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난 일요일 방영된 저리톡에서 외교홀대론, 결례론에 대해 비교적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세 가지 원인을 제시했는데 그 중 하나가 기자들의 무지입니다. 외교 의전의 실제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뭔가 비판하겠다는 생각만 앞서니 말도 안되는 소리들을 하는 겁니다.
비가 오는 와중에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 공항에서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트랩에 뚜껑이 없었다? 그래서 홀대를 당했다?
웃기는 얘깁니다. 비가 오면 트랩에 뚜껑을 씌울 건지 말 건지도 사전 실무협상에서 다 조율을 합니다. 비 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런 것 정도도 의전 실무 협의에서 얘기를 안할 것 같습니까?
아래 Jtbc 보도도 외교 협상이 뭔지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하는 얘깁니다. 우리측 산업부 과장이랑 일본측 경제산업성 과장이랑 협의를 하는데 뭐 차 한 잔도 안 주고 허름한 방에서 했다 이겁니다. 그래서 일본이 우리를 홀대했다?
참 내… 제가 외무서기관 18호봉 때 공무원 그만뒀습니다. 서기관 승진 이후로 따지면 서기관 8년차 였습니다. 그 정도면 웬만한 우리나라 중앙부처에서 과장을 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승진 적체가 제일 심한 것이 우리나라 외교부고 다음이 기재부 정도 될 겁니다.
저 정도 급 되는 외교관, 그러니까 과장급이나 서기관급이 다른 나라 가서 실무협의 하면 무슨 외교 협상이라고 해서 번쩍거리는 방에서 커다란 책상 놓고 협의하는 줄 아세요?
미국을 가든, 중국을 가든, 러시아를 가든 다 과장, 서기관급의 실무 협의는 다 허접한 방에서 합니다. 그냥 담당자 방에 앉아서 할 때도 있어요.
제가 북핵외교기획단 근무할 때 주한일본대사관의 서기관이나 참사관(우리로 치면 과장급 정도 되는 짬밥인 분들인데)이 협의하러 오면 그냥 과장 옆 자리에 접이식 의자 놓고 앉아서 얘기했어요. 아니면 과에서 평소에 쓰는 회의 탁자에 앉아서 얘기하든가요. 물이나 음료수는 있으면 주든가 아니면 봉지 커피 타 주든가 그 정도죠.
외교가에서 과장급, 서기관급이 뭐라고 뭘 대단한 방이나 책상을 기대합니까? 우리 측에서 과장급이 아니라 국장급이 가도 미국 외교관들이 어떤 때는 물 한 잔도 안 줘요. 우리가 물 한 잔 달라고 말을 해야 줍니다. 물 마시러 남의 나라 외교부에 들어간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아래 Jtbc 보도 보니까 우리는 이번 만남을 양자 협의로 부르는데, 일본측은 계속 설명회로 하자고 하고 이것이 외교 홀대다 하는데 이것도 웃기는 얘깁니다. 뭘 알아야지.
외교에서 어떤 행사의 속성이나 이름은 호스트 측이 정하는 겁니다. 가령 베이징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 하면 그 행사의 이름이나 성격은 중국측이 정하는 거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산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 만남을 갖는다 하면 그 만남의 타이틀이나 성격은 우리가 정하는 겁니다. 그런 타이틀이나 성격을 수락하지 못하겠으면 안 오면 돼요.
우리가 제주도에서 개최한 국제관함식에 일본 해상 자위대에 대해 욱일기는 달고 오지 말라 한 것 기억 나시죠? 물론 1998년, 2008년에는 일본측이 욱일기 달고 왔으니 왜 이번에는 갑자기 그런 소리 하냐 라고 일본이 볼멘 소리를 할 수 있지만, 그건 일본 사정인 것이고 우리 땅에서 열리는 행사의 성격이나 속성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고, 그 행사 성격에 욱일기가 안 만다 하면 그만입니다. 오기 싫으면 안 오면 그만이잖아요.
그러면 같은 논리로 일본 경제산업성 건물 안에 들어가서 만나는데, 그 행사의 타이틀을 뭘로 부를지는 일본측이 정하는 겁니다. 우리가 싫으면 안 가면 그만이에요.
그리고 일본측이 자꾸 ‘양자협의’라는 명칭을 안 쓰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에 호소카와 마사히코 씨라고 일본 경제산업성에서 무역관리부장하고 은퇴해서 현재는 츄부 대학 특임 교수로 계신 분이 계세요. 이 분이 전공이 전략물자 수출관리입니다. 일본 경제산업성에서 수출관리 분야 담당으로 역대 최장기간 기록을 갖고 계신 분이에요. 제일 오래 그 업무를 해본 거죠.
이 분이 요즘 여기저기 일본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데 엊그제 텔레비전에 나와서 그런 얘기를 하시더군요. 일본측 화이트리스트에 올라 있는 국가들과 일본이 대부분이 일년에 한 번씩 양자협의를 한데요. 서로 상황 점검도 하고 정보도 교환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한답니다.
그런데 한국 경우에 최근 2, 3년 정도 일본측이 계속 양자협의를 하자고 했는데 반응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본측 수출관리 실무 담당자들도 살짝 빡쳐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번에 일본측 수출 규제가 들어가니까 한국측에서 갑자기 양자협의를 하자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심술 부리는거죠. 지난 몇 년 간 계속 우리가 양자 협의하자고 할 때는 말이 없더니 이번에 우리가 뭐 발표하니까 양자협의 하자고? 우리 조치 내용이 궁금해? 그러면 일단 오시오. 설명은 해드릴게. 대신에 이번 만남은 설명회로 합시다. 뭐 이런 반응이 되는 거죠.
물론 더 윗선의 정무 차원에서는 한국측이 징용 문제에 대해 일본측 협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으니 일본측도 그와 연계에서 “협의”라는 표현을 안 쓰겠다는 전술적 계산이 작용하고 있겠죠.
그러면 이런 상황을 “홀대론”이니 “결례론”이니 하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제대로 된 외교 관련 보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실 주변 4강 중에 우리 외교관들이 가장 접근하기 좋은 나라가 일본이에요.
우리 주미대사가 워싱턴에서 자기 카운터파트가 누군인지 아세요? 국무부 동아태차관보입니다. 미국 국무성의 차관보 자리는 말이 좋아 차관보지, 우리 직제로 치면 국장입니다. 국장입니다. 우리가 주미대사를 전직 총리를 보내든 장관을 보내든 미국측에서는 국장급이 상대해 줘요. 주미대사가 미국 국무성 장관은 커녕 부장관(우리로 치면 차관) 만나기도 힘들어요. 그 밑의 차관(우리로 치면 차관보)도 만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 주미대사가 백악관 가면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만나는 줄 아세요? 그 밑의 부보좌관 만나요.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중대사 카운터 파트는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였습니다. 우리로 치면 차관보에요. 이걸 류우익 대사가 주중대사로 있을 때 자꾸 얘기하고 해서 부부장 정도로 올렸었는데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중국 공산당은 자기들만의 독특한 사회주의 전통이 있어서 접근이 더 용이하지가 않습니다.
중국의 핵심 정치실세는 정치국입니다. 정치국원 30여명이 사실상 중국을 통치하는 핵심 지도자들이에요. 중국 외교부에서 부장조리니 부부장이니 심지어 부장이라고 해봤자 정치국원에 끼지를 못해요.
그럼 우리가 주중대사입네 하고 타이틀 내밀고 정치국원들한테 만나달라고 하면 만나주는 줄 아세요. 얼마나 위세를 떠는지 아십니까?
러시아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반면 일본은 우리 대사가 일본 외무성 차관을 만나요. 차관 뿐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우리측이 강하게 요구하면 장관도 만나줬어요.
주중대사나 주미대사는 부임해서 중국이나 미국측 장관을 독대하는 것은 보통 부임인사할 때 잠깐 보고 끝입니다.
일본은 우리측이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만나달라고 강하게 요구하면 자민당의 핵심 간부들이나 관저의 핵심인사, 나아가 총리도 만나줬습니다.
우리 주중대사나 주미대사가 시진핑이나 트럼프를 따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말이 안 믿기세요. 안 믿기시기면 길가에 지나 다니는 외교관들 붙잡고 물어 보세요. 장부승이라는 전직 외무공무원 말이 맞냐고요.
이렇게 비교적 잘 만나 주는 것은 일본 사회가 갖는 특유이 접대 문화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만큼 한국이라는 나라를 중시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이번에 화이트리스트 27개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겟다고 하는데, 일본 경제산업성 출신 호소카와 마사히코 전 무역관리부장의 설명에 따르면 EU가 전략물자 수출관리 목적으로 운용하는 유사한 리스트에 일본은 올라 있지만 한국은 올라 있지 않다고 합니다.
국제관계의 디폴트 값은 자력구제이고, 원칙적으로 데면데면한 겁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외교 행사만 했다 하면 외교관들이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외교적 미사여구와 칭찬을 구사하고 친목과 우애를 과장되게 강조하는 겁니다.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요.
우리는 미국의 보호하에 지난 70년간 외교를 너무나도 쉽게 해왔어요. 외교에서 사실 가장 힘든 것이 액세스(접근)입니다. 모스크바에 주재하는 미국 외교관들이 가장 힘들다고 호소하는 부분이 뭔지 아세요? 만남이 안된다는 겁니다. 크레믈린의 주요 인사들은 절대 주러시아 미국대사관 사람들을 만나주지 않아요. 할 말 있으면 러시아 외교부 통해서 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러시아 외교부 가면 딱 정해진 카운터 파트만 만나줍니다.
중국은 어떤지 아세요. 뭔가 곤란한 일 있으면 연락 딱 끊고 핸드폰 안 받고 잠수 탑니다. 우리로서는 환장할 지경이죠. 그러다가 또 잠잠해 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으면서 악수하고, 뭐 다 그런 거 아니에요. 선수끼리 다 알면서 허허허. 그럽니다.
일본이나 미국은 그렇게 안 해왔어요. 기본적으로 한미간에는 동맹이 있고, 한일간에는 동맹은 아니어도 우리는 한미일이라는 큰 팀의 일부로서 서로 연계(alignment)는 있다고 서로 믿어 왔기 때문이죠.
이제 기본적인 신뢰가 없는 관계로 가자고 하면 되면 한일관계는 지금은 한러관계, 한중관계 수준이 되는 겁니다.
뭐 궁금해서 연락하면 아 그건 외교부 통해서 문의해 주세요. 외교부에 연락하면 아 그건 정해진 카운터파트 통해서 물어보세요. 뭐 급한 일 있으면 전화 끄고 잠수타고.
이것이 국제관계의 본질이고 외교의 어려움입니다. 외교의 현실이나 사실관계들을 너무 모르시고 그냥 생각나는대로 말하는 뇌피셜들이 너무도 난무하는 것 같아서 답답해서 좀 길게 말씀드렸습니다.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 ᅟᅲᅟᅲᅟᅲ
첫댓글 페북에 올라온 이 글을 읽고 외교의전의 실제 모습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일의 전후를 따지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에 대해 토착왜구니 친일파니 일본에 가서 살아라 하는 식으로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며 입을 틀어막으면 나라 망합니다. 그것은 파땀으로 쟁취해온 민주주의를 스스로 망치는 것이며, 냉정하게 있는 그대로를 바탕으로 지피지기하지 않으면 필패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길로 갈것 같네요. 지도자 잘못뽑은 댓가를 혹독히 치뤄야 할듯 싶습니다. 머리가 나쁘면 몸으로 때워야 한다는 게 진리.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
이 현실은 이미 옛날 정권부터 있어온것..그게 지금 터져 나온것...대비도 않한 것이 문제.../실무는 모르고 허세만 있는.
그러한 현실도 있군요. 그렇지만, 일본이 이뻐보이지도 않고, 대북물자 반출 운운은 참으로 뜬금없어 보이긴 매한가지입니다. 물론 불매운동에 대한 열정 또한 가시질 않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