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선 바오로 신부
연중 제3주간 토요일
2사무엘 12,1-7ㄷ.10-17 마르코 4,35-41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 우리는 영성생활의 길잡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코 4,38).
예수님 주변에 아직 군중이 남아 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호수를 건너가자고 하십니다.
아직 예수님의 말씀과 손길이 필요한 이들이 있는데도 떠남을 선택하신 그분이 다소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비록 스쳐가는 언급이지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다 보면 때로는 "하느님"보다 "일"에 더 몰입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고요히 주님 앞에 머물기가 더 어려운 이유입니다.
"일"과 "사람"에 파묻혀 있으면, 온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현장을 떠나는 게 마치 직무유기처럼
느껴지기 십상입니다. 식별이 필요하지만 대개는 절박해 보이는 일거리를 눈앞에 펼쳐놓고
'나 아니면 안돼, 일단 끝내고 보자, 하느님은 나중에 잠시...' 하는 생각을 불어넣는 유혹일 확률이
크지요. 악의 바람은 오직 하나,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것뿐입니다.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마르코 4,36).
제자들은 군중을 남겨 둔 채 예수님을 모시고 갑니다. 그러자 다른 배들이 뒤따르지요.
우리가 "일"을 끊고 "하느님"을 선택할 때 군중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따라오도록
돕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를 통해 군중은 자기 자리에서 예수님 말씀과 손길을
기다리던 수동성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주님을 선택해 따르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이지요.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코 4,38)
그런데 하필 거센 돌풍이 불어 물이 배에 들이칩니다. 방금까지 으쓱했던 군중과의 교감에 미련이
남은 제자들에게 '이러느니 그들에게 봉사하며 뭍에 더 눌러있는 편이 나을 뻔 했다'는
불만과 후회가 몰려들기도 했을 겁니다. 제자들은 지금 내적 외적으로, 안팎으로
돌풍에 휩싸인 겁니다. 말하자면 통제가 안 되어 당황스런 상황에서 마음도 들쑤셔진 것이지요.
그러니 천하태평 주무시는 예수님이 못마땅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했을 겁니다.
제자들의 말 안에는 "당신께서 하라시는 대로 했다가"라는 볼멘 후회가 행간에
스며 있는 듯합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마르코 4,39).
외부적 상황은 물론 내면의 소용돌이도 내가 아무리 되씹고 곱씹은들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때 치료가 필요한 경우와 믿음이 필요한 경우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내적 고통이 후자에 해당한다면 이를 잠잠히 만들 수 있는 힘은 주님의 현존 뿐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코 4,40)
말씀으로 외부적 상황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내면에 대고 안타까움을 토로하십니다.
그 안에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데도..." 하시는 속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안팎으로 고요를 체험합니다. 언제 그랬는지 싶게 모든 격정이 가라앉았습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려는 시련과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늘 담담하고 자신만만하다면 이미 성인 경지에 든 것이거나, 아예 영성생활을 시작조차 못 한
것이지요. 나약한 우리가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내외적으로 폭풍에 갇히면
그간 주님과 쌓은 신뢰와 경험도 백지처럼 되어버려,
번번이 두려움에 전복되어 휘청대고 무너집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 임금의 숨은 죄악을 예언자 나탄을 통해 들추십니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사무엘기 하권 12,10).
"몹시 업신여겼으니"(사무엘기 하권 12,14).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특히나 더 사랑하고 총애하는 이의 죄이기에
당신 스스로 무시당했고 업신여김 받았다고 느끼시는 겁니다.
사람에게 범하는 죄가 결국 하느님께 범하는 죄임을 알겠습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사무엘기 하권 12장 13절).
다윗의 범죄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만, 이 한 마디로 모든 내외적 폭풍이 사그라집니다.
다윗에게 퍼부으시는 하느님의 격노는 물론 다윗 내면에서 들끓던 오염된 양심의 불안도
잠잠해집니다.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죄의 고백은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되돌리는
것입니다. 이로써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히 질서를 찾게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살다 보면 폭풍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외부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질병, 실직, 이별, 사고, 손실, 박해, 오해, 소외, 상처, 두려움...
그런데 고통이 나름 이유 있는 사건을 통해 오는 것 같더라도, 많은 경우 하느님을
오롯히 향하고 사랑하려는 우리를 시련하는 힘일 수 있습니다.
이럴 폭풍에 휩싸여 죽을 지경이 된 우리보다 주님이 더 안타까워 애태우십니다.
그분은 결코 손 놓고 우리를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서 함께 출렁대며 고통을 겪고
계십니다. 폭풍을 잠재우고 고요를 회복하는 힘은 주님 현존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우리 믿음의 콜라보입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건너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하고 고요하지만, 폭풍 한가운데에선 늘 처음인듯
두렵고 힘겹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까지 주님의 이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어떤 돌발 상황에서라도 기억나도록 영혼 깊숙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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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우 사도요한 신부
연중 제3주간 토요일
2사무엘 12,1-7ㄷ.10-17 마르코 4,35-41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시고 백성이 지지하여 왕위에 오른 다윗은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올린 것도
잠시, 그 축복을 배신하는 어처구니 없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도 그 죄악을 감추어 보려고 얕은 꾀를 쓰다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충직했던 부하 우리야와 그의 아내 밧세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성왕(聖王)이라고 칭송받던 다윗이 갑자기 그 거룩함의 가면을 벗고
교묘하고 간사하게 자기 죄를 감추려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안쓰럽다가 다음에는 교묘하다며
손가락질하지만, 그 다음에는 우리도 죄를 지을 때 또 다른 다윗이 되어 가는 경우를
겪으면서 자책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죄를 짓는 인간의 전형적인 교활함과 교묘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을 뉘우치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축복을 전해 주었던
나탄 예언자를 시켜 다윗의 양심과 신앙에 호소하셨습니다.
즉, 나탄이 다윗을 찾아와서 들려준 비유는 이미 수많은 양과 소를 가진 부자가
겨우 암양 한 마리만을 키우는 가난한 사람의 소유를 빼앗아 버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연히 다윗도 그 부자의 악랄함에 분노를 표시했지만 나탄은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2사무 12,7).
나탄이 전해준 이 말씀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다윗의 귀와 가슴에 꽂히자 다윗은 항복했습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고 깨닫는 순간에 즉시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다윗의 이런 모습 또한
죄를 짓는 교활한 모습과 함께 인간의 솔직한 민낯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일화는 교묘하게 죄를 짓는 인간의 모습과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
즉 슬기롭게 그 죄를 뉘우치게 하시는 하느님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은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된 위기에서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잠재우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제자들이야 당연히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고물을 배게삼아 잠만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며 난리를 피웠습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 말씀으로 사태를 진정시키셨습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앞의 ‘잠잠해져라’는 명령은 배를 집어 삼킬 듯 덤벼들던 바람에게 하신 듯하고,
‘조용히 하라’는 명령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소란을 피우던 제자들에게 하신 것 같습니다.
이 상황은 군중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여러 비유 이야기로 가르치신 후에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거듭되는 가르침으로 피곤해지신 예수님이야 출렁이는 배 안에서도 태연하게 주무실 수 있었다고
하지만, 비유의 가르침을 군중의 맨 앞에서 듣고도 도무지 깨달음이 없었던 제자들로서는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41) 하고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기만 하면 거센 돌풍도 가라앉힐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돌풍 같은 자연현상을 가라앉히시는 일은 차라리 쉬운 일이었으나
제자들의 마음 안을 들뜨게 하고 있던 극심한 불신의 바람을 가라앉히시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람과 호수에게 명령하신 직후에 제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자연현상의 위기 속에서 믿음을 타박하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바람을 말 한 마디로 잠재울 수 있단 말입니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범람하는 강물에다 대고 기도하면, 부르짖으면 비가 그치고 강물이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제자들도 아마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치시고 난 후였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무릇 비유란 하느님 나라라는 보이지 않지만 현세를 움직이고 있는 신비요 진리를 보이는
사물과 사태에 빗대어 설명하는 화법입니다.
그 모든 비유에서 결론은 알아들을 귀가 필요하다는 것이요, 그 귀는 마음의 귀인 것이며,
깨달음이기도 하고 단연코 믿음입니다.
다윗에게 유혹이 찾아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보고 계심을 깨닫는 믿음이 있었더라면
그는 감히 그런 죄악을 저지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며,
더군다나 우리야를 죽여서라도 죄를 감추려는 더 큰 유혹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자신들의 능력이나 기도로써는 거센 돌풍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겠지만,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달리 말하면 그분을 통하여 기도를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믿음을 지녀야 했습니다. 전례적 기도의 기본이 이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위기들, 우리를 가로막는 도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힘만 믿지 말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도할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믿어야 할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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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3주간 토요일
2사무엘 12,1-7ㄷ.10-17 마르코 4,35-41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코 4,39)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는 도중에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자, 제자들이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합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오늘 우리는 거센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바람과 호수까지도 복종시키시는
예수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거센 풍랑!'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종종 거센 풍랑을 만납니다.
생태계 파괴로 인한 기후위기문제와 기아와 난민문제,
코로나 팬데믹 등 지금 인류가 마주한 거센 풍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지금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거센 풍랑들이 있습니다.
곧 남북의 분단이라는 풍랑, 이념논쟁과 지역 갈등이라는 풍랑,
선거를 앞두고 너와 내가 격하게 갈라져 있는 거센 풍랑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삶 속에서 만나고 있는 크고 작은 풍랑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거센 풍랑들을 가라앉히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어야만,
이러한 거센 풍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바라봅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