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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성장 수기 □
개척에서 성공까지
- Tommy Reid -
현대목회 (1982.5)
“토미 목사, 만일 내가 도시에 교회를 짓는다면 벽이 없는 교회를 짓고 싶어요.”
제 1 장 미래에 대한 묵시
나는 부흥회가 한창인 가운데 앉아 있었다. 1962년의 일이었다.
한국 전주시에 있는 Y 장로 교회의 큰 성전은 오순절의 열기가 휩쓸고 있었다.
지난 몇 주째 나는 아버님과 함께 한국의 전역을 누비며 5개 대도시에서 대부흥 집회를 열어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하는 일을 축복하사 놀라운 치료의 기적과 열광적인 성령충만을 허락해 주셨다. 온갖 종파를 망라한 수많은 교인들이 방언을 하며 성령의 은사를 행사하였다.
이 특별한 날 밤에 나는 강단에 앉아 어떤 목사님이 많은 교인들을 찬송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의 얼굴은 감동으로 차 있었다.이때 갑자기 희미한 환상이 내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에 있던 교인들과, 찬송 인도자가 사라지더니 이상한 충격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눈알을 굴리며 감았다 떴다 해 보았으나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얼굴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한국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교회 안은 서양 사람들의 얼굴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손뼉을 치고 찬송을 부르며 굉장한 열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나는 찬송을 인도하는 목사님을 보았다. 환상 속에 나는 그가 카톨릭 신부님이 입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나는 이 장면이 나의 고향 도시인 미국 뉴욕 주 버팔로우(Buffalo)시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미래에 대한 묵시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음성으로 내 마음 속에서 말씀하였다.
“토미야, 나는 네가 전에 이룩한 것 이상으로 버팔로우 시에서의 사역을 성취시켜 주겠다.”
그 순간 묵시는 사라졌다. 나는 다시금 한국의 전주 시에 돌아와 있었다. 나는 몹시 어리둥절 했다.
이번 일은 하나님께서 전에 내게 주시곤 했던 것과 같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미래의 사역을 과거의 것보다 더 크게 이룰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아직 30이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이미 사역을 크게 성공시켰다. 한국에 오기 전에 나는 필리핀에서 아버님과 함께 가장 많은 성도를 거느린 교회에서 목회를 해왔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사역을 통해 나는 미국과 전 세계에 걸쳐 대부흥 성회의 많은 군중들 앞에서 설교를 해왔다. 나의 명성은 하나님의 성회 교단에서는 확고 부동했다. 나의 사역은 굳건히 서 있었고 또 나는 내 성공을 자부하고 있었다.
나는 내 마음 속에 있었던 묵시를 정리해 보았다. 이 무슨 어리석은 일인가? 버팔로우라니? 버팔로우 시에는 우리 교단 산하의 교회로서는 단 하나도 큰 것이 없었다. 나의 입장에서 볼 때 버팔로우는 많은 시간을 드릴만한 고장이 못되었다. 나는 어깨를 움추리면서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어리석은 생각인듯 하면서도 이 묵시는 떠나려하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부흥회를 마친 나는 나의 전도 활동 본부가 있는 버팔로우 시로 돌아왔다. 나는 곧 이곳에서의 목회 가능성을 검토해 보아야 겠다는데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교단의 간부가 남 버팔로우 성막교회(South Buffalo Tabemacle)가 문을 열었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
“그 교회에서 시무하시는 것이 어떻겠읍니까?”
그러나 나의 어머님은 걱정되는 음성으로 “자리가 텅텅 비었는걸.”
어머님의 예리한 분석은 정확했다. 성막 교회는 좌석수 110개로 만족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별 신통한 상이야 없겠지만 내 체험과 이만한 솜씨라면야…” 하고 나는 자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차고를 정리하고 쓸데 없는 잡동사니를 실어다 버리려고 차에 실었다.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에 내 생각을 정리해 주시고 그 장막 교회를 맡으라는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도 수 38명의 교인들 앞에 서기를 자원했다. 불운한 시작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버팔로우 시에서의 사역에 많은 것을 약속해 주셨고 나는 그런 약속을 바탕으로 밝은 전망을 마음에 품은채 일에 착수하였다. 어쩐 일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버팔로우 시에서의 사역이 내 생애의 절정을 이루게 해 주실 것만 같았다. 나는 비통한 실망을 앞에 놓고 있었던 것이다.
잠언 29장 18절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라고 했다.
묵시란 반드시 번개불이나 움직이는 그림처럼 오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단순한 개념이나 관념일 뿐이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역 하나 하나에 하늘의 계획을 갖고 계시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사역이 성공하고, 모든 묵시가 충족되기를 원하신다.하나님의 묵시는 모든 사람들의 사역이 결과적으로 아무리 자기 중심에 흐를지라도 그 사역의 시발이 된다. 그 균형을 잡기란 애매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교회를 시작하라는 묵시를 주시며 선교 프로그램이나 사역의 방법을 개발하라는 묵시도 주시는데 그런 묵시를 받은 사람은 흥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거룩하고 의롭게 출발한 사역은 어느듯 이기주의로 변질된다. 사람을 통해 이루려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설교자를 통해 전해지는 과정에서 인간의 계획으로 전락 한다. 모든 목회자들은 이런 징후와 싸운다. 사도 바울 역시 자기 자신과 싸웠으며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신을 “악한 자”(Wretched man)라고 불렀다.
나 역시 그런 징후와 싸웠는데 그 징후는 고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묵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묵시를 사람에게 위임하되 아무리 인간의 본성이 원한다 할찌라도 인간이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
내가 한국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날 밤 내게 서양 사람이 꽉 찬 교회의 환상을 보여주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내게 사역에 대한 묵시를 주셨던 것이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 속에 자기의 약속을 인치셨다.
7년에 걸친 버팔로우에서의 나의 사역은 벅차고 어려운 것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여러번 있었다. 앞으로 언젠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룰 수 없는 이상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날 것만 같았다. 나는 그런 식의 생각으로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매일 그런 환상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7년 동안이나 교회는 침체를 계속했다. 이쯤되자 나는 지치게 되었다. 온갖 노력을 다한 끝에 나는 마침내 손을 들게 되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고 내 영적인 귀에 말씀을 주시고 내 전 사역의 방향을 바꾸게 해주셨다.그 후 몇 달 동안 하나님께서는 내게 세가지 놀라운 교훈을 주셨다. 그것은 이상스럽고 소란하기도한 몇 가지 잇달은 사건에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보여 주심으로서 나타났다.
나의 사역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완전한 끝장에 왔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나의 지난 세월 동안에 배울 수 없었던 것, 즉 사역의 진정한 의미, 교회 성장의 참된 비결, 또한 몸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에 관해 배우게 되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나의 기성 관념을 하나씩 하나씩 뽑아내시고 새로운 관점의 수립, 사역의 새
로운 유형을 뼈아픈 교훈을 통해 가르쳐 주셨다.하나님께서는 손수 교회 확장을 위한 모퉁이 돌을 놓고자 하셨던 것이다.
제 2 장 강대상을 등지고 서서
나는 여러분들이 과거의 내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를 희망한다.나는 전도자였고, 설교자, 부흥사였는데 나는 나의 “부흥성회”가 최고였음을 느꼈다. 그것은 오늘날의 나의 목회와는 요원한 것이지만 부흥사로서 나의 첫번 째 16년이 성공하였음을 말해준다.
오랫동안 우리 교파의 교리는 다음과 같은 성구이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4:6) 나는 이 성구를 아마도 수 백번 수 천번 인용하였을 것이다. 나의 설교 준비 묶음은 이 하나의 귀절을 토대로한 설교들로 불룩하다. 그 귀절은 교회성장을 하는데 있어 좋은 슬로건(slogan)이다.나는 또한 분명히 그 귀절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가운데서 성령이 함께 함으로써 그분의 교회를 세우셨음을 믿었다.
그러나 나는 그 귀절을 설교에 인용하고 또 믿었다고 해서 내가 그것을 실천한 것은 아니었다. 스가랴 4장 6절의 말씀은 실제로 나의 매일 매일의 목회에서 살아있지 않았다. 그것은 구체적인 것이 아닌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사실상, 나는 나의 설교에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주심을 느꼈으며 또한 기름 부어진 나의 설교로
많은 성도들의 영혼이 구원받고, 그들에게서 성령충만함을 보았다.
반면에 나 자신의 힘과 능은 나를 강대상에서 설교할 수 있도록 하는 대들보로서 남아 있었다.
나는 매주 많은 사람들을 끌어드리려는 나의 열망을 충족키 위해 내가 해야할 설교를 요약하며
꾸몄는데 설교는 대부분 상투적인 흥미로운 글과 성도들을 매료시킬만한 사건들로 가득차게 했고 이것들은 모두 나 혼자서 조심스럽게 준비했다.
나는 유명한 사람들의 설교도 세심하게 듣고 외웠다. T. Dewitt Talmage, Aimee Semple Mc Pherson과 그외 많은 사람들이 바로 내가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었던 분들이다.나는 설교 때마다 강단에 서있는 내게 성도들이 열중하길 바라면서 성도들이 과연 내 설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나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의 여부를 관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함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될텐데 내 마음은 기도할 때마다 다른것을 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성도들로부터 환심을 사는 일이었다. 기름부음 받은 주의 종들이 영혼 구원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단순한 인간적인 방법으로 성도들을 끌어 모으려는 것에 촛점을 두는 것은 나 말고도 요즘 목회자들이 무의식 중에 흔히 짓는 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에게 계속적인 축복을 주셨다.
그러나 내가 이런 모든 일들을 위해 애쓴 모든 보상은 강단에서 나를 나타내 보이므로써 이미 소멸되어 버렸다. 나의 설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뜻대로 주관하며 내세운 것이었다.
마치 스위스제의 정확한 시계처럼 내 설교는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시간가는 것조차 잊게 했다. 많은 여러 장소에서 부흥회를 가질 때마다 나는 뛰어난 화술로서 영적인 것들을 진술했고 저돌적이며 생기에 넘쳐있었다. 나는 설교가였고 또한 설교가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부흥회가 끝날 때마다 나는 텅 빈 내 영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침내 어느날, 공허로움 만이 내 영혼 속에 가득찬 나는 공식적인 모습 뒤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다.점점 나의 영혼은 병들어 가고 있었고 불안감이 항상 나를 짓눌렀다.
아마도 나는 지적인 탁월성을 갈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 교단인 오순절에서 내세우는 반 지성주의가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나는 방언이 파급되기 훨씬 전의 구식 오순절 파를 믿으며 자라났는데 그 때 나는 “미친 사람”이라는 신랄한 별명이 내게 주어지는 것을 두려워 했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전도 단체의 존경받는 한 일원으로서 이른 바 나는 체면을 손상시키는 그런 이름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방언을 믿고 있었고 계속 마음 속에서 열망했었지만 어느 누가 내게 무엇을 믿느냐고 물어보면 나는 사실을 숨기고 나의 교리는 남부침례교와 같은 것이라고 대답하여 가능한한 내가 방언한다는 것을 숨기려 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오순절 교파를 따르기 보다는 유명하고 잘 알려진 침례교를 따른다는 것이 다소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카리스마 운동이 1970년대 초기에 일어났을 때,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각 계에서 몰려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오순절 파가 성행했고 이 교파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카리스마적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그런데 갑자기 자유주의인 가톨릭교에서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순수한 축복이 여러 교파에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거주하는 버팔로우의 한 귀퉁이에서도 지방에 있는 가톨릭 사제가 주일 날 카리스마적 기도 모임에서 500여명 이상이나 되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와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가끔 나는 강대상에서 그 사제를 향해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는 로만 칼라와 수단을 입은 가톨릭 신부에 불과했다. 긴머리에 청바지를 입고 개혁을 주장하는 Jesus people은 버팔로우의 성역에서 거슬리는 요소였다. 그들이 이 지역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 나는 순복음 실업인도 버팔로우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부흥강사 몇몇 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임이 세월이 흐를수록 경이적이 되어간다고 했다. 물론 나는 한 번도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방법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그들을 조소하기까지 했다.
“가톨릭 카리스마나 Jesus people 같이 순복음 실업인들은 세상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라고 나는 나의 교구민들에게 말했다.
게다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오늘날 교계에서의 목회 놀이다.’라고까지 생각한 나는 우리 교회의 버스 한 대를 구입함과 동시에 버스를 타고 다니며 전도할 목사를 고용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외 다른 버스 한 대와 좀 더 효율적이 될 수 있을 듯한 트럭도 한 대 구입 했다. 그러면서 나는 주일학교를 장려시키는 일, 전도할 수 있는 매개체의 사용과 교회 행정에 관한 세미나, 혹은 회의에 참석했다. 교회 성장에 대한 일년 예산을 3천 달러로 선정하고는 뉴욕주 전역 기독교 라디오 방송망을 통해 매일 15분씩 말씀을 전파했고 주일학교를 장려하기 위해 개조용 마차를 타고 인디안 지역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리곤 큰 풍선 속에 인쇄된 광고를 넣어 풍선을 터트려 떨어지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교회의 전도사들을 버팔로우 석간신문(Buffalo Evening News)에 광고했다. 그것도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땅 덩어리 하나라도 더 차지해서 다음 개척자를 막자는 것이었다.
또한 이웃 감리교인들 몇몇과 무엇인가 잘못 인식된 가톨릭 카리스마들을 끌고와서 그들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우리 교회라는 것을 깨닫게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버팔로우에서 우리 교회가 가장 크게 되기를 원했다. 바로 이것이 영적인 세계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었다.
내가 신학대학을 다닐 때 학교 교우들은 중점적인 목표를 교회 성장에 두고 있었다.
오늘날 교회의 영적인 성장은 애송이 목사가 갖는 세 번째 관심이 될 수 있다.
차차 시간이 흘러 원하던대로 가장 많은 우리 교파의 출판물과 가장 많은 성도, 가장 큰 교회 건물, 그리고 많은 헌금이 들어 옴으로서 나는 교회성장에 대한 의식을 어느 정도는 없앨 수가 있었다.
물론 내가 거대한 건물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내게 남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 짧은 성구를 인용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의 인생이나 사역에 그와 같은 순수한 교리를 적용할수 없었다는 것은 사실 나를 몹시 괴롭혔다. 그러나 누구도 그와같은 기준에 맞추어서 살기란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들면 나는 내 이웃이 캐딜락을 그의 차고로 몰고가는 것보다 그것을 내가 가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회 생활은 나로 하여금 지방에 있는 사람들보다 뒤떨어지지 말아야 하며 그들을 능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끔 했다. 나는 계속해서 보다 좋은 집과 더 좋은 사회적 지위를 갖기 위해 배회했었다.
분명히 나는 나의 인생에서 두드러지지 않으며 별로 알려지지도 말고 오직 남의 유익을 구하라 하는 교리에 그다지 깊은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사역에도 마찬가지였다.나는 내 이웃의 목사가 어떤 부흥회나 가두 시위를 벌일때 쉽게 그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으며 더우기 그가 우리 교파가 아니라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오직 나는 나의 건물을 짓는 데만 열중했다.
내가 기획부 임원들과 함께 한 새로운 성장을 위한 안(이것은 버팔로우에 있는 다른 목사의 비용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을 계획할 때, 가끔씩 그 구절이 나를 자극했다.내 인생을 통해 훈련된 본능으로 하여금 우리 교회가 숫자적으로 성장하는 것만이 내가 목회자로서 성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또한 나는 우리 교회가 이 도시에서 주일학교 학생 수가 가장 많고 주위에 있는 다른 교회보다 선교회에 더 많은 것을 기탁하며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건물과 어느 교회보다 더 많은 버스를, 더 많은 예산을 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날을 몹시도 손꼽아 갈망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임원과 내가 모든 계획들을 세심하게 설정해 나갈 때 우리는 그 때마다 우리 계획에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있기를 열심히 기도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나로 하여금 그것들을 역행하도록 종용했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증가하였다. 우리가 열심히 이웃을 돌아다니며 권유함으로써 새로운 식구들을 데려 올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의 성장이 잠시 중단되었다. 그것은 계획된 전도 집회의 실패로 증가 숫자를 표시하는 표시판의 숫자는 요동을 하였으며,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 갔다. 7년이란 세월 동안 거의 성장추세를 보지 못했다. 나는 교단회의에서 우리 교회 증가 수치의 퍼센테이지를 인용할 때 그 정도의
증가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의 내적 영적인 싸움에서 나는 지고 있었다.
나는 자주 ‘아마도 내가 버팔로우로 옮겨온 것이 실수였는가 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아닌가 보다’ ‘애초의 생각 그대로 버팔로우에 대한 묵시가 한국 음식을 먹음으로 순간적으로 일어난 과실이었다 보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때부터 내게 부득이하게 주어진 전도사로서의 명성이 떨어져 나갔다. 비록 내가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함으로써 대중을 모을 수 있는 기교를 사용했다 할지라도 목회자로서 교인수를 늘리려하는 나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그후로부터는 모든 나의 방법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부흥되지 않았다. 대신 버팔로우의 다른 곳에서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커다란 일들이 일어났다.
제 3 장 채찍에 끌리는 인력거
엘리자베스 여왕 대로(Queen Elizabeth Way)는 내가 런던과 온타리오, 버팔로우 사이를 차를 몰고 달리는 날 밤 마치 영원을 향해 뻗어 있는 길 같았다.우리 교회는 교회 건축 계획을 추진 중에 있었으므로 나는 시간 나는대로 자주 건축 대지를 보러 다녀야 했다. 그러나 이번 주일에 나는 런던시에서 열리고 있는 박람회의 야외 집회에 주강사로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몇 차례 버팔로우에 돌아오기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 대로를 밤 늦게 달려 와야만 했다.
야외 집회는 그럭저럭 잘 되어가고 있었으며 사람도 꽤 모여드는 편이었다.그뿐 아니라 우리 교회 건축계획 역시 잘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일인지 나의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갈급함으로 차 있었다. 나의 영혼은 어딘지 모르게 목마른 데가 있었다.그날 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나는 졸음이 오는 것을 떨쳐버리려고 라디오의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흥미를 줄만한 프로를 찾고 있었다.
다이얼을 돌리던 중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명한 여성 전도사 캐트린 쿨먼이 캐나다 출신의 라디오 대담자와 어떤 프로그램에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내용이었다.그들의 대화를 듣느라고 졸음은 약간 덜 했으나 피로는 여전하였다.
그러자 그때 갑자기 캐트린 여사가 한 말이 피곤한 중에도 내 정신을 차리게 했다.
“저는 강단에 설 때마다 수 천 번 죽습니다.”(Every time I go to the platform, I die a thousand deaths)라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이 말에 움칠했다. 캐트린 쿨만이 도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가? 대중 집회가 겁나서 그러는가? 조용하면서도 진지한 음성이었지만 이 음성은 그녀가 마치 라디오에서 뛰쳐나와 내 뺨을 후려치기나 하는 듯 했다. 캐트린 쿨만은 지난 수 년 동안 수많은 대중들 앞에 서왔다. 그녀의 말씀 증거는 아름답고 내용이 뚜렷했으며 균형이 잡혀 있었다.
나는 이토록 유명한 복음 전도자가 전국을 상대로 한 방송에서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예배때마다 겁을 먹는다고 하는 말을 듣고 놀랐다. 나는 그녀의 말 뜻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격언 같이 들리는 “수 천 번의 죽음” 중 단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다. 나는 설교를 좋아하며 대중 사역에 관한한 꽤 성공한 셈이라고 생각해왔다. 강대상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내 몸에 아드레날린을 촉진시키려는 개인의 생리적 노력에 불과했다. 나의 사역에는 캐트린 쿨만의 모습을 닮은 데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강단에 서서 그렇게 움추려야만 하는가? 그녀가 정녕 그렇다면(물론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녀의 사고방식은 나의 건과 전적으로 다르다.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이런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저는 천 번 죽습니다.”라는 말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갖지 못한 투시력을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때 나는 내 자신이 주님 앞에서 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내 속에 성령님에 대한 싱싱한 부르짖음이 일고 있으며 버팔로우에서의 나의 사역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된 자신을 발견하였다.
“토미, 그녀가 한 말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마. 어느 날엔가 너는 그녀가 겪은 것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캐트린 쿨먼의 의미심장하면서도 간단한 이 한마디 말은 나의 생활을 급격히 바꾸어 놓았다. 나는 근심에 찬 마음으로 곧장 성경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즉 사역에 대한
새로운 관점, 내 인생의 사업에 대한 새로운 전망에 관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캐트린은 자기의 사역을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청중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인간적인 능력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바로 이러한 무능력은 나의 경우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토미 리이드라는 인간의 능력이 매우 쓸모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사실은 우월감이었다. 나는 대교구의 행정 업무도 거뜬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나는 스스로를 능변가라고 생각했고 교인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
나는 캐트린을 바라보고 나서 나 자신을 반성했으며 캐트린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사역에 성공하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고 수고하지 않는다. 그러기보다 도리어 그녀는 청중들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전사역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성령님께서 담기에 알맞는 그릇이 되도록 자기를 완전히 비운 채 하나님께 드렸다.
내가 아름답고 균형잡힌 사역이라고 해석한 그의 사역이 실은 성령님께서 캐트린 쿨만을 통해 역사하신 것에 불과하다. 캐트린 자신은 그 사역에 책임이 없다. 그녀는 자기의 성회가 성공을 거둔데 아무런 힘도 보탠 것이 없다. 그녀는 하나님께 그토록 굴복하였으므로 예배 때마다 죽고 또 죽고 했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이 그 성회를 성공시키고 무엇인가 유익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녀 자신이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삭을 바치듯이 자아를 바쳤다. 아브라함처럼 그녀는 자기의 믿음을, 자기 인생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위에 두었다. 아브라함은 죽음의 제단 위에 자기의 외아들을 드릴 때 절대적인 자아 포기를 선언했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소유라고 생각했다.
소유권의 이전이 일단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기 시작하셨다. 그로부터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원한 아버지로 세워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캐트린 쿨만이 자기의 전 생애와 사역을 하나님께 드리자 하나님께서 그녀의 사업을 놀랍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축복하기 시작하셨다.
그녀가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치료의 역사를 행한 복음 전도자가 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성공은 결코 그녀의 것이 아니었고 그녀는 다만 성회가 있을 때마다 첫 번의 죽음을 죽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소유에 대해 축복하셨던 것이다.
캐트린 쿨만은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소유한 것에 대해 축복하신다.”는 영원한 원리를 찾아냈다. 진정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소유한 것에 대해서만 축복하시는데 그것은 개인일 수도 있고 한 가정이나 교회나 또한 한 국가 전체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축복하신다.
성령님께서 이러한 원리를 내 마음 속에 처음으로 일깨워 주어 나는 눈을 바로 뜨게 되었다.
나는 강대상에 서서 도대체 누구의 성공을 추구하고 있었던가? 그것은 토미 리이드의 성공이었다. 내가 교구 안에서 드높여온 명성은 누구의 것이었던가? 토미 리이드의 명성이었다.
내 사역은 내 자신의 것이었고 내 손으로 꾸며낸 것이요 교만을 위한 자기 만족의 근거가 되었을 뿐이다. 나의 이삭은 내 자신의 사역이었다. 물론 나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안 것처럼 내 사역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역을 통해서 태어난 자손을 하나님께 한 번도 바친 일이 없었다.
내가 지금 범하고 있는것은 성경 말씀에 나타난 하찮은 특징이 아니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확고 부동한 원리를 어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가운데 자기 백성에 대해 이러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되돌려 바쳤고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를,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예수님은 자기의 온 생명을 드렸다. 그러한 본보기는 끊임없이 이어져 간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소유하신 것에 대해 축복하셨다.
자기 중심으로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 보는 가운데 나는 내가 교회를 위해 해온 모든 것에 대해 일종의 정신적 구역질을 느끼게 되었다. 문제의 중심에서 볼 때 나는 정말 “나의 교회”(my church)를 만들어 왔다.
남부 버팔로우 성막교회(South Buffalo Tabemacle 뒤에 순복음 성막 교회 : Full Gospel Tabemacle로 개칭됨)는 내 것이었다. 신도들은 “나의”(my) 신도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시야를 더 넓혀 주셨다. 그리고 보니 내가 앓던 병은 세계 도처의 교회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임을 알게 되었다. 목회자란 목회자는 “자기의”(his) 교회라는 소유권 주장을 해왔다. 슬프게도 상황은 내게 분명해졌다.
수많은 사역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충분히 받지 못해 마땅히 받을 만한 축복을 제대로 받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 사역에 주권을 행사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목회자들 역시 내가 그런 것 같이 그들 자신의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소유하지 않은 것에 대해 축복하시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세상을 축복하고 계시다. 하늘의 창문은 인간의 자기 중심적 태도 때문에 닫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세운 원리의 범위 안에서 역사하시며 우리가 자기의 사역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한도 내에서 축복하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재능과 능력, 우리의 목회 계획과 기술, 교회와 모든 사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한 사람의 손은 묶여 있다.
나는 나의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내가 강대상에서 하는 일은 성도들과 하나님의 축복의 중간에 서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내 능변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채찍에 몰리는 인력거를 그리듯 어중간한 사역에 그럴듯한 장식물처럼 설교를 꾸며왔다.전등불 밑에서 지내온 많은 시간들이 이제 하나의 낭비처럼 보였으며 하나님께서 소유하시지도 않은 것에 대해 축복을 받아내려고 애써온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설교 때마다 나 자신을 배우고 그 자리에 성령님이 오셔서 나를 통해 빛을 발하게 하는 대신 나 자신을 채우는 것으로 장만해 왔다. 나는 내 사역을 손아귀에 꽉 움켜진 채 빠져 나가지 못하게 했으며 그것이 침체되는 것을 보고 안타까와 하고 한 가지가 다른 한 가지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 못한채 지내 왔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준비한 미끈한 설교요지를 놓고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 순간에 상기되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그토록 손쉽게 그리고 전문가답게 꾸며내곤 하던 메시지에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주시도록 열심히 간구하였다. 그러자 성령님께서는 어떤 특이한 장면들을 통해 내가 이삭을 드리지 않음으로써 놓쳐왔던 여러가지 사역의 징표들을 보여 주셨다.
이제 나의 사역에 관해 내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이 분명해졌다
(나의 사역이란 말이 그렇게도 속된 말처럼 들리게 되다니!).
나의 이삭을 드린다는 것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마음의 변화를 뜻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강대상 위에 오르는 나 자신이 확실히 그리고 실제로 바뀌어야 함을 뜻한다. 내 뱃속 어디에선가 이제 내 마지막 공연은 끝났다고 말하는듯 하다.
쇼는 막을 내렸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맡을 차례이며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장면 장면을 마련하실 차례다.
제 4 장 낙담자로 차있는 세계
내가 차를 몰고 달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내 상각을 완전히 사로잡는 듯 했다. 뉴욕 주 횡단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뻗어 있는 나이야가라 연장선을 달리는 동안 나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나는 “하나님, 주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지 제게 알게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간단한 기도조차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Seneca Street 교차료를 막 지나자 갑자기 시야가 희미해지더니 전면 하늘에 커다란 둥근 것이 나타났다. 나는 우주인처럼 공중을 날으면서 지구를 외계에서 내려다 보는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러자 하나님의 손길 같은 커다란 두 팔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더니 세계를 두 쪽으로 갈라놓고 그 속을 들어냈다. 나는 갈라진 그 세계 속에서 낙담자의 큰 무리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내 영혼 속에 깊은 슬픔이 넘쳐흐르는 것을 나는 느꼈다.
“아들아, 내가 보는 세상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너도 세상을 그렇게 보기를 원한다.”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부드럽게 말씀하셨다.낙담자의 세계에 관한 이 때의 환상은 그로부터 몇 달, 몇 년이 지나도록 나의 생각을 붙드는 중심이 되어왔다. 낙담자의 세계에 대한 환상이 내 생각에 미칠 때마다 지금까지의 내 사역이 서서히 내 앞에 벌거벗은 모습을 들어내 놓았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 환상은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낙담자를 상대로 사역해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사람을 상대로 사역해왔다고 할 수 없을 정도다. 강단에 서서 성도들을 내려다 볼 때 나는 그들을 욕구를 지닌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서 본 것은 죄 뿐이었다. 물론 그 죄는 용서 받아 마땅한 것들이다.
나는 오직 죄에서 구원 받아야할 영혼들, 즉 강대상 위에서 회개한 자의 수를 확인하여 다음 달 잡지에 그 숫자를 발표하는 것만을 생각해왔다.나는 사람을 겉으로 볼 뿐 좀 체로 짐에 눌린 속 사람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죄는 보면서도 그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또한 신도들이 자기의 인생문제에 관해 기도한 것이 응답을 받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본적도 없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서서히 나로 하여금 내 사역의 실상과 내 사역의 모든 방법에 관해 눈을 뜨게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그런 깨달음을 내게 주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성도들에게 형식적인 설교를 했음을 고백한다.
교회의 전도 활동이란 분명히 하나님 왕국에 새로운 결신자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이 문제의 핵심을 “새로운”(new) 것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의 괴로운 영혼이 아버지의 인도에 눈을 뜨자 하나님께서는 문제의 핵심이 “새로운”(new)것이 아니라 “태어난”(born) 것임을 알게 해 주셨다. 나는 출생과정(birth process)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해왔다.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법칙은 땅이 생물을 “그 종류대로”(after their own kind, 창 1:24) 내게 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그러한 법칙에 따라 창조되었고 동물이나 식물 역시 그러했다.
우리가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출생의 원리가 우주적이며 일방적이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출생 원리에 따라 만물을 지으셨다. 결혼은 “그 종류대로” 생산을 가능케 한다. 그런데 부모가 이혼한 가정의 자녀에게 이혼률이 엄청나게 많은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나라도 역시 그 종류대로 생겨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어보라. 당시 백성들은 왕의 특별한 영적 지도력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은 출생원리에 따라 지배되고 있다. 이 출생원리는 모든 다른 원리의 기본이 된다. 즉 씨를 뿌리고 거두어 들이는 원리, 주고 받는 원리, 죄와 사망의 원리 등이 다 그러하다.
교회 역시 출생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나는 나의 교회가 성장을 위해 애써온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열심을 다해 일하기만 한다면 여기 저기서 가정을 교회로 끌어들일 수는 있었으나 새 가정을 교회의 울타리 안에 머물게 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몇 가지 이유로 해서 영적인 성장을 이루거나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가 일쑤다.
이제 그 이유는 내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명백해지고 있다.
교회가 육신적인 수단으로 새로운 결신자를 낳는다면 교회의 좌석은 새로운 결신자로 찰 것이다. 인간적인 방법론과 인간적으로 잉태된 것은 인간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걸 사람에 촛점을 맞추고 예배에 참석하는 신도의 숫자에 신경을 쓰듯 나의 육신적 동기는 육신적 결과를 거두어 드리게 했다. 우리 교회의 성장은 사실이 그렇지만 인간적인 차원에서 밖에 설명될 수가 없었다. 우리 교회는 진정으로 초자연적인 폭발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한복음 3:6) 라고 한 해묵은 성경 귀절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내게 다가왔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방법에 의해서만 태어날 것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육적인 방법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다. 숫자 놀이(number game)는 숫자를 만들어 낼 뿐 부흥은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출생원리의 조명을 통해 처음으로 나의 교회의 계획을 바라볼 때 느낀 체험은 한심스러운 것이었다.“우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 마음 속에 뛰어드세요. 다음은 성령님께서 맡아 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가 오늘날 목사님들과 교회의 일군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태도가 아닌가 생각한다.말은 그럴 듯 하지만 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 말은 하나님의 출생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란 말씀은 인간적 술수로 교회에 끌어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술수이므로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시 127:1)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해서 내 사역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육신의 팔이 얼마나 하나님의 교회 건설 사업을 가로막아 왔는지를 보여 주셨다. 경쟁과 시위와 자선 사업 등 자기를 들어내려는 이 모든 얕은 술책들이 믿음의 눈 앞에 육신의 모양을 들어내 놓았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대부분의 경우 목사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일을 하도록 택함 받았다. 하나님의 장막인, 교회를 운영함에 있어서 우리는 광고매체, 즉 라디오, 신문, 서신 등에 너무 깊이 개입되어 있다. 교회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매달 너무 많은 예산을 이 분야에 쏟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육신적 노력이 얼마나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시작했다.
아직 나는 그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사역자가 광고를 할 수 없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선전광고 없이 어떻게 새로운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노력 없이 어떻게 교회 재정을 확보할 수 있는가?
“주여, 제가 그런 것들을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호소하였다.
나는 귀찮은 현실만이 다가올 뿐 이런 나의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은 받지 못했다. 하나님의 출생원리에서 파생되는 모든 진리가 내 마음을 온통 괴롭히기만 했다. 만일 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를 갖고자 했다면 그것은 내가 성경 말씀을 깊이 파고 드는 동시에 하나님의 성령에 눈을 떠야만 가능했을 것이다.
날이 감에 따라 나는 영적인 회의에 빠졌다. 나의 교회 뿐만 아니라 오늘 날의 교회 전반에 관해 나는 오랫 동안 심각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의 모든 방법 즉, 설교와, 성장 운동과, 심지어 예배 의식에 이르기까지 재검토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의 예배 의식의 어떤 것들은 거의 전적으로 육신적인 기반 위에 세워져 있다. 이런 것들 중에는 흔히 감정적 반응을 얻기위해 고안된 것들이다. 그런 예배에서 얻어지는 것은 감정에 좌우되는 그리스도인 뿐이다.나는 찬송 부르기를 좋아하지만 찬송가의 곡조에만 전적으로 의지하여 찬양드리는 것이 반드시 참된 예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가 성령 안에 살며 성령께 의지해서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감화 감동을 무슨 소란스러운 과정을 통해야만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하나님께서 나의 예배 의식에 관여하기 시작한 후부터 교인들은 손을 들거나 악기의 도움 없이도 참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는 북소리와 오르겐 반주가 멈추면 예배의 분위기가 떨어지고 감정으로 움직이는 그리스도인들은 흥분이 가라앉고 만다. 그런 사람들은 흥분이 가라앉는 것을 마치 영적인 저조 현상으로 착각한다. 이것은 그릇된 일이거니와 오늘날 하나의 공통적인 증상이며 내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사역을 통해 실제로 목격하고 또 그렇게 해온 현상이기도 하다.
더구나 최근들어 유행되고 있는 성령 중심의 예배는 그 기본적인 형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하나의 형식이 되어버리는 듯하다. 노래로서 성령님을 찬양하든가 묵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모두 예배로서 최상의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교회는 거룩한 예배 즉 이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장차 우리가 하늘 나라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나 마찬가지의 자세로 드리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에 우리 자신을 시종일관하게 내어 맡김 없이는 어떠한 예배형식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없음을 뜻한다. 교회는 끊임없이 새로와지지 않으면 안된다.
설교나 예배 의식이 모두 사람의 손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으나 오늘날 교회를 지배하는 것은 전도의 세속화(fleshliness of evangelism) 현상이다. 나는 부흥회라도 나서면 유창하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서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예수님의 위대한 명령을 붙잡고 교회 성장 운동을 고압적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우리 교회 주일학교 프로그램에 예수님의 그런 엄숙한 명령이 반영된 적은 별로 없었다. 기독교계의 대 잡지에서 보다 큰 인정을 받으려는 내 욕심 때문에 나는 이웃 교회 목사님들과의 경쟁 의식 속에 교인들을 들볶아대곤 하였다. 심지어 같은 교단 내의 교회조차 이 “숫자놀이”의 적대자였다.
내가 대중 매체에 깊이 관여하면 할수록 광고물이 예수님의 위대한 명령에서 이그러져 나가는 것을 도와줄 뿐임을 알게 되었다. 대중 매체에 의한 광고는 더 많은 비용을 필요로 했고 그러다 보니 더 많은 헌금과 더 많은 교인이 필요했으며 또 그것을 위해 더 많은 광고를 해야 한다는 무한대의 악순환이 있을 뿐이었다.
영적인 전환은 오직 영적인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도행전에 3000명이 일시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기록은 다락방에 모였던 120문도의 마음 속에 잉태됨으로 가능했다. 놀란 군중들은 120문도를 통해 성령님이 넘쳐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모여들었던 것이며 어부 출신의 베드로에게서 거창한 말씀을 기대하거나 신문 광고에 눈에 끌려 모여든 것도 아니었다. ‘인간의 영적 거듭남’의 과정이 활동을 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과정이 나의 사역이나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사역에 있어서 그저 평범하게 작용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많은 사역자들에게 더 많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관심과 돈을 쓰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는지 물어보라. 아마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내가 버팔로우(Buffalo)라는 자그마한 고장의 교회를 이끌어가기 위해 “달러는 영혼을 뜻합니다.”(Dollars mean souls)라고 옹호하는 것과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이 말은 오늘 날 교회의 신조가 되고 있다. 이 말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만 하세요. 그 다음은 성령님이 맡아주실테니까요.” 하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돈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흔히 사람과 사역 양자의 영적 효과를 그릇되게 만든다. 돈이 정말로 영혼을 구원한다고 믿으면(물론 나 역시 성령님의 창조력은 도외시하고 설교가 영혼을 구원한다고 믿은 적이 있지만) 그 사람은 이미 사물을 보는 관점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더구나 그럴 경우 새로운 결신자는 영적 양식의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거금 모집 운동원으로서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는 괴물(monster)을 사육하는 것과 같은 꼴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명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설교와 예배와 교회 성장을 위한 구상 속에 나타나고 있는 세속화를 특히 내게 보여 주셨다. 나는 이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잘 몰랐다. 나는 신문 광고와 라디오 프로의 출연, 텔레비젼을 통한 설교 계획을 중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갑자기 설교를 중단하거나 교회 예배 순서를 뒤바꾸어 놓는 것도 내게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영적 거듭남’의 원리가 내게 하도 큰 자극을 주었고 지금도 그 원리가 나의 생각의 중심을 잡고 있는 지금 오직 한 가지 해결 방안은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선택 뿐이라고 여겨진다.
제 5 장 성령님과 동행
세번째 교훈은 가장 귀에 거슬리는 것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조용히 다가왔다.
나는 토론토에 있는 기독교 회관에서 집회를 인도하도록 계획이 짜여 있었으나 계획 과정에서 여러가지 장애가 우리 일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집회 준비가 중단되지 않도록 애를 쓴 결과 집회는 시작되었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집회 인도는 나의 토론토 여행의 제2차적 목적인 것 처럼 느껴졌다.
집회는 잘 되어가고 있었으나 어느날 저녁 예배가 끝난 후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은 꽤 깊었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파자마와 슬리퍼 차림으로 내가 머물고 있던 고층 아파트의 발코니로 걸어 나갔다.토론토의 밤은 차갑고 상쾌했으며 넓은 시가가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시야에는 특별한 환상이나 초자연적인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날 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세 번째 메시지는 그 어느 것보다도 나의 사역의 중심을 깊이 찌르는 것이었다.
“내 사역에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는 하지 말아라 토미야, 지금부터는 내 사역의 일부가 되어라.”고 하나님께서는 발코니에서 떨고 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놀란 나머지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나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분부인 줄로 생각해왔고, 나의 계획, 나의 설교, 나의 음악, 나의 전도 매체가 모두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여기에다 빛을 밝혀 주셨다. 나는 하나님을 내 사역 일부분으로 만들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반대해 왔다.하나님께서는 나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시고 버팔로우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셨다. 버팔로우 시내에 있는 거치장스러운 가톨릭 신부야말로 성령충만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나의 교단과의 관계 때문에 그 때까지만 해도 성령 운동을 교묘히 피해왔다. 호텔 Holiday Inn에서 개최된 순복음 실업인들의 비교회적 모임은 성령의 능력이 파도치 듯 넘치고 있었고 뜨내기 교인들 조차 부흥회를 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결점을 통해 “너는 이 땅에서 나의 사역의 일일가 되라.”는 가르침을 깨닫게 하심으로 영적인 성공에 이르게 했다.
나는 여태까지 하나님의 성령의 흐름으로부터 떨어져 있었음을 발견하고 놀랐다. 나는 나의 교회가 오염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우리 교단 밖의 집단에 대해서는 그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든 그렇지 않든 접촉을 불허한다는 것을 선언했었다. 나는 성령님께서 오로지 우리 교단만을 사역해 주시리라는 가상하에 하나님을 상자 속에 가두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억지에는 아랑곳없이 기존 관념을 버리고 하나님을 자유롭게 믿고자하는 남녀이면 누구에게나 성령이 흘러 넘쳤다. 가톨릭 성령 운동자들과 순복음 실업인들 그 밖의 버팔로우 시의 다른 집단은 사실상 영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었으나 나만은 그 도시 버팔로우 시 전역에 나의 과민한 행동을 알리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곧 깨닫게 되었지만 이 성령의 원리는 모든 교회사를 통해 진실이 되어왔다. 마틴 루터나 존 웨슬레, 윌리엄 부츠, 그 밖의 교회 부흥을 선도한 주님의 일군들과 함께 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모두 영적을 쇠퇴하였다. 그러나 교회사에 있어서 쇄신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생명을 얻고 건강과 활력을 되찾았다.
나는 그와 동일한 원리를 나의 생애 속에서 이미 관찰하였다. Oral Roberts와 같은 사역자들과 손잡고 1950년 대부터 신유의 대 부흥 운동에 참여해온 우리 교단 산하 교회들은 굉장한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편 성령 운동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던 교회들은 쇠퇴를 면치 못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날에 있어서도 나는 성령 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는 성장하고 있음을 본다.
성령 운동에 반대하는 교회는 여전히 고투를 계속해가고 있다.
말하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 역시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그러했듯이 목이 곧은 사람이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오순절 교단에 속한 사람으로서 이웃의 성령 운동을 하는 교회와 같은 은사를 지니고 있다고는 생각하면서도 그들과 같은 신선함과 열심은 갖고 있지 못했다. 도리어 신선함은 하나님과 행동을 함께하는 그들 교회에서 볼 수 있었다.
이렇게되자 마치 꽃이 활짝 피듯이 눈에 뜨이지 않던 성경 귀절이 내 앞에 환히 다가 왔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
나의 교만은 하나님의 율법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었다. 위의 성경 말씀이 나의 영적인 본성을 깊이 찌르기 시작하자 나의 저의(底意)가 들어났다. 나는 그릇 행했을 뿐 아니라 동기가 불순하고 비성서적이었다. 나는 다른 사역자들의 일에 대해서는 통 관심이 없었고 오직 나의 유익만을 생각해왔다. 더구나 나는 다른 사람의 비용으로 내 교회의 성공을 추구하고 있었다.
나는 일찍 이런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나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하신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8)라고 하신 아름다운 귀절을 놓치고 살아온데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사업은 보통 순수한 동기 이 외에 다른 인간적인 동기에 의해 성취된다. 나는 그러한 검은 점이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병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의 세계 속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우리는 영혼 구원이라는 가면 속에 너무 많은 노력을 허비하고 있으나 실상은 명성과 인간들의 눈 앞에서의 성공과 교구 내에서 가장 큰 상을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초대 교회가 숫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우리 자신들에게 말하는데 결국 그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의 대규모 교회가 추구하는 목표를 정당화해 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동기를 들어낼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요에 관심을 별로 두고 있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나는 다른 곳에 내 마음을 두고 있었다. 즉 나는 이기적인 동기가 나의 교회의 변속 장치를 태우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수 백의 교회들이 마치 내가 그러했듯이 성공을 추구하는 목사님들의 불순한 동기에 따라 보람없이 엔진을 내몰고 있었다.
어쨋든 이것은 오르막길을 오르는 경주와 같은 것이다. 교회 임원들이 읽는 모든 것, 연구하는 모든 시험은 오직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으며 성공적인 방향으로 몰고나갈 수 있느냐를 말해 준다. 우리의 영적 상태는 교회에 모여드는 머리 수로 측정되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가장 큰 교회 건물이나 가장 많은 주일학교 학생을 확보하고 있거나 가장 큰 예산, 가장 많은 선교 헌금을 하고 있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식의 측정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교회의 일군들이 하나님 사업을 함에 있어서 얼마나 자아를 나타내지 않고 성령님으로 하여금 그 일을 자유롭게 행하시도록 하느냐에 따라 등급을 매기신다. 자아를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성공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사역의 비결 중에 빠져 있는 요소가 무욕(無慾, selflessness)이라는 것과 내 성공에서 참된 맛이 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도 무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내 마음의 눈에서 광고 계획과 목회 사업과 교단적인 장벽이 모두 일순간에 사라졌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 사역의 일부가 되라고 명하셨으며 그 명령은 내 자신의 왕국 건설을 허용치 않으셨다. 이제 내 자신의 사역을 위해 애쓰거나 광고를 할 필요도 없으며 또 그러한 일이 옳은 일도 아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기 위해 설교하는 것이나 나의 교회를 오순절 교단으로부터 분리시켜온 일 역시 마찬가지로 옳은 일은 아니었다.
나는 이웃 사역자들로부터 나 자신을 강력히 방어해 왔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구하는 것을 백 마디의 해 묵은 말보다 더 순수하게 동기를 보여 주셨다. 그런데 이 순수한 동기는 다른 사람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자세에 참되게 나타나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성공을 측정하는 비범한 측량 솜씨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성공은 내 동기의 순수성의 분량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다. 나의 동기는 내 이웃 사역자들의 성장에 대한 내 감정의 분량에 따라 측정된다. 여러분은 이웃 교회의 성장을 본받을 용의가 얼마나 있는가?
앞서 말한 성령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가톨릭 신부님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왕국의 일부분이요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신부님의 성공을 내 것보다 우위에 놓도록 내게 말씀하신다. 내가 그토록 애써 건설하려던 “토미 리드 왕국”은 더 이상 내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계시는 마음을 오싹하게 만든다.
“가정에서 다른 식구를 위해 나 자신을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이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교단을 초월하여 나 자신을 헌신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이상이다.”
자기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내가 전에 겪지 못한 체험이다. 이에 대해 내가 보인 최초의 반응은 내 왕국을 웅켜 잡으려는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이것들은 어렵게 얻어진 것들이고
내게는 커다란 즐거움과 교만의 원천은 되지 않았을지라도 감정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내손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내게 구약 속에 나오는 섬뜩한 귀절을 보여주셨다.
위대한 왕 느브갓네살은 궁전을 활보하면서 외쳐댔다.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느브갓네살을 짐승처럼 들에 내 몰아 소가 풀을 먹듯 풀을 뜯어 먹게 했으며 머리칼이 덥수룩하고 손톱이 고양이 발톱처럼 자라게 하는 등 비참한 몰골로 만드셨다.
이 귀절은 나를 몸서리 치게 했다. 나 역시 내가 만든 궁전 안을 활보하면서 내 창조의 거창함을 자랑삼아 왔다. 물론 이러한 자랑은 공공연히 또는 의식적으로 해온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서 거듭 거듭 그래 왔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성취한 것을 보고 스스로 스릴을 느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소유한 것에 대해서만 축복하신다. 목사가 자기 왕국의 건설자가 될 때 이미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지 않다. 그런 사람은 본인이 그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하나님의 성령의 흐름을 자기의 영토를 가리는데 이용하려 든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내 눈을 뜨게 하셔서 내가 해온 일들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일들인지를 깨닫게 하셨다. 아무리 헐벗은 사막의 거주자도 리오 그란데의 물줄기를 바꾸어 자기 정원에 물을 댄 일은 없다.
나의 설교는 성령의 흐름과 함께하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나는 내 그리스도인 동역자들을 따라 행동하고 부르짖고 멋대로 재단해왔다. 내 성장 운동은 성령의 흐름과 함께 하지 않고 내 자신의 노선을 만들어 왔다. 나의 교회 역시 성령의 흐름과 함께 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교회의 활동과 관심을 나의 왕국속으로 둘러 싸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신의 궁전을 지었으되 겉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덧입혔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흥미가 넘치는 개념을 어떻게 확실한 것으로 만들려 했던가?
흐름을 따른다는 것 즉 하나님께서 버팔로우에서 행하시는 사역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이 지역의 다른 동역자들과 흉금을 터놓고 하나가 되어 일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내가 버팔로우시 전역을 상대로 다른 목사님들을 나의 협력자들로 여겨 새롭게 융성하는 사업을 위해 내 가족을 잃게 되는 것 조차 기뻐함을 뜻한다.
사실 나는 내 이웃의 부요를 “찾으라”(seek)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기 위해 더욱 멀리 가야만 한다. 나는 내 이웃 교회의 발전을 위해 보다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그들을 격려해야 한다. 나는 내 경쟁자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그가 하나님 왕국에서 보다 풍성한 추수를 하도록 도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시키려고 하신 것은 무엇이었던가? 내 교인들을 다른 교회로 보내는 것일까?
나는 내 앞에 펼쳐질 불길한 종말, 즉 내 교인들이 버팔로우 시의 여러 교회로 흩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어디까지 긋고 계신가? 내 이웃 사람들의 부요를 위해 내 호주머니에서 얼마나 많은 돈이 지출되어야 하는가?
나는 하나님의 도전의 무거운 짐을 느꼈고 무엇인가 해보려는 충동을 느꼈다. 성령님의 어떤 격려는 내게 낯이 설어보였으나 버팔로우에서의 7년이라는 열매 없는 세월을 지낸 나는 이제 영적인 모험을 할 차비가 되었다.
앞으로 전진함에 따라 나는 내 교회 안팎의 사람들 때문만 아니라 내 소심한 성격 때문에도 여러번 넘어지곤 하였다. 머지 않아 나의 교회 개척을 위한 도전은 나의 전 사역을 위험 속에 몰아 넣을 지도 알 수 없다. 괴로운 결정은 오직 내 앞에 가로 놓여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인생의 거창한 모험 역시 앞에 놓여 있다.
제 6 장 떠돌이군과 마이더스왕
우리 교회 교인들이 내게 내놓은 최후 통첩은 마침내 모든 것을 행동에 옮기도록 했다.나의 교회는 지난 1년 여에 걸쳐 수 많은 특별 강사를 초청 하고 전도대회를 주최해 왔다. 따라서 교인들은 이런 특별행사에 대해 진절이를 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성도들의 분노가 점점 거세어지더니 드디어 집사회는 교인들을 대신해서 내게 앞으로 6개월 동안 더 이상 특별 강사나 가수를 초청하지 말라고 강력히 요청하였다. 나는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나야말로 이제 교인들로부터 특별 취급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토론토에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이제 너는 내 사역의 일부가 되라.”는 말씀을 받은지 며칠 안 되어 나는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순복음실업인회 지부장 부인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그녀는 음악을 전공한 목사 부부가 오셨는데 우리 교회에서 돌아오는 주일 오전 예배 때 성가를 부르도록 모실 생각은 없느냐는 것이었다.
이들 목사 부부는 순복음 실업인회가 후원을 하고 있었고 또 같은 주일 저녁에는 가톨릭이 1주일
예정으로 주최하는 성령 대망회의 첫 예배를 인도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실업인 선교회는 그 대신 그날 우리 교회 오전 예배의 헌금 중에서 재정적인 도움을 받기를 원했다.
나는 토론토에서 들은 “내 사역의 일부가 되라.”는 말씀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았다.
그 제안을 받아 들일 형편이 아니었다. 교인들은 내게 최후 통첩을 냈을 뿐만 아니라 이 두 부부 가수는 교회 음악 중에서도 소위 신좌파 운동(new left movement)에 속한 사람들로 이 때만 해도 오순절 교회 계통에서는 이 운동이 그리 낯이 익지 않았다.
“미칠 지경이군.”하고 나는 생각했다. 만일 내가 그들을 초청했다가 당회에서 내게 사표를 내라고 하면 어쩐다? 그런데 나는 이 히피형의 두 사람 때문에 목사 자리를 내놓으며 위험을 무릅쓰려 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 사람은 우리 교회와는 경쟁관계에 있는 순복음 실업인회의 후원을 받고 있는데다 가톨릭과도 줄이 닿아 있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내가 교회를 떠날 경우 내게는 장차 받도록 되어있는 유산까지 잃게 될 위험이 있었다. 내 집안의 숙모 한 분이 나의 요청에 따라 많은 재산을 교회에 바쳤다. 그 때 토지 한 필지도 아울려 회사했는데 그 땅은 숙모님의 유언 여하에 따라 내 소유가 될 처지에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숙모에게 값진 재산을 내놓게 한 다음 이제와서 목회 자리를 뜰 경우에 생길 당혹감이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땅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전 재산이나 다름 없었다.
나는 이 모든 이유들로 해서 숙모가 교회에 머물러 있도록 해야할 책임이 있음을 느꼈고, 더욱 그녀는 지금 교회 옆에 있는 장차 내 것이 될 바로 그 땅에서 살고 계셨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만일 내가 교회를 떠난 경우 숙모께서는 내게 아무것도 유산으로 남겨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교회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분명하고도 강력한 것이었다.
“네 이웃의 부요를 구하라. 내 사역의 일부가 되라. 성령과 함께 행하라. 너의 이삭을 바치라. 너의 교회를 바치라. 네게 부여된 이해관계에 상관없이, 너의 인간적인 판단에 상관 없이, 그리고 너의 교회 집사들의 최후 통첩에 관계 없이 너는 모든 방향을 내게로 돌리라. 모든 것을 내게 내어 놓아라.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라.”
나는 헛기침을 하고 머뭇거렸다. “목회자가 당회와 맞서는 일은 무모한 짓이다. 더구나 당회가 교인들의 지지를 얻고 있을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가톨릭 계통 사람들과 관계하는 것 역시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좌파 가수는 내 명성과 급료와 유산을 걸만큼 가치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런 생각들이 내 머리 속에서 엎치락 뒤치락 하였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할 수 있으며 따라서 내 당회의 소리에 불복할 수 있단 말인가? 숙모에게 교회에 헌금을 하게 해놓고 이제와서 숙모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짓을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이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총명을 주시지 않았는가? 주셨다. 만일 내가 이 두 가수를 초청한다면 이것은 이상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런 문제는 어느 신학 대학의 교과서에도 나온 바 없는 일이다.
성령님은 나를 단호하게 붙잡았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시험하시고 계셨다. 이것은 나의 교회인가 하나님의 교회인가? 나는 믿음의 요단 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 나는 나의 이삭을 제단에 바칠 수 있겠는가?
나는 지금껏 이보다 더 큰 문제에 직면한 적이 없었다. 나는 언약의 문제(question of covenant)와 직면해 있었다.
오늘날 목회자나 평신도가 직면하는 가장 광범위한 문제의 하나는 성서의 폭넓은 원리를 무시하는 일이다. 이런 일들은 현대인의 태도가 이들 원리를 과소평가할 때나 또는 이들 원리가 너무 낡아빠져 그것을 도외시 할 경우에도 생긴다.
그러한 원리 중의 하나가 언약 관계이다. 오늘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언약 관계속에서 말하는 일은 별로 흔치 않게 되었다. 마치 유행에서 밀려난 꿰맨 나이롱 양말처럼 언약 관계란 말은 낡아빠진 귀절이 되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의 원리조차 인식되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언약이란 말은 성경말씀 중 여러 곳에 등장하고 또 많은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매우 민감한 것이다. 그야 어찌되었든 언약 관계는 지금까지의 내 모든 사역을 뒤집어 놓은 원리로 등장했으며 내가 시무하는 교회가 부흥하는 요인이 되었다.
언약 관계는 사실상 성경 전체를 일관하는 주제이며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두 개체 사이에 교환된 아름다운 이야기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교환(exchange)이란 약속을 마음 속 깊이 주고 받는 것을 뜻한다.
구약 시대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약속이 이루어지면 그들은 언제나 세 가지 물건 즉, 옷과 무기와 허리띠를 교환하였다. 옷은 부요를 상징했으므로 그 옷을 교환함으로써 그들은 서로 “나의 재산은 당신 것이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당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뜻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인간과의 언약 관계를 맺었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당신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된다. 물론 하나님 편에서 줄 것이 더 많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광활한 땅을 약속하신 후 이런 보장을 주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찌이다.』(창 12:2)
그러나 아브라함 쪽에서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하란에서의 모든 사업을 포기하고 팔레스타인으로 갈 것을 요구하셨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에 당도한 그는 기근을 겪는 동안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생존을 위해 애굽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애굽 땅에서 모은 재산을 버리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것을 다시 한 번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세 번이나 아브라함의 재산을 요구하셨다.
사람과 사람의 약속 시에 교환하는 두 번째 물건은 무기라고 했다. 이 무기는 힘을 상징한다. 그들은 약속을 하고나서 칼 집에서 칼을 뽑아 서로 교환하였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힘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성경 말씀 전체를 통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싸우고 계시다. 시편 91편 7절에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라고 기록했다. 그 대신 인간은 하나님께 비록 하잘 것 없는 것이기는 하나 자기의 힘을 바칠 것을 약속한다. 오늘날 이 힘을 드리는 행위는 우리의 예배를 통해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언약 관계가 실제로 지켜지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허리띠의 교환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대단히 큰 효과가 있다. 허리띠는 한 인간의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재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신 분이다. 이유는 인간이 바치려고 하는 모든 재물은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만물을 주실 때 자유 의지를 아울러 허락하셨다.
선택의 문제는 다른 것과는 달리 진정으로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의지하여 살아갈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을 의지하여 살아갈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교통하려는 갈망을 인간 속에 심어주셨으나 그러한 교통을 강요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피조물을 사랑하시며 그러한 바탕 위에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가자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통해 확장(extension)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종자 씨앗과 족보를 주셨으며 그 족보를 통해 만 백성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기 전에는 죽은 자나 다름 없는 삶을 살아왔다. 자식도 없고 종자 씨앗도 없는 아브라함은 후손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처음에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의심했으며 사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백 세에 가까운 나이였으므로 그런 약속을 의심할만도 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게 언약하거니와 네게 후손을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다.
하나님과의 언약이 교환 조건 위에 서 있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인간은 이어서 허리띠를 서로 교환해야 했다. 언약은 “우리의 생명이 정말로 서로에게 달려있느냐?”는 질문을 돌아가면서 하도록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지 어떤지를 시험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산으로 불러 “네 아들 이삭이 정말로 나에게 속해 있느냐?”를 물으셨다.
이 질문은 모든 목회자들이 직면해야 할 질문이다. 나 역시 나의 사역에서 이 질문에 직면했다.
그러나 나는 집요하게도 나의 이삭을 내놓지 않으려고 버텼다. 내 사역은 어디까지나 내 것이었으니까.나는 마치 가망 없는 빈털터리 부랑자(hobo)가 어여쁜 아가씨 즉, 마이더스 왕(디오니서스로부터 손에 닿는 것을 모두 황금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부여 받은 히랍 신화의 왕 – 역자 註)의 딸 정도로 부자집 여인과 결혼한 것이나 다름없다.
결혼 약속 조로 교환할 세 가지 중 둘은 간단하다. 부랑자는 있는 것 중에서 주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돈이 없는데다 힘도 없었으므로 지불 내용은 뻔하다. 그와는 반대로 신부 쪽에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재물과 힘을 주어 신랑으로 하여금 곤궁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신부는 온갖 사치와 지위까지 남편에게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하루 아침에 이 부랑자는 떠돌이의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부랑자는 마이더스 왕의 재물에 손을 대어 보았다. 그러자 그것이 황금으로 변했다. 그는 아내의 재물에도 손을 대어 황금으로 변화시켰다. 그의 손은 마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 그런 것을 해냈다. 그는 독자적인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그는 더 이상 아내의 돈이 필요 없게 되었으며 지위 역시 아내 혼자서 행사하도록 버려둔 것에 불과했다.
이쯤되자 신랑된 부랑자는 약속으로 주어야 할 세 번째 물건을 주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의 생명은 그 자신의 것이다. 자기 생명을 어느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지가 않았다. 개인적으로 볼 때 그는 부자였다. 그는 자기의 토지에서 살아 왔고 후손을 남길 아들도 있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언약 관계에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언약에 관해 질문하셨다.
“너의 이삭은 정말로 내 것이냐? 우리는 지금도 계약 관계에 있느냐? 우리의 모든 생활이 상대방에게 속해 있느냐?”
나 역시 그러한 질문을 받는 처지에 서 있었다. 나는 언약이 파기될 위기까지 와 있었다.
“나의 이삭은 내 것이었던가 아니면 하나님의 것이었던가?”
나는 이렇게 자문하게 되었다.
모든 다른 목회자들도 그런 체험에 이르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목회자들도 그런 위기에 직면해야만 한다. 우리 각자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이삭이 내 것이냐? 나는 내 모든 소유, 즉, 내 사역과 내 교회와 내 명성과 내 생명까지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의 교환 조건으로 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인물들조차도 이런 언약의 질문과 직면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출중한 사역자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각기 독립된 장소에 도달한 지금에 있어서도 “이삭은 너의 것이냐? 너는 정말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내게 주려느냐? 너는 내게 전적으로 의지하느냐? 우리는 아직도 계약 관계에 있느냐?”하고 물으신다.
목사는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 없이도 설교할 수 있다. 사역자는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 없이도 거대한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다. 목사는 하나님께 의지함이 없이 순전히 자기 생각에 의지하여 기계적으로 사업을 이끌어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맺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법이 없으시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 사역 위에 올라 앉아 축복을 계속해서 발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 각자에게 “이삭은 너의 것이냐?”라고 묻고 계시다.
교회는 목회자가 자기의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까지는 진정한 부흥을 이룰 수 없다. 목회자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계약 관계에 들어가기까지 자기의 전 재산과 힘과 생명 조차 하나님께 다 드리기까지 교회의 진정한 발전은 있을 수 없다.
나의 내적 존재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나는 내 온 존재가 압박감으로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숙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고 우리 교회 집사님들을 기쁘게 해드리고 교인들 모두를 즐겁게 해드리고 싶었다.
나는 가톨릭 계통 사람들이나 순복음 실업인회, 그 밖의 교단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려고 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그대로 보존하기를 원했다.그러나 나는 마음 속에서 심한 갈등을 겪는 동안 기력이 다하여 마침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다.
“주여, 제가 파산을 하고 경멸의 대상이 될지라도, 제가 교회와 현재의 직위와 저의 사역 전부를 잃게 될지라도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듯 하다. 거센 목사가 회개하여 사태를 호전시키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당장 어떤 기뻐 날뛸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삭을 벌거벗겨 하나님 제단에 드렸다.
나는 이제 내 지저분한 과거에 끝장을 내기를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각자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이삭이 내 것이냐?”
교회는 목회자가 자기의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까지는 진정한 부흥을 이룰 수 없다.
제 7 장 폭발이 일어나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모든 것이 즉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경우에 있어서 신경 과민한 내 생각으로 볼 때 당장 내게 나타난 결과는 두려운 것이었다.
두 초청 가수가 강대상으로 걸어나올 때 교회 안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그런데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세 번째로 차가 도착하더니 나이 지긋한 복음 전도사 한 분이 가방을 들고 들어섰다.교인들은 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역겨워하는 감정이 내 마음에 와 닿는듯 했다. 나는 약속을 어겼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반대에 결연히 맞섰던 성경속의 인물 12여명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그 순간 성난 교회와 맞서 있는 내 팔을 잡아 주지는 못했다.
예배가 시작되자 내 마음 속에 다져 온 결심들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지금까지 교인들의 청을 거절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한 전례에 비추어 볼 때 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으로 볼 때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것을 깨닫고 있었다.
나의 이삭은 하나님의 것이었다. 하나님과 나는 언약 관계에 있다.
두 부부 사역자는 노래를 불렀다. 뜻밖에도 그들은 내가 예상했던 소위 “신 좌파”(new left)의 냄새를 풍기지 않고 중도적인 처신을 해주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날 아침 상황을 호전시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예상한대로 어색하고 난처하고 긴장만이 감돌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초대된 여자 가수는 교회 복도에까지 내려가 그것도 방언으로 노래를 하는 것이었다. 두 분은 기독교 음악의 전위적인 프로그램을 끝까지 불렀다. 그런 다음 연로하신 복음 전도자가 등단하더니 설교를 시작했다.
나는 소름이 끼쳤다. 정오까지 예배를 끝내는 우리 교회 관례를 깨뜨릴 판이었다. 나는 부엌에서 음식이 타고 주부들이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을 상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 전에 성령께서는 도무지 역사하실 생각을 않는듯 했다. 그러다가 내가 하나님께 나의 교회를 온전히 내 맡기는 순간에 이르자 비로소 성령이 흘러 넘치기 시작했다.
내가 속이 조마조마해서 앉아 있는 동안 이 복음 전도자의 구약에 관한 말씀 증거는 냉랭한 교인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는듯 싶었다. 그가 성경 말씀을 펴들자 교인들은 성령의 역사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반응은 처음에는 아주 느리게 나타나더니 점점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나는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배가 끝날 무렵이 되자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 완전히 임재하셨으며 하나님의 축복이 온통 흘러 넘치게 되었다. 교인들의 감정적, 심리적, 영적인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흐름을 타라”(Go with the flow)고 하신 성령의 가르침을 되새겨 보았다. “내 사역의 일부가 되라. 네 이웃의 부요를 생각하라. 너의 이삭을 바치라.”
교인들이 제단 주변에 몰려들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앉아 있던 나는 이제 성령의 인도를 특별한 방식으로 따르기로 결심했다. 예배가 끝날 때 나는 2주일 동안의 교회 모든 예배 일정을 취소하고 이들 초청 강사들이 가톨릭 교회에서 개최하도록 예정된 집회에 모두 참석하도록 광고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정통파 오순절 교회에 속한 우리로서는 급진적이고 돌발적인 방향 전환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온 것이다. 우리는 대 폭발의 첫 불꽃을 맞이했을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강단에 서서 그토록 비난해온 가톨릭 교회의 성령 운동을 처음으로 직접 보게되었다. 내 교회 교인들도 참석한 이 가톨릭 집회 중에 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지를 목격하였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진실이었다. 나의 교단에서는 상자 속에 가두어 왔던 것 같은 성령께서 이 가톨릭 집단을 통해서는 성난 불길 같이 타오르고 있는것이 아닌가!
나는 난생 처음으로 성령께서 이 땅 위에서 행하시는 일의 일부에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뿌듯해졌다. 나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고 있음을 목격하였다. 내가 나의 교단에서 상자 속에 가두어 두었던 것과 꼭 같은 성령님께서 이 가톨릭 교인들을 통해서는 불길 같이 거세게 타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성령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시는 일 중 일부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뿌듯해졌다. 350석의 우리 교회 성전에는 390명이 넘는 성도가 그것도 반 이상이 가톨릭 교회 성도들로 붐볐다. 우리는 그날 저녁 예배를 두 번 보았는데 2부 예배 때는 250명이나 참석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이 새로운 사태에 놀라고 의아해하고 언짢아하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교회 교인들은 벌써 몇 년 째 성당 안에 자기 자리가 정해져 있다시피 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자기가 좋아하는 자리를 잡기 위해 한 시간 전에 미리 와 있어야 했다. 가톨릭 여자 성도님들은 바지 차림으로 예배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런 옷 차림은 우리 교인들에게는 아직 익숙치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새로 오신 분들은 담배를 피웠다. 이런 모든 일 때문에 우리 교회의 많은 교인들은 탐탁치 않은 태도였다.
집사님들 중에도 손을 들어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뜻을 어긴 셈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놀라운 변화가 아닐수 없었다. 나는 교인 몇 사람이 심히 노해 있다는 것도 눈치 채고 있었지만 성령님께서 자유롭게 역사하는 마당에야 달리 무슨 손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교회 전면에서 뒷전으로 물러났으며 이제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 이쯤 되자 하나님께서는 집사님들의 마음도 재빨리 감화 감동시키기 시작하셨다.
그 무렵 플로리다 주의 Clearwater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Art Shell 목사님이 며칠 동안 우리 교회에서 말씀을 증거할 계획이 세워졌다.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Shell목사님에게 옛날에 행한 설교 중의 하나인 “여러분의 목사님을 위해 기도 합시다.”(Praying for your Pastor)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도록 인도하셨다. 그는 열심히 자료철을 뒤적이더니 필요한 것들을 골라냈다.
Shell 목사님은 설교를 끝내자 우리 교회 집사님들을 내 주변에 불러 세우더니 나를 위한 기도를 하게 했다. 몇 사람에게는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겠지만 성령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가라 앉혀 주셨다. 강대상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마다 함께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고 나는 우리의 마음이 새로운 성령충만 속에 연합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이야말로 나와 당화 사이에 사랑과 협력의 새로운 시기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머지 않아 가톨릭 성도들에 대한 우리 교회 교인들의 언짢은 태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몇 주가 지나고 또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성령님은 두 교회 교인들을 잘 단합시켜 주셨다. 믿음 약한 사람들은 고참 교인들의 도움과 지도를 받았다. 한 때 고의적으로 막혀 있던 두 교회 간의 의사 소통도 이제는 원만하게 되었다. 우리가 버팔로우 시의 영적인 형제자매에게 마음 문을 열어놓자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몰려들어 왔다.
가톨릭 신부님이 우리 교회에서 찬양대를 인도하게 되었으니 나는 점점 묵시의 참된 모습을 보는듯 했으며 그 묵시는 내 앞에 제 모습을 드러내는 듯 했다. 우리는 버팔로우 시의 순복음 실업인 연합회와 그 밖의 성령 운동 집단과도 손을 잡기 시작했다. 순복음 실업인 연합회 산하선교회 세 회장들이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한 단계 한 단계가 우리 교회로서는 풍성한 체험이었다. 분리주의는 순수성을 지켜주기는커녕 성령의 역사를 막는 길 밖에 되지 않았다. 주일 저녁에 5부예배를 드리는 것도 성공적이었다. 그러다보니 머지 않아 우리는 새로운 예배 장소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또 다른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언약 관계를 보다 충실히 이행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 있는 각종 광고 운동을 그만두라. 매주마다 내는 신문 광고와 매일 방송되는 라디오 프로를 집어 치워라. 그것들은 모두 네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교회 성장에 있어서 광고가 절대적이라는 원리를 알고 있다. 해마다 출판되는 교회성장 편람에는 그러한 권고가 들어 있다. 나같이 고지식한 정통파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교훈은 절대적이요 보편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광고행위의 중단을 원하셨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과연 나의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것인지 어떨지를 시험하시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브라함 역시 같은 갈등을 체험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신 후 약속 이행을 위해 하나뿐인 아들을 도로 바칠 것을 요구하셨다.
내가 성령님의 인도에 귀를 기울일수록 성령님은 그동안 내가 교회를 위해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이룩해온 사업들에 대해 깊은 수술을 가하시는 것이었다.
“텔레비젼 전도 계획을 포기하라. 버스 전도 확장 계획도 버리라. 이 두 가지는 육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들은 네 것이지 내 것은 아니다. 주일 학교의 모든 목표와 광고 행위를 버리라.”
나는 한 동안 망설였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내가 내 교회를 짓겠다.”고 거듭 일깨워 주셨다.
나는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나서 라디오와 텔레비젼 프로 계약을 취소하고 신문 광고를 중단 했으며 버스 전도 계획 그 밖에 모든 광고 활동을 취소한채 성령님께서 우리 교회에 일으키시려는 폭발적인 역사를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이제 우리 두 교회는 한 몸이 된거나 다름 없었다. 우리 두 교회, 즉, 가톨릭과 신교 교인들은 힘을 합쳐 새 성전을 완공했다. 그들은 모두 아름다운 세 건축물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와같이 단합심이 교회에 차고 넘치자 새로운 도전이 다가왔다. 우리가 막 새로 지은 건물로 이사를 가려는 때에 이 고장의 뜨내기 교인들이 찾아와 우리교회 일부를 예배 장소로 쓸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이 뜨내기 교인들은 반 문화(Counter-Culture)를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으로 회원이 250명인데 예배드릴 장소가 없었다.
이것은 놀라운 사태 발견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내 마음 속에 일러 주셨다.
“흐름을 타고 가라. 내 사역의 일부가 되라. 너의 이삭을 바쳐라. 나는 네 교회를 세우겠다.”
우리 교회의 낡은 건물은 새 건물 바로 옆에 있었으므로 나는 이곳을 기독교인 집단에게 내어 주었다. 그 사람들 역시 오래지 않아 변화를 일으켰다. 그들 중 반 이상이 성령님의 감화를 받아 우리 교회에 흡수되었다. 우리는 맨발에 블루 진 차림을 하고 장발인 이들 150명이 주일 정규 예배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문제는 담배를 피워댄다든가 청바지 차림이라든가 하는데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 안에는 서로 의사 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는 집단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성령님은 우리 교회의 기성 교인과 초신자들과의 사이에 사랑과 관용으로 역사하셨다. 단시간 내에 우리 교회 교인들은 성령 안에서 초신자들과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실은 이 반 문화 운동에 앞장서온 그리스도인들은 유수한 실업인이나 직위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 저명인사들의 자녀들이었다. 이러한 두 집단이 예배와 친교를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하나가 된 것이다.
(註 : 이들 뜨내기 교인들은 교회시설을 우리와 같이 사용하였지만 독립성은 그대로 유지해 나갔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적에 흡수되기는 했지만 따로 구 건물에서 그들 나름의 집회는 계속해 왔다.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장로를 따로 두고 있었고 헌금과 계획을 따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는 동안 그들의 장로는 우리 교회 장로가 되었고 교인들도 우리 교회에 흡수되어갔다. 물론 그것은 어떤 법적 수속을 밟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성령님의 역사,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방식과 계획 안에서 이루신 것이다.)
우리 교회 성도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은 나 개인 속에서도 계속 역사하셨다.
머지 않아서 나는 내 설교가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설교는 인간이 꾸민 것이요, 사람을 홀리는 말투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그릇에서 역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스타일의 설교를 그만 두기로 하였다.
그 대신 나는 성령님의 인도에 내 맡기기로 작정했다. 나는 설교자로서의 자존심을 제단 위에 바쳤고 내 설교를 하나님 앞에 내놓았다. 나는 더 이상 하나님께 내 말씀에 기름 부어 주시도록 간구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나는 어떻게 하든지 나를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대로만 사용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구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
마치 시원한 수도물처럼 나의 사역은 성령님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얻어내려고 토요일 밤이면 몸부림치던 나의 버릇도 사라졌다. 오랜 시간을 이 교리 저 교리를 꿰어 맞추는 작업 대신에 나는 일주일 내내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찬송하고 또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영감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에만 시간을 보냈다.
언젠가 교인들이 그런 요청을 한 바도 있지만 이제 나의 예배 진행은 아주 기쁨이 넘치는 것이 되었다.
나는 토요일 밤을 편안히 자고 아침에 일어날 수 있었고 주일 새벽이면 이미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설교 메시지가 내 마음 깊은 곳에 와 닿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설교만으로는 충분한 것이 못되었다. 나는 사역을 해야 했다. 성령께서 흘러들어 올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했다. 나는 설교의 스타일이 바뀌었고 버팔로우의 다른 곳에서 성도들이 그곳 담임 목사님들과 나누는 것과 꼭 같은 식의 설교를 하게 되었다.
이 고장 목사님들도 결국은 같은 한 권의 책, 다시 말하면 성경 한 권을 통해 설교를 마련해 왔던 것이며 이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흐름 속에서 함께 흐르게 되었다.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는 오래된 감정은 끊임없이 마음 속에서 맥박치고 있었다. 하나님의 몸 전체를 통해 흘러넘치는 메시지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감격이 아닐 수 없다.
기름 부음은 우리가 기도 하고 구하는 대상이라기 보다 우리가 그 속에 흘러들어가야 하는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왕국을 버리고 하나님의 역사의 일부가 될 때 기름 부음은 거침 없이 우리의 몸에 흘려 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물결 속에서 함께 가기 때문이다.
교회 성장은 매일 같이 계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매주 우리 교인들 속에 새로운 식구를 보내주었다. 이제 더 이상 서커스 광고 같은 신문 광고가 성장의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시위 행진이나 비행기 좌석권이나 유명 인사가 강대상에서 새로운 가정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 때문에 계속 늘어날 뿐이었다. 우리 교회가 그 밖에 더 무엇을 바랄게 있겠는가!
목사와 당회와 교인들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이야말로 우리교회의 주권자임을 인정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운용에 대한 직접적인 관활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역사에 서툰 일이란 결코 없는 것이다.
나는 신학교 시잘에 배운 교회 행정에 관한 규칙을 모조리 무시했다. 그 결과는 적극적이고 고무적인 것이었다. 내가 내 힘으로 혼자 애썼으나 실패한 것들이 이제는 다 내 앞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교인 수는 엄청나게 불었고 헌금도 2배, 3배, 4배로 계속 늘어났다. 우리 교회의 교인들은 어느 사이에 이 고장을 대표하는 단면도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성령님의 흐름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개종자들의 질적인 변화이다. 나는 전에 개종자들의 자질에 관해서는 별로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말 자체가 탐탁치 않게 여겨졌다. 특히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형태의 죄를 사하시며 또 완전한 속죄를 이루신다는 진리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러했다.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계획을 더욱 깊이 관여하시며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한 요한복음 3장 6절 말씀을 진정으로 이루어 나가시는 것을 보았다. 새로운 사람들이 우리 제단에서 결신을 할 때 그들은 전보다 말씀을 더욱 빨리 받아들이고 또 선전 광고를 통해 얻은 결신자들보다 믿음을 굳게 붙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원리, 즉, 성령님의 창조의 솜씨를 통해 태어났으며 따라서 그들이야 말고 진정한 영적인 선남선녀들이다.
오늘 날의 교회에 있어서 성장과 후퇴는 다 같이 지척 간에 있다. 감정적으로 상승 무드에 있는 신도는 성령의 흐름에 빨리 동화된다. 나는 한 가족을 여러 해 동안 교회의 울타리 속에 붙잡아 두기가 어렵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선전 광고나 육신적인 수단으로 인도해왔기 때문에 쉽게 떠나갔으며 내 딴에는 공들인 설교였지만 그것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을 깊이 갈급해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끌어 가시도록 길을 열어드린 후 나의 설교는 성령 운동에 앞장 서고 있는 이 고장의 다른 교회와 오순절 계통의 교회를 휩쓸고 있는 바로 그 물결 속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오는 새로운 결신자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교회 문턱에 들어설 때면 으례 누가 무어라고 안해도 자기 스스로 성령의 흐름에 휩쓸리려고 애쓴다. 한때 일어났다가는 금새 사라지고 마는 낡은 방식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다.
한편 나는 우리 교회에 왔던 새로운 신자들을 그들이 속해 있었던 본 교회로 돌려보내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본 우리 교단의 많은 목사님들은 놀라는 눈치였다.
내가 한 때 성령충만하고 성경말씀을 잘 믿는 이웃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찾아 나서자 우리 교회 교인들도 앞장서서 그들을 우리 교회로 끌어 들였다. 물론 이 교회들은 우리 교단 소속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들을 경쟁 상대로 여겨 왔었다. 나는 그들에 대한 도전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한 때 나의 그러한 행동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짓도록 우리가 길을 열어드려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알려야 할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목회자들을 돕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내게 가르쳐 주셨다.
“나의 이익만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위해 힘쓰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단 내부에서 내가 사업을 확장해 갈 시장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더욱이 우리 교회 교인들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영적인 활력을 되찾게 되자 나는 그들이 전에 속해 있던 교회로 되돌아가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기쁨과 흥분을 전파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이것은 특별히 새로운 개념도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주변에 있는 몇몇 목회자들도 이미 그렇게 해오고 있다. 교계의 원로 목사이신 David du Pessis는 언젠가 새로이 깨달음을 얻고 거듭난 한 교인이 그가 전에 22년 동안이나 출석해온 생명 없는 교회로 되돌아갈 생각이 미친 것을 알고 이렇게 권면하였다.
“당신은 교회를 위해 아무 것도 공헌함이 없이 22년 동안을 허송세월 하였소. 공헌은커녕 교회에 상처만 입혀왔소. 이제 당신은 교회를 도울 수 있게 되었소. 그 곳에 들어가 무언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을 어떻겠소?”
우리 교회는 그동안 어떤 목적 하에 그렇게 되기도 했지만 몇 가정을 잃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심으로 매주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내가 이웃 목사님들의 성장을 위해 애쓰자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도 그들만큼 영적으로나 숫적으로 같은 성장을 이루게 해주셨다.
영적으로나 수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우리가 대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성경 고린도전서 10장 24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신 별로 대단치 않은 원리에 적극적으로 순종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나는 오늘 날 교회에서 두 가지 큰 비극을 보게 된다. 그 하나는 “사람 찾기”(people quest)다. 다른 교회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또 줄기차게 사람들을 긁어 모으거나 주일학교 참석 인원수를 늘리기 위해 사람을 찾아나서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내 교회를 통해 교회가 불순한 동기의 기초 위에 성장할 수도 있으나 공동체 내의 다른 교회 성장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는 진정한 영적 성장은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비극은 아주 묘한 이야기가 되겠으나 바로 그 “사람 찾기”의 이면(裏面)으로 눈에는 잘 뜨이지 않지만 “교회는 사람이다.”(Church is people)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
제 8 장 교회는 곧 인간이다.
나는 오순절 운동의 원로인 J. Robert Aschroft 목사님과 뉴욕 주 Syracuse의 어느 호텔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새 교회 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그가 내게 해준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토미 목사, 만일 내가 도시에 교회를 짓는다면 벽이 없는 교회를 짓고 싶어요.”
평생을 사역에 몸 바친 후 Aschroft 목사님이 터득한 진리는 오늘에 사는 우리 목회자와 평신도가 다 같이 마음에 새겨야 할 귀중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the church is not a building – it is people)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회 건물을 지으라든가 교단 간판을 세우라든가 지도를 들여다 보고 인구 10,000명 이상의 도시를 찾아 그 곳에다 교회를 세우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기념비적인 건물이나 교단의 방대한 기구를 만들라고 하신 적이 없다.
그러기보다 예수님은 사람을 찾았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을 구원하게 하셨다.
그러나 나는 버팔로우에 있는 동안 이런 깨달음은커녕 심지어 내 교회 교인이 상당수 늘어난 후에도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라는 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날이 갈수록 우리 교회 교인들은 교회 건물에 유난히 집착하는듯 했다.
초대교회 당시 사람들은 기초 건물이나 가정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오늘 날의 교회는 이러한 예배 태도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렇게 때문이다.
많은 목사님들은 오랫 동안 가정 성경학습(Home bible studies)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일부 목사님들은 사람들이 가정 성경 학습에 너무 매달리게 되면 교회에 신경을 덜 쓰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방법이 목회 사업의 최우선의 자리에 있지 않을 때 목회자들은 교회 건물에 투자한 거대한 재산을 지키겠다는 생각에 사로 잡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교회 건물 전면에 교단 간판을 세우는 일에 마음을 쏟기를 원하시진 않는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사람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가령 내일 교회 건물이 불타고 교단이 해체될지라도 교회는 계속 존속해 갈 것이다. 무리를 이루어 예배를 드리지 않더라도 교회는 여전히 교회로서 살아 움직일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집이나 서식 행위가 아닌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회는 건물 자체가 존재 이유처럼 되고 있다. 목사님들은 건물이 우뚝 솟아 그럴 듯해 보일 때 교인들은 교회에 대해 책임의식을 더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태도는 실은 목사님들이 자기의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모시고 그의 인도를 따르려는 것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면 자기 자신이 교인들의 신임을 얻을 자신이 없다는 것을 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사역을 하려 할 때 특히 그러하다.
이런 목회자는 양 무리의 영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오도하는 것이며 또 그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그의 교회는 성서적 표적을 잃는 결과가 되고 만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교회 건물은 일의 시작이요 목표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교회의 벽이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보다는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막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당신 교회의 예산을 한 번 살펴 보기 바란다. 만일 당신이 수입의 20% 이상을 건물 짓는데 투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 된다. 벽을 쌓는데 드는 비용은 전도비용과 맞먹는다.
벽은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우리의 돈은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들을 사역하고 사람을 전도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교회는 수입의 5% 정도를 저당권 설정 내용으로 지불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건물을 마련하는 일에 소홀해왔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는 매달 전도 비용으로 지불해야할 돈이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에 교회 건물은 우리 교회 사역 중에 그리 크게 중요하진 않았다.
우리는 광고나 선전물에 돈을 들이지 않았지만 신학교라든가 약물 중독자 요양소, 텔레비젼 방송, 해외 선교 계획 같은 새로운 분야에다 투입했다.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특별히 인도하신 것이다.
물론 교회 건물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건물 자체가 우리의 최종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성전을 짓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사람을 확보한 뒤의 문제이다.
우리가 교회 안의 비좁은 장소마다 알뜰하게 이용하고 있는데도 사람이 계속 늘어나 더 이상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할 경우나 새 건물을 짓지 않으면 안 될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 한한 일이다.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단호하게 말하거니와 교회 건물은 자동차나 집이나 천막 등과 같이
그것을 가진 사람의 신분의 정도를 알리는 상징물 즉, Status symbol에 불과하다.
나는 목사님들이 가끔 “나는 이 도시에서 가장 큰 교회 건물을 갖고 있지요.”라는가 “나는 이 나라 또는 우리 교단에서 가장 큰 교회 건물을 갖고 있읍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말투로 보아 교회 건물은 그 사람의 신분을 과시하는 상장이 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많은 경우 목회자는 이성의 한계를 넘어 교인들을 저당물 취급하거나 이 땅에서의 사역에 대한 기념비 정도로 여기도 있다.나는 바로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가책을 느껴왔다. 나는 내 교회 건물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다. 나는 가장 큰 교회,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설교하기를 좋아했고 온 세계에 나의 신분을 과시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이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신의 표적을 세우도록 우리를 부르시지 읺았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교회 건물을 지으신 일은 한 번도 없었고 또 당신이 이 땅에서 무엇인가 했다는 것을 알릴 목적 증거를 남기려 하신 일도 없었다.
예수님은 사람을 남기고 떠나셨다.
우리 목회자들은 건물의 원동기나 벽돌에 관심을 쏟을 것이 아니라 건물이 살아 움직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건물에 대한 계획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계획에 노력과 예산과 사역을 투자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호텔의 연회장이나 학교 건물이나 가정 집이나 공회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릴지라도 우리는 교회로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교회는 이같은 개념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목회자는 도심지 전도를 어떻게 해 나가야 할까?
뉴욕 시에서 사람들은 밤에 강도나 강간범들이 무서워 아파트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아파트 안에서는 그들 스스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 Vallejo 시의 Church on the Hill의 Ron Haus 목사님은 그런 면에서 한 술 더 뜨고 있다. 그는 “교회가 사람일 뿐 아니라 가족이기도 하다”(The church is not on ly people but also the family)고 선언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한 가족이 어느 집회에서 다른 가족과 합류하려고 몇 마일 씩 여행을 떠날 때 그들은 교회라는 것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의 일부인 것이다.”
사실 Haus 목사님은 성령의 몇 가지 은사의 경우 교회보다 가정에서 더 잘 역사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성령님은 4~5명을 한데 모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도리어 효과적인 사역을 해낼 수 있다. 성령의 은사가 역사하기에 이상적인 장소는 가정 예배 때이다. 왜냐하면 가정은 곧 교회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라면 뉴욕 시에서 어떻게 교회를 지을까?
그는 고린도에 교회를 세운 것과 꼭같은 방식으로 세울 것이다.
그는 전도할 때 건축 계획을 놓고 시작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사람들과 함께 시작했다.
그는 사람을 구했고 그의 지도력에 따르도록 했으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가 임명한 장로들을 따르게끔 가르쳤다. 바울은 한 번도 교회 건물에 헌신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는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헌신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몸 바치라는 설교를 했을 뿐이다.
그리고 바울이 세운 교회 지도자들은 건물을 짓는 일 보다 가정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마음과 가정 속에 교회를 짓는 일에 더 열심을 다하였다.
바울은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인도하도록 임명된 일군들에게 헌신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만일 바울이 오늘 날에도 전도 사업을 한다면 그는 모든 관심을 사람에게 집중 시킬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하나님 사업에 참여케 하고 장로를 임명할 것이며 그들을 이웃으로 보내 수 천 개의 작은 예배 구역(prayer cells)을 조직해 그것이 온 도시에 확장해 나가도록 할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공장과 은행, 사무실, 식당 그리고 각 사회 계층과 빈민굴과 교외 주택지로 보낼 것이다.바울이 세운 교회는 가정 안에 있었다. 그 교회는 어떤 건물의 일부라기보단 가정의 일부였다.
따라서 오늘날 성서적 가르침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일부 교회들은 그들이 오래 도안 의지해 온 전통적인 예배 방식의 한 두 가지를 버리고 있다. 예컨대 Ron Haus 목사님은 그와 그의 교회 임원들이 더 많은 정성을 쏟고 있는 구역 조직 때문에 점점 쇠퇴해가는 주일 저녁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있노라고 실토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예언자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웃을 파고드는 교회 즉, 구역 예배조직이 위력을 나타낼 때가 머지 않아 오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판에 박은 듯한 낡은 방식의 교회는 오늘날 미국 전역에서 보다 큰 위력을 떨치고 있는 새로운 흐름 앞에서 쇠퇴하고 말 것이다.”
Haus 목사는 앞으로 교회 건물이 영적 성장과 관련해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지 못할 때가 올 것이라고 덧붙였다.그러나 널리 만연되고 있는 건물짓기 병으로 말미암은 비극은 아직 끝날 엄두를 내지 않고 있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영적 기반인, 곧 사람에게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교회를 원위치로 다시 오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사람 중심으로 예산을 짜야하고 사람 중심의 프로그램을 짜야 한다.
교회가 건물이라는 낡아빠진 개념을 벗어버리고 진실로 그리스도께 우리의 헌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교회는 사람이다.
내가 교회의 폭발적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 지금까지 이룩해온 많은 것들을 얼마나 많이 버려야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들에 핀 백합화처럼 나는 손수 수고하기를 그쳤으며 그대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교회를 아름다운 옷으로 입히시도록 맡겼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교회를 손수 지으시겠다는 뜻을 내게 확인시켜 주셨으며 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자기를 내드렸다.
나는 다만 우리 교회와 교회의 모든 계획, 즉, 교인과 건물을 다 함께 하나님께 양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이끌어 가시도록 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는 별 다른 프로그램이 없다. 교인 수를 늘리려는 목표나 헌금을 측정하는 계측기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통해 당신의 목표를 달성하신다. 물론 그렇다고 목회자가 일손을 멈추거나 될대로 되라고 버려 두는 것은 물론 아니다.
교인들은 성령의 흐름에 순행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성령님께서는 시공을 초월, 개인이나 집단에 역사하신다. 성령님은 계획된 부흥회나 제단 위에서 감정에 호소하는 특별 행사를 원하시지 않는다. 성령님은 끊임없이 언제 어디서나 흘러 오신다. 왜냐하면 이제 교회는 성령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장 강력하면서 간단한 교회성장 원리, 즉, 성령의 물결, 그 흐름에 순응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차트 위에 세운 목표를 뒤쫓는 것이 아니다. 비젼(Vision)을 쫓고 있다. 지난 7년 동안 내가 그렇게도 필사적으로 매달려온 Vision이 그 당시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이삭을 주님께 드리고 나자 곧 적극적이며 강력한 사역의 도구로 사용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비젼을 보여주실 때 그 사람은 매일 그 비젼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한다.
만일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사역을 이끌어 가려 한다면, 기도실에서 매일 그러한 비젼의 새로운 차원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살려고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비젼을 보여 주실 것이다.
나는 사역을 하는 동안 비젼 없이는 조금도 전진할 수 없던 때가 가끔 있었음을 기억한다. 교회 성장이 그쳤을 뿐 아니라 교회 가체가 쇠퇴해 들어가는 때가 실제로 있었다. 한 동안 주일마다 좌석이 점점 비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사태에 관해 일부 친구들과 의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왔을 때야 비로소 그 원인을 깨달았다. 과거에 교회가 성장한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총 덕분이지 내 능력으로 인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그로부터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비젼 속에서만 살고자했다.
나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비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이것이 전부였다.
그 후 나는 이 비젼의 새로운 차원 속으로 들어 갔다. 나는 그 비젼을 부여잡을 뿐 아니라 그 속에서 기도했다. 나는 교회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으로 보고자 했다. 하나님께서 주일 예배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더해 주실 때면 사람들이 빈자리 없이 들어차는 것을 본다. 그런 경우 나는 하나님께서 비젼 속에 보여주신 예배의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된다.
아무리 좋은 스케쥴을 마련하려고 이리저리 애를 쓴다고 해도 비젼을 대신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제 교회 프로그램을 기존의 것에서 하나님의 눈을 통해 본 것이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런 기도를 드리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는 내게 비젼을 보여 주신다. 좌석은 성도님들로 차고 프로그램은 다채로와지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비젼은 성취된다.나는 이것을 얼마나 뼈저리게 느꼈는지 모른다.
나는 하나님 방식 대로 믿음의 눈과 미래에 대한 눈으로 우리 교회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짓게된 새로운 성전에 새 성도님들을 채워주실 것과 텔레비젼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을 구원할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가 세운 신학교에 새로 입학하게 될 학생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것은 변덕장이가 내세우는 “적극적 사고술”(positive thinking technique) 따위가 아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7:20~21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않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이러한 기도를 하셨다. 내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도의 차원 속에 들어갈 때 나는 보지도 못했고 우리 교회에 와본 일도 없고, 우리 신학교에 대해서 들어본 일도 없고, 텔레비젼 설교시청 지역에 살지도 않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 교회에는 이제 참된 목표가 있다. 성령님께서 우리 교회 임원들 마음 속에 그 목표를 심어 주셨다. 그러나 이 목표는 사심이 없는 것이고 토미 리이드나 그 어떤 인간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세우기 위한 비젼일 뿐이다.
이 목표는 나의 생애 동안에 성취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순복음 장막 교회(Full Gospel Tabemacle)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버팔로우 시를 전도하기 위해 다른 교회, 다른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의 방향이 달라질지라도 성령님과 동행할 것이다. 나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기도가 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린다.
“주여, 주님께서 저로 하여금 강대상에서 내려와 기도실에 들어가라고 할 때 기꺼이 따를 수 있도록 나를 도우소서.”
틀림없이 하나님의 비젼은 실현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어떤 사람 속에 들어갈 수 없을 때는 그 사람 주변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교회사는 교회가 얼마나 성령의 역사를 외면한채 잘못된 길을 걸어왔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거역한 목회자들의 교회 부흥 정도를 통해서도 명백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역사하기 시작할 때부터 매일 같이 “성령님, 오늘은 어느 곳에서 일하시겠읍니까? 성령님께서 오늘의 비젼을 어떻게 이루시고자 하십니까?”라고 묻곤 한다.
한때 제자리 걸음만 해오던 교회라는 바퀴는 이제 전진 태세를 취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과 연합된 완전한 개념, 즉, 교회에 대한 하님의 비젼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뒤를 밀어주기 시작해셨다.
다가올 미래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 속에서 교회에 관한 가장 진부라고 광범위한 관념들을 제거해버리는 대신 그 자리에 버팔로우 시의 사역 전체를 흔들어 놓을 진리로 채워 주실 것이다.
제 9 장 장로제의 채택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규모가 작아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으신다.
초대교회는 작지 않았다. 초대교회는 처음에 120문도로 시작했으며 단 한 번의 집회를 통해 3,000명의 신자를 얻었고, 며칠 만에 그들은 또 다른 5,000명을 얻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숫자가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한 남자만을 헤아린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시대의 교회가 이 땅에 처음 생긴 후 단지 며칠 동안 적어도 8,000여명의 교인을 확보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들은 교회가 ‘가족 규모’(family sized)라야 알맞으며 벌써 500명만 넘어도 ‘지나치게 비인간적’(too impersonal)이라고 단정해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영적인 미숙을 정당화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만일 성령님께서 아무 거리낌 없이 역사하실 수만 있다면 또한 성령님께서 친히 교회를 운영하시기만 한다면 초대 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확장될 것임엔 틀림없다. ‘지나치게 비인간적’이라는 문제만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보다 좋은 해결 방법을 갖고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대교회가 복수 지도제(plurality of leadership)로 운영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이 그토록 집착하는 단일 목회자 제도(single-pastor plan)을 만드신 일이 없다.
성경은 어떤 특정 도시의 교회에 관해 말할 때 오직 하나의 교회로 말하고 있다.
당시에는 ‘고린도 제일교회’라든가 ‘고린도 동부 교회’, ‘고린도 그리스도 개신교’ 따위는 없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the church at corinth) 곧 고린도 시에 사는 모든 교인을 상대로 사역했다. 물론 바울이 그토록 많은 사람을 단번에 사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통치의 한 형태인 복수 지도제, 즉, ‘장로들에 의한 통치(government by elders)’의 형태로 사역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목회자도 단독으로 대교회를 이끌어 나가기는 어려운 것이다.
나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vision이라 할 수 있는 교회 통치의 성서적 모형이 오늘날 세계 어느 곳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나는 신학교 때 교회 통치 방식으로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첫째 유형인 감독 제도(episcopal form)는 감독(bishop)으로 하여금 특정 지역 안의 교회를 관할하게 하는 제도인데, 여기에는 로마 가톨릭 산하의 교회, 감리교, 성공회가 포함된다.
다음 ‘회중과 교회제’(congregational form)는 교회의 지도자를 민주적인 투표 방식으로 뽑는 제도로 침례교(Congregationalists) 그리고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가 이에 속한다.
‘독립 교회제’(independent form)는 목사 한 사람이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제도인데, 교단 산하 교회(interdenominational)와 비교단 산하 교회(nondenominational)에서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끝으로 ‘장로제’(presbyterian form)는 지역 교회가 교회 내에 속한 하나의 장로 집단(a group of elders)에 의해 통치되어지는 형태로서 이들 장로가 교회를 대표할 당회장을 뽑도록 되어있다.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통치 방식을 객관적으로 보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한 평생을 한 교단 한 교회에 속해 신앙 생활을 해오는 관계로 사물을 자기가 살아온 배경을 기준으로 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랜 세월에 걸쳐 굳어진 편견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며,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또 백성들이 잘못 실천해온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하나님의 첫째 원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교회 통치의 독특한 기반이 되고 있다. 이 원리는 모든 교회의 능력의 원천이 된다.
교회란 광고나 심방이나 전도 계획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의 동력원(energizer) 즉, 예수 그리스도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만이 모든 권위를 대표한다. 이것을 도외시하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교회의 권위가 목사나 장로나 감독의 것이 아니며, 교인들 자신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교회의 최고 권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을 통해서 일하신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권위를 대표한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시종 예수님이야말로 몸의 지체를 인도하시는 교회의 참 머리가 되신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몸의 지체에 대해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하셨다.
처음 예수님은 그의 열 두 제자에 대해, 나중에는 70명에 대해, 그보다 더 뒤에는 수 백명의 추종자들에 대해, 다시 말하면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회자, 교사와 같은 직분에 합당한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했다(엡 4:11). 교회의 모든 직분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각기 그리스도의 권위를 위임 받았다.
예수님은 택함 받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 10:40)
그리스도의 권위를 위임 받는 것은 몸된 교회의 모든 지도적 직분에 대한 권위까지를 통틀어 위임 받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새삼 놀랐다. 교회 내의 모든 지도자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자세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한 시대에 속하는 오늘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지도자들에게 보여주신 놀라운 계시는 교회에 대한 성서적 원리인 장로에 의한 통치(government of elders)로 돌아 가는 것이다.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 장로의 역할은 매우 두드러진 것이었다. King James Version에 보면 그런 역할을 하고 사람을 elder, bishop, overseer, pastor, presbyter 등 다섯 가지 용어로 표현하였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 1:5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에서 장로의 자격에 대해 계속 이렇게 말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7~9)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 장로란 말은 관리자(administrator)를 뜻한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를 집사(deacon)나 목사에 대해 교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장로는 두 가지 책임을 성취하도록 하나님께서 어느 도시에서나 직분을 맡긴 사람들을 뜻한다. 그 두 가지 책임이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사람, 그리고 바울이 말한대로 목사나 복음 전도자, 선지자, 사도 같은 지도적 직임을 맡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직임을 맡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목사인 나는 이런 장로제에 대해 위협을 느껴왔던 것을 분명히 고백한다.
도시마다 어떤 교회에서는 내가 목사로서 평생토록 해온 일을 장로들이 하고 있는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왜 교회의 지도력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분담시키려 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수 천 명을 돌보게 하시지는 않으신다. 물론 한 사람이 주일마다 특정 시간에 수 천 사람을 상대로 예배를 인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몸된 교회 안에서 교회를 이끌어갈 여러 방면의 지도자를 길러 내신다.
오늘날 교회의 기본 일군들(natural leaders)은 거의가 주일학교 같은데서 일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주일학교 교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름 부음 받은 일군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쓰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개인이나 교회할 것 없이 보다 완전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장로는 또한 경리 업무를 다루는 회계사가 아니다.
성경은 집사가 돈을 다루도록 특별히 임명하고 있다.(deacon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섬기는 사람 즉, servant를 뜻하며 초대 교회 때에 집사는 실제로 일군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돈을 셈하는 테이블 옆에서 돈이 배분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오늘 날의 교회는 성서적 원리를 어기고 집사와 장로의 역할을 제멋대로 혼동해서 쓰고 있다.
목회자와 당회 사이에 흔히 긴장이 생기는 원인은 교회의 영적인 지도력과 재정적인 지도력을 동일 집단에서 행사 하려는데 있다.
만일 장로들이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만 한다면 이들의 직분은 과연 무엇인가?
현대적 용어로 말해서 이들이야말로 교회 목사인 것이다.
성경의 테두리 안에서 볼 때 초대 교회 때 가르치는 일의 대부분은 주로 가정에서 개최한 신도들의 소규모 집회에서 행해 졌으며 이 집회는 장로들이 인도하였다.
오늘 날 상당히 이름 있고 성공을 거두었다는 목사님들도 가정 집회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교인들이 가정 예배 때문에 교회에 바칠 헌금을 소홀히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심지어 그들이 교회를 떠나 독립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그러하다.
목사님들은 흔히 가정 집회를 불화가 싹트는 장소로 여긴다. 그러나 가정 집회를 성령님께서 인도하기만 한다면 그러한 집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적인 계획이요,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바 가르침이다.
초대 교회 때 교인들은 한 주일에 한 번씩 합동 예배를 드리기는 하였으나 주중에도 교인들은 가정과 일터에서 접촉을 계속했다. 전도 활동이 시작된 것도 바로 이러한 가정 집회를 통해서였고 사도의 직분(discipleship)의 문제가 제기된 것도 가정 예배를 통해서였다.
성도의 교제와 하나님과의 교통 그리고 개인적인 사역이 가능했던 장소는 가정이었다.
인간이야 말로 하루 24시간 내내 교회 그 자체였다.
오늘날 우리는 뿌리 없는 세대를 길러내고 있다. 오늘날 한 젊은이가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받을 경우 우리는 이 청년이 자기 믿음이 성장해온 지역 교회를 떠나 따로 사역할 대상을 물색하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끔 만들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볼 때 지역 교회는 이미 그 지역 내에 개인 사역이 필요한 많은 곳을 가지고 있다.
교회 안내서를 살펴보라. 첫장을 뒤지면, 그 속에는 전임 사역자(full-time ministry)가 되려고 결심한 청년의 아름답고 늠른한 사진이 크게 실려 있다. 그는 지금 목회자의 수련을 쌓고있는 중이다. 그런데 안내서의 다른 구석을 들여다 보면 그 젊은이가 주일 학교를 가르치고 가정 예배를 인도하고 청년 집회를 조직하고 탁아소를 돌보고 버스를 운전하는 모습을 우표장 크기만큼 작은 사진으로 게재하고 있다. 바로 이런 사진들을 들여다보는 교인들은 머리를 내흔들면서 “참 한심한 일이야. 목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아직 집도 떠나지 않고 있느니”라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초대 교회 때에 청년들은 장로 밑에서 훈련을 받았고 또 실제로 그들 자신이 장로가 되어 자기가 자라온 것과 동일한 가정 집회를 인도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젊은이들이 전에 한 번도 본일조차 없는 사람들의 세계로 보내서 훈련을 쌓게 하고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사역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할 것을 요구하며 마침내는 그들이 낯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 교회를 맡아 혼자의 힘으로 사역을 해나갈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어떤 교회와 교인들은 이런 태도를 아주 엄격하고 지키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교회와 가정을 한 모형으로 지으셨다. 가정의 자녀는 가정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는 어른 밑에서 훈련을 받도록 되어 있다.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가정의 자녀들은 그들을 훈련시키고 가까이에서 그들의 생활을 지켜 보아온 사람들이 정장에 어울리는 책임을 지워준다.
우리는 오늘날 전도가 되지않은 도시에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이 우리 교회의 전도 일군들을 모두 멀리 보내 버렸기 때문이다. 교회를 하나의 가정으로 볼 때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가정 형태의 훈련 원리(principle of family-type training)를 줄곧 위반해 왔다.
어떤 목사님들은 성서적 교회 통치를 입법화해서 통제와 균형 그리고 장로 선출의 절차와 임명에 관한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성경은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잠 18:16)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의 바탕 위에서 나는 문자 그대로 성령님이 우리 교회 가정 예배를 인도할 구역 조직의 인도자들은 세우도록 내어 맡겼다.
구역 집회의 수는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성도님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배우고 사랑을 나눌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주일이 돌아오면 주중에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찾아 오는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나 아주 많을 때는 한 주일에 네 가정씩이나 되었다.
이러한 구역 집회는 우리 교회의 경우 다른 방법으로는 잘 되지 않았다. 나는 몇 차례 내 자신이 이웃에서 또는 지도적 일꾼이 될만한 가정을 골라서 가정 집회를 만들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같은 의도적인 모임은 나의 집에서 모였던 집회를 포함해서 모두 오래가지 못하고 사그러졌다.
그러나 어쨌든 애쓴 끝에 우리 교회는 어느 정도의 규모까지 구역 조직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한 구역 모임은 무슨 내규(內規) 따위로 조직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 조직이 교회의 공식 기구의 일부가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와 또 우리 교회 협동 목사님들은 새로 생기는 구역의 구역장에 대해 그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 나서 우리 교회 이름으로 구역을 인도하도록 승인해 주었다. 구역장님들은 성경의 기초적인 교과 과정에 따르도록 되어 있으나 각 구역이 다 자기 나름의 특색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특색을 살려 나가고 있다.
또한 각 구역은 그 구역의 특성을 충족시키고 있다. 대부분이 가톨릭 출신이거나 그러한 배경을 가진 성도님들에게는 그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성경 말씀에 중점을 두고 가르친다. 그와 마찬가지로 새로 믿기 시작했거나 그 밖의 특수한 분야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알맞은 성경 말씀을 강조해서 가르친다.
구역장이 될 수 있는 그 밖의 요건은 소속 교회의 영적 지도력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역 관리에 문제가 생기면 나는 우리 교회 협동 목사님들과 함께 그 실태를 조사하여 적절한 대책을 세운다. 그러나 여러 가지 규범에 따르기는 하지만 구역 조직은 매우 느슨하고 격식을 덜 갖춘 모임이다.
나는 매주 수요일 우리교회 구역장님들과 교회 지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예배도 드리고 친교를 나누고 있다. 이 구역장님들은 주중에는 줄곧 구역 식구들을 돌보고 있으므로 한 주일에 한 번 있는 구역장 모임은 그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또 필요한 가르침을 받게 해준다.
구역장님 한 분은 구역 조직을 ‘완전하게 조리된 비프 스튜’(perfect blend of beef stew)라고 불렀다. 이 모임은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서로가 모자라는 것을 보완해주며 잘 해나가고 있다. 불고기 접시에는 완두콩도 있고 감자 볶음도 곁들여 진다. 이 모임 역시 모든 사회 계층을 대표하는 사람, 각양각색의 신학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멋진 모임을 형성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불과 몇 사람 안되는 이들이야말로 대부분의 목사님으로 선정할만한 사람들이다. 구역장님들 중에는 사업가도 있고 의사, 변호사, 가정 주부, 운전사를 포함해서 교외의 수준 높은 임대 주택 주민들도 끼어 있다.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모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솜씨와 모형에 따라 이들을 지도자로 키우셨다. 테니스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야구모를 쓴 이들이 교회 지하 식당에서 종이 접시에 음식을 받아 함께 먹는 장면을 보면 그들이 특별히 양무리를 인도할만한 사람들 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주일이면 이들은 세상의 어느 교회 사람들이나 마찬가지 차림으로 교회에 온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 속에는 건축 노동자도 있고 이태리인 가정 주부도 있고 때때로는 요리사나 인쇄업자도 있다. 물론 그 중에는 캐딜락을 몰고 다니는 사업가도 있고 가톨릭 교회의 고위직을 맡고 있는 사람도 있다.
각 사람이 지닌 은사마다 자기 역할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 구역장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구역을 인도해 가고 있으며 그에 따라 교인들 상호간의 관계가 성장되고 아울러 교회도 강력하게 만들고 있다.
장로제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이면에는 단일 교회 도시(single-church city)의 개념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 도시마다 하나의 대교회를 갖되 한 사람의 목회자가 아니라 많은 장로들(multiplicity of elders)이 인도하는 교회를 갖게 하려 하신다.
이웃 목사님들과 내가 마치 한 교회를 인도해 가듯히 협력할 때, 마치 우리가 상대방의 성장을 위해 팔을 잡고 지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보다 빨리 접근하게 된다. 우리 각 사람은 각자가 시무하는 교회의 수석 장로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한편 우리는 모두가 버팔로우 시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협동 장로(Co-elders)인 셈이다.
만일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아마 디도가 우리에게 직분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계획 안에서 볼 때 다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마음이 편협된 목회자는 이 분야의 일을 하나님의 인도에 잘 내어 맡기려 하지 않는다.
목회자가 자기의 이삭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거나 성령의 흐름과 동행하지 않는 한 이런 일은 당혹감을 주고 위협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성령님이 하나님의 교회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온 세계 교회에 역사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사실 나는 많은 미국의 대교회 목사님들과 여러 시간 이야기를 나누어 왔는데 하나님께서는 예외없이 내게 말한 것과 꼭 같은 말을 그들에게도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로직과 가정 사역(home ministry)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세계 여러 나라의 많은 교회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성령님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성서적 계획에 대한 참 뜻을 깨닫도록 만들기만 하면 즉시 실천에 옮겨졌다.
이미 이러한 성서적 통치 원리를 따르고 있는 대부분의 미국 교회들은 사실 어떤 특정한 목회자들이나 이론에 의한 의식적 추진을 통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러한 성서적 통치 원리에 따르기 시작한 목회자들이 다른 곳에서 하고 있는 방식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그렇게 해오고 있다는 것을 더욱 더 알게 되었다.
가령 Quentin Edwards 목사님만 해도 그렇다. Edwards 목사님은 성공적인 복음 전도자로서 인도에서는 6만이 모인 단일집회에서 설교한 적도 있고 세계의 43개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말씀을 증거해온 분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Edwards 목사님을 Florida 주의 Winder Haven에 있는 보잘것 없는 하나님의 성회 제일교회(First Assembly of God)를 인도하도록 맡기셨다.
이 교회는 역사가 거의 50년이나 되는데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님은 평균 160명을 넘지 못했다.Edwards 목사님은 열심히 일했다. 그는 잘 알려진 불같은 솜씨로 설교를 했으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몇 달 가지 않아 그는 예배 장소를 시립 공회당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 2년 동안 그는 이 장소를 채워오더니 이제는 한 번 집회에 보통 2,300명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예배 때마다 설교 제목에 관계 없이 결신자가 나왔다.
“그리고나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아주 세차게 몰아 부치셨지요.”라고 Edwards 목사님은 말했다.
그는 어느 아파트에서 굶주린 개가 갖는 아기를 잡아 먹은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무심코 갖는 아기를 개가 있는 아파트 밖에 버려둔 채 볼일을 보러 갔다.
설교가 한창 진행되는 중에 갑자기 성령님께서 Edwards 목사님에게 임하시더니 목사님 역시 의지할 곳 없는 교인들을 혼자 버려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는 주일마다 제단 위에 올라와 결신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는 않으면서 그저 안수만 해왔다. Edwards 목사님은 설교 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역시 갖난 아기를 버려두듯이 교인들을 문 밖에 버려두고 있읍니다.
우리 교회는 말하자면 대낮에나 일을 보는 커다란 영혼 관리소 같이 되어버렸읍니다.”
회개에 잠긴 목사님은 교회가 영혼 한 사람 한 사람이 갈급해 하는 것을 채워 주어야 하며 새로운 결신자들을 단순히 교회 안으로 긁어 모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살펴야한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양 무리를 어떻게 인도하고 있는가?” 목사님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 교회에서 부흥의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이다.
하나님께서는 Edwards 목사님에게 목사 한 사람의 힘으로는 수많은 그리스도의 자녀들을 돌볼 수 없음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서적 통치 방법에 따라 목회자 자신이 먼저 거듭나게 한 후 많은 협동 장로를 통해 양 무리를 사역하도록 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이러한 가르침을 깨달은 Edwards 목사님은 즉시 결신자를 제단으로 불러내는 예배 순서를 중단했다. 그는 그 대신 예배마다 참된 꼴을 먹이는데 노력하는 동시에 교인 개개인을 상대로한 개별 전도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그는 그로부터 스물 한 번의 주일을 보내는 동안 줄곧 이 사도의 직분의 개념(concepts of discipleship)에 관해서만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 Cypress Cathedral 이라고 개명한 순복음 제일교회는 Edwards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힘을 합해 이끌어가는 번영하는 교회가 되었다. 교회 사업은 집사님들이 맡아 하고 있으며 20명의 구역장님들은 주 중에 자기 구역을 돌보고 있다.
주일 낮에 교회에 출석한 교인들만을 상대로 해오던 무성의한 사역은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토록 유명한 설교자인 Quentin Edwards 목사님은 목사님보다 ‘선생님’(teacher)으로 불리기를 더 좋아한다. 그의 교회가 따르고 있는 성서적 통치 방식은 목회자와 교인 모두를
성장시키는 아름답고 굳건한 모형이 되고 있다.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그의 몸된 교회 안에 성서적 통치 방식을 재건하려는 때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통치 방식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시급히 실천하도록 내주신 과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상처로 입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지역 교회 성도들이 상처 입은 이들을 도와주도록 인도하시며 지원이 필요한 사람을 감싸주고 기도해 주도록 명령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공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목회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형제 자매된 교인들이 사랑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욜 2:28)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밀려오는 눈 사태와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대 교회의 대표적 유형이 되고 있는 대규모 건물에서 수 천 명을 상대로 사역하는 것만으로는 문제의 완전한 해답이 될 수 없다.
참된 해답은 장로들을 통한 사역 즉, 장로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우리는 막강한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얻어진 새로운 결신자들을 수용할 교회 건물을 인간의 힘만으로는 지을 여력이 없다.
우리는 그렇게 할 시간도 돈도 또한 필요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계획이다.
그 계획은 건물이 아니라 인간 즉, ‘장로들’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우리는 서울에 있는 순복음중앙교회를 예를 들 수 있다.
이 교회는 현재 성도 수가 20만이 넘었고 매달 오천 명의 새로운 결신자가 늘어나고 있다.
도대체 이러한 일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이것은 목사님이 교회 사역을 전적으로 성령님께 맡겼고 하나님께서 60여명의 장로와 2만 구역장을 세워 주신 결과로 가능했다. 이들은 구역 조직을 관리하고 서울 전역에서 각종 기도 모임을 인도한다.
오늘날 조용기 목사님의 교회 성장 비결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본을 받고 있는데 그러한 성서적 통치 방식을 채택한 미국의 목사님들만해도 Florida 주 Lakeland의 Karl Strader 목사님, Texas 주 Irvin 시의 J. Don George 목사님, 그 밖에도 수많은 목사님들이 계시다. 위에 인용한 목사님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획, 즉,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젼을 복귀함으로서 성공의 비결을 발견하였다.
제 10 장 동역자와의 관계
공산주의는 미국인 개개인을 그들의 마음 가짐에 따라 위협하기도 하고 화를 내게 하기도 한다.
개인의 헌신과 노력에 의존하는 부(富), 즉, ‘국가의 부’(state pot)에 관한 사회주의자들의 개념은 자유 기업, 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개념과는 상치된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자들이 초대 교회의 형태가 사회주의적이었다고 주장해도 그것을 당연히 도외시 한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초대 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의존해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를 실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기 문제를 자기 스스로 해결한다.”(every-man-for-himself)는 개인주의 사상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도리어 서로 의지해서 살았고 교인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살았다. 그들은 서로가 언약 관계에 있었다.
성경은 그들이 매일 빵을 나누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빵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언약의 상징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빵은 생명의 기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 시대의 교인들은 그들의 부와 힘과 생명까지도 주고 받는 언약 관계를 맺고 있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모든 것을 공유(共有)하고 있었는데 오늘날 우리는 이와 관련된 하나님의 진리를 도외시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초대교회가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신봉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는 현대 교회와 현대 미국사회와 너무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서 그것들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초대 교회의 모형에 기초하여 볼 때 우리는 오늘 날도 하나님 뿐 아니라 같은 교인들 사이에도 언약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가 민주주의와 자유 기업을 신봉하는 것에 관계 없이 우리는 교회 안에서 우리의 돈과 힘과 생명까지도 나누어야 한다.
원한을 품은 사람, 완고한 인종차별주의자, 구두쇠에게는 이런 사상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언약 개념은 그 누구보다도 교인들을 선도해야할 목회자들 자신이 실천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 같다.
목회자의 지도력이 확립되지 않는 한 교인들의 성장도 있을 수 없으므로 목회자들 상호간에 형제적인 언약 관계를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목회자 상호간의 언약 관계는 그것이 실제로 사역에 도움이 안되는 한이 있더라도 교인들에게는 하나의 모범이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큰 교회는 많은 급료를 받는 목회자와 그렇지 못한 목회자들이 함께 어울려 일하고 있다. 미국의 어느 중부 지방에 있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두 대의 캐딜락을 굴리며 마치 왕 같이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목사님 밑에는 한 동안 협동 목사님 내외가 함께 일했다. 그들은 하루 15시간씩 고된 목회일을 도왔다.
남편 목사는 교회의 오르간 반주와 출판 관계 일을 맡아 보았고, 아내는 교회 도서관과 교회 음악 전반에 관한 업무, 그리고 담임 목사님의 서신을 타이프 치는 일까지 도왔다. 두 부부는 거의 매일 밤 열 두시까지 일했으며 그러다보니 아기는 보모에게 맡겨야 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이 받는 급료는 보통 공장 노동자들이 받는 액수에 미치지 못했다.
그들이 완전히 지쳐 교회를 떠날 때 손에는 일전 한 푼 없었다.
그 반면 담임 목사님은 날로 부자가 되고 영향력도 커 갔다.
수 많은 다른 교회들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런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나를 세우시고 또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형을 본받도록 가르쳐 주심으로 해서 나는 목회자가 그들의 동역자들과 완전한 성서적 언약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언약의 첫째 표시인 옷을 교환하는 행위, 즉, 재물을 나누는 일은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다. 많은 목사님들은 여러 해 동안 고생 끝에 어느 정도 합당한 수준까지 끌어 올린 수입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 “너의 이삭은 누구의 것이냐?”를 물으신다.
내가 버팔로우의 장막 교회를 맡은지 얼마 있지 않아 교인들은 나에게 교회 수입의 비율에 따라 급료를 지급해 주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나중에 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되자 이러한 결정은 내게 유리한 것이 되었다. 나는 그 밖의 재정적 도움은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숙모님이 내게 주기로한 재산을 교회에 도로 바치도록 명하시는 것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편안했으며 또 수입은 내가 필요로 하는 이상이었으므로 교회에 대한 나의 충성은 더해만 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그와의 언약 관계 속에서 다루기 시작하시자 나는 돌연 나의 동역자와의 사이에도 언약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소유가 실은 그들의 것이기도 하였다. 내가 받는 배당의 비율은 내 것만이 아니라 우리 공동의 것이었다.
만일 내가 몸된 교회 안에서 언약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란다면 그들 역시 목회자로서의 정당한 수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출발이란 다름 아닌 가장 민감한 언약 즉, 옷을 교환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나에게 베푸는 대우는 나의 동역자들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깨달음이 있는 날로부터 나와 나의 동역자들은 교회의 같은 특별기금에서 급료를 받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우리는 필요한만큼의 돈을 특별기금에서 끌어 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지난 몇 해 동안 나의 동역 목사들은 나보다 더 많은 돈을 그 기금에서 인출해 썼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언약 자체가 그러하듯이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해 같은 호주머니
(common purse)가 마련된 것이다.
언약의 또 다른 항목은 ‘무기의 교환’(exchange of weapon)이다. 이것 역시 필요한 것을 채우는데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수석 장로(head elder)의 입장에서 나의 장로님들과 힘을 합하고 정력을 함께 나누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윗과 요나단이 무기를 교환했듯이 나는 가진 힘을 송두리째 그들에게 주어야 했고 그들 역시 나에게 그렇게 해왔다.
이러한 힘의 교환은 나와 동역 목사님들이 지난 세월 동안 온갖 일을 함께 대처해 가는데서 얻어진 것이다.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밤 중 긴급 사태에 이르기까지 동역 목사님들은 나에게 알리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어려운 일을 처리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들은 나와 힘을 서로 나누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내 아내를 통해 잠든 나를 깨우느니보다 그들은 자기네까리 일을 처리하곤 했다.
나 역시 그들을 위해 같은 일을 해 왔다. “뭐니뭐니 해도 당신은 나를 보좌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소.”라는 식의 우두머리 목사(Kingpin pastor) 노릇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오늘날 나의 동역 목사님들은 협동 장로님들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순종한다. 그들은 나의 종이 아니다. 설령 내가 그들을 인도하는 입장에 있다하더라도 그들의 왕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다 함께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께 순종할 따름이다.
세번째로 언약은 우리가 목숨까지도 나누기를 요구한다.
이 언약 관계의 참 모습은 실제적인 ‘죽음의 언약’(death covenant)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과 언약 관계에 있었듯이 나 역시 나의 동역 목사님들과 ‘죽음의 언약’을 해야 하며 목숨까지도 나누어야 한다. 왜냐하면 언약은 그것이 몸된 교회의 교인들 전체가 실천에 옮기기를 바라기에 앞서 목회자들 스스로가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 지상의 언약 관계라는 테두리 안에서 볼 때 죽음의 언약이 최종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그의 죽음의 언약을 이루셨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셨으며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게 되었다.
그와 같은 이유로 나와 장로님들은 그리스도의 생명 즉, 거룩함과 의로우심을 받아 누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속에서 나타나게 함으로서 죽음의 언약을 실천할 수 있다.
나는 장로님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야지 인간 Tommy Reid를 들어내서는 안된다. 만일 내가 이기심과 나쁜 성미와 탐욕과 시기와 그 밖의 육신적인 것을 들어낸다면 그것은 내가 장로님들 앞에서 나를 위한 인생관을 사는 것이 된다.
그러나 내가 그들과 죽음의 언약 관계에 있다면 나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 즉,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을 나타내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언약의 형제를 위해 나는 죽음을 무릅써야만 한다. 죽음의 언약의 결과 하나님과 인간은 교통이 회복되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과 생명을 교환했기 때문이다.
나와 장로님들과 맺은 죽음의 언약의 결과 역시 교통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교통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로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마음의 정결을 유지하게 해 주신다.
목회자들이 서로 언약 관계에 있음을 밝히는 것은 교회의 장래를 위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언약 관계에 있음을 밝혔듯이 목회자들 역시 자기의 장로님들과 언약 관계에 있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의 구역 조직이 모두가 언약으로 맺어진 집단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특별히 교회에 와서 자선 기금을 낼 필요는 없고, 교회까지 구제품을 실어나르는 일은 필요없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언약 집단 속에 있는 가난한 자는 이미 가족들 사이에서 보살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구역 단위로 해결되지 않을 때 비로소 교회가 지원하면 된다.
먹을 것을 도와주는 따위는 부분적인 일에 불과하다. 병자를 위한 기도와 지원은 주일 예배 때 목사님이 불러세워 기도해 주는 일외에 언약의 형제 자매 즉, 구역 식구들의 도움을 받도록 되어야 한다. 구역 형제자매들은 병원에서 철야하며 같은 구역식구의 병상을 지켜 줄 수 있다. 집에서 나다닐 수 없는 사람은 목사님의 심방보다는 구역 식구들의 보살핌이 더욱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구역 조직은 어디 까지나 목사나 협동 목사 등 목회자와의 관계를 통해 시작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자기의 재물과 노력과 생명까지도 장로들과 나누려할 때, 그리고 목사가 장로들을 대하듯이 동역 목사들과도 최우선의 대우를 하려 할 때 비로소 성경에 나타나 있는 교회의 이상적 모형이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서적 모형은 진정한 교회 성장의 전제 조건이다. 나는 교회 성장이란 개념이 20세기에 들어와 생긴 말이요 더욱이 교회의 초대형 성장은 1970년대에 생겨난 개념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 교회 성장은 성령님이 역사하는 사역이면 어찌할 수 없이 나타나는 부산물이다.
더우기 하나님의 눈은 우리 인간이 보는 것과 다르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 교회 성장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어야 한다.
성장은 대중(mass)이 아니라 동력(energy)이요, 동력은 곧 영(spirit)인 것이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헌신하고 교인들이 상호간에 헌신할 때 그리고 언약 관계가 힘을 발휘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할 때 교회는 성장한다.그러한 성장은 가능하다.
그와 같은 힘찬 전진을 위해 하나님께서 지금 역사하신다.
<맺음말> - 미래의 교회
나는 미래의 교회가 이미 오늘에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교파의 출현도 아니요 또 다른 종교 개혁도 아니다. 이것은 영적인 시계추(spiritual pendulum)가 왔다 갔다 하듯이 단순히 믿음에서 행함으로, Martin Luther에서 또 다른 신성 운동(holiness movement)으로 중점이 옮겨 가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내일의 교회는 단순한 성령 운동의 부산물이 아니다. 이것은 Time 잡지가 ‘선교의 해’(The Year of the Evangelical)라는 특집 기사를 다루는 것 이상의 뜻을 지닌 것이다.미래의 교회는 놀라운 것이 될 것이다. 이제껏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혀온 낡은 관념과 미신들을 깨뜨리는 교회가 될 것이다.
나는 미래의 교회가 우리에게 충격을 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미래의 교회는 지난 세기 어느 교회보다도 성서적인 교회가 될 것이다. 미래의 교회는 바울과 요한의 사도 시대 이래 멀리 떠나 있었던 그리스도교가 제 위치를 회복함을 뜻할 것이다.
미래의 교회는 그 개념에 있어서 가톨릭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황의 통치 하에 인도되는 거대한 단일 기구가 아니라 성도 개개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교회라고 생각하는 교인들로 이루어진 범세계적 기구로 인도되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적그리스도에게 문호를 개방하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 한다. 그러나 지금 나타나고 있는 세계교회(world church)는 두 가지 유형 즉, 거짓 교회와 참된 교회로 구분된다. 사단은 항상 하나님의 솜씨를 흉내 내지만, 원본을 대신할만한 것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오늘날 등장하고 있는 참된 세계 교회는 사단이 흉내낼 만큼 가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약 성경 속에 하나의 교회를 지으셨을 뿐이다. 세계 교회는 하나의 실체이며, 이미 하나님의 것이다. 오직 자아 의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성령에 의지하는 목회자는 그 어느 때보다 교회 존립의 극적이며 성서적 전제를 찾아내고 있다. 어느 한 도시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통틀어 볼 때 오직 단일 그리스도 교회(One Christian Church)가 있을 뿐이다.
우리 목회자들은 많은 장로들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 왕국 건설의 시대는 지났다. 남의 교회 교인들을 훔쳐내는 시대도 지났다. 양 무리를 지키는 목자는 함께 일해야 하며 목회자는 교인을 섬기는 장로들의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우리는 함께 가르치고 서로 사랑하며 여러 도시의 장로들이 일체감을 이루고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교회는 완전한 아름다움과 완전한 능력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왕국이 될 것이다.
미래의 교회는 건물 지향적(building oriented)이 아니라 인간 지향적(people oriented)으로 변화할 것이다. 우리가 이웃 교회 죤스 목사님을 앞질러 더 큰 기념비적 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새로운 건축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는 커다란 충동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 때 건축 자재와 원동기와 각종 도구의 노예가 되어온 교회는 이제 교인들을 섬기는 곳이 될 것이다. 사회 복음(social gospel)에 냉소적이던 사람들에게는 불만스러운 일이 되겠지만 미래 교회의 예산은 달라질 것이다. 그들의 예산은 가난한 자를 먹이고 핍박 받은 자를 일으켜 세우는데 쓰이도록 될 것이다.
내일의 교회는 교회 참석자의 수를 늘리는데 보다는 영혼 구원에 더 많은 돈을 쓰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의 합동 예배나 가정 예배할 것 없이 모두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임을 인정해 주는 성서적 개념으로 복귀할 것이다.내일의 교회는 그 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를 거의 갖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시대에 성령님이 역사하고, 목회자들은 각자의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고 모든것을 성령님께 내어 맡길 때 우리의 교회 건물은 새로운 결신자들을 미처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될 것이다.
그때 가서는 우리의 교회 재정을 아무리 많이 늘려도 재래식 예배 방식으로 교인을 모두 수용할 만큼 충분한 시설을 마련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건물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교회가 되길 원하신다.
그리고 앞으로의 교회는 ‘하나님 왕국 지향적’(Kingdom-oriented)이 될 것이지 더 이상 ‘인간 왕국 지향적’(Empire-oriented)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도시마다 목회자와 종교 단체들은 자기들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목회자들 각자가 같은 도시의 다른 사역자들을 장로권의 동역자(co-eldership)로 인식하게 되면 더 이상 자기 왕국 건설에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단들은 서로 협력하게 될 것이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 왕국의 건물 속에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이상을 가리켜 지상의 교회가 이루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분과 내가 일하고 있는 교회는 이 땅의 것이 아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조직이다. 교회의 머리된 분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 땅의 교회에 대한 사령탑은 하늘에 있다. 교회를 다스리는 율법서는 하나님이 지으신 책이다.
교인들은 이 땅에 존재함과 동시에 하늘 나라에 속한 사람이다.
교회는 성공을 추구해야 할 뿐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면류관을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주후 이래 처음으로 인간의 마음이 단합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기도함으로 얻어진 결실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1~23)
예수님의 기도는 오늘에 와서 응답되고 있다. 내일의 교회는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느날 밤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먼 곳에서 세계를 바라보게 하셨다.
지구는 희미한 몇 개의 불빛이외에는 암흑이 뒤덮고 있었다. 그 불빛은 교회의 십자가 탑들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불빛마다 주변에 자그마한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땅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한 십자가 탑들 중 하나가 나의 교회였다.나는 소리쳤다.“저건 내 교회야.”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나에게 세계를 보여 주었다. 교회의 탑은 아직도 원을 그리면서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불빛들도 있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자세히 쳐다 보았다.
그 불빛은 가정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나의 교회다.”라고 말씀하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