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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 불가침조약(1939년)
이데올로기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인 두 나라가 은밀한 회의에 열중해서 터무니없는 현실 정치(Realpolitik) 속에서 동유럽 국가들을 조각내는 것, 그것은 기괴한 일이었다. (···중략···) 이데올로기는 스탈린에게 대수롭지 않았다. 소련 국경 저 먼 쪽에서는 국가 이성(raison d'etat)이 더 우세해졌다. 그는 파시스트 독일과 조약을 맺을 수 있는 만큼 손쉽게 제국주의 서구와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소련이 보기에 유럽의 반동 국가들은 모두 사회주의라는 쇠바퀴에 깔려 종국에는 모두 가루가 될 것이었다. (···중략···) 무엇보다도 독일은 소련이 1939년에 그저 꿈에서나 바랄 수 있던 것을 내놓았다. 그것은 유럽에서 옛 차르 제국을 재건할 가능성이었다. 그 가능성이 독일의 동의를 받아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 제공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작은 완충 국가들의 네트워크 대신에 독일과 소련이 국경을 맞대는 상황을 가져오리라는 사실은 감내할 만했다.
- 리처드 오버리 저, 류한수 역,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p. 77-79
1939년 8월 23일 체결된 나치 독일과 소련 양국 간 체결된 불가침조약. 조약 체결자인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이름을 따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이라고도 한다.
서유럽 국가들이 뮌헨 협정으로 아돌프 히틀러를 봐주는 실수를 저질렀다면,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히틀러의 야심을 얕보고 불가침조약을 맺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조약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2. 독일-소련 관계의 파국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만 해도 독일과 소련은 매우 사이좋은 우방국이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서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군비를 제한받음과 동시에 국제 연맹 가입을 거부당하고 있었고,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유로 역시 국제 사회에서 왕따당하는 처지였다. 비록 양국이 1차 대전 때 피터지도록 싸웠다고는 하나, 소련에게 있어 그것은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의 일이었고, 독일 역시 독일 제국의 문제였다.
때문에 독소 양국은 1922년 라팔로 조약이라는 우호 조약을 체결하여 독일은 소련에게 여러 선진 군사 기술을 제공하고, 소련은 군비 제한이 많은 독일에게 비밀리에 신기술 연구 및 군사 훈련을 할 수 있는 시설을 자국 영토 내에 제공하는 등 서로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 아울러 양국 모두 폴란드라는 가상 적국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기도 했다. 독일은 국경 인정 문제로, 소련은 1920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이후로 폴란드와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러나 이런 양국 관계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수상에 취임하면서 깨져 버렸다. 그는 시종일관 "때려잡자 공산당!"을 외쳤으며 자연스레 소련과의 관계는 나빠졌다.
3. 1938년 위기와 소련
1938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수데텐란트 할양을 요구하며 유럽에 전쟁이 터질 위기가 도래하자 소련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 군사 동맹을 체결한 상태였으며, 유사시 동맹국의 안전 보장을 위해 참전하여 독일과 싸워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하지 않아, 폴란드 혹은 루마니아의 영토를 통과해야 했다. 이 가운데 폴란드는 죽으면 죽었지 소련군에게 영토 통과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기 때문에, 루마니아로부터 영토 통과 허용을 약속받았다.
이때 영국, 프랑스는 소련과 처음으로 접촉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을 크게 신뢰하지 않아 이들이 선택한 건 독일과의 화평이었고, 그 결과가 바로 뮌헨 협정, 일명 서구의 배신이었다.
소련은 체코위기 당시 체코와 동맹을 맺고 있었고, 소련군은 유사시 루마니아를 통과하여 체코에 출동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정작 서유럽이 체코를 포기하고 독일에 할양하자 크게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히틀러는 집권 당시부터 소련을 비난했고, 소련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독일이 곧 소련과의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위기감이 소련 지도부를 덮쳤다.
소련 외교부 장관인 막심 리트비노프는 체코위기 당시부터 영국-프랑스와 동맹하여 독일을 포위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영불이 독일에게 양보한 뮌헨 협정으로 이는 물거품이 되었으나, 독일이 뮌헨 협정 이후 폴란드에 계속 압력을 가하자 소련은 다시 영불과의 집단안보체제를 구상하게 되었다. 독일이 소련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폴란드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이 바로 소련으로 쇄도할 것이라는 것이 바로 소련 지도부의 판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트비노프는 폴란드의 안보가 곧 소련의 안보라고 판단했다. 폴란드를 독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소련 혼자서는 버겁고, 영불을 끌어들여 소련-폴란드-영국-프랑스의 집단안보체제를 구성, 독일의 야욕을 저지할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를 강점한 이후에도 야욕을 버리지 않고 폴란드에게 폴란드 회랑을 요구하면서 유럽에는 다시 전운이 고조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동맹국이 사라진 이상,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에 직접적인 병력 지원이 가능한 새로운 동맹국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는 바로 소련이었고, 여기서 소련과 서방국가들은 다시 접촉했다. 소련과 나치 독일은 스페인 내전에서 간접적으로 싸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은 절박한 상황이었다. 1938년과 달리 이번엔 양측 모두 상당히 진지하게 접촉하며 의견을 주고 받았다. 최우선적으로 독일의 팽창 저지와 제압을 목표로 하는 데에는 양측의 의견이 동일했다.
1939년 4월 17일, 막심 리트비노프는 외무장관직에서 해임되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외무장관이 되었다. 몰로토프는 '발트해-지중해까지 모든 나라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그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라도 독일의 공격을 받을 경우 영국, 프랑스, 소련 세 열강이 모두 전쟁에 돌입한다'는 내용의 동맹 관계를 제안하는 내용을 적은 문서를 영국, 프랑스에 전달했다.
그러나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우선 회담 시작 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문서를 전달받은 지 6주가 지나서야 영국에서 답신이 왔으며, 그나마도 동맹 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비 회담을 열자는 데 동의하는 것이었다. 초조해진 몰로토프는 7월 17일, 영-불-소 외교 회담에서 군사 협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이 되어서야 영국, 프랑스 협상단은 비행기가 아니라 여객선 '시티 오브 엑스터(City of Exeter)' 호를 타고 레닌그라드에 입항한데다가, 곧바로 모스크바에 가지 않고, 하루를 관광으로 소비하여, 소련 측에 저 새끼들 놀러왔나? 같은 나쁜 인상을 심어주고 말았다.
8월 12일이 되어 모스크바에서 겨우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회담에 참가한 협상단도 문제였다. 소련 측 협상단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친구,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였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할 필요 없이 바로 군사 협정에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증명하는 문서를 영불 협상단에게 보여주었다.
반면 영불 협상단장의 자격은 소련에 비해 상당히 떨어졌다. 프랑스 협상단장은 프랑스 제1군관구사령관 육군 대장(Army General) 조제프 두망(Joseph Doumenc)이었는데 보로실로프와 마찬가지로 협상 서명권을 지니고 있었기는 하나 당시 프랑스군 내 서열 40위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영국은 한 술 더 떴다. 영국 협상단장 레지널드 드락스 경(Reginald Drax)은 당시 해군 소장이었는데, 일개 함장 출신인 데다 영국 정부에 보고만 할 수 있을 뿐 협상 권한이 없었다. 자국의 거물들을 협상단으로 때려박은 소련에서는 영-불의 진위를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
소련 협상단은 매우 당황하고 불쾌해했으나 계속 협상을 이어나갔다. 곧이어 소련은 소련군이 독일로 진군할 수 있도록 동유럽 국가, 특히 폴란드(당시 영-불과 동맹국)가 길을 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협약을 양국 정부와 맺었는가를 질문했다.
5.2. 집단안보를 거부하는 폴란드 제2공화국
리트비노프가 구상한 집단안보는 위와 같이 영불도 소극적이었지만, 폴란드도 마찬가지 였는데, 폴란드는 독일 못지않게 러시아/소련과 역사적인 여러 악연이 있었으며, 영토할양을 요구하는 독일에 강경한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안보에 참여하라는 소련의 요청도 매우 차갑게 거절했다. 영불이 소련의 제안에 소극적으로 나선 것도 바로 독일과 직접 국경을 맞댄 폴란드가 " 소련이 끼는 집단안보에는 절대로 참가하지 않겠다"고 영불에게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었다.
폴란드와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아주 사이가 좋지 않으며 그 역사도 아주 유구하다.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폴란드는 심심하면 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을 쥐어팼고 러시아가 선공했지만 패배해서 모스크바가 불타고 차르가 끌려가서 폴란드 국왕에게 무릎 꿇은 적도 있다. 그 후로는 반대로 1772년, 1793년, 1795년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영토가 3번이나 강제 분할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가혹한 통치를 받았는데, 폴란드가 3국에게 분할 통치를 받는 동안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비교해서 러시아는 지금 밟아놓지 않으면 또 모스크바가 불탈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야말로 엄청난 탄압을 가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가 국내적으로 혼란한 틈을 타 폴란드에서 먼저 공격해서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1919년-1921년 소련과 전쟁을 치른 경험까지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는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을 차지했는데, 일단 소련이 폴란드를 지원하면 폴란드 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건 당연지사고 심하면 일전에 얻은 동부 영토까지 그대로 떼어먹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폴란드의 주요 외교적 노선은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의 중립 추구였다. 이 상황에서 소련과의 일방적인 동맹은 독일의 어그로를 끌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래서 폴란드는 결국 독소 불가침 조약이 성립될 때까지 소련군의 자국 영내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고 이것은 영-불-소의 회담이 결렬되는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렇게 소련과 역사적인 악연이 있기는 하지만, 당장 폴란드가 독일의 침략을 받을 경우 소련을 제외하면 도와줄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뮌헨 조약이후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압력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 폴란드는 어떻게 든지 안보방침을 재고해야 했다. 이렇게 폴란드는 소련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우방인 프랑스는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폴란드 수뇌부는 독일이 양면전쟁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에 100만의 육군을 거느린 프랑스가 있는 한, 독일은 움직이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프랑스는 폴란드의 생각과는 달리, 1차대전때 엄청난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독일과 충돌을 야기할 수 있는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데 매우 소극적이었으며, 히틀러가 베르사이유 조약 폐기를 선언한 후에도 적극 제지하기는 커녕, 독일의 공세적인 군비확장에 미온적인 대응을 할 뿐이었다. 폴란드가 믿고 있었던 또다른 나라였던 영국은 아래에도 나오지만 상설 육군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독일의 팽창주의적인 도발에 기껏해야 외무성 성명이나 발표하는 정도였다. 폴란드-독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국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독일에 대한 해상봉쇄가 전부였다. 그러니 폴란드는 외교를 통해 안전을 확보하는 것도 실패한 셈. 이런 폴란드의 외교실패는 유럽의 전간사를 다룰 때, 항상 언급되는 내용이다.
폴란드는 독립 영웅 피우수트스키의 지도 아래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는데, 그는 과거의 사회주의자였으나, 후에 우파로 전향하였고 독립 후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그는 과거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모델로 삼아 발트해 (발트3국)로부터 흑해(우크라이나)에 이르는 거대한 연방국가를 구성하고 폴란드가 그 맹주가 되어 서로는 독일, 동으로는 소련(러시아)와 맞서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미엥지모제 (Międzymorze) 라고 부르는 이 정책은 패권주의적이여서 폴란드는 항상 대외적으로 강경책을 폈고, 영토확장에 적극적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력의 차이만 있었을 뿐, 당시 독일이나 소련 못지않은 팽창주의나 대외 확장주의를 시전하고 있었다. 폴란드는 루마니아를 제외하면 독립 후에 싸움을 걸지 않은 주변나라 (독일/소련 뿐만 아니라 체코, 리투아니아)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여기에 소수민족 탄압도 심했는데 폴란드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으로 획득한 우크라이나 지방의 정교회는 카톨릭이 주류인 폴란드 정부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으며, 유대인들도 상당히 차별을 받고 있었다.
폴란드는 독립하자마자 막장화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침공해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일으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절반을 먹기도 했고 ,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군대를 동원해 강탈하기도 했으며, 뮌헨 협정 때는 3국분할로 거의 멸망했다 구사일생으로 부활한 국가 주제에 히틀러에 맞장구쳐 체코 분할에도 참가했다. 특히 당시 폴란드 사회는 민주국가가 아니라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사후 그 부하들, 일명 피우수트스키의 대령단(colonels)이란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던 군사 독재, 군국주의 사회로서, 자국의 국력도 생각하지 않고 동서 양쪽의 강적들에게 계속 어그로를 끌고 있었다. 즉, 폴란드 지도부는 소련은 소-파 전쟁 때 한번 승리한 바 있으니 자신있고, 독일군은 재군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전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도와주겠다고 나선 소련의 손을 거절한 이유에는 민족적 악연도 있지만, 저렇게 자국군을 과대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군과 소련군은 국력의 한계로 제대로 기계화되지 못한 폴란드군을 넘어서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할 시 각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수치에 관해 소련 협상단은 120개 사단, 중포 5천여 문, 전차 9천여 대, 항공기 5천여 대를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는 110개 사단, 전차 4천여 대를 파병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영국 협상단은 16개 사단이라고 밝혀 보로실로프가 "통역 잘못한 것 아님?"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황당한 소련이 세부 사항을 캐묻자 영국은 사실은 단 4개 사단만이 전투 가능하다고 실토했다. 회담 종료 후 스탈린이 영국 대사에게 구체적으로 더 묻자, 사실 4개 사단 중에서도 2개만이 제대로 된 사단이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좀 더 뒤에야 완편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답변이 돌아오자 소련은 멘탈붕괴한 나머지 할 말을 잃었고, 영국이 의도적으로 소련과 독일의 전쟁을 부추기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5.3. 소련의 입장
소련의 의심에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 직후 서방 세계는 직접 군대를 파병하여 러시아 내전에 개입해 사회주의 정권을 붕괴시키려다가 실패한 전례가 있었다. 즉, 소련으로선 서방 세계가 나치 독일, 일본 제국 같은 파시즘 국가와 소련의 전쟁을 유발하여 양측을 모두 공멸시키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에 충분했다. 특히 3월 10일에 있었던 공산당 대회 선언문에서 스탈린은 다가올 전쟁을 제국주의자들끼리의 전쟁이라고 부른 점에서 이런 의심을 느낄 수 있다.
당장 이 수치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첫 대륙 원정군 규모인 4개 사단에도 못 미치는 소규모 병력만 즉시 투입 가능한 데 반해 전쟁은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다고 보였으므로, 소련 입장에선 영국인들이 제대로 싸울 의지 자체가 없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이미 1938년 후반부터 방위 산업 생산 규모를 대폭 확장하기 시작한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인들은 실제로 영국군이 훨씬 많은 병력을 동원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아직 지상군보다는 공군, 그리고 공군보다는 동맹국들이 싸우는 데 필요한 금융 자본의 확보에 더 열심인 상황이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영국도 독일과의 전쟁이 다시 벌어지면 참호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폴란드)서(프랑스)로 각각 100만의 대군을 면전에 둔 독일군은 적어도 한동안 지체될 것이지만, 영국 육군의 개입 없이도 독일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 1차 대전 때도 영국 육군은 초반 2년을 매우 소극적으로 임했고, 이는 대륙의 전쟁에 개입하는 영국의 전통이기는 하지만, 당장 미치광이 히틀러와 독일군의 총칼에 맞설 수 있는 소련이 "돈 댈 테니까 내가 올 때까지 좀만 참으셈."이라는 태도를 좋게 봤을 리는 만무하다.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
요약하면 영국이 보인 행동은 지금까지 대륙 전쟁에 개입할 때의 전통을 따랐지만, 소련의 입장에서는 설득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확실한 전쟁 준비보다는 금융 자본의 확보에 주력하고 있는 영국 측의 태도가 당장 나치와 총칼을 맞댈 수도 있는 소련에게 "이 새끼들 같이 싸울 생각은 안 하고 돈벌이에만 급급해?"라는 커다란 의심을 불러 일으킨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영국의 금융 자본은 1차 대전 때도 프랑스에 전쟁 자금으로 각국에 엄청난 차관을 빌려주었고, 패전국인 독일에 전쟁 배상금을 탕감해주면서도, 정작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에는 그런 혜택 없이 받을 것을 전부 받아가서 커다란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반영 감정이 고조된 바 있었다.근데 빌려준 걸 안 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이기는 하다 영국이 육전에 대한 대비보다는 전쟁에 필요한 자본을 확충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던 것은 대륙 국가들이 당분간은 어떻게든 독일을 막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이는 엄청난 오판이었다. 소련 입장에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사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문제로 전쟁이 시작되면, 군병력 동원이 오래 걸리는 자신들을 대신해서 소련과 폴란드가 힘을 합쳐 적어도 6개월에서 1년쯤 독일군을 동부에 붙들어 주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소련은 그런 장기 지연전의 결과로 소련군만 피를 흘리고 마는 게 아닌가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 독일과 소련이 다같이 기진맥진해 있을 때 영불이 기습 공격으로 두 나라를 동시에 무너뜨리는 것조차 가능해 보였다. 매사에 의심 많은 스탈린으로서는 그런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물론 러시아 제국 시절 때부터 영국과 수십 년 동안 적대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소련의 그런 의심은 충분히 타당했다. 적어도 스탈린에게는 타당해 보였다.
게다가 상술했듯 1939년 다자 안보 체제 구축 회담 당시 영국-프랑스의 대표단은 소련 측 대표단에 비해 격이 많이 낮은 인물로 구성되어 있었고, 영국 협상단은 국가 원수를 대신해 협상에 서명할 권한조차 없었다. 결과적으로 독일과의 전쟁 발발 시 유럽 본토에 투입 가능한 병력을 4개 사단이라고 실토해 버렸기에 소련 입장에선 더더욱 믿음이 가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5.4. 영국의 입장
그러나 반대로 보면 단순히 스탈린이 계산하기에,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 게 더 도움이 되어서 혹은 단순한 오판, 확증편향적 오류에 근거한 판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영국이 육전을 피하려고 한 것은 이기적이긴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이기적이지 않은 국가는 없다. 프랑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영국도 1차 대전때 엄청난 인명피해를 냈으며,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나는 육상전에는 될 수 있으면 참전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당연하다. 이는 1차 대전 때 젊은이의 1/3이 전사한 프랑스가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국방예산의 절반 가까이를 쏟아부어 알자스-로렌 국경에 마지노 요새를 건설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나치당이나 나폴레옹과 같이 갑자기 팽창하는 강대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동맹을 맺은 것이지 애호와 우정의 감정으로 친교를 맺은 것이 아니다. 차관을 빌려 주면 다른 꿍꿍이가 없는 이상은 이자까지 쳐서 갚게 만든다. 물론 프랑스가 가장 많이 피를 흘려서 영국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프랑스가 영국을 위해 피를 흘린 것은 아니다. 독일이 승천하기 이전에는 서로 물어뜯던 사이였으며 그런 차관의 가장 피해자인 프랑스조차도 영국과 동맹을 맺은 것은 필요에 따라서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러한 이유로 영국이 싫어서 동맹을 못 맺었더라면 프랑스부터가 영국과 동맹을 맺지 않았다. 독일 차관의 경우 미국이 개입하기도 했다는 점을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소련 수뇌부도 국제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어느 나라가 이기적이지 않은 아름다운 마음을 품고 정성을 다하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랑 편을 먹어야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가느냐다. 그리고 구태여 영국을 빼더라도 프랑스군이 있었으며, 정말로 영국이 섬나라의 이기적인 습관 때문에 그렇게 일이 돌아갔었던 것이라면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기 때부터 영국에게 학을 떼고 협력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던 이유는 프랑스가 무리하게 공세로 나서다가 개박살난 것도 있으며 영국 입장에서는 삼국 협상을 맺긴 하였지만 협상 내용상 반드시 영국이 참전했어야 할 의무는 없었는데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했기 때문에 개전한 것으로, 당시 영국 입장에서는 당장 징병제로 전환한들 보급할 장비가 모자라 괜히 인명과 자원을 낭비하게 될 뿐이었다. 그리고 차관을 모은다고 하지만 금융 자산은 전쟁에 매우 중요하며 지리학적인 특성에 따라서 다른 전략을 취하는 것은 상식 중에 상식이다. 억울하겠지만 그게 국제 사회이며 독일을 못 막았을 때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피를 보는 것은 인접국인 프랑스지 영국이 아니다. 또한 영국이 피를 안 흘렸냐고 한다면 영국은 결국 병력을 모아서 대륙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나폴레옹 시대든 세계 대전이든 말이다. 애초에 영국은 금융 자산을 지키기 위해 폴란드의 차관 요청도 거절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소련이 영국과 프랑스와 접촉한 이유는 극단적인 반공 국가인 나치 독일을 견제해야 하는데 자신만 싸운다면 두들겨 맞고 엄청난 피를 흘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즉 소련도 영국과 프랑스, 폴란드가 대신 싸워 주길 원하는 것이지 영국, 프랑스, 폴란드가 소련을 믿고 따라준다면 앞서 나서서 파시스트를 분쇄하고 세계 평화를 되찾아보겠다가 아니다. "저 놈들이 내가 싸우는 동안 뒤통수를 쳐서 죄다 가로챌 속셈이다."라는 식의 의심은 어느 동맹국 사이에서도 일상적으로 있어 왔던 상황이다.
특히 서방 군대가 러시아 내전에 개입했기 때문에 소련이 위협을 느꼈다고 하는데 당시 소련은 최근까지도 세계 혁명을 운운하던 공산주의 국가였다. 그 와중에 동맹국인 러시아 공화국의 수뇌부를 갈아버린 소련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보내지 않는 게 말이 안된다. 오히려 안 보냈으면 신의없는 서방 동맹을 운운할 만한 일 아닌가. 동시에 폴란드의 불안은 대국적이지 못한 것처럼 묘사하는데 그 폴란드는 물론 소련에게 선빵을 치기도 했지만 러시아에게 수백 년 간 쥐어짜인 기억 또한 가지고 있는 국가였다.
둘째로 몇 개 사단이나 당장 동원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영국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게 현실이며 전통적인 해상 국가였던 영국이 소련이 보기에 비교적 흡족할 만큼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쪽이 더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애초에 영국은 1936년부터 재무장을 시작해서 재무장 시작일로부터 3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 비대한 해군의 유지비에 막대한 재정이 소모되고 섬나라라는 특성상 육군이 예산 배정에 우선순위가 되는 것이 더 이상하다. 또한 당시는 1939년으로 아직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시기로서 영국과 프랑스가 경제적으로 편했던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결국 그게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소련에게 들이밀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영국-프랑스가 좀더 성의의 제스처를 보였더라면, 나치와 대결할까 봐 절박했던 소련이 독일 측에 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래저래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에 성의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폴란드를 더 믿고 있었으며, 동맹 체결에도 건성이었다. 이는 러시아 내전에서 영국-프랑스와 악연이 있던 소련의 의심과 겹쳐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 대해 추가적인 자세한 내용은 "필사적인 포옹 : 독·소 불가침 조약 (1939·08·23)과 소련 측의 동기분석"을 중심으로 수정주의적 해석으로는 Geoffrey Roberts의 논문을, 전통주의적 해석은 The Deadly Embrace: Hitler, Stalin and the Nazi-Soviet Pact라는 책을 보기를 권한다.
6. 소련의 정책 변화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의 협상 태도를 보고는 이들이 소련과 군사 동맹을 맺을 생각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렇게 되면 이들이 독일과 소련을 싸우게 하고 뒤로 빠지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 의심은 상당히 그럴듯 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인들 중에도 정말 그런 이이제이를 바란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영국과 프랑스의 분위기는 그곳에 산재한 소련 간첩망에 의해 스탈린에게 보고되었고, 의심 많은 스탈린은 결국 영불을 불신하게 되었다.
이미 영프와의 협상을 하기 전, 1939년 5월 영/불/소와 집단 안보 체제를 주장하던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장관을 해임하고 심복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외무장관에 앉혔다. 그러나 리트비노프의 해임은 독일에 우호적인 제스처가 아니었고, 오히려 어느 정도 자기 생각이 있는 리트비노프 대신 예스맨인 몰로토프를 앉혀 자기 뜻대로 영불과의 협상을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5월 이후에도 소련은 독일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도 연합국과의 회담은 진전이 없었다. 결국 1939년 8월 20일부로 영-불과의 회담은 허무하게 종료되었다.
7. 독일의 접근
이때 스탈린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다름 아닌 독일이었다.
독일 또한 지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선을 마구 넓혀서 패배한 이후 양면전쟁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며 아울러 소련과 서방 세계가 접촉하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실제 참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침략 전쟁에 소련이 개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만약에 대비하며 동부에서의 세력 균형을 위해 소련을 묶어둘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계획의 스타트를 끊게 될 폴란드 침공에 소련이 개입하면 초장부터 만사를 그르칠 수 있으므로 히틀러는 소련을 어떻게 묶어둘 것인지 고심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영불이 폴란드를 구하러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고, 폴란드군은 별 문제 없겠지만 그 뒤에 있는 소련의 개입은 우려하고 있었다.
8월 2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이런 걱정을 하는 히틀러에게 스탈린과 협상하도록 권했고, 히틀러는 리벤트로프의 제안을 받아들여 소련에게 '발트해에서 흑해까지의 지역의 결산'을 제안했다.
소련으로서는 구미가 매우 당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서방놈들과 함께 자기들 도움은 죽어도 싫다는 폴란드를 돕느니, 세력권을 나눠서 서로 맛있게 잘 먹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독일의 제안이 훨씬 당근이었다. 8월 17일 소련은 독일과의 회담에 동의했고, 8월 19일 양국은 독소 신용 협정(German-Soviet Credit Agreement)를 체결하였다. 경제 협정 체결 후 며칠 뒤인 8월 20일,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스탈린 귀하
1939년 8월 20일
1. 본인은 독일과 소련의 관계 개선을 위한 디딤돌인 새로운 독소 무역 협정의 서명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2.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의 체결은 장기적인 독일 정책임을 의미합니다.
3. 귀측의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전달한 불가침조약을 수락하지만 이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점들을 가장 신속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4. 독일과 폴란드 간의 갈등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습니다. 폴란드의 대국에 대한 무례한 행위는 언제라도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5. 양국이 함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의도가 있다면 빨리 서둘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귀하가 나의 외무장관을 8월 22일(화), 혹은 늦어도 8월 23일(수)에 맞이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귀하의 즉각적인 회신을 요망합니다.
아돌프 히틀러
스탈린은 이 전보를 받고 매우 기뻐하며 다음날 답신을 보냈다.
히틀러 총통 귀하
1939년 8월 21일
귀하의 서한에 감사합니다. 나는 독일과 소련간의 불가침 협정을 계기로 양국 간의 정치적 관계가 개선되었으면 합니다. 양국의 국민들은 평화로운 관계가 필요합니다. 독일 정부가 불가침 조약에 합의키로 한 사실은 정치적 갈등의 제거와 양국 간의 평화와 협력을 구축할 계기가 될 것입니다. 소련 정부는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의 8월 23일 모스크바 방문에 동의하는 것을 귀하께 알립니다.
이오시프 스탈린
히틀러는 전보를 보낸 후 답장을 기다리며 잠도 못 이룰 정도로 긴장했다고 하며 스탈린으로부터 긍정적인 톤의 답장을 받자 미친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8. 조약 체결
이어 스탈린은 답신을 보낸 8월 21일 외무라인에 영불과의 협상 모색을 중단시키고 독일과의 협상 준비를 하도록 한다.
8월 23일 히틀러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리벤트로프를 위시한 독일 외교단이 소련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당시 모스크바 공항에는 하켄크로이츠 깃발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리벤트로프는 허겁지겁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몰로토프의 영접을 받으며 공항에서 점심을 먹은 후 바로 크렘린으로 갔다. 크렘린에서는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한 스탈린이 직접 외교단을 맞이했다. 사실 의전에서 일개 외무장관을 최고권력자가 맞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좀 더 환영 제스처를 보였다면 바지사장이었던 소련 국가 원수 미하일 칼리닌이 영접했겠지만, 당시 전쟁이 임박했음은 유럽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최고 권력자였던 스탈린이 직접 나옴으로써 환대의 의사를 표시했다.
원래는 양국의 외무장관인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협상을 해야했으나, 실제로는 스탈린이 여기에 동석해서 사실상 스탈린이 리벤트로프와 교섭하게 되었다. 협상은 리벤트로프가 도착한 8월 23일 오후부터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으나, 의외로 양 독재국가는 아귀가 잘맞아서 여러 현안에 대해 쉽게 합의했다. 스탈린과 리벤트로프는 협상이 의외로 술술 풀리자 점점 의기가 투합하여 나중에는 서로 극단적인 농담까지 주고받았을 정도였다. 실제로 리벤트로프는 스탈린에게 1936년의 독-이-일의 3국 협정은 겉으로는 소련을 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영-불-미가 주도하는 서방질서를 흔들기 위한 것이라고 협상 시간 내내 계속 주지시켰으며, 이는 영불에게 의심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던 스탈린의 입을 귀까지 찢어지게 만들만큼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
영불과의 협상이 질질 끌어서 1년이 지나도록 진척이 없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소련-나치 독일은 단 하루만에 유럽의 운명을 결정할 모든 현안에 대해 합의하고 다음날인 24일 모든 항목에 대한 합의문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아래 그림과 같이 스탈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스탈린은 조약 체결후 환영 만찬에서 리벤트로프에게 "히틀러 총통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이 협약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맹세했고, 리벤트로프도 이 조약에 대해 끝까지 충실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미래에 대해 완전히 낙관하진 않았다. 그는 리벤트로프에게 "우리는 서로 욕을 잘도 해댔습니다. 그렇지 않았나요?"라고 발언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소련과 독일 사이의 해묵은 원한이 하루아침에 사라질리도 없고, 이후 재발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이 조약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과 소련은 공동작전으로 폴란드를 분할했으며, 이후 독일의 묵인 아래 소련의 압력을 받은 루마니아는 베사라비아를 소련에 할양했다. 발트 3국은 소련의 협박에 모조리 소련에게 넘어갔는데, 이 때 독일은 약속받은 리투아니아를 포기하는 대신 폴란드에서 합의된 것 이상의 영토를 차지했다.
이 조약에서 합의된 분할 대상 중 핀란드는 통째로 소련에 넘어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겨울전쟁에서 침공해 온 소련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선전하였다. 결국에는 국력의 격차를 넘지 못하고 패배해서 영토의 11% 정도(산업능력의 30%)를 소련에게 넘겨주게 됐지만, 이웃하는 발트 3국과는 달리 소련에 흡수되는 운명은 면했다.
물자 지원도 이전에는 소련에서 일방적으로 퍼준 것으로 취급했지만 현재 연구로는 소련에서 독일로 간 것 만큼 독일에서 난방용 석탄(연간 300만톤), 최신 기계류(엔지니어 파견 포함), 발전설비, 방산 기술(비스마르크급 전함 설계도 등)이 넘어가면서 일방적인 흑자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일방적인 흑자가 아니었다고 해도 독일이 이득을 본 것은 사실이다. 독일의 대 소련 수입액이 3억 1800만 마르크인데 반해, 대 소련 수출액은 5억 3600만 마르크였고, 독일이 소련에게 보내주는 공급량은 소련의 공급량과 비교하면 57 ~ 67%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 자세한 내막에 대해 알아보자면, 소련은 독일에게 막대한 원자재와 전략 자원들을 보내주었고 소련의 철도망과 수로, 항구를 이용하고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 연합군의 경제 봉쇄를 무력화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독일은 보내주기로 약속한 각종 기계와 설비, 기술을 매우 불성실하게 보내주었다. 그리고 1941년에 이뤄진 독일의 물자 공급은 거의 사보타주 수준이었고,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하기 몇 시간 전까지 소련이 보내주는 물자를 받아챙기다가 소련을 침공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소련의 개입을 막는 것이 가능해져 동부에 또 하나의 전선이 탄생할 가능성을 막은 이후 불과 8일 뒤에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그 첫 번째로 폴란드를 침공하여 소련과 나눠먹은 이후 폴란드 침공 종료 8개월 후에는 프랑스를 항복시켰고 최전성기를 달리게 되었다. 소련도 동유럽에서 확보한 지역을 발판으로 세력을 크게 키웠으며, 독일과 함께 세계구도 차원에서의 세력분할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야욕은 마침내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소련에게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소련을 기습 공격한다. 독소전쟁의 시작이었다.
독소불가침조약의 댓가로 스탈린이 독일에 넘겨준 것은 원자재와 전략물자들 만이 아니었다 바로 (소련측이 불순하다고 생각한) 독일 공산당원 명부도 넘어갔고 나치독일 하에서 은신하고 있던 여러명의 독일공산당원들이 투옥-처형되었다. 물론 이들은 트로츠키주의자로 간주된 자들로서, 스탈린이 별로 쓸모 없다고 생각한 자들이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자국으로 망명한 독일인 중에서도 스탈린체제에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된 자들은 독일로 바로 송환했고, 이들은 당연히 송환되자마자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
사실 비밀조항은 독일이 항복하고 나서 독일 외무부의 문서가 서방연합국측에 압수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알려졌다. 소련측은 붕괴될 때까지 이 조항의 존재를 부인했고, 러시아 연방이 소련의 모든 과거를 부정하면서 이 조항을 사실상 인정했다. 다만 러시아는 이에 대한 책임은 모두 소련측에 넘기고 있고, 과거에 대한 사과는 거부하고 있다.
10. 관련 어록
歐洲天地 複雜怪奇(유럽 천지가 복잡하고 괴기하다).
- 히라누마 기이치로
"독-이-일 반공 협정은 사실 소련이 아니라 영미를 겨냥한 것입니다. 스탈린 수상께서도 이 반공 협정에 가입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농담, 협정 후 만찬장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오늘부로 나도 반공주의자요."
- 스탈린의 농담,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회상록에서.
우리는 서로 욕을 잘도 해댔습니다. 그렇지 않았나요?
- 스탈린, 리벤트로프를 맞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