은이 여러분에게 없다면 여러분은 모두 온역에 걸려 사망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주}를 경외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은 반(半) 세겔이 없다면 여러분은 온역에 걸려 죽습니다. 온역에 걸려 죽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도 이 은 반 세겔을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 생명에 관한 일인데도 교회당에 나온 사람들은 이 은을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거짓된 고운 것을 그리고 헛된 아름다운 것을 쫓아서 그것을 추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식이 없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을 구원해 주시겠습니까? 성도라면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을 구하지는 않고 고운 것과 아름다운 것을 보며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은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반드시 내 생명을 속할 생명의 속전 은 반 세겔을 구해서 인구조사를 할 때 그 속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는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을 조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5-7절애 “5.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6. 그분께서 정하신 때에 증언을 받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느니라. 7. 그 일을 위하여 내가 복음 선포자와 사도로 임명을 받았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하지 아니하노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이방인들의 교사가 되었노라.”
육적 이스라엘은 반드시 자기가 은 반 세겔을 드려야 했습니다. 자기 생명을 속하기 위해서는 천국 백성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은 반 세겔을 자기가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영적 이스라엘인 지금의 성도는 이 생명의 속전을 예수님께서 모두 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 있는 우리가 죽어야 하는 것을 죄 없는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육적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설령 인구조사를 한다 해도 우리는 속전을 낼 수 있는 입장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방인입니다. 그런 이방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속전이 되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이방인은 어떤 방법으로도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인구조사를 할 때 생명의 속전으로 드렸던 그 은(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모든 사람의 속전을 드리심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구원 받는 일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2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여러분이 이 보화를 찾지 못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잠언에 분명히 은(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창조주} 경외하기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은을 구하지 못하고 이 보화를 찾지 못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도 없고 경외하는 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이 은을 구해야 하고 반드시 이 보화를 찾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다.
은(銀)이 없이 보화가 없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자기 행위로 곱게 만들고 선하고 의로운 행위로 아름답게 포장을 해도 그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은을 구하는 것이 보화를 찾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디모데전서에서 이 은이 바로 생명을 위한 속전이며 이 은(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드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성도는 이 은을 구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골로새서 2장3절에 “3.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감추어진 보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고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성경 안에서 이 감추어진 보화를 찾아야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다. 이 보화를 찾지 않고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습니다. 경외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적으로 무척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너무도 쉬운데도 사람들은 어렵게 그 방법을 찾으려 하다가 하나님을 경외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도님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의 속전을 냈고 감추어진 보배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습니다. 그것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성도인 줄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첫댓글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