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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알라메인 전투(Battle of El Alamein,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2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전투이다. 북아프리카의 전세를 뒤바꾼 대표적인 전투이며, 서부전선에서 단일 전투로는 가장 많은 전차를 양측에서 동원한 전투다. 총 2차례의 전투가 있었는데, 이 중 일반인들에겐 2차 전투가 유명하다.
가잘라 전투에서 연합군은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독일군에 의해 재기불능 수준의 큰 타격을 입었고, 중동군 사령관 클로드 오킨렉은 6월 17일을 기해 전군에 후퇴 명령을 내렸다.
게다가 가잘라 전투에서 너무 많은 물자와 장비를 집중시킨 탓에 토브룩의 방어태세가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가잘라 방어선이 무너지자마자 며칠 만에 토브룩은 추축군이 함락시켰으며, 영국군은 3만 명이나 되는 포로를 내고 말았다. 또한 추축군은 토브룩에서 막대한 양의 식량과 연료를 획득, 이제 사실상 고갈되어 가던 물자를 일거에 어느 정도 보충하는 데 성공, 다시 이집트로 진격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공훈으로 다음날인 6월 22일, 롬멜은 원수로 진급했다.
여기서 클로드 오킨렉은 가잘라에서 메르사 마트루까지 160여km를 후퇴했다. 하지만 병력과 물자의 양이 부족할 뿐 아니라, 메르사 마트루는 지형상의 문제로 인해 쉽게 우회 및 포위당할 수 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어서 개전 전부터 마련해놓은 요새가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방어의 핵으로 쓰기에는 부적당했다.
따라서 메르사 마트루는 단순한 진격 저지용 방어로만 사용하고, 주 방어선은 150km 더 후퇴시켜서 엘 알라메인에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엘 알라메인은 수십km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 카타라 저지대 덕분에 기계화 부대의 통행이 불가능하므로 사막으로 우회한다는 전법을 써먹기 곤란하고, 방어선의 길이도 단축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할 경우 안 그래도 패전의 책임이 있는데다가 이집트 내부로 깊숙하게 후퇴하는 상황인지라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항구이자 영국 지중해 함대의 주요 항구중 하나인 알렉산드리아가 방어선에서 200km 이내로 들어오게 되므로 추축군 공군의 공격권 안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선에서 사소한 균열이 생겨도 함락위기에 놓일 수 있다는 위험성이 존재했다. 그래서 클로드 오킨렉은 이 결정의 대가로 8월 15일에 중동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었고 헤롤드 알렉산더 대장에게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그러나 사실 이건 신의 한수였다.
가잘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토브룩을 점령하고, 물자도 약탈로 일단 보충했고 여기에 더해서 메르사 마트루를 영국군이 사수할 것인지, 버릴 것인지를 놓고 최종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추축군이 빠르게 전진하는 바람에 메르사 마트루는 요새가 있다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함락되고 만다. 게다가 연합군은 메르사 마트루 방어전에서 40여 대의 전차를 비롯한 물자와 병력을 손실하는 등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전투가 끝난 후 엘 알라메인까지 영국군을 추격한 추축군에게 남은 전차는 단 70대에 불과해서 손실율이 무려 80%에 달했다. 영국군은 그 2배에 달하는 손실을 입긴 했지만 마침 본격화된 미국의 쇼미더머니급 렌드리스에 힘입어 단시간에 이를 극복할 수 있었고, 그에 비해 추축군은 승리의 결과 수천km 수준으로 연장되어버린 보급선 때문에 적어도 단기간에는 전력 복구는 고사하고 필요한 물자조차 제대로 수급할 수 없었다.
이미 6월 말 엘 알라메인에서 피아 대치가 시작된 시점에서 추축군은 전혀 전력 보충을 받고 있지 못한 데 비해 영국군은 소규모로나마 장비 보충이 이루어져 다시 영국군이 추축군에 대해 전차 및 포병에서는 2배, 혹은 그 이상의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비록 가잘라 전투의 결과 영국군의 사기가 급락하고 추축군의 사기는 최고조이므로 그 수적 열세가 어느 정도 상쇄되긴 했지만, 보급 상황으로 볼 때 양측의 사기가 역전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이 상황에서 추축군은 사실상 진퇴양난에 빠졌다. 후퇴하자니 그동안의 성과가 아까웠고 눈앞의 먹이인 알렉산드리아가 너무나도 탐났다. 알렉산드리아의 점령은 사실상 지중해 전체가 추축군의 지배하에 들어오는 결과를 불러 전쟁의 흐름을 추축군 쪽으로 완전히 돌리고도 남을 만했기 때문이다.
이 유혹은 결국 롬멜로 하여금 공격을 계속한다는 결정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매우 공격적인 지휘관이었던 에르빈 롬멜은 가잘라 전투의 성과를 무로 돌리는 대신 부하들에게 극단적인 무리를 강요해서라도 그 성과를 극대화하는 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7월에 벌어진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 그리고 다음 달 월말에 마지막 힘을 모아 감행한 알람 엘 할파 공격이라는 두 전투의 패배로 이어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엘 알라메인 주변의 지형은 롬멜의 장기중 하나인 우회공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방어선 전면에 닥돌하는 공격을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동안의 패배로 인해 연합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더 밀리면 파국이 닥친다는 것 때문에 죽기 살기로 방어선을 사수했으며, 최장거리가 200km도 안되는 짧은 보급선으로 인해 보급도 원활했고, 공중지원도 손해를 무시하고 지원하라는 명령하에 집중적으로 자주 이루어졌기 때문에 화력, 병력, 장비면에서 추축군이 밀렸기 때문이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1942년 10월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의 패배와 북아프리카에서의 추축군 패배를 초래하게 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이집트 영토 내륙까지 밀려서 방어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 자체가 큰 문제였기 때문에 영국은 버나드 로 몽고메리를 보내 에르빈 롬멜을 상대하게 했으며 몽고메리는 남은 영국군을 재편성하며 방어에 전념했다. 이때 몽고메리는 패배주의에 찌들어 롬멜을 찬양하던 부하들을 마구 갈구며, 사상자까지 나올 정도로 지옥훈련을 통해 부대의 사기와 능력을 올리는 한편, 후방에서 빵빵한 지원을 받아 8군의 규모를 점점 불려나가고 있었다. 독일 공군 제27전투비행단의 정찰기가 150마일(=약 240Km) 속도로 8군진지 주위를 돌고나니 10분이 걸렸다고 한다.
한편 에르빈 롬멜은 상황이 더 안좋았다. 일단 계속되는 진격으로 영역은 많이 확보했으나 보급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깊숙히 진격하는 바람에 보급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토브룩을 점령함으로써 보급유지가 가능하리라 기대되었으나, 토브룩 항 자체의 능력 부족과 더불어 토브룩이 연합군 공군의 직접적인 작전권 내에 있었기에 오히려 역효과만 불렀다. 영국 공군과 해군이 더욱 기를 쓰고 추축군 보급선단을 작살냈기 때문이다. 여기에 몰타가 중간에 떡하니 버틴 덕분에 상황이 점점 악화... (그런데, 그 몰타를 공략할 여력을 빼돌린 건 다름아닌 롬멜 본인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 게다가 당시 이탈리아의 식민지인 리비아는 쓸만한 유전을 개발하지 못했으며, 정유시설도 없다시피 한 상태였으므로 모든 유류는 안그래도 석유가 부족한 독일 본국에서 지중해를 건너서 보급받던 실정이었다. 이로 인해 에르빈 롬멜은 더 이상 북아프리카 전쟁이 길어지면 보급이 후달리는 독일에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 전 병력을 이끌고 엘 알라메인을 공격한다. 이를 제1차 엘 알라메인 전투라 부르는데, 여기서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공세를 취하지 않고 독일 기갑부대를 방어선으로 끌어들인 뒤 격파함으로써 추축군의 진격 능력을 사실상 없애버린다. 후퇴하면서, 롬멜은 “비열한 작자가 나와서 싸울 생각은 안하고 캠핑이나 치고 있다니!”라고 버나드 로 몽고메리를 욕했다고 한다.
이후 주도권이 영국으로 넘어가서 오히려 엘 알라메인에서 독일군이 방어하고 영국군이 공세를 취하는 입장이 된다. 여기에 증원과 보급을 요구하러 잠시 독일로 돌아간 에르빈 롬멜은 원하던 병력과 물자는 커녕, 건강 문제까지 발생하고 만다. 당시 롬멜은 저혈압으로 인해 간혹 실신 증세를 보였으며, 위생이 열악한 사막에서 얻은 이질에다 위장병까지 앓고 있는 상태였고, 장기간의 피로가 누적된 상황이었다. 결국 에르빈 롬멜은 본국에서 반강제적으로 요양을 하게 되고, 일시적으로 지휘권을 동부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게오르그 슈툼메 기갑대장에게 넘기게 된다.
1942년 8월∼10월 사이에 영국군의 증원군이 매일 엘 알라메인에 도착해 병력 4만 1,000명, 야포 800문과 1,000대의 전차가 보충되었고, 그 전차들 중에는 미국의 M4 셔먼 전차 300대도 있었다. 이는 그 당시 북아프리카의 추축군이 티거, 판터는 고사하고 M4 셔먼을 상대할 수 있는 4호 전차 F2형을 불과 30대 밖에 보유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전력이었다.
8월 13일, 지난 7개월 동안 궤멸 직전의 타격을 받은 영국군 중동군 사령관으로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 부임했다. 몽고메리는 전임자인 클로드 오킨렉의 후퇴계획을 보고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따위 계획은 있을 수 없다. 10m라도 후퇴할 때는 우리 병력이 반 이상 줄어들었을 때다.” 그리고 그는 패배 의식에 젖어 있는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서두르지 않고 용의주도하게 준비해 나갔다.
8월 30일 밤, 롬멜은 몽고메리의 제8군을 공격했는데 작전의 성패는 속도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접근로에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는 데 하룻밤을 소비해야 했다. 가까스로 그곳을 돌파, 알람 엘 할파 능선을 공격할 때 불행히도 몽고메리의 매복에 걸리고 말았다. 몽고메리가 그곳에 그랜트 전차를 숨겨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군은 49대의 전차를 잃고 퇴각하고 말았다.
그 후 롬멜은 전투력의 열세ㆍ보급지원의 악화 등을 고려해 엘 알라메인을 고수하기로 방침을 굳혔다. 그리고 아프리카 군단의 방어 전면(全面) 60Km에 8Km의 폭으로 50만발의 지뢰를 매설, 악마의 정원을 만들었다. 영국군이 서쪽으로 진격하려면 이곳을 돌파하지 않고는 갈 수 없도록 돼 있었다.
그 당시 영국군 제8군과 독일군 아프리카 군단의 수치상 전투력 비는 심각한 수준의 격차를 보이고 있었다. 독일군의 보급물자는 480Km 떨어진 토브룩, 960Km 떨어진 벵가지, 더 멀리는 1,920Km 떨어진 트리폴리 항구에서 내린 다음 트럭을 이용해 사막길로 수송해야 했는데, 도중에 영국 공군의 공습을 받기도 했다. 결국 에르빈 롬멜이 필요로 하는 보급물자는 월 3만 톤이었으나 실제로 받은 것은 6,000t에 불과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롬멜이 귀국했다가 중병 크리를 맞고, 롬멜에서 슈툼메로 사령관 교체가 되었다.
영국 중동군 사령관 버나드 몽고메리는 반격작전의 개시일을 1942년 10월 23일로 정하고 주공을 북쪽의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로 택했다.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는 오후 9시 30분 영국군의 폭격기가 폭격을 쏟아냄으로서 시작했다. 곧 이어 900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독일 방어진지의 지뢰와 철조망 조각들은 공중으로 솟아올랐고 쏟아지는 포탄의 폭풍에 병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악마의 정원에도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말 그대로 폭탄과 포탄으로 지뢰밭을 뒤엎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롬멜과 슈툼메가 약 50만발로 추산하는 많은 양의 지뢰로 만들어진 악마의 정원을 비롯해 방어준비를 철저히 해놓았으며, 구축해놓은 진지도 많았기 때문에 집중폭격과 포격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진지와 지뢰밭이 매우 많았다. 게다가 방어구조가 악마의 정원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지뢰밭 뒤에 88mm 대공포와 전차들이 입맛을 다시고 버티는 구조였다. 이 때문에 지뢰를 제거하려던 공병들은 온갖 포탄세례를 뒤집어썼고 전차들은 대전차 지뢰에 발이 묶여서 후속 포격에 작살나기 일쑤였다. 이로 인해 초기 영국군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영국군의 야포사격 수초 만에 독일 통신시설은 아예 박살이 나버렸고, 때문에 모든 통신이 불통인 상황에서 아프리카 군단의 슈툼메는 뷔휘팅 대령을 대동하고 전선을 확인하기 위해 출발했다. 포연과 모래먼지 속에서 작렬하는 탄막을 뚫고 달리던 지휘차는 오스트레일리아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고 말았다. 총탄을 맞은 뷔휘팅이 절명하고 슈툼메는 그 충격으로 심장병이 발작해 죽고 말았다. 게다가 이런 사고가 난 것 자체를 한동안 추축군이 몰랐기 때문에 슈툼메 대장은 실종으로 보고됐다.
반면 영국군도 지뢰 때문에 예상 밖의 병력 손실이 발생했고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지뢰와 같이 묻어둔 110㎏ 짜리 폭탄은 1개 소대 장병 30명을 순식간에 하늘로 날려버렸다. 제42 스코틀랜드 연대의 1개 대대에서는 새벽이 오기 전까지 7명의 향도(嚮導) 장교가 사망 또는 중상을 입었다.
영국군의 입장에서 이 전투 최대의 위기는 10월 24일∼10월 25일 밤에 벌어졌다. 엘 알라메인 전 지역이 거대한 살육장으로 변한 아비규환 속에서 공격하는 영국군이나 방어하는 독일군 어느 쪽도 승패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25일까지 영국군 보병은 6000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고 전차는 130대가 파괴됐다.
몽고메리의 참모장과 제10ㆍ제30군단장은 더 이상의 공격은 무리라고 보고 몽고메리에게 작전을 중지하고 철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때 몽고메리는 이렇게 응대했다. “아직도 사용 가능한 전차가 900대나 있다. 그것들은 소모품이다.”
다급해진 히틀러는 롬멜을 복귀시키지만, 전황은 노련한 롬멜로서도 별 수 없을 정도로 나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10월 25일에 롬멜은 완쾌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격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기울었고 탄약과 전차 연료가 바닥났다.
10월 26일 영국의 제9사단(오스트레일리아군)이 북쪽에서 8Km 의 지뢰밭을 돌파했다. 롬멜은 오스트레일리아군의 돌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예비인 제90경기갑사단을 투입하고 남방 50Km 지역에 있던 제21기갑사단에 북쪽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북쪽에 투입한 사단들이 더 이상 급한 곳이 있다 하더라도 되돌아갈 연료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편 10월 23일 방어선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던 폴고레 공수사단에 영국군 제7기갑사단, 44, 50보병사단, 자유프랑스 제1사단, 그리스 여단등이 공격하지만 폴고레 공수사단의 분전으로 3일간의 전투끝에 격퇴되었다. 게다가 이들은 말이 사단이지 사실 7개 대대, 3500여명 정도의 병력이었다. 대전차 능력이 부족해지자 일본군이 할법한 대전차근접전과 대전차포의 연계공격으로 110대의 전차를 격파한다.
롬멜이 정예부대를 북쪽에 투입한 사실을 간파한 몽고메리는 북쪽의 주공부대를 현재 위치에서 남쪽으로 8Km 지점인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경계선 쪽으로 이동시켰다.
11월 2일 오전 1시, 영국군의 대포 360문이 사막의 싸늘한 밤을 찢었다. 강철 방패 같은 탄막이 3분 간격으로 90m씩 앞으로 나아갔고 엄청난 포탄이 지뢰와 철조망을 헤집어 놓았다. 오전 5시30분 전차가 길을 열어놓은 보병 사이를 뚫고 전진했다.
독일군의 대전차포는 돌진해오는 영국군 제9기계화여단의 전차를 차례로 격파했다. 제9기계화여단은 적진에 돌입해보지도 못하고 뭉그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몽고메리는 2개 여단의 전차를 새로 투입했고 롬멜도 2개 기갑사단으로 하여금 양측에서 반격토록 했다. 전차와 전차의 불꽃 튀는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됐다. 전투가 끝날 무렵 독일군의 전차는 35대로 줄어들었다. 피할 수 없는 냉엄한 현실이 롬멜의 눈앞에 다가왔다. 이로서 반격의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프리카군단장 리터 폰 토마 육군 중장은 히틀러의 비현실적인 철수 불허 명령에 분노하여 스스로 영국군 주둔지로 차량을 몰고 가서 항복했다.
롬멜은 철수는 절대 안된다는 히틀러의 말을 무시한 채로 11월 2일에 철수를 시작하고 나중에는 히틀러도 11월 3일에 이 철수를 인정한다. 공군 운용에는 좀 꽝이었던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오폭을 우려해서 추격을 망설인 것도 있고, 마침 운좋게 기상이 악화되어 영국 공군이 효과적으로 독일군을 공습하는데 실패하면서 추축군의 잔여 병력은 영국군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려는 롬멜 장군은 어떻게 하든지 나머지 병력을 리비아로 귀환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전략을 짜고 후퇴를 개시했다. 우선 서쪽으로 400km 떨어진 샬롬과 할파야 고개까지 후퇴하여 그곳에 매복하여 자신의 군대를 추격하는 영국군을 기습하여 크나큰 피해를 주었다. 그리고 영국군이 독일군에게 큰 타격을 줄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지만 전투 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독일군은 무사히 후퇴한다. 이후 히틀러는 롬멜을 다시 불러들여서 노르망디 방어를 맡겼다. 독일은 사실상 북아프리카 전역을 유지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내 군대를 구해내자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오. 우리는 지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날들을 눈앞에 두고 있소”
PS. 죽은 자들이 행운아요, 모든 것이 끝났으니까.
-에르빈 롬멜 장군,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중
그러나 영국군도 하루 만에 중대 몇 개가 소멸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어떤 영국군 장교는 “이겼는데 이겼다는 기분이 안든다.”고 말했을 정도다. 당장 독일군의 사상자는 3만 명에 포병 전력은 전체의 85∼90%가 괴멸되었다. 반면 영국군의 사상자는 1만 5000명이었는데 문제는 기갑 전력의 피해가 극심하여 상당수의 영국군 기갑 부대가 아예 전멸해 버렸을 정도다.
아무튼 이 전투의 승리로 몽고메리는 영국 최고의 육군 지휘관으로 부상했고 후에 원수까지 오르지만, 여기서 “밀어붙이면 다 된다”와 “병사는 소모품”이라는 나쁜 관념을 가지게 되어, 결국 마켓가든 작전의 대참사를 부르게 된다.
롬멜이 북아프리카 전역의 철수를 결정하고 전쟁물자와 병사들이 하나하나 북아프리카를 떠나고, 그 결과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영국, 자유 프랑스군이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해안지대에 상륙작전을 감행한 횃불 작전이 성공했다. 그들은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였고 연합군이 1943년 5월 13일에 튀니지 전역에서 승리함으로써 북아프리카 전역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1943년 7월 10일에 연합군의 허스키 작전으로 이어져 연합군이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 상륙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히틀러는 동부 전선에서 쿠르스크 전투에 파병된 독일 병사들을 이탈리아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군사를 빼돌려 쿠르스크 전투의 패배를 자초하였고 독일군의 지원과 많은 병력 파병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1943년 9월 8일 항복하고 만다.
엘 알라메인 전투는 같은 해 6월 태평양 전선에서의 미드웨이 해전, 이듬해 1월까지 계속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더불어 연합국이 추축국 진영을 상대로 1942년에 거둔 값진 승리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 승리를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엘 알라메인 전투에 대한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수상의 다음 두 어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비록 이번 승리가 전쟁의 끝, 혹은 ‘끝의 시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시작의 끝’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엘 알라메인 이전까지 우리는 승리를 맛보지 못했지만, 엘 알라메인 이후에는 더 이상 패배를 맛보지 않았다.”
롬멜 매니아들은 “이 전투에 대해서 보급만 제대로 받았으면 이길 수 있었다. 몽고메리는 보급을 다 받고 이겼다.”란 식의 비하와 가정을 하는데, 정작 그 보급선을 길게 만들어서 보급을 힘들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롬멜 자신이었다. 보급선 길게 만들어준 원인 제공은 이탈리아가 일차적 원인 제공을 했다. 이탈리아 군대가 그리스를 공격해놓고 독일이 마무리해준데다 크레타 이후 공수작전 금지 크리 덕에 몰타를 못 죽이게 했으니 애초 전쟁에서 “이렇게 했으면 이겼을 거”라는 쉴드(shield)는 먹히지 않는다. 운이 안 좋았건 실수를 했건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보급이 전쟁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롬멜은 자국과 동맹국의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는 보급능력을 가늠하지 않은 채 작전을 짠, 무모한 장군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몽고메리가 보급을 더 잘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걸 잘 활용한건 엄연히 몽고메리의 능력이고 롬멜이 보급을 경시했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롬멜은 아프리카에 적용 가능한 보급체계상 한계가 있다는 총참모장 할 더 상급대장의 말에 대해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당신 일이잖소?”라고 대꾸했는데 이때 롬멜의 계급은 중장이었다. 게다가 병력 손실비가 1:2 이상으로 우월했고 롬멜이 전략적 식견은 좀 떨어지더라도 전술적 능력만큼은 대단히 탁월한 지휘관임을 고려할 때 이 전투에 한해서는 몽고메리가 무능력했다고 보기 어렵다. 결정적으로 몽고메리는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의 공세를 사실상 끝장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군 손실이 높은 것은 비판 받을 만하지만 충분한 보급을 받고 적을 압도하여 적의 공세 능력을 꺾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고, 그 기본을 잘하는 것이 명장이란 점에서 몽고메리에게 찬사가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