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의 '버닝'과 폴란스키의 '물속의 칼'
'버닝'이란 영화를 보고나서 겨우 이틀이 지났는데 내 안은 앉으나 서나 그 영화 생각으로 꽉 차있다. 영화가 자꾸 말을 건다. 은유된 이미지가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풍경은 언제나 꽉 차지 않고 헐렁했으며 하늘이 거의 차지하고 여명이거나 노을의 장면이 태반이다. 정오의 해 아래서 눈을 번쩍이며 잰 걸음으로 다녀도 시원치 않을 젊은 주인공들인데 느려터지고 허무한데다 일상을 의미롭게 살아가기 조차 어려워 하는 사람들의 내적 풍경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종수와 벤, 해미 세 주인공 모두의 가슴이 탄다. 그 버닝의 뿌리는 사랑이며 추상적 사랑을 구체적인 자위행위나 섹스로 드러내고 있다. 자기 속을 태우는 사람 종수와 남의 속을 태우는 벤으로 대별된다. 욕구를 품고 사는 종수는 수시로 자위를 하고 벤은 수시로 여성을 갈아치운다.
관람포인트는 상징을 탐색하며 보기이다. 나를 자극한 첫 단어가 '판토마임 이다.
판토마임.....실재하지 않는 상황을 모션으로 전달하는 장르를 연습하는 여주인공 해미, 지금 그녀의 삶이 가상적 누리기임을 보여준다. 그녀가 한 말 중에 귤 껍질을 까서 하나 집어먹는 시늉을 하면 실제로 귤맛이 난다고 한다. 은유가 읽히면서 흥미로와졌다.
마른 우물....우물이란 사람들이 딛고 선 땅보다 더 밑으로 푹꺼진 자리를 의미한다. 이 것은 성인이 그려내는 심리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상징이다. 존재가 낮은 입지를 말하며 그 자리에 갇힌 것을 상징한다. 해미가 고향에서 같이 자란 종수를 만나서 그 우물에 빠졌을 때 종수가 구해주었다고 하나, 종수는 그런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고향에 내려가 물어봐도 그러한 사건스토리를 확인하지 못한다. 종수를 바라보면서 수렁에서 빠져나왔다는 말이다. 심리적 상황을 '마른 우물'
에 빚대었다. 우물에는 물이 있어야 하는데 물 조차 없는 환경은 살기가 힘들었다는 증거가 된다. 종수는 그냥 존재했을 뿐이나 그를 바라보며 희망했을 수 있으며 지금은 그 우물이 메워졌다고 하니 현실이 아니라 과거이다.
비닐 하우스...농가에 흩어져 있는 비닐 하우스는 불질러도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본채가 아니라 일터의 일부이기에 별 것 아닌 것의 상징이다. 그 비닐하우스가 분노를 표출하는 대상이 된다면 기막힌 일이다. 그렇지만 대수롭지 않게 표현하는 것에 분노를 느끼는 종수이다. 벤이 비닐하우스에 불지르는 것이 취미라고 말하지만, 세상에서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인간에게 자신의 분노를 방출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벤, 여성을 욕구의 배설로 생각하고 타인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잊어버린다. 풍요롭고 세련되게 꾸며놓고 살면서 노는게 일이고 재미있으면 무엇이든 한다는 사람이다. 마약을 즐기며 해외여행 다녀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파티주선자가 된다. 그러니까 잘 꾸며놓은 집에 약간의 안주거리를 마련하면 초대받은 사람들은 황홀할 정도로 흥미가 동한다. 그 곳에서 벤은 속이 빈 여자를 낚는다. 허접한 인생으로 느껴지는 여자를 비닐하우스에 빚대고 걸려든 인생에 자기 욕구를 방출하는 행위를 비닐하우스에 불지른다고 표현한다. 영화 어디에도 죽였다는 표현은 없지만 종수가 사랑하는 여자를 보고 어느 날 질투가 난다고 하더니 결국 자기 여자로 취하고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말한다.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라....죽였거나 죽었거나가 된다. 벤은 종수 가슴에 불을 지르고 종수는 그를 죽여 포르세 자동차 안에 집어넣고 자신의 옷을 다 벗어서 던져넣은 다음 불을 질러버린다. 그것이 종수의 진실 이미지다. 실제인지 이미지 차용인지 또한 알 길이 없다.
아마도 "너 죽이고싶어. 확 불질러 버릴거야. 너와 네 차까지...." ' 라고 말하는 대신 던진 이미지,
바로 종수의 진실, 발거벗은 뒷모습일 것이다.
화장실 안의 서랍에 든 여성 악세사리...화장실은 배설공간이고 그곳에서도 서랍 안은 더 깊이 숨겨진 곳의 이미지다. 벤의 섹스는 배설이며 여성은 액세사리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한번도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내, 이 남자의 여성에 대한 진실은 숨겨져 있지만 일상은 노출되어있다. 세련남이 되어 재미를 찾아다니고 나이트에도 가고, 뭍사람을 모아 토크 파티도 열고, 생산하는 일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노는게 일인 남자의 매너는 참으로 예의 바르고 깍듯하다.
트럭과 포르세 ...신분의 차이
칼 ...축산업을 하는 종수네 아버지의 비밀 방에는 비밀스러운 물건이 있다. 여러 개의 칼이 꽂혀있다. 인간의 내적 공간에 감추인 공격성의 상징이다. 칼을 갈고 산 종수 아버지도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분출했다가 징역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타협할 줄 모르고 직진만 아는 우직스런 축산업자는 칼을 갈고 살다가 실형을 받은 죄수가 되었다.
옷입기 ...인격체의 특성을 암시한다. 벤은 겉 꾸미기에 충실하고 종수는 내부를 잘 관리하기에
충실하며 헤미는 과거에 비해 현재 투명하다. 자주 옷을 벗는다고 종수는 해미를 못마땅하게 생
각하지만 그게 해미의 성격상 개성이다.
상의 벗기...해미는 아프리카에 다녀와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를 설명하며 노을이 지는 풍경 앞에서 상의를 벗고 배워온 그 나라 전통춤을 추어보인다. 노을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속내를 보여준다. 상의만 벗었으니 절반의 진실인 셈이다. 새 매장을 홍보하는 춤꾼으로 활동을 하지만 그 일의 의미는 일시적 돈벌이를 위한 것이며 하는 일에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여행을 가기 위해 돈을 모을 뿐이라고 투명하게 드러낸다. 게다가 몸쓰기를 즐긴다는 해미의 고백도 들을 수 있다. 기억 하부는 가리고 상부는 벗고 춤을 춘다는게 지금은 투명하게 보여주고 산다는 의미로 보인다.
발가벗기...종수는 해미가 사라진 것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벤을 살핀다. 탐정처럼 뒤를 쫓기도 한다. 벤의 집에서 해미의 손목시계를 보았고 숨어서 지낸다는 고양이를 보았다. 연상케 하는 장면으로는 해미의 방을 깨끗이 치워놓고 낯가린다는 고양이를 자기집으로 데려와 보고 있다. 그녀를 취했다는 증거이며 벤의 정갈한 손길이 환경정리에서 나타난다. 벤은 보이는 부분을 정리해두는 데 철저하다. 해미를 두고 은근히 경쟁을 하던 두 남자인데 벤은 보란듯이 종수를 자기집으로 불러 승자의 얼굴로 종수를 약올린다.
'너 그래봐야 소용없어, 내가 이미 해미 몸에 불 질렀어. 그 애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결국 종수는 꼭지가 돌고 만다. 전라의 몸은 온전한 진실이며 뒷 모습은 내적 이미지라는 말이
된다.
어느 날 한 모임에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강남의 집값이 끝을 모르게 오르는 것을 보면서' 버닝의 사내'를 만났다. 이루어지라고 하는 말이 아닐 지라도 그는 "강남 한 복판에 김정은이가 핵폭탄 한 개 터뜨리면 속이 시원하겠다"고 그랬다. 상황을 생각하고 하는 말이 아니라 분노의 표출이라고 생각되어 이 영화에서의 그 장면도 "해미를 건드려 놓고 어디로 간지도 모르는 파렴치 한 놈 죽여버리고 싶어. 확 불질러 버릴테야"란 말의 영상처리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발가벗었으니 온전한 진실의 표출이다.
핑크빛 시계...그나마 화사한 시간을 보낸 해미
고양이 ...종수는 해미의 부탁대로 그 집에 와서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데 벤은 고양이를 자기집에 데려가서 먹이를 주고 있다. 되어주는 사랑과 자기 식으로 부리는 사랑방식이 다르다.
'산 것이 필요로 하는 대로 들어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배려이지 너 같이 하고 싶은대로 하는게 사랑은 아니야' 라고 고양이를 통해 해미에게 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영화는 칙칙하고 느리게 내게 와서 오래 파고든다. 묘하다. 아직도 내게는 '상영 중'이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자꾸 말을 걸어온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냥 편하게 하고싶은 대로 하는 내가 죄를 지은 듯 미안하다. 처음에는 종수와 해미가 만났는데 마지막에 해미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종수는 불을 지르고, 벤은 불에 탄다.
이 영화는 1962년작 로만 풀란스키의 처녀작 '물속의 칼'과 구성이 흡사하다. 한 여성을 사이에 둔 두 남자가 저마다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쟁취해나가는 이야기이지만 속내는 성적 욕구가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놀랍게도 성 이야기 같지만 달리 해석하자면 물속의 칼은 자궁 속에 잉태된 남자 아기로도 상징되어 '거룩한 결합'으로도 읽힌다. 그 영화도 설명하지 않고 열어두었고 이창동 감독의 영화도 설명을 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맡긴다.
이 영화도 현실장면을 빌어 내적 풍경을 그렸으며. 은유된 서양화의 연속 화폭이라고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 폴란스키의 '물속의 칼'과 이창동의 '버닝'의구조를 살펴보면 정교하게 닮아있다.
물속의 칼 버닝
------------------------------------------------------
로만 풀란스키 감독 이창동
두 남자와 한 여자 등장인물 두 남자와 한 여자
자동차와 요트 공간 낡은 트럭과 포르쉐
세상 살이에 미숙함 매너 세련됨
가난한 히치 하이킹 일 1남 소설가가 희망
단순한 부호의 놀이 남 재미있게 노는 것
방향키와 칼 겨루기 고양이 물주기
물 속에 잠수 반전 관찰
사랑이 떠난 요트 결과 불에 타는 포르쉐
무섭게 맞물리는 요소들이다. 결핍은 욕구를 강화시키고 강화된 욕구는 결합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끼리 무섭게 교감한다. 그 열망은 길을 내는데 건강한 열망이 아닌 끝은 별리거나 죽음의 속성을 띈다. 다만 폴란스키는 물로 다루고 이창동은 불로 다룬다. 육적 결합을 통해 영적결합을 말한다. 폴란스키나 이창동 모두 보이는 세상의 이미지를 통해 보이지 않는 영역을 말하고 있다. 그냥 보는 즐거움이 깊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