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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들이 의외로 많은듯 한데
그래서 찾아보니.....놀랍게도 신채호 선생이 천부경은
후일에 누군가 위조해낸 것이라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계연수가 천부경을 최초로 발견했다는 년도(1916년)와
계연수가 썼다는 한단고기에도 천부경이 실려 있다는데
그러나 한단고기는 1911년에 쓰여졌다고 주장되는가 봅니다.
한단고기는 아마 나중에 이유립이라는 사람이 공개한 것으로 아는데...
이유립이 한단고기를 계연수가 썼다고 주장하는가 봅니다.
암튼, 한단고기 내용들을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적어도 한단고기 내용들 전부가 위작일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천부경과 한단고기 관련해서는
모든 것이 명확하다기 보다는 어딘지 석연치 않은 구석도
약간 있어 보입니다.
천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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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들의 순서를 정론직필이 약간 바꾸었음)
《천부경(天符經)》은 대종교의 경전 중 하나로, 1975년 교무회의에서 채택되었다. 현재는 환인(桓因)이 환웅(桓雄)에게 전하여 지금까지 내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917년경 최초의 등장 시에는 단군교의 경전이었다. 실제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17년으로 단군교(檀君敎)에서 처음으로 언급, 유포하기 시작하여 1920년경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 1921년 단군교의 기관지 《단탁》에 의해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대종교에서는 한참 후인 1975년이 되어서야 기본 경전으로 정식 채택하였다. 대종교에서는 단군 시기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한국사학계에서는 위작이라 보고 있다.
전문 81자로, 난해한 숫자와 교리를 담고 있어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나오고 있다.
역사를 연구하려면 사적 재료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지라. 고물이 산같이 쌓였을지라도 고물에 대한 학식이 없으면 일본의 寛永通寶(관영통보)가 箕子(기자)의 유물도 되며, 십만책의 藏書婁(장서루) 속에서 坐臥(좌와)할지라도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후인 위조의 《천부경》 등도 단군왕검의 성언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책을 태워버린 때(이조 太宗의 焚書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별로 없었으므로, 근래에 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辨駁)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책은 각 씨족의 족보 가운데 그 조상의 일을 혹 위조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다지 진위의 변별에 애쓸 필요가 없거니와, 우리와 이웃해 있는 지나. 일본 두 나라는 예로부터 교제가 빈번함을 따라서 우리 역사에 참고될 책이 적지 않지마는 위서 많기로는 지나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니, 위서를 분간하지 못하면 인용하지 않을 기록을 우리 역사에 인용하는 착오를 저지르기 쉽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종로서원, 1948
https://ko.wikipedia.org/wiki/%EC%B2%9C%EB%B6%80%EA%B2%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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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진한 붉은색은 둥베이(랴오닝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 지방이고,
조금 연한 부분은 내몽골 자치구 동부 지역, 가장 연한 부분은 외만주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7%8C%EC%A3%BC#/media/File:Manchuria.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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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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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大倧敎)는 한민족의 교조로 여겨지는 단군을 신봉하는 신흥 종교이다. 중광 교조는 나철로 초기에는 '단군교'(檀君敎)라고도 불렸다. 근본 교리는 성(性)·명(命)·정(精)의 삼진귀일(三眞歸一)과 지(止)·조(調)·금(禁)의 3법이다.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시기가 바로 일제 강점기였던 탓에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2] 2010년 현재 전국에 약 3,766명의 신도가 있으며 시교당(詩敎堂, 대종교의 교회)과 수도원 20여곳 등의 조직을 갖추고 있으며 현재 대종교의 4대 경절로 중광절 · 어천절 · 가경절 · 개천절을 기념하고 있다.
대종교에 따르면, 중광조 나철이 1905년 서대문역 근처에서 백전(佰佺) 도인으로부터 대종교의 경전이 된〈삼일신고(三一神誥)〉와〈신사기(神事記)〉를 전해 받고, 1908년 도쿄에서 두일백(杜一白) 도인으로부터〈단군교포명서〉를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대종교를 일으켰다고 한다.[3] 나철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간섭과 강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항의하고자 4차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여 구국운동이 몇 사람의 정객만으로는 이룩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보고, 1909년 1월 15일 동지 오기호, 정훈모, 이기, 김윤식, 유근 등 10명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함으로써 국조 단군을 숭앙하는 단군교를 창시하였다.[2]
시교(始敎)한 지 1년 만인 1910년, 대종교로 교명을 개칭하는 한편, 같은해 만주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였다가, 1914년에는 대종교 본사를 이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국내와 만주 일대로 확대시켰다.[2] 정훈모(鄭薰模)는 1910년 7월 30일에 대종교로 명칭을 변경하자 ‘단군교’의 이름을 고수하며 분파해 나갔다.
일제가 1915년 10월 《총독부령 83호 종교통제안》을 발표함으로써 대종교를 종교 단체로 위장한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여 탄압이 심해지자 만주의 지린 성 허룽 현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기고 서일, 박찬익 등과 함께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고, 《단조사고》《신단실기》, 《신단민사》 등의 책을 편찬했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는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인도주의와 평등성을 바탕으로 민족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벌였다.[4]
1916년 나철이 죽자 대종교의 역사서라 할 수 있는 김교헌이 2대 교주로 취임하였는데, 그는 3·1운동 이후 만주로 들어가는 동포들을 포섭하여 그들로 하여금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서게 하였다. 그 실례로 20년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청산리대첩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의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2]
한편,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 3대 교주 윤세복이 취임한 이후 많은 교인이 체포·학살되었고, 1932년 이른바 만주국의 탄생과 함께 대종교도 지하로 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1937년 시교당의 수가 52개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포교활동은 곧 독립운동의 일환이었으므로 교세 확장은 바로 독립운동의 확대이기도 하였다. 1948년 김교헌이 죽을 무렵에는 한국·만주·노령(露量)·중국 본토 등에 48개의 시교당을 가지고 있었다.[2]
나철은 비밀 결사 조직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으로 알려진 이완용, 권중현,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의 다섯 인물의 암살을 시도했다. 또한 그들을 죽이자는 참간장(斬奸狀)을 돌리기도 했으며, 일본을 방문해 일본 궁성 앞에서 단식투쟁을 하기도 하였다. 대종교 중광 60년사에 따르면 나철은 이 사건 때문에 정부 전복 혐의로 무안군 지도(智島)에 유배되기도 했는데, 1909년 정월 15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 서울 북부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 아래에서 60여 명의 동지들과 단군교를 새롭게 열면서 이날을 중광절(重光節)로 삼았다. 중광이란 기존에 있던 것을 새롭게 중흥한다는 의미였다. 망국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단군교에 속속 입교했지만 서울 북부지사교(北部支司敎) 정훈모가 친일로 돌아서고 일제의 탄압이 가해지자 나철은 1910년 8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5]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발족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독립전쟁사에 기록된 봉오동, 청산리 대첩의 실질적인 지휘부는 대종교였다고 한다.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이상용, 김동삼, 이범석 등 애국지사들이 그들이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정인보를 비롯해 김두봉, 이극로 등도 대종교인이었다. 김두봉은 1916년 구월산에서 나철이 순교할 때 시봉하기도 했다.
환국 직후에도 대종교는 번성했다. 50년대 후반 교도 수가 60만 명을 넘어섰고, 삼일신고, 천부경, 참전계경 등 경전과 규원사화, 환단고기 등 역사서를 보급시켰다. 환국 이후 대종교는 민족 종교의 적통으로 인정받아 초대 정부의 제1 교단으로 등록되었다. 당시 대종교의 지식인들이 정부의 고위관리로 입각해 활동했다.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교육이념에 홍익인간이 채택되었고 단군 연호, 개천절, 한글 전용 등이 시행되었다.
민간에서는 대종교 중심으로 민족 행사들이 개최되어 1946년 광복 1주년 당시엔 대종교 총본사에서 채화된 성화가 남산 꼭대기에 점화되었다. 그해 개천절 행사에선 성화가 총본사에서 채화되어 마니산 참성단까지 봉송, 점화되었다. 홍익대, 단국대, 경희대 등이 대종교 교인에 의해 설립된 대학이듯이 대종교 역사 자체가 교육과 독립운동이었다. [6] [7] [8]
정훈모의 단군교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나철이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만주로 교단을 이동하자 정훈모가 이에 반발하여 단군교라는 교명을 고수하며 교단을 분리·독립하였다. 나철이 교명을 바꿔 만주로 이동하게 된 계기가 정훈모를 중심으로 한 몇몇 친일분자들에 의한 교단 내분이었다.[9] 정훈모의 단군교는 단군을 신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였으며, 교단의 수뇌부에는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된 친일파가 있었다. [10] 1912년에 내분이 일어나 교단이 둘로 나뉘었으나 1915년 정훈모가 교단을 재정비하였으며, 1930년에는 시흥에 단군전(檀君殿)을 세우고 본부를 이전하였다. 이후 내분이 이어지고 일제가 소수 종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1936년에 폐교되고 신자들도 와해되었다.[11] [12]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C%A2%85%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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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원래 대종교가 1909년초 중광(重光)될 당시는 밝혀지지 않았던 경전이다.
그 시절 묘향산에서 수도하던 계연수(桂延壽)가 10여 년 동안 정성을 들인 끝에 암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찾아내어 1916년 9월 9일 이를 탁본(拓本)하여, 뜻을 살펴보려 해도 헤아릴 도리가 없어, 고심하던 끝에 서울에 한배검[檀君]을 신봉하는 단군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1917년 초 대종교로 전하여옴으로써 밝혀졌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5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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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 선생에 대하여 궁금해져 약간 검색해 보았습니다.
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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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별세하기 직전의 나철 선생
나철(羅喆, 1863년[2] 12월 2일 ~ 1916년 음력 8월 15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대종교의 창시자이고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나두영(羅斗永), 개명은 나인영(羅寅永)[3]이며 아호는 홍암(弘巖)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전라남도 보성 출신[4][5]인 그는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를 지냈으며, 1907년(광무11년) 2월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매국대신(賣國大臣)을 저격한 죄로 귀양살이를 하였고, 귀양이 끝나자 정계와 손을 끊고 민족의식의 집결을 위한 국조(國祖) 단군숭배 사상을 고취하며 수도(修道)에 전념하였다. 1916년 일본 천황과 국회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장서(長書)를 보내고 자결함으로써 순교(殉敎), 순국(殉國)하였다.[6]1891년(고종 28)에 가주서에 제수되고, 1895년에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귀향한 후 1904년에 강진의 오기호, 부안의 이기, 최전(崔顓) 등 호남 출신의 지식인들과 함께 비밀 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고,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6월에는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홍필주(洪弼周) 등과 일본에 건너가 동양 평화를 위한 단식농성을 하는 등 일찍부터 민족주의적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이철, 강원상(康元相) 등을 포섭하여 오적암살단을 결성,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907년 자수하여 지도(智島)에 10년 유형을 선고 받았으나, 1년 후 풀려났다.
그 후 나철은 구국운동(救國運動)의 일환으로 민족 종교 운동에 주력해 1909년 1월 15일 한성부에서 대종교를 창시했다. 오기호(吳基鎬)등 동지 10명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셔 놓고 <단군교 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한 것이 단군교, 즉 대종교의 시작이다.
1년 뒤 대종교로 개칭하는 한편(신도수 2만여 명으로 증가),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였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로는 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 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대거 뛰어들었다. 1914년에는 본사를 그 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만주 일대까지 넓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탄압을 노골화하였고, 교단의 존폐위기에 봉착한 나철은 이듬해 1916년 8월 15일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에서 일제의 폭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한배검(단군)에게 제천의식을 올린 뒤 순명삼조(殉命三條, 한배님께 제천하고, 대종교를 위하고, 한배님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2세 교주가 된 김교헌(金敎獻)은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和龍)으로 옮긴 뒤 홍범규칙(弘範規則)을 공포하는 한편,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시켰으며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음해에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김교헌은 통분 끝에 병으로 죽었다. 김교헌은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신단실기』(神檀實記), 『신단민사』(神檀民史), 『단조사고』(檀祖事攷) 등을 저술하였다.
3세 교주가 된 윤세복(尹世復)은, 일제의 압력을 받은 길림성장(吉林省長) 장쭤상(張作相)에 의해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지자 총본사를 발해의 옛 도읍터였던 동경성(東京城)으로 이전,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대종교서적간행회를 발족시켜 『삼일신고』, 『종지강연』 등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천전(天殿) 건립을 서두르던 중 1942년 11월 윤세복 외 20명의 간부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구성>이란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옥사하였다.[7]
1916년 음력 8월 14일,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16일 새벽 이상스럽게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나철은 자신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나철의 유언대로 청파호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그 후 대종교에서는 나철이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절(四大節)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위 내용들을 검색하다보니....아래와 같은 기사들도 있어
소개합니다.
“전통문화의 핵심은 바보같이 묵묵히 앉아 호흡 하는 것”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장…'숨 고르게 쉬는게 최고 민족정신수련법'
양김진웅 기자 | 승인 2003.12.03 00:00
국학(國學)의 맥 모두 끊겨
“80년대에 끊어진 민족정신을 20세기 민족사상가인 봉우 선생이 명맥을 이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룡산에서 30여년 동안 '민족정신수련법'을 공부해 온 정재승씨(46·봉우사상연구소장).
제주민예총이 지난달 25일부터 ‘우리문화 문맥찾기'의 강좌로 마련하고 있는 2003 역사문화아카데미 강좌에서 만난 그에게 ‘민족정신론'에 대해 들어봤다.
계룡산은 선도(仙道)사상을 후학하는 이들에게 선각자이자 ‘도인(道人)’으로 일컬어지는 봉우(鳳宇) 권태훈(權泰勳) 선생(1900~1994)의 정신적 함양처(涵養處)이자 후학을 길러내던 본향(本鄕)으로 알려져 있다.
봉우 권태훈 선생은 소설 『단』의 주인공으로 익히 세상에 알려져 있다.
지난 20세기 말 한국 정신계에 ‘단’ 열풍을 몰고 온 선도계의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봉우 선생 자신의 생생한 삶의 모습과 그 이야기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봉우 권태훈 선생의 모든 행정, 일화, 유고 등에 나타난 사상적 요소들을 발굴해 새롭게 현대적 의미를 부여 하자는 취지에서 지난 2001년 2월 봉우사상연구소(www.mindvision.org/publisher/SinSun/preface.html )를 세웠다.
정신문화 가장 많이 남아있어
▲ '丹'은 봉우선생을 주인공으로 다룬 소설이다. | ||
“우리민족의 정신수련법은 국조 단군, 즉 한배검께서 상고시대부터 인민을 가르친 방식을 말합니다”
산중에서 봉우 선생을 만난 인연으로 선도사상에 매료돼 무한한 ‘정신세계’의 체험에 직접 뛰어든 그는 정신세계의 목표가 한마디로 ‘나를 찾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는 “각분야의 국학(國學)이 있었는데 모든 맥이 끊어졌다”며 “사실 국학의 정신세계는 무당 등의 샤머니즘의 아니라 주로 산(山)에서 도를 닦는 수도자들에 의해 내려왔다”고 강조했다.
그래도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것이 ‘정신세계’ 문화라는 그는 전국 명산을 중심으로 한 ‘선도사상’이 구전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의 민족정신 수련법은 유구한 세월동안 우리 조상님들이 계계승승해서 성(成)과 부침을 거듭하며 전해 오던 법”이라는 그는 “후일 백두산에서 중국대륙으로 전해지고 곤륜산을 넘어서 소아시아 지역으로 가고 천산을 넘어 인도로 들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즉, 중국으로 가서 유교와 도교가 되고, 인도로 가서 불교가 되며 소아시아로 가서 회교가 되고 또 예수교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한배검 정신이 세계문화와 종교 사상의 근원이라 할 수 있으며 마음을 닦는 차원에서 본다면 민족정신수련법은 유교, 불교, 도교와 예수교, 회교 등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방식”이라며 “다만 그 민족의 관습이나 풍속상의 다른 점으로 인해 뒤로 내려오며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숨을 고르게 쉬는 것이 최대 민족정신수련법
▲ 정재승 소장. | ||
그가 말한 한배검께서 전해 주었다는 정신수양법은 무엇일까?
그는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의 삼법(三法)이라고 잘라말한다.
“지감이란 마음을 잘 다스려서 좋은 방향으로 쓰도록 노력하는 것이요. 조식이란 숨을 고르게 쉬도록 함이요. 금촉이란 마음과 숨을 잘 다스리고 더불어 실제로 행동하는 것까지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중에서 숨을 고르게 쉬는 조식법이 바로 한배검의 형이상학적 가르침으로, 이는 서양의학과 달리 사전에 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며 “따라서 불교와 유교와 차별되는 조식법은 정신수련법의 가장 중요한 본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고대 한배검님께서 전해주신 조식법의 도맥을 중세에 이어받아 ‘해동선가지방(海東仙家之方)’으로 알려진 북창 정렴선생의 ‘용호비결’로 이어져왔다”며 “근현대에 와서 그 고유 선맥이 이어온 봉우 선생의 ‘연정16법’은 우리 선도(仙道)의 교과서로 삼을 만 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가 정신을 수양하는 까닭은 ‘나에게서 구함’에 있다”며 “내게서 진정한 나를 찾은 뒤에야 남도 알고, 남을 알아야 사랑할 수 있으며 남 역시 나를 사랑한다”고 풀이했다.
이어 “서로 사랑하는 세상이 바로 홍익인간의 사회이며 진정한 평화세계가 이룩된다는 뜻”이라며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정신수련을 추구하는 가장 큰 뜻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통문화의 핵심은 바로 바보같이 묵묵히 앉아 있는 자세로 조식(調息.복식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이 간단한 방법을 생활화하면 돈을 들여서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점점 조급증에 걸려있는 현대인에게 그는 하루에 5분간 조식법을 생활화하는 ‘바보되기’를 실천할 것을 당부했다.
▲ 정재승(鄭在乘)은
단기 4291년(서기 1958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봉우 권태훈 선생 문하에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철학 및 심신수련법을 수학했다. 『백두산족에게 고함』,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문화』, 『민족비전 정신수련법』, 『봉우일기』 등 여러 책을 엮어 펴냈다. 현재 봉우사상연구소 소장.
▲ 봉우 권태훈 선생(1900∼1994. 선인(仙人). 종교가. 한의학자. 예언가)
▲ 봉우 권태훈 선생. | ||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인학(寅鶴), 자는 윤명(允明) 또는 성기(聖祈), 호는 여해(如海), 봉우(鳳宇), 물물(勿勿), 연연(然然). 서울 재동(齋洞)출생. 권율(權慄)장군의 11대손이다.
아버지는 대한제국의 내부판적국장(內部版籍局長), 평산군수?진도(珍島)군수를 역임한 중면(重冕)이고,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경주 김씨이다.
중면은 을사조약에 서명한 중현(重顯)과 형제의 의를 끊고, 1907년의 정미칠조약을 계기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권태훈은 이러한 특수한 가계와 집안분위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머니로부터 6세 때 조식법(調息法)을 배운 이래 선도(仙道)의 세계를 접하였으며, 유교경전들을 섭렵하였다.
10세 때인 1910년에는 서울 종로구 마동(麻洞)에 있는 단군교 포교당에서 나철(羅喆) 대종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충청북도 영동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면서 수학 등 근대학문을 접하였는데, 이 때 일본유람단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13세에 선도계의 거인인 우도방주(右道坊主) 김일송(金一松)을 처음 만났으며, 19세에 그를 따라 구월산에 입산하여 3개월간 선도수련에 입문하였다. 이 때 좌도(左道), 우도(右道)의 여러 심법(心法) 등을 전수받았으며, 그 뒤 인천에서 산주(汕住) 박양래(朴養來) 등 선도계의 여러 인물들을 만나기 시작하였다.
3.1운동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전쟁에 참여하였고, 국내로 잠입하여 지하운동을 하였다. 해방 이후에 한독당(韓獨黨)에 가입하는 등 정치운동에 나섰으나 고난을 치렀다. 60세 때에 공주에 연정원(鍊定院)을 신축하여 수련을 하다가 65세 때에 상경하여 한의원을 개업, 83세가 되는 1982년에 대종교의 최고지위인 총전교에 취임하였다.
▲ 天符經(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 문화(권태훈.1989년 11월). | ||
1984년에는 《단(丹)》이란 소설을 통해서 선인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1986년에는 한국단학회 연정원을 설립하고 총재에 취임하였다. 1989년에 수필집 《백두산족에게 고(告)함》을 출판, 《천부경(天符經)의 비밀과 백두산족 문화》를 구술, 출판하였다. 또한 1992년에는《민족비전(民族秘傳) 정신수련법》을 감수, 출간하였다.
그리고 95세인 1994년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上莘里)에서 운명하였다.
권태훈은 유ㆍ불ㆍ선의 여러 사상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주로 선도를 바탕으로 하였고, 시대적 영향을 받아 민족종교인 대종교 사상의 영향도 받은 듯 하다. 6세 때부터 시작한 호흡법을 기본으로 평생 선도수행에 열중하였고, 예언ㆍ사상 등도 역시 그에 기초한 것이 많았다.
1951년에 이미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예언하였으며, 원자탄의 발명. 일본의 멸망. 남북의 통일. 중국의 분단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예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명을 비판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문명비평가적인 면모도 보여주었다.(도움말=봉우사상연구소)
▲ 봉우 선생의 선도수행이란?
▲ 봉우일기1,2(권태훈.1998년 11월). | ||
봉우 권태훈은 선도수련을 대중화시키고자 선도수행법을 소개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체계화시켰다.
선도는 수행방법과 조직, 논리 등이 ‘비인물전(非人勿傳)’, 즉 비공개를 원칙으로, 수행자들간에만 전달되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의적(秘儀的)이고 신비적이었으며,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이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도수련의 실제와 과정 및 선도인들의 활동을 역사상의 인물은 물론 당시대의 인물들까지 실명으로 등장시키는 등 공개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선도가 일반화되고, 또한 조직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거거거중지(去去去中知) 행행행리각(行行行裏覺)”이란 문장을 사용하여 행위의 측면을 매우 중시하였다.
따라서 선도의 초역사성, 탈역사인식을 극복하고 역사성을 가진 사회사상으로 변화시켜 민족역사에 근원을 둔 수행과 인식을 통해 민족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21세기는 문명의 내용과 실현 방법 등에서 전환이 일어나고 주체가 백인에서 황인으로 바뀐다는 ‘황백전환론(黃白轉換論)’을 주장하였다.
▲ 봉우선생이 펴낸 '백두산족에게 고함'(1989년 1월). | ||
이러한 문명의 전환과정에서 한민족이 적극적인 주체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역할론이 바로 ‘백산대운론(白山大運論)’, ‘백두산족론(白頭山族論)’이다. 이러한 문명관은 학문과 수행, 사상적 편력 등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형성되었으나, 천지도수의 변화, 원상(原象), 산법(算法) 등의 선도적 방법론도 근거로 하고 있다.
권태훈의 존재와 사상은 《단丹》이란 책을 통해서 추상적이고 비과학적으로 여겨졌던 기(氣)의 존재를 일반화시켰다.
또한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논리화되지 못했고, 조직적인 사회운동이 되지 못했으나 1980년대 인간의 정신과 가치관은 물론 사회문화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왜곡당한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자긍심을 갖게 하였으며 한민족의 정체성을 민족 내부의 문제를 뛰어넘어 세계는 물론 문명의 전환이라는 거시적인 입장에서 생각하게 하였다.
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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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의가 없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자” | ||||
<홍암나철 100주기⑥>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 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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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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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안에 내가 있어도 업은 아이 삼 년 찾듯 한다”
등록 :2016-03-01 20:18수정 :2016-03-02 16:00
을사오적에 대한 암살도 실패하고 일제의 대종교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자, 나철은 이를 자신의 부덕함으로 여겼다. 1916년 8월15일 구월산 삼성사에 간 나철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낸 뒤 수도실로 들어가 ‘오늘 새벽부터 3일간 단식 수도를 하니 이 문을 열지 말라’는 글을 써 붙이고 잠갔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흰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입은 나철은 숨진 채 발견됐다. 나철은 스스로 숨 쉬는 것을 멈춰, 숨을 거둔 것이다. 이런 폐기에 의한 죽음은 최고의 수행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일본에 머물고 있던 나철은 한 노인을 만난다. 그는 백두산 도인 백봉이 이끌던 단군교의 신도인 백전이다. 나철은 노인을 만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최 삼일원장은 “대종사는 ‘나라는 망했어도 겨레는 있다’며, 살아 있는 겨레에 대한 종교적 교화 운동이 참된 구국운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독립은 몇 사람의 외교적 노력이나 암살 등의 방법으로는 어렵고, 주권을 강탈당하고 식민지화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사대주의에 있다고 생각해 그것을 극복하고 겨레의 정기를 모으기 위해선 고유한 사상을 부활시켜야 된다고 확신한 거죠”라고 설명한다.
근대한국의 자생종교 가운데 최제우의 동학, 강증산의 증산교, 박중빈의 원불교는 교주의 강렬한 종교 체험을 바탕으로 창시된 것에 비해, 나철의 대종교는 이미 있었던 대종교를 다시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나철은 고려 중엽 이후 700년간 어둠에 잠겼던 대종교를 다시 밝혔다는 의미에서 중광이란 표현을 썼다.
최 삼일원장은 “단군 왕검시대부터 하느님을 숭배하고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등의 제천의식을 거행한 우리 겨레 고유의 신앙 형태이었던 대종교는 중국, 인도나 서양의 외래 종교들에 밀려서 민간에 전승되어 오다가 대종사가 빛을 보게 한 것입니다”라고 설명한다.
깨달음 얻는 지름길은 삼법수행
최 삼일원장은 대종교의 ‘삼법수행’이 깨달음을 얻는 지름길이라고 설명한다. “눈을 감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무념무상하게 마음을 비우는 것이 지감법의 출발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 통일하여 기도하며 깊이 호흡하는 것은 조식법의 기본입니다. 경전을 소리 내어 읽거나 외움은 금촉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최 삼일원장은 대종사의 사상을 집약한 계시문을 설명한다. “순왈도 일일성 물작사 물복식 도자정 성자검 부자기 통(純曰道 日日誠 勿作事 勿服飾 道者靜 誠者儉 不自欺 通, 순수한 것을 도라 한다. 하루하루 정성을 다 하라. 일을 꾸미지 말며, 장식하지 말라. 도는 고요함이요, 정성은 검소함이니, 스스로 속이지 않을 때 통한다)의 22자는 대종사가 10년 동안 입산수도 수행중에 받은 계시문으로 대종사의 종교생활을 압축한 것”이라고 말한다.
http://www.hani.co.kr/arti/PRINT/7328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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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597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홍암 나철 100주기 ①> 도제사언문을 찾아서
홍암 나철(弘巖 羅喆, 1863~1916),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6년 음력 8월 보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제천의식을 가진 뒤 시자들을 물리치고 ‘절식수도(絶食修道)’에 들어가 유서 여러 장을 남기고 스스로 숨을 멈췄다.
다섯 아들에게 준 유서에 “너의 무리 가운데 혹시 내 뜻을 이어서 몸을 종문에 바치는 자가 있으면 참으로 내 아들이다 누가 할 수 있을까!”라는 마지막 바람은 실제로 1942년 임오교변으로 중국 목단강 액하감옥에서 순교한 임오십현(壬午十賢)에 맏아들 정련, 둘째아들 정문이 포함됨으로써 실현됐다.
최후의 항거수단 자결, ‘스스로 숨을 멈추다’
“순명하신 자취를 살피면 (북쪽을 향하여) 곧바로 누워서 두 손을 드리웠으니 시체(尸體)를 거두지 아니하였으되 머리로부터 발까지 곧기가 먹줄을 놓은 것 같은지라. 어리석은 생각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얼이 되시지 않고는 이렇게 될 수가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일본헌병대 의사가 와서 살피고 저희끼리 말하기를 『그 목숨 끊음을 연구하건대 아무런 물건도 쓰지 않은 것을 증변(証辨)할 수가 있으니 참으로 선생님, 참으로 선생님이시다』라고 공경하며 탄식하더라 합니다.” (홍암신형조천기, 96쪽)
대종교(大倧敎)에 대한 일제의 극악한 탄압에 맞선 최후의 수단으로 자결(自決)을 선택한 것도 한 인간으로서 결행하기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폐기 절식(閉氣 切息)’이라는 자결 방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힘든 일이다.
폐기 절식은 쉽게 말해 숨을 쉬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말한다. 대종교의 삼법수련 중 호흡법에 해당하는 조식법(調息法)이 높은 경지에 이르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종교의 항일무장투쟁 책임자였던 백포 서일 역시 폐기 절식으로 자결했다는 것이 대종교의 입장이다.
우리 전통 수련법에 조예가 깊은 한 인사는 “숨을 참는 것이 아니라, 숨을 쉬도록 하는 근원적인 기관을 닫는 것”이라며 “우리 역사상 그 같은 경우는 적지 않다”고 말했다.
무단통치의 도를 더해가던 일제는 191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을 공포해 대종교를 철저히 불법화하고 탄압했다. 일본 신도(神道)를 퍼트려 식민통치를 완성하려는 일제에게 우리민족 고유의 신교(神敎)와 단군을 내세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있는 대종교는 그야말로 양립불가능한 눈엣가시였던 것.
대종교의 도사교(교주)인 홍암 나철은 1916년 음력 8월 4일 김두봉, 엄주천 등 시자들을 대동하고 수백 교우들의 환송을 받으며 경성역을 출발해 사리원역에 도착했고, 사리원역전 대기(大崎)사진관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자결을 결심한 행동이었으리라.
구월산 삼성사에 도착한 홍암 일행은 쇠락한 삼성사를 수리했다. 단군이 승천한 곳으로 알려진 삼성사(三聖祠)는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사당이지만 돌보는 이가 없어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홍암은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에 천제를 지낸 뒤 시자들을 물리치고 수도에 들어갔다.
“말씀을 마친 종사는 사당옆 언덕에 올라서 북쪽과 남쪽을 향해 망배한 후 곧 수도실로 들어가시어“자(自)금일 상오3시위시 3일간 절식수도 절물개차문(切勿開此門)”의 21자를 써서 문중방에 붙이고 안으로 방문을 잠근 뒤에는 먹(墨)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익(翌) 16일 상오 5시경 겹친 피로에서 깨어난 시자들은 늦잠 잔 것을 걱정들 하면서 수도실에 나아가니 고요하고 아무 동정이 없거늘 의아하게 생각 하고 “선생님”을 네번이나 불렀으나 응답이 없는지라 불안한 예감에 급히 문 을 떼고 들어가 보니 종사께서 미소를 띠운 얼굴로 손, 발을 펴시고 반듯 하게 누우시어 조천하신지 이미 오랬고 책상에는 여러개의 봉한 글월과 봉하지 않은 유서 두장이 있었다...” (홍암신형조천기, 44~45쪽)
“날이 저물고 길이 궁(窮)한데 인간이 어데메뇨?”
▲ 홍암 나철이 순명 조천한 삼성사 삼성전 내부. 지금은 단군을 가운데 모셨고, 좌우에 환인, 환웅을 모셨다. 당시 홍암은 환인을 가운데 모셨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홍암 나철만큼 극적인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이도 드물겠지만, 그만큼 많은 유서를 남긴 이도 거의 없을 것이다.
대종교의 법통을 이을 무원 김종헌 종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비롯해 따로 봉하여 신규식에게 전달케 한 <순명삼조> <전수도통문> <밀유> <공고교도문> <유계장사칠조>가 있고, <이세가> <중광가> <일본총리 대외에게 준 글> <조선총독 시내에게 준 글>이 있다.
또한 개별적으로 <집안에 준 글> <소운 황병욱에게 준 글> <보본 엄주천에게 준 글> <유증: 무원종사에게 보낸 유서> 등이 있다.
홍암 나철은 <순명삼조(殉命三條>에서 “한 오리 목숨을 끊음은 대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한 오리 목숨을 끊음은 한배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한 오리 목숨을 끊음은 천하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신도들에게 준 <공고교도문(恭告敎徒文)>에서는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비․바람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窮)한데 인간이 어데메뇨?”라고 한탄하고 “내가 간 뒤에 대종교의 일은 오직 여러분 형제자매의 힘씀으로써 이 세상에 행복될 것을 바랍니다”라고 당부했다.
<밀유(密諭)>에서는 “삼법(三法)을 힘써 행하여 욕심 물결의 가라앉음을 도모하며, 한 뜻을 확실히 세워 스스로 「깨닫는문」이 열림을 얻게 하라”고 지감, 조식, 감촉의 삼법수련을 통한 깨달음을 권유했다.
<유계장사칠조(遺誡葬事七條)>에는 “지금 조선에 이 몸을 묻을 곳이 없으니 반드시 화장(火葬)으로써 깨끗하게 할 것”과 비단과 상여, 부고, 상장 등을 금하는 청빈한 장례절차를 미리 못박아두었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나철의 자결을 통해 본격화되는 대종교 무장투쟁의 전통이, 그 집단의 오랜 전통이었다”며 “일제하 대종교의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대내외에 천명한 일대사건으로써, 항일운동 본산으로서의 역할과 더불어 총제적 저항의 사표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로 홍암 나철의 자결 이후 대종교 무장투쟁 책임자 백포 서일(白圃 徐一, 1881.2.26~1921.8.28)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1920년 김좌진 장군의 지휘아래 청산리대첩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백포 서일은 당시 애도사를 통해 홍암의 순명을 신선들의 우화등선에 비유 우화(羽化)했다면서 ‘성통(性通)하여 하늘에 오른’ 조천(朝天)이라고 기렸다. 조천은 깨달은 이의 하늘과의 만남을 뜻한다. 슬픈 날이지만 기쁜 날로 기념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미군정과 이승만,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남쪽에서 대종교는 발을 제대로 붙이지 못했고, 일제 후반기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 무장투쟁 세력이 주류를 이룬 북쪽에서 일제 전반기 민족주의 계열 무장투쟁 세력은 이미 역사적으로 ‘극복된’ 비주류에 불과했다.
심지어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독립유공자 등급에서도 홍암 나철과 백포 서일 등 대종교 핵심지도자들은 6등급 중 3등급 서훈에 해당하는 ‘독립장’을 받았을 뿐이다.
대종교와 만남으로써 비로소 ‘중화 사관’(中華 史觀)을 넘어서 ‘대륙 사관’을 펼칠 수 있었던 단재 신채호는 100년 전 홍암 나철의 자결 소식을 베이징에서 전해듣고 ‘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을 지어 애통한 심경을 남겼지만 아직 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도제사언문은 북한 인민대학습당에 보관된 단재 신채호 유고자료에 포함돼 있음이 김병민 전 연변대학 총장이 펴낸 『신채호 문학유고선집』(1994)에서 확인된 바 있다.
http://www.daejonggyo.or.kr/modules/board/bd_view.html?no=81&id=news&p=1&or=bd_order&al=asc
나철의 사상과 독립운동 방략
첫댓글 광주mbc에서 특집으로 "홍암나철 백년의유산" 이라는 동영상도 있군요
스스로 조식법으로 자결을 했다니 참으로 놀랍군요
감사합니다
[펌]합니다
한단고기는 계연수 선생이 쓴것이 아니라,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저작된 각기 다른 역사서 4권을 묶어서 필사하여 전한 것입니다...
필사하신 분이 계연수 선생이죠...
저자로 거론되는 인물은
삼성기 전편은 안함로, 삼성기 후편은 원동준이고,
단군세기는 행촌 이암이 쓴 것을 문정공이 전하였다 하며,
북부여기 상하는 휴애거사 범장이 쓴 것이고,
태백일사는 일십당 이맥이 저작한 것입니다...
태백일사의 내용중에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있죠...
한단고기의 내용은 조선말 실학자인 해학 이기선생의 감수를 거친후,
계연수 선생이 필사하여 후대에 전한 것이죠...
안함로원동준의 삼성기라는 글이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되고 있고,
안함로와 원동준은 신라사람이라고 합니다.
단군세기를 쓴 행촌 이암은 고려시대 사람이고,
북부여기를 쓴 범장은 고려말의 학자이고,
태백일사는 조선 중종때 왕실의 서고를 관리하던 찬수관이라 직책을 맡고 있던
이맥이 왕실서고에서 숨겨진 우리 역사서를 발견하여 읽고서
이를 근거로 태백일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한단고기는 실제 역사서일 가능성이 큽니다.
@새날 조일 국교수립과정에서 일본이 강탈해간 사서 를 되찾으면 우리역사의 비밀의 상당부분이 복구될것으로 생각합니다
조선말 암울한시기에 보쳔교도인이 600만 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합시다. 기기서 독립자금이 출처 대부분 거금은 그 보천교에서 나왔습니다. 기독교에서 나온것도 아니고 천주교에서 나온것도 아니고 불교에서도 나온것이 아닙니다. 민족을 생각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곳이 어디였는지..
삭제된 댓글 입니다.
한단고기가....완전 날조된 위서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즉, 무엇인가 실제 근거 문서를 바탕으로 기술된 내용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어딘지 문제성이 약간 있어보이는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정론직필 http://m.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3244
천부경은 고려말에도 존재한 것으로 나옵니다. 목은 이색선생의 서적에 나왔습니다. 실존한 것이지요. 대종교인들은 한일합방과 홍암나철대종사가 돌아가신후 거의 대부분의 신도들이 독립투쟁에 참여하셨지요. 독립투쟁중 만주에서 조선땅에서 20만명 30만명이 순국한 것으로 압니다. 가장 큰 독립세력이었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멍때리기 자세로 앉아있다기 보다는 아마도
조용히 앉아 복식호흡에 집중하는 상태를
의미할 것 같네요.
가짜뉴스는
90% 사실에
10% 거짓을 섞어 만든다더만..
10% 거짓을 보는 능력만 있다면..
좋겠다.
천부경 원본 이미지 파일 올립니다
운삼사 순환 오(십) 이
후대에 일본에 의해
운삼사 순환 오(칠)로
조작되었으리라 추정합니다
천부경은 신비할 것 없습니다.
도덕경이나 천부경등 신비시 하는데
천부경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사람이 가장 고귀하다."
천부경 원본은
신지문 16자(법수교 출토분,영변지)입니다
이를 최치원이 번역했는데
"황정경"의 오행장편과 삼족오의
내용을 "의상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의
도식을 빌어 9*9=81로 표현했으나
보안점이 많습네다(본인의견)
이것마저 탁본과정에서
환오십을 환오칠로하여
"금척"이니 하면서 잡설이 많습네다
대삼합 육칠팔구에서
이미 칠이 생성되었는데
운삼 사성 오십이 되어야
문맥이나 이치상으로 맞습네다.
"신지전자문16자"는
우리말의 셈수
하나 ~열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본인이 작성한글
"이(夷)족의 발자취에
올린 내용입니다.
陰符經에
觀天之道 執天之行(하늘의 도를 살피고 하늘의 운행을 잡는것)
하늘의 도가 天符고 집천은 權임
01334=10
천부경의 내용을 무리하게 상상해 보는것 보다는 천부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를 관찰해보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나요? 신이나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알고 있을 법한 비밀을 적어놓은 글이라고 상상이 드나요? 그래서 저 뜻을 내가 풀어내면, 나도 자동으로 동급의 능력을 얻게 되지는 알을까 싶은가요?
혹은 저 뜻을 정확히 풀어내서 나에게 시원하게 설명해주는 사람들 찾나요? 내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안심하고 그를 심리적으로 의지하고 믿고 따르고, 그렇게 해서 나의 모든 문제나 사회의 문제가 해결될거라고 믿고 싶은걸까요?
제가 저시대의 한자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기에 저 글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저글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딱 하나 있다고 보여집니다. 우선 저 글을 쓴 작자와 같은 주파수, 같은 레벨, 동급의 경지에 이르고 나서 저글을 이해할 수 있겠죠.
그러나 저 글을 쓴 작자도 우리가 원하는 의식의 전환이나 깨달음같은 그런 경지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저 글을 쓴 사람도 일반 사람이 저 글을 해독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을것 같아요. 왜냐하면 아주 쉬운 말로 인류 최대의 비밀을 말해줘도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는데. 저런 암호문으로 무슨 일을 기대했겠어요. 다만 추측하기에 아주 외로웠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기에. 그래서 후대에라도 자기 같은 사람이 있을까봐서, 글을 남겼겠죠.
@올빼미 너 혼자 뿐은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었겠죠.
그러나 저런 글을 남겼을때 발생할수도 있는 불상사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통한 사람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저런 글을 이용해서 반드시 대장 노릇하려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또 반드시 그런 사람을 추종하는 무리가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그런 무리들은 반드시 사회에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겠죠.
이 이야기가 바로 현존하는 종교단체들의 현주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