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반지 / 조병렬
소목(素木) 김규련(金奎鍊) 선생의 수필 <거룩한 본능>을 처음 읽은 때가 삼십 년 전이다. 이 작품은 1980년「수필문학」3월호에 처음 발표된 후, 1984년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었고, 그때 나는 이 수필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거룩한 본능>은 작가가 경상북도 영양교육장으로 재직하던 당시에 쓴 수필로서, ‘작자의 노트’를 보면 작품의 배경과 주제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경북의 오지(奧地), 영양군에는 하늘 아래 첫 동리라 불리는 수비면이 있다. 여기서 또 한나절 걸어 들어가면 화전민의 자연부락이 있다. 나는 한때 그 고장의 교육행정 책임자로서 그 화전민 부락의 국민 학교를 방문했다가 하룻밤 묵게 됐다. 그날 밤 물레방아가 도는 동장 집 큰 방에서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동네 사람들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했다. 그러다 지난겨울에 황새 한 쌍이 이 고장에 왔다가 죽게 된 사연이 화제에 올랐다. ‘…하찮은 그 미물도 정이 있어서 그렇게 목을 감고 죽었으니…….’ 울먹이듯 말끝이 흐리는 그들의 순정.
나는 그날 밤늦도록 호롱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자연 그대로 남아 있는 산촌의 풍경과 그들의 고운 심성, 밀렵꾼의 행패와 황폐해진 인간성, 그리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돼 가는 자연……. 찬란한 별빛이 쏟아지는 뜨락을 들락거리며 깊은 상념으로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던가. 이 작품의 주제는 행간에 깔려 있는 자연중심의 자연보호와 인간성 회복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짝을 잃은 황새는 연신 부리가 멍들어 부서지도록 울어대었고, 결국 그 한 쌍의 황새가 서로 목을 감고 싸늘하게 죽었다. 이 사연을 듣고 작가는 하찮은 그 본능이 인간의 종교보다 더 거룩하고 예술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면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가슴앓이를 하였다. 어디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아픔일까? 황새가 영물(靈物)로서 거룩한 본능이 있다면,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으로서 절대적이고 거룩한 사랑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어릴 적, 우리 마을 뒷산 소나무 숲에도 황새 여러 쌍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과 그곳 야트막한 산에 소 먹이러 자주 갔다. 여름이면 소를 산에다 몰아놓고 산 밑의 저수지 ‘굴못’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해지는 줄 몰랐다. 마을 사람들은 황새를 멀리서 바라만 보았을 뿐 누구도 해코지한다거나 쫓으려 하지 않았다. 마을 어른들은 황새 똥을 머리에 맞으면 머리털이 빠진다며 황새 가까이에는 절대로 가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 줄 알고 곁에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마을 어른들도 황새를 길조나 영물로 여기며 보호하고자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 후에 대도시에 가까운 고향 마을에는 공장이나 축산 농가가 들어오면서 아름답고 평화롭던 농촌 풍경은 사라져갔다. 지금도 그 소나무들은 낙락장송이 되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지만, 고귀한 자태를 뽐내며 유유히 날아다니던 황새들은 고향을 떠난 마을 사람들처럼 돌아오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길조나 영물로 여겼던 황새들이 노닐던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우리 밭이 있었는데, 이 밭에서 삼십여 년 전에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있었다. 소목 선생의 <거룩한 본능>을 다시 보면서 우리 밭에서 일어난, 마치 설화 같은 우리 집의 황금 반지 사연을 다시 떠올려 본다.
얼마 전, 무엇을 찾다가 우연히 보관된 반지를 보며 아내와 얘기를 나누었다. 아내는 줄곧 직장 생활을 하며 바쁘게 살다 보니 귀금속에 관심을 둘 만큼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랬다. 세상에 어떤 여인이 자신의 몸치장에 관심을 두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내의 손을 바라보니 옛날 그렇게도 희고 도톰하던 손은 많이 변해 있었다. ‘손마디가 저렇게 굵어졌으니 옛날 결혼반지가 들어가기는 할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굵고 거칠어진 손을 슬며시 잡아 보았다. 옛날 새색시 때처럼 곱고 부드러운 손은 아니지만, 손안에 잡힌 그득한 느낌이 오히려 듬직해서 좋았다. 온몸과 더불어 손가락마저 통통히 살이 올랐으니, 나하고 살면서 그래도 밥은 굶지 않았나 보다 싶었다. 그만도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왠지 마음이 짠하며 지난날들이 돌아 보였다.
아내가 간직하고 있는 반지 중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반지가 하나 있다. 모양도 빛깔도 화려하지 않으나 내게는 가장 잊을 수 없는, 그래서 가장 소중한 반지로 기억된다. 내가 처음 교직 생활을 시작하던 그해에 할머니께 선물한 서 돈짜리 황금 반지다. 당신께서는 지극히 사랑하는 외동 종손(宗孫))을 대하듯 언제나 자랑스럽게 끼고 계셨다.
그러던 어느 날, 부엌일을 하시다가 잃어버렸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몰랐지만, 할머니의 상심은 얼마나 컸을까? 당신께서는 미안한 마음에 나에게 말씀도 못 하셨을 것이다.
할머니께서 타계하신 몇 년 후,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께서 밭을 매다가 우연히 흙 속에서 그 금반지를 발견하신 것이다. 그 순간 어머니는 어찌나 놀랍고 고마웠는지 밭이랑에 앉아서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시며 눈물까지 흘리며 몇 번이나 감사의 절을 했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도 눈시울을 적셨던 생각이 난다. 옛날 할머니께 반지를 선물할 때, 내가 어머니께도 함께 해 드리려고 했으나 어머니는 기어코 사양하셔서 나는 어머니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고 할머니께만 선물하지 않았던가.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으니…….
수년 전에 집에서 잃은 반지가 어떻게 우리 밭에서 발견되었을까? 부엌에서 떨어진 반지는 땔감 나무에 섞여 부엌 아궁이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고, 타고 남은 재는 매일 아래채 두엄간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그 재거름이 다시 밭에 내다 뿌려지면서 흙 속의 보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 후 오랫동안 흙 속에 묻혀 있다가 밭일을 하시던 어머니께로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이런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다. ‘모래밭의 바늘 찾기’라는 말처럼, 결코 쉽지 않은 일이 아닌가.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일까 싶었다.
어머니께서 그 반지를 사뭇 끼고 계시다가 훗날 그 반지의 특별한 사연과 함께 아내에게 물려주셨다. 이 반지는 단순한 물질적 대물림은 아니다. 그것에는 할머니를 향한 나의 마음과 어머니의 효심과 할머니의 영묘(靈妙)한 가족 사랑이 담겨 있다. 이 사랑과 효심의 반지는 이제 삼 대를 이어 내 아내에게까지 전해진 우리 집의 가보(家寶)임이 분명하다.
황금은 부의 상징이나 황금 반지는 사랑의 표상이다. 나는 결혼한 지 삼십여 년이 지났지만, 아내에게 변변한 반지 하나 선물하지 못했다. 많은 기념일에도 선물할 생각을 못 했으니, 나는 참으로 매력 없는 남편인 셈이다. 요즘 금값이야 정말 금값이 되어 금반지 선물이 쉽지 않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어찌 그렇게 무심했을까 싶다.
한편으로 돌이켜 보니 내 탓만도 아닌 듯하다. 이제 와서 이렇게 된 연유를 아내에게 슬쩍 돌리려는 변명까지 일어나니 더욱 가관이지만, 결혼 초기 이후에는 아내가 반지를 끼고 있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해본 생각이다. 귀걸이는 물론, 귀금속으로 몸을 치장하지 않는다. 아직 귓불도 뚫지 않았으니, 그것이 하나의 증좌(證左)이다. 우리의 결혼 예물에는 반지도 몇 종류 있을 텐데, 그 반지들은 화려한 빛을 감춘 채로 언제나 우리 집 어느 곳에서 참선하는 도인처럼 묵언정진(默言精進)하며 조용히 미소 짓고 있을 뿐이다.
근래 우리의 진주혼(眞珠婚) 기념일에도 고운 진주 반지 하나 선물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사십 년 세월 동안 우리 집 황금 반지는 삼 대에 걸쳐 선물로 전해지고 있으니 이보다 더 귀하고 값진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이 황금 반지는 빛깔이 퇴색되고 문양(紋樣)도 닳아서 희미하지만, 화려하고 값비싼 어떤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보석이고 사랑의 표징(表徵)이다. 이 반지는 앞으로도 영원히 거룩한 사랑의 표상으로 대물림되어 계속 이어가리라.
내가 소목 선생과 인연을 맺은 지 길게는 삼십 년이요, 짧게는 십 년이다. 수필 <거룩한 본능>을 읽고 크게 감동을 한 때가 삼십 년 전이고, 같은 문학동인회에서 다달이 뵙고 부처님의 상호를 올려보듯 한 지도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소목 김규련 선생께서는 산수연(傘壽宴)의 축복을 받으신 뒤에도 건강하신 모습으로 왕성하게 옥고를 탈고하시며, 언제나 수필의 등대에 빛이 되어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