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운명을 바꾸는 법’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여러분,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참으로 어려운 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으로 바꾸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이지 않은 무언가 획기적인
다른 수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이런 절묘한 방법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요.
불교에는 이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주제가 운명이니, 바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는 운명을 바꾸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잘 아시겠지만 바로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부처님 명호를 열심히 부르는 수행이 있습니다.
기도라고도 하고 염불이라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거나 아니면
석가모니불, 지장보살을 찾기도 합니다.
또 다른 수행법으로는 간경을 있습니다.
경전을 읽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참구하는 것입니다.
또 화두 참선을 통해 깨달음의 길로 곧장
나아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수행을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부처님의 명호를 일념으로 찾는 이유 말입니다.
바로 우리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의 경전을 열심히 읽고 참구하는 것
또한 타고난 운명을 개선하고 궁극적으로
완전히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다른 종교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절대자를 믿고 따르는 것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구원이지요.
신의 은총입니다.
마치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에게 선생님이
선물을 주는 형식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결코 어떤 절대자의 능력을
믿고 따른 것으로, 그러니까 구원을 통해
운명이 바뀔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념으로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고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분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의 삶을 닮아가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으로써 운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바라문이라는 수행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요즘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절대자를 믿었습니다.
흔히 범신(梵神)이라고 합니다.
범신 또한 우주를 창조하고 천지조화를
이루고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마음대로 합니다.
그런데 바라문들은 절대자를 믿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았습니다.
그 절대자와 하나가 되는 것을 갈구했습니다.
믿고 따르는 것을 넘어 하나가 되고자
갈구하는 것, 이때부터는 수행의 영역입니다.
우리 또한 부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을
모든 수행의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참선이나 간경, 어느 수행도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복을 얻기 위해서, 병고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뭔가 얻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기도를
합니다.
경전을 읽는 사람 또한 지식의 알음알이로
끝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연 이래서 운명이 바뀔 수 있을까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참선을 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님을 부르고 화엄성중을 찾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결국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 진리의 당체로
탁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분별을 끊어버리고 삼독심을 제거해야 합니다.
참선을 하던지, 염불을 하던지, 간경을
하던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경계, 내가
마멸되고 사라지는 현상. 이 모든 것은
일심(一心)으로 정진했을 때 가능합니다.
따라서 수행을 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복을 받기위해 기도를 하기도 하고 병을
고치기 위해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불자들은 기도할 때 가르쳐 준 목표에 따라
기도를 합니다.
물론 기도를 통해 복을 받을 수도 병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도의 목표는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바로 알 수 있게 해 달라.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기도든 예불이든 염불이든 간경이든
모두 방편입니다.
방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관세음보살이든 지장보살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표가 중요합니다.
깨달음,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