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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강해(19)결박을 풀음
사도행전 12장1-15절 / 송태근 목사
오늘은 사도행전 19번째 강해를 하면서 12장으로 넘어옵니다. 조금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여기 지금 헤롯이 등장을 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명의 헤롯이 있어요. 왕으로써 일가가 대대로 정권을 유지했기 때문에 헤롯이라는 이름이 계속 등장을 합니다. 아버지 가졌던 이름을 아들도 썼지만 여기에 나오는 헤롯은 아그립바 2세입니다. 예수님 태어날 때 헤롯은 다른 헤롯이지요.
그리고 사도행전 뒤편에 나오는 바울이 변증 하던 그 헤롯은 또 다른 헤롯입니다. 어쨌든 이 헤롯의 혈통은 아시는 대로 [에서]의 혈통입니다. 그래서인지 컴플렉스가 있어요. 항상 유대의 분봉 왕으로 정권을 잡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중의 지지와 정치적 탄탄한 기반에서 잡은 정권이 아니고 로마 정부와 정치적인 묘수를 통해서 잘 결탁을 했고 집안 대대로 분봉 왕을 해요. 그래서 그 헤롯의 왕가를 그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을 글을 보면 어마어마한 갑부였어요.
많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고 부를 축적(蓄積)했지요. 그것은 바로 그 정치적인 중요한 이익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항상 이중적이었지요. 로마 정권에도 잘 보여야 되었으니 정부가 그 지향하고 있는 가치나 철학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 당시에는 힘이 숭배 되던 세상이었어요. 그 힘이 또 헬레니즘 문화를 섞어서 받아들이는 바람에 가치관의 혼탁과 또는 그 윤리적인 타락이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게다가 또 이제 유대인들의 눈치도 봐야 돼요. 심정적으로는 지지를 안 하니까 늘 유대인들이 부담 거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유지해야 되는 그런 딜레마 속에서 항상 이 헤롯은 제일 첫 번째 관심이 민심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민심을 자기 쪽으로 물줄기를 틀 수 있을까?” 여기에 항상 정책이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1-2절에 보면 여기 야고보의 죽음이 등장을 해요. ➤“1. 이제 그 무렵에 헤롯 왕이 교회에서 몇 사람을 괴롭히려고 자기 손을 뻗치고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라.”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뭘로 죽여요? 칼로 죽입니다. 이 칼로 죽였다는 누가의 묘사는 정확하게 이 죽음이 불법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묘사한 대목입니다. 절대 유대인은 칼로 처형을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처단 자체가 불법이에요. 근데 지금 이 인물이 야고보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형제’라고 표현되어 있어요. 세베대 아들을 얘기합니다. 야고보가 여러 번 등장을 해요. 알페오 아들 야고보도 있고, 세베대 아들 이고보도 있어요. 그래서 보통 교회사에서는 알패오 아들 야고보를 소 야고보라고 하고, 작은 야고보 또는 이 순교 당한 야고보를 큰 야고보 이렇게 별칭을 붙여서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 야고보는 어떤 인물인가 하면?
초대교회의 요한과 더불어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님의 아주 핵심인 그룹이었어요. 사도행전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돼요. 원래 이 사람은 굉장히 큰 어장을 경영했던 집안의 아들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한때는 예수님에게 오해를 해서 정치적인 왕권을 꿈꾸기도 했어요. 나가서 성격이 대단히 불 같아요. 그래서 [보아네게] ‘천둥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다혈질입니다. 한번은 예수님 앞에서 싹쓸이 발언을 하였어요. “옛날에 누가 했던 것처럼 이것들을 명해서 그냥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서 싹쓸이 할까요?”라고 말했다가 예수님에게 야단을 맞지요.
이 어머님이 또 굉장히 그 치마 바람이 거셌던 꽤 잘 사는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야고보가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깨지고 빚어지고 만들어지면서 그는 정치적인 [왕관] 대신 ‘순교의 면류관’을 쓰게 됩니다. 그렇게 죽어요. 야고보를 죽인 헤롯의 의도는 뭐냐면 딱 하나입니다. 민심이었어요. 이 헬라에 있는 유대인들에게서 민중의 마음을 어떻게 자기에게로 물꼬를 좀 틀까를 골몰 하다가 유대인들이 이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굉장히 심사가 편치 못하다는 걸 간파하고 ‘이게 옳으냐? 틀리냐?’ 진리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딱 하나는 표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래서 선거 때 돌아다니는 정치인들의 구호는 99% 믿을게 못됩니다. 그건 결국 표를 의식에서 하는 발언들이기 때문에 거기에 여러분들이 눈멀고 현혹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야고보는 헤롯의 정치적인 야욕에 희생물이 되어 그리고 유대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일들이었습니다. 그 내용들을 한 번 보십시다.
➤3절 “3 또 그가 유대인들이 그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더 나아가 베드로도 잡으려 하였는데 (그때는 무교절 기간이더라.)” 그 예루살렘 교회 최고, 교회 지도자였던 베드로에게 불똥이 뜁니다.
야고보를 죽이니까 백성들이 아주 기뻐해요. 해서 늘 이 민심에 관심이 있었던 헤롯 입장에서는 이참에 조금 더 나가보자 하고 악수(惡手)를 둬요, 그것이 베드로의 체포입니다. 베드로는 그래서 붙들리게 되어 그 당시 베드로의 교회의 위치는 최고의 지도자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지금 체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교묘하게 정치적인 그 감각의 더듬이는 워낙 발달된 인물이기 때문에 헤롯이 언제 잡느냐 하면 자! 3절을 잘 보세요. “더 나아가 베드로도 잡으려 하였는데 (그때는 무교절 기간이더라.)” 어느 기간이요? 무교절이라 무교절은 명절이라는 말이에요. 명절은 천지 사방에서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려고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절기입니다. 예수님도 이 이 기간에 고문을 당하고 붙들리게 돼요.
정치인은 이런 명절을 이용해요.
선거 때 보면 정치인들이 언제 제일 여론의 이 방향타에 관심을 써요? 명절날입니다. 추석이 끼거나 설날이 끼면 이제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이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때 그 백성들의 흐름이, 민심의 흐름이 누구에게 쏠릴까? 이거 굉장히 관심을 기울이게 되지요. 뭐 그런 시기에요. 자 그런데 우리가 조금 더 나가 보면 ➤4절 “4. 그가 그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군사가 넷씩인 네 소대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으니 이것은 이스터가 지난 뒤에 그를 백성에게로 끌어내려 함이더라.”
이때가 베드로에겐 정확히 세 번째 투옥 되고 붙잡히는 체포의 순간이에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앞에 첫 번째 두 번째는 체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신비스러운 은혜와 방식으로 그가 풀려납니다. 아무 해를 받지 않고 그대로 풀려나요. 헤롯이 그 일을 너무 잘 알고 이번에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자기 정치적인 여정에 굉장히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아주 철저하게 단단히 묶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지난 후에 그를 처형하기 위해서 어떻게 지키느냐 하면 군대 수 4교대로 16명이 하루에 이 한 사람을 위해서 붙어요.
그리고 나중에 이제 그 기록이 나오는데 한쪽 팔에 다가 수갑을 채우고 이제 사슬을 채웠겠지요. 또 그 나머지 끝은 로마 군사든지 관리가 한쪽 발에 채워요. 그렇게 꼼짝 못하게 하고 둘이 같이 잠을 자는 거예요. 나머지 병사는 옥문 밖에서 이 상황을 지켜 주고 얼마나 철저히 그를 봉쇄했는지 알 수가 있지요. 자 성경 6절을 보십시다. ➤“6 헤롯이 그를 끌어내고자 할 때에 바로 그 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사슬에 묶인 채 잠을 자는데 간수들은 문 앞에서 감옥을 지키더라.”
자! 내일이면 이제 처형 집행 날입니다. 그런데 “7 보라, [주]의 천사가 그에게 이르매 감옥 안에 한 광체가 빛나더라. 그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그를 일으켜 세우며 이르되, 빨리 일어나라. 하니 그의 사슬이 그의 손에서 풀려 떨어지더라.” 아멘! 자 굉장히 이제 중요한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을 보시는 것처럼 베드로는 지금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병사 둘이 자기 양팔에 사슬을 묶어서 같이 자고 있어요. 그리고 이 이 상황은 그가 지금 처형을 앞에 둔 상황입니다.
그런 지금 지하 3층 밑에 감옥에 갇혀 있어요. 원래 이 감옥은 지하에 주로 만들어지는데 3층으로 구성이 됩니다. 상옥, 중옥, 하옥, 하옥은 누구만 가두어지는 공간인가하면? 중 범죄자들이나 사형을 앞에 둔 죄수들만 가두어지는 공간이에요. 거기에서 탈옥할 수 있는 길은 없고 절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지금 옆에 사람이 자기 양팔에 사슬을 묶고 같이 누워 있어요. 바로 코앞에는 두 병사가 지키고 서 있습니다. 자 이제 베드로는 이렇게 왜 끝나는 것처럼 보여요. 사방을 둘러봐도 습기가 되게 배어나오는 3층 지하에 깜깜한 벽 밖에는 보이는 게 없어요.
그때 성경의 중요한 단어 하나가 등장을 하는데 7절 보세요. ‘홀연히’ 자! 앞을 잠깐 볼까요. [홀연히] 라는 말이 나오기가 쉽지 않아요. 홀연히, 뭘 말하는지는 알겠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등을 포함한 개념이겠지요. 그런데 조금 더 이 성경 기록자가 원래 쓴 원문에 가깝게 해서 읽으면 이런 뜻이 됩니다. ‘홀연히’ 이라는 말은 따라서 하십시다. [보라] 그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어 있는가 하면 지금부터 [보라] 그 뜻입니다.
여기서부터 [보라] 누가 일하시는 시간이지요?
‘지금부터 보라!’ [베드로] 라는 한 인생이 지금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여지도 없어 이렇게 끝나는 것 같이 보여 집니다. 그 인간의 어떤 수단도 작용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철저히 갇혀져 있고, 묶여져 있는지를 성경 기록자가 유독 세밀하게 기술을 해요. 그런데 그때 이 모든 상황을 한꺼번에 뒤엎어 버리는 단어 하나가 등장을 하는데 여기서부터 [보라] 누가 일하시는 시간이지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이에요.
여러분들이 길이 막히고 담이 막히고 절벽 끝에 서 있는 느낌으로 인생 막다른 길에 던져줬다 싶을 때 사람으로는 답이 안 보일 수가 있어요. 이렇게 머리가 하얘지는 경험을 인생에서 몇 번 겪지요. 그때는 누가 일하는 시간? 하나님! 그 대반전의 단어가 [홀연히] [보라]라는 단어예요. 이 말은 공연이 붙여진 수식어가 아니에요.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지금부터 보라] 누가 일하신다는 얘기입니까? “하나님이” 믿습니까?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오늘 어떤 심정으로 어떤 상황 속에서 이해를 찾아내지는지 몰라요.
그런데 수 천 명의 성도들의 각가지 사연 속에서 ‘하나님은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시는 섬세함으로’ 여러분들의 칠흑 같은 상황을 알고, 보고, 듣고 계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답이 없다고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오늘 설교 다 잊어버려도 [홀연히]-[보라] 라는 단어 하나 붙들고 일어나셔도 됩니다. “자!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내가 시작하는 게 아니에요. 누가 시작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멘! 이게 하나님께서, 또 말씀이 주는 힘이에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그 분의 의지와 영원하신 고집으로 성취 되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밑에서부터 뜨겁게 올라오는 말씀이 주는 격려와 위로가 여러분들의 유일한 힘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홀연히]-[보라] 보통 단어가 아니요. ‘홀연히’ 여러분 오늘도 돌아가시거든 책상 앞에 다가 써 넣으세요. [홀연히] 그걸 묵상하면서 바라볼 때마다 절망이 밀려오고, 두려움에 밀려올 때마다 “그렇지! 이때야 말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시간이지” 이층에 성도님들 아멘! [홀연히]-[보라] 저는 이 단어 앞에서 침묵하고 한참 눈을 감고 있었어요. 여러분들의 인생에 한복판에 홀연한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 단어의 이런 심오한 반전이 있을 줄이야! 알렐루야!
베드로의 믿음
자 그런데 그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제 하나님이 일하시고 보십시다. 7절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게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자! 앞을 보세요. 베드로는 뭐 하고 있었어요? 자고 있었어요.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상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뭘까요? 우리는 이제 크게 3가지로 추측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상황 속에 잠이 와요? 내일 죽어요. 잠이 와요? 어떤 분은 이제 그 책에 다 그렇게 쓰세요. ‘베드로의 믿음”, 창조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그에게 믿음을 주셨어요. “하나님이 건져 주실 줄 믿고 그런 깊이 잠들 수가 있었다.” 그걸 우기면 안 되는 말은 또 아닌데?
그러면 이 베드로를 예를 들어서 하루 종일 그런 시달리고 신문 받고 고문을 겪었을 것, 아니에요? 너무 피곤해서 골아 떨어졌나? 여러분 고문과 신문 당하면 더 못자요. 온 몸이 쑤셔서 아니면 또, 하나의 방향은 송 목사처럼 둔했거나? 제가 자는 모습을 보고 어머님이 가끔 그런 얘길 했어요. 야! 그거 네가 자는 거냐? 혼수상내처럼 저는 잠을 굉장히 깊게 잡니다. 잠을 많이 자는 스타일은 아닌데 한번 잠들면 진짜 난리가 나도 몰라요.
베드로가 여기 이렇게 깊이 잠든 상황을 성경 기록자는 왜 일부러 이렇게 밝히고 있을까요? 의외로 답이 간단한 데 있어요. 탈옥을 위해서 베드로가 한 게 없다는 얘기입니다. 베드로가 아무것도 계획을 한 것 없고 여기서 어디 빠져나갈 궁리를 했겠어요? 이 말은 베드로가 한 게 없다는 얘기예요. [보라] 라는 말 속에 ‘홀연히’ 라는 말 속에 누구 일하시면 시작이라고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다.” 여러분! 이 말씀을 정말 믿어야 됩니다. 지식으로만 믿는 것 아니고 고백으로만 믿는 게 아니고 정말 믿어야 돼요.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는 안에서는 잘하고 돌아가시는 데 또 현장과 실질적인 상황 속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런 행동과 반응을 나타낼 때 얼마나 많아요? 하나님이 하신다는 얘기예요. 여기서 “홀연히” 라는 이 뜬금없는 반전의 단어와 연결된 결론입니다. 자! 그러면 이쯤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에 봉착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 질문이 뭐냐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베드로의 체포는 누구의 죽음으로 촉발된 사건이에요? 그렇습니다! ‘야고보의 죽음으로 촉발된 사건’이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갇힙니다.
이제 한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일이에요. 이렇게 천사를 동원하여 깊이 잠든 베드로를 흔들어 깨워서 그를 탈옥시킬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면 야고보는 그렇게 할 수 없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야고보는 왜 죽여요? 칼로 치려고 그러면 칼이 뚝, 뿌려지든가, 뭐 이런 역사를 하나님이 못 하셨을까요? 이런 그 지원이 반드시 나와야 돼요 그래야 이 야고보의 죽음과 연결된 베드로의 등장이 의미가 생깁니다.
왜? 야고보는 목 베임을 당해서 순교자로 만드시고, 베드로는 살려주신 것인가요? 베드로는 건져냈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이런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헷갈릴 때가 많아요. 더 잘 준비 했는데 우리가 볼 때도 반듯한 상황인데 하나님은 그 길은 계속 막고 묻어 버릴 때가 있고,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또 하나님이 계속 그런 곳으로 몰고 가시고 쓰세요. 그럴 때 이제 헷갈리는 거죠.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영적인 눈을 열어둘 필요가 있어요. 그겁니다.
제가 우리 남자 분들에게 한번 여쭤볼게요? 121사태 아세요? 모르시나요? 북쪽의 무장한 그 테러 집단이 공비가 그걸 공비(共匪)라 그래요, 공비가 청와대 뒷산까지 넘어 세검정까지 넘어와서 “박정희 목을 따겠다”고 난리쳤던 적이 있어요. 온 나라와 세계가 발칵 뒤집힌 아주 엄청난 사건이었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게 향토예비군이에요. 그래서 만들어진 이래 그 외에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도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 해가지고 그 실미도 부대 만들고 또 그 박대통령이 향토예비군 만들었지요.
그 때 유일하게 다 사살이 되고,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 [김신조] 씨라고 있어요. 지금 목사가 되어 있지요. 그분에게 그런 사건이 있을 그때 전군에 비상이 걸렸어요. 그런데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이제 막 제대 명령 받고 위병소 나가다 걸린 거예요. 뭐 그 사람 진짜 접시 물에 빠져도 죽는 운을 타고난 사람이에요. 위병소 나다가 걸린 사람이 있어요. 실제로 그의 제대가 몇 달 연기됐지요. 모든 군인의 유일한 희망의 시간은 언제입니까? 제대하는 날입니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이게 군인들의 유일한 구호 아닙니까? 군인들의 모든 꿈은 제대하는 거예요. 그럼 물어봅시다. 남자들만 느낌 아니까 물어 봅시다. 제대하는 사람이 좋은 거예요? 아직도 군대 남아서 뺑뺑이 도는 사람이 좋은 거예요? 누가 좋아요? 말은 제대하는 사람이 좋다. 그러는데 우리 인생살이 속에는 그 감각에 안 들어온다.
여기 지금 제대한 사람은 누굽니까? 야고보요. 야고보 제대했잖아요. 그 아직도 복무해야 되기 때문에 할 일이 있기에 하나님의 계속 끄집어내고, 끄집어내고 계속 이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가게 하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베드로에요. 누가 진짜 난 거예요? 이렇게 감(感)이 들어오세요? ‘이게 정확히 하나님 시각에서의 영적인 그림’이에요. 제대하는 사람, 백번 낫지요.
후에 바울도 뭐라 그럽니까? “내가 마음은 빨리 나 아버지 집에 가고 싶다. 마음은 늘 아버지 집을 향한 그리움을 떠난다.” 라는 표현은 [떠난다.] 그 [떠난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면 이런 뜻입니다. 전장의 현장에서 병사들이 험한 전투 속에 임시 장막에 살다가 이제 전쟁이 승리로 끝나고 고향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텐트를 걷을 때, 그때 짐을 싸잖아요. 그 텐트에 묶여 있는 줄을 품에다 딱 풀어요.
이 줄을 풀 때 ‘떠난다’ 라는 표현을 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병사들이 전쟁을 끝내고 내 어머니, 내 아내가 기다리는 이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 텐트에 묶인 줄을 풀 때. 1) 마지못해 푼다. 2) 죽지 못해 푼다. 3) 어쩔 수 없이 푼다. 4) 소풍을 떠나는 소년의 설렘으로 푼다. 어느 쪽이 맞을까?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설렘, 바울은 아버지의 집을 향한 그리움을 그렇게 묘사 했어요. 남아 있는 게 괴롭다고 얘기했어요. 내가 이 두 사이에 끼어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야고보는 제대한 사람이에요.
베드로는 아직도 그가 초대교회에 단단한 기초와 안정을 위해서 할 일이 있기에 하나님이 감옥에 집어넣어도 또 끄집어내서 길을 걷게 하시고 “너 아직 복무기간 남았다.” 그 말이에요. 그럼 누가 난 거예요. 남자 분들만 누가 난 거예요. 야고보가 100번 낫지요. 그런 시각입니다. 아직도 이 땅의 우리를 걷게 하시고 남겨주실 때에는 하나님이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는 내 속에 깎고 빚어질 내용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나를 남겨 두세요.
“너 지금 그 꼬라지 가지고는 벌거벗은 구원을 얻을 수밖에 없다. 좀 모양 갖추고 가라.” 그래서 더 남겨둔 온 거예요.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 하시는 이 사명의 길이 있기에 우리를 아직도 이 땅에 남겨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장례식장에 가서 정말 울 사람은 시체가 일어나서 우리를 위해 울어야 돼요. 우리가 시체를 우는 게 아니고, 아시겠어요? 우리 거꾸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분들은 고인들은 제대한 거예요. 하나님 품에 간 것이고요. 그럼 그 사람이 우리를 위해서 울어야지 말로 하자면, 머릿속으로 동의가 되는데 심정적으로는 별로 동의가 안 되는 그 애매한 표정을 저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11-15절을 보십시다.
➤“11.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이제야 내가 [주]께서 자신의 천사를 보내사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인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건지신 줄 확실히 아노라, 하며 12. 그 일을 깊이 생각한 뒤에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는데 거기에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3. 베드로가 바깥문의 문을 두드리매 로다라 하는 여자아이가 들으려고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반가워서 바깥문을 열지 아니한 채 뛰어 들어가 베드로가 바깥문 앞에 서 있다고 말하매 15. 그들이 그녀에게 이르되, 네가 미쳤다, 하나 그녀가 확고히 단언하여 참으로 그러하다고 하니 이에 그들이 이르되, 그것은 그의 천사라, 하더라.”
 : 베드로가 이제 성도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이제 추적을 해서 가서 문을 똑, 똑, 똑 두드렸어요. 그랬더니 [로데] 라는 여자아이가 나와서 “누구세요?” 그랬더니 “나 담임목사다. 베드로다.” 그러니까 이 애가 정신이 나가지고 문을 열구 뛰어 들어가야 될 텐데 열어 주지도 못하고 너무 놀라서 뛰어 들어가서 성도들한테 “담임목사님 나오셨다”고 야단을 치니까 성도들이 뭐라 그랬어요.
“네가 너무 슬픈 나머지 헛것을 봤구나?” 힘써 참 말이라 하니까 “너 유령 본 거 아니냐?”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금이 성도들 여기 왜 모여 있어요. 5절을 보세요. 찬양대만 ➤“5. 그러므로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으나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여기 왜 모였어요. 이 지금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 하려 모였어요. 그럼 베드로 선생님이 그 감옥에서 잘 견디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 했을까요? 석방을 위해서 기도했겠지요. 그런데 지금 문 앞에 나왔었는데 성도들은 그렇게 기도 해 놓고도 안 믿어요. 네가 헛것 봤구나? 자 이런 참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를 성경 기록자가 왜 기록했을까요?
두 가지입니다. 철저히 이 일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참 황당한 결과지만 따라서 합니다. 이건 꼭 따라 해야 됩니다. “이런 형편없는 기도도 응답하신다.” 우리 옆에 사람들에게 그런데 왜 기도 안 하십니까? 인사하세요. 아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기도도 하나님이 들으세요.
이 오늘 저녁 예배에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세밀한 설교를 할 겁니다. 다니엘이 기도를 통해서 과연 그런 기도 의미가 우리에게 뭔가에 대해서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릴 텐데 문제는 이러한 기도도 하나님의 응답 하세요. 아 이제 뭘 우리가 기도 안 해야 됩니까 저 경부선 타고 내려가다 보면 우측에 무슨 그 출판사 건물이 있어요. 땡땡 출판사라고 그 건물이 이런 기도문 이런 글귀가 붙어 있어요.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 하십니까?] 이런 문구가 쭉 길게 붙여져 있어요. 앞만 보시라고 그런 거 잘 안 보이지요. 앞만 보고 운전 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새내기들 기도의 시간이 커 특별히 세상이 말하는 불금 불타는 금요일 날, 10시에 기도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번 금요일에 여러분들이 모두 나오셔서 형편없는 기도라도 부르짖고 간구 하시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역사를 경험할 줄을 믿습니다. 오늘 이 모든 말씀이 여러분 생애 속에 [홀연히-보라] 자 이제부터 하나님이 일하신다. 라는 말씀 앞에 그 기적을 한주간도 경험하는 우리 삼일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영상녹취 / 김은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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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녹취에 애쓰신 주님의 사람 김은영목사님의 육체적 질병이 '홀연한 '주님의 역사로 차유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고 소망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