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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한담 : 부안 월명암 월인(月印)스님
월인 스님
“참회하는 오늘이 밝은 내일 약속해요.”
“걸림이 없어야 중노릇 잘할 수 있어.”
월명암은 월명각시가 이승의 몸을 그대로 가지고 승천의 이적을 시현한 곳이고, 바로 이웃한 묘적암은 그의 아비 되는 부설거사가 부부의 인연을 맺고 함께 수행한 묘화보살을 위해 지은 초막 암자입니다. 이 모두가 저 먼 신라시대의 이야기이고 그때의 흔적이란 찾아 볼 수도 없지만 아직도 그들의 지고한 수행이야기는 생생히 전해오고 있는 도량입니다.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단풍들듯 이 도량의 세월 속에 그들의 이야기는 단절되지 않고 전해지며 공부하는 이들의 귀감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봄꽃 만발한 묘적암에 달이 떠오르고 소쩍새가 하염없이 울어대는 밤이면 정말 묘적(妙寂)의 신묘한 소식이 전해오는 듯합니다. 무상(無上)의 법을 닦는 사람에게 도량의 좋고 나쁨이 있을 수 없겠지만 나는 이 월명암 묘적암과 별난 인연이 있습니다. 무상한 세월 속에 여든 아홉의 나이에 이르도록 이 도량과 정말 깊은 인연을 맺으며 살아 왔습니다.
세상 살기가 어렵다는 말을 풍문에 듣고 앉아 있는 와중에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이 노납(老納)에게 촌설(寸說)을 청하니 거절할 수도 없거니와 달리 잘난 말 한마디를 전할 덕도 쌓지 못했음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내 살아 온 이야기를 들려드리지요. 행여 그 속에 먼지처럼 묻어 있는 부처님의 가피가 있거든 그걸 버리지 말고 갈무리해 수행의 거름으로 써 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경술년에 전라남도 능주, 지금의 화순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누구나 그랬듯이 참으로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지요. 선친께서는 삼천리 명산을 찾아다니며 남들이 알지 못할 공부를 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집안 살림은 말할 수 없이 기울었고 마침내 선친께서 금강산에서 타계하시니 그나마 밥줄을 잇던 살림살이가 파탄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위로 두 형님들은 어디론가 떠나갔고 어린 나는 모친을 의지해 외가살이를 하게 됐습니다.
열두어 살 때부터 지게를 지고 산을 다니며 나무를 하는 신세를 면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나이에도 산에 오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게를 지고 산꼭대기를 올라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 내 가난한 어린 시절을 지켜준 유일한 재미였습니다. 나는 산꼭대기에서 하늘을 향해 소망을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어려운 세상살이를 하지 않고 산에 들어가 도를 닦고 싶습니다.”무슨 도를 어떻게 닦으리란 다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런 소망을 갖게 되었던 겁니다. 선친의 피가 내 몸에 흐르는 탓이었는지 어린 나이에 가난이 싫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발원이 있어 지금껏 승단의 한켠에서 불은(佛恩)을 축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외가살이를 하다가 스무 살이 넘어서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시계고치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때만 해도 시계란 귀한 것이어서 그걸 주무르며 고치고 다니는 일은 신나는 일이었지요. 시계고치는 연장을 손가방에 넣고 전국을 떠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도 신명나는 일이었습니다. 내 기술로 내 밥을 해결하니 남에게 구차하게 손 벌릴 일도 없고 내 가고 싶은 곳이 바로 나의 행선지이니 누구에게 길을 물을 것도 없었지요. 주로 북쪽을 많이 다니게 되었습니다. 선친이 공부하다 이승인연을 마감했다는 금강산도 돌아다니고 보현산도 돌아 다녔지만 그래도 만주 땅을 가장 오래 쏘다녔습니다. 그곳에서는 일제의 병기를 들고 살상의 전장으로 끌려갈 험난한 팔자를 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주를 돌아다니다가 돌아 온 조국 땅에서 해방을 맞이했는데 그 해에 불문(佛門)으로 들어서 버렸습니다. 어릴 때부터 소망했던 것이 늘 가슴에 들어차 있었기에 서른다섯이 되도록 부부의 인연을 맺을 여자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언젠가는 산문으로 들어갈 사람이 한 여자의 일생을 반쪽으로 잘라놓고 떠나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죽 있었던 게지요.
출가사찰인 전라북도 보석사에서는 머리만 깎은 셈입니다. 정선(正善)스님이 머리를 깎아준 은사스님인데 이듬해 화엄사로 나를 보내며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어야 참으로 중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 한마디가 전부였습니다. 물론 그 가르침도 나는 평생을 귀하게 받들고 있고 지금 머리를 깎으려는 이들에게도 ‘정녕 하나의 걸림이 없는 삶을 구할 자신이 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화엄사에 서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참선도 하며 지내다가 서울에서 정화불사가 대단하고 모두들 모여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화불사가 끝날 무렵에 서울로 올라갔는데 나는 실망했습니다.
정화불사는 갑오년(1954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를 촉매로 시작되었던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나는 그 다음 해 초가을에 조계사로 갔습니다. 이미 많은 절에서 대처승들이 물러난 뒤였습니다. 조계사 앞뜰에 모인 스님들이 여기저기서 무리를 지어 수군거리는데 그 내용은 지방의 절들은 많은데 비구들의 수는 적어 서로 절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정화를 했으니 절을 인수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때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부처님 혜명을 바로 잇고 법통을 온전히 이어가기 위한 정화였는데 종국에는 무리를 지어 좋은 절들을 차지하려고만 하는 것이 이 촌사람에게는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여비도 없어서 대각사에서 한 달 가량 있었는데 대접을 잘해 주더군요. 한 도반이 찾아와서 나를 보더니 “스님은 왜 여기 있으시오?”하더군요. “갈 만한 곳도 없고 여비도 없어 여기 있다.”고 했더니 그 스님이 꽤 많은 여비를 주더군요.
서울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던 터라 잘된 일이었지요. 그래서 발길 닿는 대로 찾아 온 곳이 월명암입니다. 와보니 절은 말할 수 없이 퇴락해 있었습니다. 누군가 저 옆 봉우리(쌍선봉) 아래 스님들의 유골이 나뒹굴고 있다고 하더군요. 6.25전쟁 때 빨갱이들이 월명암 스님 4명을 끌고 가 돌로 쳐서 죽였다는 것인데 아무도 그 유골을 수습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쌍선봉 아래로 가보니 해골 4개가 나뒹굴고 있더군요. 주변에는 유골들도 흩어져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수습을 해 화장을 하고 스님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를 지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은 이 유서 깊은 사찰에서 스님을 돌로 쳐 죽이는 비극까지 만들어 놓아야 했던 것이고 그 유골마저 몇 년을 숲속에서 뒹굴어야 했으니 말입니다.
그해 겨울에 이 묘적암 자리에 초막을 짓고 그 다음 해부터 월명암 법당불사를 시작했습니다. 월명암은 학명(鶴鳴)스님이 잠시 계시던 절이기도 했고 법당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역시 전쟁 통에 불 타버린 뒤였습니다. 그래서 그 주춧돌 위에 법당을 다시 세우는 불사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물론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당시 지방에서는 비구승들이 지나가면 욕을 하고 미워하는 시대였으니까요. 신도도 없는 절에 누가 불사시주금을 내겠습니까. 원경스님이란 분이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나는 어설프게 만든 권선문을 들고 원경스님을 따라 나섰는데 부안군수와 군내 각 면장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그들이 제법 많은 돈을 내 놓았고 그런 바람에 염전하는 사람을 비롯한 지역 신도들도 십시일반으로 시주해 불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묘적암
불사가 다 되기 전에 나는 소공스님이란 분에게 마무리를 부탁하고 지리산 토굴로 들어갔습니다. 워낙 세속 물정에 밝지 못한 내가 불사를 주도 하는데 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불사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내소사로 가버려 월명암은 다시 쇠락하기 시작했습니다.
10년 후에 다시 월명암을 찾아 기와불사를 하고 떠났다가 또다시 80년대 중반에 돌아왔습니다. 세 번째로 월명암을 찾은 겁니다. 해남 달마산에 토굴을 짓고 앉아 있는데 무슨 인연인지 몰라도 당시 주지스님이 나를 데리러 왔기에 따라 왔습니다. 절이 제법 격을 갖추고 선방도 있어서 결제 철이 되니 10여명의 선객들이 찾아오더군요.
나는 안거를 들며 선객들과 ‘10악 참회’와 ‘발원문’정진을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세간에 있건 출세간에 있건 수시로 짓는 악업을 소멸시키지 않고 어떻게 성불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나옹선사의 발원문을 조석으로 되새기며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다잡아 나가는 것도 중요한 수행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0여 년 전부터 안거 철에는 10악 참회와 발원문 정진을 참선수행과 함께 하고 있는데 신기한 일이 두 번 있었습니다.
첫 해의 일입니다. 10명의 선객들이 모여 10악 참회와 발원문 정진을 한철 했는데 그때 부안군에는 여름 한철, 그러니까 3개월간 단 한건의 범죄도 발생하지 않아 경찰들이 할 일이 없었다는 겁니다. 이 소식이 방송을 타고 전국에 알려졌는데 어떤 사람들이 “월명암에서 10명의 스님들이 참회정진을 석 달간 한 공덕인가”라고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 소문 덕택에 월명암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고 기도 객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참선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월명암이 이제는 참회도량으로도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참회와 발원을 하던 중 어느 해에는 대중들이 참선수행만 하면 될 것이라며 참회와 발원정진을 하지 말자는 의견을 보였습니다. 선방에서 대중들이 하는 말인데 늙은이가 고집을 부리고 안 들어 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런 외진 선방에는 대중들이 많이 찾아오지도 않는 시절이 아닙니까. 주책을 무릅쓰고 한마디 더 보태자면 해제비가 많고 적은 걸 따져가며 선방을 정하는 세태까지 왔다는 소리까지 들리는 터라 내 고집을 내세울 처지가 못됐던 겁니다.
그런데 안거 한 달이 지나고 서울에서 신도들이 승합차를 타고 절을 찾아오다가 논산근처에서 사고가 났는데 안타깝게도 한사람이 죽고 두 사람이 크게 다쳤습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대중들에게 첫해 참회 발원정진을 했던 일과 부안에 3개월간 범죄가 없었던 일을 상기 시켰습니다. “이 도량을 옹호하고 우리 승단을 돌보는 신장님의 가피력이 없다 할 수 없고 우리가 참회 발원 정진을 하는 바른 뜻이 자리이타의 보살행을 실천하자는데 있음을 잊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참회 발원 정진을 열심히 하자”고 했더니 다들 그렇게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옛 부설거사의 이야기에는 공부를 위해 사사로이 정(情)을 요구하는 사람을 아궁이에 넣어 죽였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어서야 안 되겠지만 무릇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모질고 단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몇 년 지리산의 토굴에 의지해 있다가 재작년에 네 번째로 월명암을 다시 찾아 이곳 묘적암에 거처를 정하며 나는 “이제 나는 여기에 죽으러 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이도 나이이고 한 세상 남에게 큰 부끄러움 없이 정진해 왔으니 죽어서 다음 생에 더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 밖에 뭐가 남아 있겠느냐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나는 참회하고 발원하는 마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나이에 생식을 하고 내 손으로 빨래를 하며 사는 것도 나의 덧없는 일생을 참회하며 간절한 발원의 마음을 다잡아 가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봄꽃이 저토록 아름답게 피었지만 이내 져 버리고 말 것을 알지 않습니까. 그걸 알면서도 저 꽃의 아름다움이 영원한 것인 양 착각하고 그 아름다움에만 끄달려 정신을 잃어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가을 되어 잎 지는 날의 쓸쓸함도 알아야 하고 엄동설한 속에서 안으로 봄을 준비하는 인고의 지혜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한그루의 꽃나무도 저토록 절절히 법문을 하고 있건만 우리의 귀는 세상의 악행과 더러움의 소리들만 듣고 있지 않은지 돌이켜 봅시다.
그리고 내 살아 온 나날들과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을 때때로 돌아 봐야 합니다. 그것이 참회입니다. 헛된 망상의 끄나풀에 뒤엉켜 온갖 악업을 지어내는 흉한 모습이 보일 겁니다.
진실로 참회합시다. 오늘날 세상이 살기 어려워진 것도 한때 정신 못 차리고 들떠 있던 시절의 업보 아닙니까. 보다 나은 내일을 원한다면 그만큼 어제를 참회하고 지금 발원해야 합니다.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모든 죄업을 참회하고 청정 수행에 힘써 나와 남이 다 성불할 수 있도록 발원하는 데서 밝은 내일의 해가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 날이 바로 부처님 오신 날이 아니겠습니까.
■월인 스님
·1910년 전남 화순生 1999년 원적
·1945년 전북 보석사로 출가
·화엄사 월명암 달마산 토굴 등에서 선 수행
출처: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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