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 스님은 1969년 부터 1983년 까지 14년간 송광사의 방장으로 있었으며 내가 송광사에 머물던 당시에는 나의 스승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참선 수행을 할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구산 스님은 1909년 전라북도 남원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26세 때 큰 병에 걸려 온 병원을 찾아다녔으나 고칠수가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이 도와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근처의 지리산에서 백 일 동안 관세음보살의 진언인 옴마니반메훔('오, 연꽃 속의 보석이여' 란뜻. 여기서 연꽃은 진흙 속에서 자라므로 세속의 중생 사회를 상징하며, 보석은 깨달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주문의 뜻은 세속 사회에서도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을 외웠는데 백 일 동안 염불한 후에 그의 병이 완전히 나았다고 한다.
그래서 구산은 불교를 믿게 되었고 3년 후에는 송광사에 와서 20세기 전반부의 가장 유명한 선승 중 한 명이었던 효봉 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았다. 송광사에서 다시 일 년을 지낸 후, 불보사찰이며 전통적 율원이었던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여러 해 무無자 화두를 정진한 후인 1943년, 구산은 첫 깨달음을 경험했다. 1976년과 1977년에 걸친 동안거 설법 때 구산은 그 깨달음의 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암자 뒤에 정각이란 이름의 작은 방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 하루 두 끼분의 양식을 갖다 두고는 잠 안 자고 수행하기로 결심했지. 앉은 채로 수행한 지 나흘이 지난 후, 나는 과거 수행을 통해 얻었던 참선의 효과가 지난 몇 주 동안의 활동으로 상당 부분 무뎌졌음을 알 수 있었지.
대부분의 시간을 졸음. 환상과 싸우면서 보내야 했던 게야. 수행이 그렇게 무뎌졌으니 어떻게 먼저 떠난 도반 스님이 저 세상으로 가시는 마지막 날가지 도움을 드릴 수 있었겠나.
그래서 잠을 쫓기 위해 선 채 합장 자세로 참선 수행하기로 결심했지. 5일이 지나자 여러 스님들이 법춘 스님의 49재 법회를 상의하려고 방문했더군. 나는 돌아가신 그 스님의 친척분들과 상의하라고 돌려 보냈지. 홀로 남게 되자 어떤 경우라도, 설사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는 수행을 계속했어.
서서 참선할 때 가장 힘들었던 건 움직이지 않고 처음 두 시간을 참는 것이었어. 그 후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던 셈이지. 앉든,서든, 선정 삼매에 들면 다 똑같은 것이야. 잠자지 않고 참선한 지 만 일 주일이 지났어도 피곤하지도 않고 다리가 아프지도 않았어. 옛 선사들께서 잠자지 않고 참선 수행하신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으셨단 얘기지.
49재 전날 밤 벽시계가 막 9시 종을 치기 바로 직전 째깍하는 시계 소리를 듣는 순간 깨달음의 첫발을 내디딘 거야. 그 때 나는 이런 오도송을 지었지.
한 번의 짤깍 소리 삼천 대천 세계 다 삼키니
고독한 수행자 아홉 번 '아' 감탄사 발하도다.
시계의 째깍 소리, 불법 가르치는 길고 넓은 혀요,
쇠, 나무로 된 시계 부품. 법신의 청정한 몸이네.
시계가 아홉 번 친다는 의미는 뭔가? 칠 일 밤낮을 선 채로 열심히 참선 수행했더니 몸이 마비되지도 않았고, 정신의 산란함도 다 없어져 버려서 기분은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하늘 같았어. 내 생명의 원점으로 돌아 갈 수 있었던 게지
. 허리띠 풀린 바지가 슬그머니 내려가듯이 편한 대로 적당히 하는 수행자는 백날을 해도 헛일이야. 참선 수행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겠다는 의지를 가져야만 깨달음의 경험을 얻을 수 있는 게야."
그러나 구산 스님은 후에 이 깨달음이 완전한 것은 아니었으며, 단지 깨달음의 문턱에 처음 들어가는 단계였다고 했다.
그 후, 스님은 해인사 방장이며 동시에 그의 스승이었더 효봉 스님과 좀더 가까이 지내겠다는 생각으로 그 절 근처의 작은 암자에서 삼 년을 더 머물렀다. 거기서 구산 스님은 다시 깨달음을 얻었는데 후에 그는 그 깨달음이 그가 얻은 최초의 참 깨달음이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구산 스님에 따르면, 그는 14일간 계속된 깊은 선정 상태에 들어갔는데 그 때는 외계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느끼지도 못했으며 선정 상태가 워낙 깊었기 때문에 새들이 어깨 위에 앉아 쉬면서 그가 입은 겨울용 누비 솜 두루마기를 쪼아 솜이 빠져 나오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1957년에는 백운암에서 그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혹독하다고 할 수있을 정도의 참선 수행을 3년간 계속했다. 장좌불와 수행을 하면서 여러 날을 선 채로 쉬지도 않고 선정 삼매에 들기도 했다
. 좌선시에는 긴 막대기에 매단 칼을 턱 밑에 세워 뒀는데 졸음 때문에 머리를 끄덕거릴 경우엔 영락없이 자기 목을 찌르도록 되어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제대로 된 식사 대신 쌀가루와 솔잎을 물에 섞어 먹었다. 마침내 50세 되던 1960년에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이 때의 경험을 아래와 같이 읊었으며, 이 시를 그의 스승이었던 효봉 스님에게 바쳤다.
보현의 구멍 속으로 깊이 들어가니
문수가 꼼짝 못하는 도다
이제 큰 대지는 조용하구나
동짓날 덥고 소나무 절로 푸르니
돌 사람 학 타고 푸른 하늘 날으네
이 시에 대하여 효봉 스님은 '지금까지는 네가 나를 따랐는데 이제 너를 따라야 할 사람은 바로 나로다" 라고 말하며, 구산 스님에게 정식으로 법을 전해 주었다. -로버트 버스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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