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전은 공자를 중심으로 4 성인과 18명의 현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8 현인 중에는 고려와 조선조의 현인도 포함,
* 대성전 안은 이렇게 위패를 모셔 놓은 것 외에는 별다른 시설이 없다.
* 대성전과는 달리 명륜당은 학문을 가르치는 강의실과 같은 곳이다.
* 옛 서원이나 향교 등의 문은 다 이렇게 낮다. 겸손히 허리를 숙이고 드나들라는 가르침도 있다고 한다.
가, 양근(楊根)향교,
체육공원을 가는 길에 양근 향교라는 안내판이 보여 손주 손을 잡고 향교를 둘러보기로 했다.
서원이나 서당과는 달리 향교는 지금으로 치면 국립 교육 기관에 해당하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교육
기관이다. 조선 건국 이후 성리학을 국가 통치의 기본 이념으로 삼아 양민 이상 국민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던 시설이 향교이고, 지방관이 부임할 때 향교의 교관(교수 종6품, 훈도 종9품)을 대동
하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로 들어오며 관학이라 할 수 있는 향교보다는 사학 기관이랄 수 있는 서원이나 서당이 오히려 교육기관으로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지만, 지금도 웬만한 전통적 기반이 있는 곳에는 향교가 남아있어 옛 교육 기관의 위상을 후대에 전하고 있기도 하다.
옛날에는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오르지 않으면 士, 農, 工, 商의 계층 중 士(선비)에 해당하는 이들이
일할 직장이 아예 없었다. 관직이라 해도 일자리가 많은 것도 아니라 관직에 오른다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라 할 만큼 문이 좁았다. 과거를 보려면 체계적인 교육도 받아야 하는데, 그 문도 과히 넓지
않았다. 향교의 정원은 작은 행정단위에는 30명 정도, 크다 해도 90명이 넘지 않았고, 전국 향교의
정원이 1만 5,330명으로 제한되어 있어 지금으로 치면 종합대학 한 곳의 정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조선 팔도 모두에서 정원 만 오천 명뿐인 향교에 입학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향교의 정점에는 성균관이 있다. 성리학에서 으뜸으로 섬기는 이는 공자이고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곳이 공자와 성현들의 위패를 놓은 대성각이라는 배향(配享) 시설이다.
성균관이나 향교는 교육 시설이긴 하지만 공자를 위시한 4성(안자, 증자, 자사, 맹자) 외에 18현을
모셔 놓은 배향시설과 학문을 가르치는 강학(講學) 시설, 교육생들의 숙식과 뒷바라지를 위한 기숙사와 취사 시설 등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향교가 평지에 자리한 경우에는 전묘후학으로 배치하고 구릉지인 경우에는 전학후묘로 시설을 배치하는 게 원칙이라는데, 양근 향교는 구릉지라 대성각이 뒤쪽에 자리하고 강학 시설인 명륜당이 앞쪽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구조를 띠고 있었다.
-전묘후학(前廟後學)이란 앞쪽에는 배향시설, 뒤쪽에는 강학(講學) 시설을 배치하는 경우이고
전학후묘의 경우는 이와는 반대인 경우이다.
양근 향교를 둘러보며 옛 선인들이 참 어려운 삶을 살아오셨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바람막이 전실(前室)도 없이 외풍에 접한 작은 방에서 지내며 공부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리라! 그나마도 선택된 소수 인재가 누리는 혜택이었으니, 일반 백성의 삶이 어떠했을까 ?
향교를 돌아보는 내내 이 땅에 살아 온 민초들의 고된 삶이 아프게 다가왔지만 어린 손주는 마냥 즐겁다. "할아버지 여기서 더 놀자!"
* 우리나라의 담장은 이렇게 낮다.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 학인들이 머물던 기숙사와 같은 곳이다. 성균관은 몰라도 향교는 아마도 여럿이 기숙했을 것이다. 추위에 떨었을 듯싶다.
* 온돌구조는 굴뚝이 아궁이 반대쪽에 있다.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 건축물이 왜소함은 온돌구조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나, 창기야 정말 너무너무 보고 싶구나!
옥천 체육공원 미끄럼틀 바로 옆에 작은 흉상이 하나 서 있다.
체육공원에 갈 때마다 마주치는 곳이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곤 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곳을 찾는 사람 중 흉상에 관심을 두고 살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손주가 미끄럼을 타는 재미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별생각 없이 흉상 후면에
새겨있는 글귀를 보게 되었다.
보고 싶은 아들 창기야!
그 누가 너를 그 먼 곳으로 데리고 갔길래
그 무엇이 우리를 다시는 만날 수도
볼 수도 없게 갈라놓았니
아주 짧고 짧은 순간에 너와 생이별을 하고
수년이 흐른 지금도 너를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도록 만들었는지
엄마는 오늘도 아들 생각에 가슴이 메여
찢겨 지는구나
창기야 정말 너무너무 보고 싶구나
아들아 우리 다시 꼭 만날 날을 약속하고
하늘나라에서 편히 지내렴,
아들을 너무너무 그리워하는 엄마가... (비석 내용 전문)
비석에 새긴 비문을 읽으며 가슴이 메어옴을 느꼈다. 며칠 만 안 봐도 보고 싶어지는 피붙이를
한순간에 영영 잃어버리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보낸 엄마의 절규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 절망하고 피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고 김창기 준위(원사에서 추서)는 이곳 출신으로 천안함 폭침 시 전사하신 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가 생전에 다녔다는 학교는 서울을 오가는 길에 우뚝 서 있다. 오가다 빤히 쳐다보이는 학교
를 보며 얼마나 아들 생각이 간절하셨을까? 웃고 떠들며, 흉상 제단 디딤돌을 놀이터 삼아 뛰놀아도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던 자신의 무심함이 정말 죄스러웠다.
* 옥천면 체육공원에 위치한 고 이창기 준위의 추모비,
* 자식을 그리는 엄마의 애틋한 마음이 구구절절 가슴을 아리게 한다.
* 아이들의 놀이 시설 바로 옆이라 님의 혼령께서는 아마도 외롭지는 않으실 것이다.
양평군 옥천면, 주민들을 위한 체육시설을 빠짐없이 잘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 더해,
옛 향기 가득한 향교를 품고 있기도 하고, 나라를 위해 장렬히 목숨을 바친 용사의 기념비도 간직
하고 있는 열사의 고장이기도 하니, 이곳에서의 삶이 초라하지는 않겠다고 하는 자위를 해 보았다.
기념 흉상 앞에 놓인 돌 화병에 꽂힌 꽃이 며칠을 봐도 늘 같은 조화라는 사실이 마음 쓰였다.
면민 체육대회라도 여는지 지척에 자리한 체육시설에서는 함성이 요란했고, 음식 쟁반을 든 여자분
들이 주변을 분주히 오가기도 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문득, -자주는 몰라도 국군의 날이라도 고운 생화를 바쳐야겠다-
나이 탓인가? 세상을 보는 눈이 착해지는 것 같다.
손주 녀석이 좀 크면 놀이터 삼아 뛰놀던 기념비가 지닌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 줘야 할 텐데,
에그! 세월이 기다려나 줄는지 모르겠다.
다, 손주의 재롱을 보며 눈높이 맞추기에 세월을 잊는다.
* 그네 타기를 좋아해 제 형이 다니는 인근 옥천초등학교 운동장을 자주 찾았다.
* 양평읍에는 이런 키즈 카페가 서너 곳이 있다. 덤블링을 하며 좋아하는 녀석을 보면 나이를 잊는다.
* 녀석 할아버지 모자를 보기만 하면 벗겨서 제가 쓰고는 이쁜 표정을 짓는다.
* 뭘 먹으려 하지 않아 데리고 다니기에 신경이 쓰인다. 양평 쉬자 파크 구내 빵집에서,
* 인근 한국 콘도 가는 길에 있는 패러글라이더 착륙장에서 신기 한 듯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
* 장난이 심해 양근향교에서도 잠시도 가만있지를 않았다. 제 엄마가 보면 아마도 난리가 날 것이다.
* 이쁘게 하라니까, 저도 어색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