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17,15.22─18,1 요한 16,12-15
"진리의 영께서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살다보면 찾아지는 것과 주어지는 것들이 있다. 사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찾아내고 깨닫게 된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창조주이시며 지혜이신 하느님 앞에서야
제아무리 대단한 진리라 하여도 한낱 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창조적 깨달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겸손하게 자기중심적이며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진리의 영께서 친히 이끌어주시는 깨달음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완전한 진리는 계시 자체이며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다. 이런 완전하고 통합적이며
총체적인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음과 사랑이 절대적인 요건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진리가 무엇인지, 참 삶이 무엇인지,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신다. 따라서 참 인간됨의 길, 참 신앙의 길은 성령 안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동화되려는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
보호자 성령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심판을 확신시켜 준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악행을 할 때 두려움에 쫓기고 불안해하며 두려워하는 것은 성령께서 모든 이의 마음에 심판을
선고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 평화가 주어짐을 깨닫게 해주신다.
진리의 영께서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말씀을 모두
되새기도록 해주신다(14,25-26). 뿐만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해주고 의로움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신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으나, 백인대장과 예수님을 지키고 있던 이들은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54) 하고 깨닫게 된다.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보게 된다(사도 9,1-9).
이 모두가 성령의 작용이었다. 따라서 성령의 활동 안에 머물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진리와 생명에 참여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시고 하느님의 자비를 건네주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한꺼번에 하느님의 진리를 다 파악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제자들에게 주실 수는 없었고, 다음으로 성령께서
가르쳐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복음적인 계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왔으나,
그분의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그분의 부활하심으로 살아계셔서 항상 진리를 계시하시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는, 영적인 진리뿐 아니라, 과학과 학문 예술 등 모든 진리에
대해서 밝혀주신다. 신학자와 설교자들만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새로운 진리를 알아듣고
밝히는 것은 아니다.
헨델은 그의 작품, ‘메시아’ 중의 알렐루야 코러스를 어떻게 작곡했느냐고 묻자,
“하늘이 열리고, 희고도 장엄하신 하느님께서 그 어좌에 앉아계시는 것을 보았다”고 답변하였다.
한 물리학자는 자연 안에 숨어 있는 물리학의 원리를 발견하는 신비로움 속에서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때때로 사람들은 어떤 생각에 몰두하면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에 부딪친다.
바로 그 순간, 그 문제의 해답이 주어지는 것을 체험한다. 인간의 사고가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지혜 자체이신 하느님의 은혜가 들어온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분야에서 모든 진리를 점차적으로
밝혀주시고 함께해 주신다. 우리도 주님께 기도하자! 주님, 저에게 당신의 진리를 풍부히 드러내시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좋은 도구가 되게 해주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소서.
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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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17,15.22─18,1 요한 16,12-15
고대 그리스 문화의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아테네. 그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아크로폴리스
정상에는 고대 그리스 건축물의 정수라고 손꼽히는 파르테논 신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에 세워진 건물로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지만, 그 거대한 규모와 높이 솟아오른 수많은
돌기둥은 여전히 보는 이를 압도하며 과거의 영광과 위용을 그대로 자랑하고 있는 듯합니다.
여행길에 그 아크로폴리스 정상을 향하여 가다가 산 중턱 한 모퉁이에서 작은 푯말 하나를
보았습니다. “아레오파고스, 바오로가 이곳에서 설교하다.”
바오로는 그렇게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인 아테네에서, 그리스의 다신론 사상이 절정을 이루고 있던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며, 산 중턱 한 모퉁이에서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선포합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거대함과 웅장함과 그 화려함 앞에서 담대하고도
용기 있게 외칩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나왔을까요? 신전 중에 신전이요, 인간이 지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졌던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어떻게 이런 말로
설교할 수 있었을까요?
바오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이 다 담아낼 수 없는 하느님, 사람의 손으로 드리는 섬김과 예배에
결코 종속되실 수 없는 그 하느님께서 바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오늘은 그렇게 온 세상조차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 계심을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수원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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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만 세례자요한 신부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17,15.22─18,1 요한 16,12-15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신앙
요한 복음 16장은, 최후의 만찬자리 그러니까 이미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앉혀 놓고 그들에게 일러주시는 마지막 유언,
이제는 곧 이별을 앞둔 스승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고별의 담화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고,
또 3장에 걸쳐서 진행되는 이 고별담화를 통해 요한은 예수님과 공동체,
곧 교회와의 관계를 정리해 나가는 긴 대목 중의 일부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잘 알아들으려면
우리의 시선을 그 시대의 상황으로 좀 되돌릴 필요가 있는데요,
우선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은 지금 우리처럼 그리스도교라는 교회가 일반적이지 않은,
대단히 작고, 어쩔 수 없이 그 당시의 사회로부터도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던 시절에,
그러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어떠한 박해를 당할지 모르는,
마치 비밀결사 집단이나 가질 법한 긴장과 철저함이 가득 베여있는 초세기 교회공동체가
그 대상입니다.
세상은 아무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않는데, 이를 고백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나버리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건을 체험한 그들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목숨을 내걸고서라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 자신들 역시도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올지 두렵고 또 모든 것을 박탈당할지도 모를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들이 뼈저리게 체험하는 바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두렵고 떨리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어둠 속에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그리고 그분께서는 기어이 우리에게 다시금 돌아오실 것이라는 굳은 약속.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막막한 두려움 속에서도 울려 퍼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그분의 이끄심에 대한 의탁을 예수님의 유언 형식을 빌어
이 글을 읽는 교회 공동체 신자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시선으로 오늘의 말씀을 다시 봅시다.
‘지금은 너희가 어둡고 괴로움 속에서 무엇인가라도 잡으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오히려 지금 너희가 하느님의 뜻을 다 감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진리의 영, 곧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그분이 너희가 가야할 길들을 일러주실 것이다.
그분은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시며, 어둠에 덮어두었던 모든 것들은
빛으로 폭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대동소이합니다.
참으로 많은 어두움과 두려움, 그리고 막막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다구니를 써서라도 하느님의 뜻이 이거다 저거다 재단하고
무언가 하나 턱하니 내세우고 욕심이 앞섭니다.
기도하면서도 안달하게 되고, 믿는다 하면서도 끝없는 불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식의 대답은 성에 차지 않습니다. 하느님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분의 때가 있고 그분의 시간이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를 성령께, 하느님께 내맡기지 않고 내가 나서서 자꾸만 뭔가를 해결 지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꼬여가는 신앙의 길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신앙은 바로 그분 친히, 이렇게 안달하고 끝없이 돌아서려는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일, 그분의 성령께 아프고 억울하고 작아보여도 그래도 그분께
나를 다시금 이끌어주시도록 내맡기는 일,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오늘 요한은 우리에게 그런 기다림을 이야기하십니다.
지치지 말고, 포기하지도 말고, 정말로 스승의 말씀과 그분의 성체에 머물러라고,
그러면 우리가 예상치도 않았던 때에 모든 것이 드러나게 해주시리라고 격려하십니다.
여러분. 부디 힘을 내십시오.
2,000년 전의 사람들도 이런 절박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들과 함께 같은 기다림의 대열에서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부산교구 조영만 세례자 요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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