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내세를 위한 이생의 삶이어야 ....
지난 주간에는 죽음과 관련된 두 분의 행사를 치르며 우리에게 내세가 없다면 얼마나 비참할까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를
가졌습니다. 작년 이맘 때 100세를 일기로 하늘나라에 가신 고준봉 권사님 그 분이 남기신 아름다운 일들로 우리 모두의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습니다.
권사님 선물 하나쯤 받지 않은 성도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권사님은 아무 말 없이 교인들의 형편과 처지를 살펴.. 어떤 이에게는 신발을, 어떤 이에게는 바지를, 양말, 겨울내복, 점퍼, 자켓, 라면, 사탕, 심지어 소금, 장학금, 용돈까지 상상을 초월한 일들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토요일 밤이면 예배당에서 설교 준비하는 개척교회 목사를 위해 어김없이 카스테라 3개와 라면 3개를 커피와 함께 배달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왜 3개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주일날은 말씀으로 채우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골고루 하나씩 챙겨 먹으라고 그랬을 것이라 제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권사님에게는 합당하거나 부당한 것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어찌 아셨는지 큰 찻길 건너 일주일에 한 번 밥해주는 곳엘 다녀오시더니.. “밥 때가 되면 어디서 오는지 늙은이들이 때로 몰려와요”라고 하시면서 그날 있었던 얘길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행색이 초라한 할머니 한 분이 오시는데 그 할머니는 식사를 하시다가 반쯤 남겨 비닐봉투에 챙겨 가신다는 거였습니다. “그 할마이 5만원 주고 왔어요. 5만원이면 쌀 한 푸대 살 수 있갔디?”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그 할머니를 쭈-욱 지켜보시다가 형편이 어렵다고 판단해서 용돈을 챙겨주셨던 것입니다.
당시 97세를 넘기신 분이 어떻게 그런 긍휼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생각할수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사님은 살아계실 때 이미 시신기증을 했기 때문에 숨을 거두자마자 연세대병원측에서 시신을 모셔갔다가 3개월쯤 지나 화장해서 목함에 넣어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묘를 만들지 말라 하셨기에 수목장으로 모셨습니다. 그 연세에 어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참으로 위대하신 권사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잡목 우거진 숲을 헤치며 밭길에서 20여 미터쯤 올라가자 3평정도 평평한 언덕이 나왔습니다. 그곳이 산소라는데 기념수나 비석 대신 손바닥 크기의 돌멩이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길도 없고 표식도 없는 이곳에 누가 다시 찾아오겠는가? 생각하니 쓸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되돌아 더듬거리며 내려오는 길에 상수리 열매 몇 개 주워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홍미향 선교사 모친 기예순 집사님께서 향년 93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연락을 받았던 터라 부지런히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다음 날 주일 오후예배 시간을 당겨 드리고 교우들과 함께 전남 광주로 문상하러 갔습니다. 기예순 집사님께서도 살아계실 때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았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릿고개를 넘기면서 집사님에게 얻은 보리쌀 한 되를 가지고 삼사일씩 나눠 먹었고, 어떤 이는 먹을 게 없어 굶주리고 있을 때 하얀 쌀밥을 가져다 주셨다고 추억했습니다.
남에게 베푼다는 것은 많이 배우고 잘 알고 깨달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평소 몸에 베인 삶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집사님의 막내딸 홍미향 선교사께서 “엄마를 조금이라도 흉내 내는 삶을 살겠노라” 공동체 공간에 글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에겐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명제입니다. 죽음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영적 죽음'입니다. 이는 영이 하나님을 떠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둘째는 '육체적 죽음'입니다. 이는 영이 육체를 떠나는 것으로 영과 육체가 분리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누구나 이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이는 육체적 죽음 이후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영들이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신자는 육체적 죽음만 경험할 뿐, 그것도 주님 재림 시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온전한 영체로 변형되어 영생복락, 즉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고준봉 권사님과 기예순 집사님은 지금쯤 주님과 함께 낙원 어디쯤 걸으며 새 노래를 부르고 계실 것입니다. 물론 “새 노래”란 새로운 곡이라기보다 질적으로 새로워진 노래를 일컫습니다. 우리도 이 두 분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6: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4:14)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돌아가신 분들은 영만 존재하기 때문에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주님의 재림을 맞는 신자들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홍종찬목사 (아름다운교회) / 출처 : 창골산...
첫댓글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6~17)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4:18)
@참음 아멘...
오직 소망은 예수님..본향..
귀한 내용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