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있어 가져옵니다.
오마이 뉴스
김대중에 대한 열등감, '4.19 영웅'의 초라한 말로
news.v.daum.net/v/20201108134501284
그리고 당시 급변했던 민주당의 변화과정이 떠올라 두서 없이 끄적여 보겠습니다.
삼당합당 후, 통일민주당(약칭, 통민당 당시 총재 김대중)과 꼬마 민주당
( 김영삼 총재가 삼당합당 한 후,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의 노무현 의원을 포함한 합당 거부파)
호남과 서울에 지지기반을 둔 야당과, '부산은 본디 야도(野都)다' 며 경남 야당을 외친 현역 의원 5명 가량의 야당
두 당이 지분을 50대 50으로 합당을 했지요.
그게 현재 열린민주당의 중시조 정도 되는 정당....
(나중에 한 번 찢어지다가 (국민회의, 민주당) 도로 합치죠.)
(현 민주당이 스스로, 자유당 시절의 민주당의 적통을 잇는다고 자부하고 있으니 그 민주당을 시조라고 하면,
김대중 총재와 이기택 대표가 합당한 그 민주당을 중시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여하튼 합당 당시 비화
(이념이 아니라 공학적으로) 당세, 국회의원 수만 놓고 보면,
지금의 국민의힘에 해당되는 제1야당과 정의당 정도 되는 소수 야당이 합당을 하는데
지분을 절반 씩 나눌 정도로, 김대중은 '호남당 낙인'을 벗어나고 싶어했지요.
(합당을 통해 '민주당은 부산경남의 민주화 인사들도 수용한 전국구 정당이다.' 라는 이미지가 필요)
더욱이, 꼬마민주당은 그 정도 국회의원수(5명)를 유지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무슨말이냐면, 김영삼 총재의 삼당합당으로 부산경남의 민심은 민자당으로 급속히 쏠리거든요.
즉, 꼬마민주당 소속 현역 의원들도,
'다음 총선에서는 우리가 다시 국회의원 되기 힘들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죠.
(실제 결과 또한 그러했음)
여하튼 합당 조건으로 이기택 대표는 지분 50대50을 요구하는데,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며 김대중 총재는 망설입니다.
그 때, 정치 경력이 지금의 김남국 의원 정도 되는 소장파 의원이
'이 정도 수용 못하면 합당 못합니다'라며 소리를 지르며 압박합니다.
그 소장파 의원은 사실 단순한 소장파 의원 이상이었던 것이,
5공비리 청문회에서 맹활약을 해서, 전국구 스타 의원이었죠.
바로............노무현 의원.
김대중 총재는 놀란 듯 그 의원을 바라보고 잠깐 묵묵히 있다가
과감히 그 요구를 수용합니다.
(이 일화의 출처, 노무현 저 '여보 나좀 도와줘')
김영삼을 '탁월한 정치인', 김대중을 '훌륭한 정치인'으로 비유하면서
이 일화를 소개했었죠.
김영삼은 정치인으로서는 탁월한데 과연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느냐? 이 부분이 아쉬웠고
김대중은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느냐?는 사상이 돋보였고, 식견이 훌륭한 만큼
어떤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하기가 어렵지만, 일단 설득하면 아랫사람의 의견도 과감하게 수용했다고.
본인이 생각해도 무례했다며, 그 일화를 '당랑거철'에 비유했었죠.
(제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관측통들 풍문에)
사실 삼당합당 당시 이기택도 김영삼 총재를 따라 민자당에 합류하려고 했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단, 노무현 등 도저히 '야합은 동참 못한다.' 고 생각한 소신파 의원들은
아직은 정치 경력에 있어 중량감이 없었고.....
(지금 보다 더욱 대표적 인물을 중심으로 정당의 인지도가 좌우되는 상황인지라)
대표급 얼굴이 필요했던 소신파, 소장파 다섯 의원들은
이기택을 설득해서........잔류시키고 대표로 앉혔던 것이죠.
여하튼, 조중동은 (합당 후) 이기택 민주당 대표의 '몽니'는 모르는 척 하고
'봐라. 이기택이 전라도 당 들어가더니, 저렇게 전라도 정치인들에게 핍박받는다',
'저렇게 서러워 한다' 이런 이미지 만들기에 집중합니다.
(이기택도 이런 조중동 논조를 내심 즐기는 듯한 모습)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당시 유동근씨가 광고한 건강음료의 광고카피
'샐러리맨은 쉬고 싶다. 피곤하니까'....에 빗대서
중앙일보 만평가 김상택씨는
(대표 명패를 김대중 앞에 내던지며) '고용사장은 그만 두고 싶다. 서러우니까'
라는 만평을 (최대한 김대중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며) 그리기도 했었지요.
하나하나 떠올리면 말이 길어지지만,
'92년 대선 실패 후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했는데 민자당은 계속 김대중을 공격합니다.
(김대중과 호남을 하나로 묶고 공격하고 고립시킴으로서,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나머지 지역을 자신들의 표밭으로 만드는
""" 자칭 """ 보수들의 전통적 레토릭은 지금도 계속 되지요.
그 레토릭을 '밥상머리 교육'으로 이어받은 젊은이 집단이 바로 '일베'
깨놓고 말해서, 일베에 경상도 출신 젊은이들 비중이 높아 보이는 것이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함.
여하튼, 민자당이 은퇴 선언을 한 김대중을 계속 해서 도마 위에 올리는데,
이기택 대표는....... (설령 '불감청고소원'일 지언정)
자당 출신 인사에 대한 계속 되는 공격에 당의 대표로서
형식적일 지언정 어느 정도 받아치는 논평이나 제스춰를 해 줄 법도 한데
오히려 그 상황을 대놓고 즐기는 모습을 보이고,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당 대표가 뭐하는 거냐?'는 반발을 했지요.
그럼 다시....'고용 사장은 서럽다' 프레임 (조중동과 이심전심 협업)
'나 나갈까?' (본인이 나가면, 민주당은 도로 '호남정당' 낙인 강해진다..는 압박)
그렇게 속으로 곪고 곪아 터진 것이, '지방선거 돈봉투 파동'
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를 놓고 하던 당내 경선,
이기택 계열 인사인 장경우 후보가 돈봉투를 살포하는데
왠걸, 이걸 적발해 낸, (김대중이 밀어주던) 상대 후보 사람들이 먼저 두들겨 맞음
(언론사 특히 자칭 보수 언론은 '각목들고 상호폭행'에 방점을 둠
민주당을 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인과 언론사에게는 부정적 이미지 씌우는데
이런 호재가 없었음)
당장 중요한 선거가 코앞이니 '민주당' 이름으로 함께 선거를 치루웠지만
결국 분당
이 분당 결과가 ....새정치국민회의와 (도로 꼬마)민주당.
그런데 분당 방법이 주류(동교동계 등)가 비주류(부산경남 소장파 의원들의 얼굴 마담인 이기택)
를 출당 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류가 집단탈당을 해버림
재미있는 점은 김대중의 적극적 구애로 정계에 입문, 서울시장이 된 조순씨는
이 국민회의로의 집단탈당에 동참하지 않음.
(조순 당시 서울 시장에 대한 비판이 아님.
민주당 지지자까지도 '집단 탈당은 너무 무리한 방법이다' 비판이 심했음)
형식상 민주당의 당적을 지킨 이기택의 민주당은
결국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당적을 둔......민자당에 합류
(그 결과로 '실질적으로는 동교동계가 마련했던' 자산(민주당 당사 등)도
민자당 소유가 됨. 또한, '민주당 소속'으로 정치를 시작했던 조순과....그 보좌관 출신
"정미홍" 씨도 자연스럽게 보수정당 인사가 됨)
문제는............... 당시 노무현씨는 (재선에 실패했던 상황이었으니, 고인을 자연인 명칭으로 ㅠㅠ)
다시 '도로 꼬마민주당'을 꾸려서 남게 됨.
도로 꼬마민주당은 어찌어찌......결국 김대중의 국민회의와 합당
김대중 총재는 다시 '호남정당' 이미지에서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을 시작했던 것.
도로 꼬마민주당과의 재합당과 더불어 다수의 인사들 영입을 시작함
이렇게 만들어진 정당이 '새천년민주당'
(사실, 뒷이야기로는 이기택과의 악연(?)과는 무관하게 예전부터 노무현 후보를
무척 아끼고 또 탐냈다(?)는 말이 무성했음.
삼당합당 전인 1988년 5공비리 청문회에서
김영삼의 민주당(신한민주당)과 김대중의 평민당(평화민주당)은 선의의 라이벌로
민정당을 함께 압박하는 정황이었는데
당시 돋보이던 초선의원들이 신한민주당의 노무현 의원, 평화민주당의 이해찬 의원
하지만, 전국적 찬사와 인기는.....노무현 의원이 단연 으뜸.
즉, '왜 평민당에는 저런 인물이 없냐? 옷은 좋다지만 (김대중이 총재라고 하지만)
옷걸이가 영 시원치 않다. (소속 의원들)'고 핀찬을 듣는 상황에서도
김대중 총재는 노무현 의원과 마주칠 기회가 있으면, 환하게 웃으며 진심으로 응원했다고 함.
( 노무현 저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옴)
여하튼 다시....... 꼬마민주당과의 재합당 + 인물영입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 시기에 정치에 영입한 인물들이
고 김근태 의원과 이종찬 (김영삼의 토사구팽 후 갈길을 잃었던 상황)...
이걸 두고 호사가들은 '좌근태 우종찬'이라는 말을 만듬.
(김대중 총재가 포용할 수 있는 이념적 스펙트럼이
진보계열로는 재야인사 김근태 씨, 보수계열로는 (당시 기준으로는 합리적 보수 소리 듣는)
이종찬까지 라는 말)
현 법무부장관인 추미애 판사,
(강금실 판사도 영입하려고 했는데, 강금실 본인은 고사하고 추미애를 추천했다는 후문)
나중에 정풍운동을 주도했던 정동영............그리고........이낙연
그리고, 지금은 50대가 된, 386 (당시 30대에 80년대 학번인 60년대 생)등등
(비슷한 시기에 '정풍'이라는 말이 두 번 등장하는데
여기서 정풍운동은 '낡은 정치행태에서 벗어나자'는 구호로 일어났던 당내 개혁 운동
정동영 의원이 주도하고, 추미애 의원이 호응하고 다수 386(지금의 586)이 동참했던 운동
이 정풍운동으로 민주당의 제도가 정비되고, 대한민국 정당사 최초로 대통령 후보를
'국민경선'을 통해 뽑게 되며............ 그 결과가 노무현 대통령 후보.
이때 물먹은 이인제는 또 탈당......철새 이인제의 탄생)
2002년 대선정국에 등장했던 '정풍'은 6개월 가량 잠깐, 하지만 강하게 일었던
정몽준 의원에 대한 인기를 말함.
정동영의 정풍운동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노무현 대통령 후보까지 이어졌다면,
정몽준 바람을 뜻하는 정풍으로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입지가 흔들림.
여하튼, 동교동계는 정풍운동으로 일격을 맞고도 정신을 못차린 듯
패거리 기질은 계속 되고, 급기야 정식절차를 밟은 대통령선거 공식 후보도 흔들기 시작.
이것이 바로 정풍(2002 월드컵을 타고 일어난, 축구협회회장 정몽준 의원에 대한 순간적 인기)
을 등에 업은................후보 흔들기.
'지름길을 모르면 큰 길로 가라. 큰 길을 모르거든 직진하라'는
이낙연 당시 대변인의 명언도 이 때 나왔었고,
돼지엄마 추미애 의원은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는 동교동계 의원들을 매우 날카로운 어조로 비판하며 노무현 후보를 지킴.
나중에 탄핵 동참으로 인심을 크게 잃었지만.
(추미애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동참하게 된 사정은 이야기가 길어지니)
단 10년 정도의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억이 나는 대로 대충 정리해도
이렇게 참 복잡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