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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jeangenie
여기저기서 찾은 것들 정리한 거 올려볼게^^
우선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혹은, 당시 활동했더) 젊은 예술가들. 여기에 정리돼있던 걸 기초로
우리한테 잘 알려진 사람들 위주로 추리고 빠져있던 사람도 몇몇 채워봤어. 영어권 네티즌이 정리한 거라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인물 순으로 나온다. 모국이 전승국인가, 패전국인가, 참전국인가에 따라
전쟁 경험도 상당히 갈렸다는 걸 알게 돼. 목록의 인물들은 주로 80년대~90년대생이야.
여기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거의가 전쟁에서 살아남아 이후 활발한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지.
그 중 20세기 중후반까지 살았던 사람들은, 다시 말해 장년기에 2차 세계대전까지 겪어야 했다는 뜻ㅠㅠ
↑ (왼쪽부터)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책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안녕』 표지,
1920년에 찍은 시그프리드 서순과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사진, 아들과 함께 있는 A. A. 밀른.
로버트 그레이브스Robert Graves (1895~1985). 영국의 문필가, 시인. 역사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스다』, 평론집 『하얀 여신』 등 많은 작품을 선보임. 1914년에 보병대에 입대, 1915~16년에 서부전방에서 현역 복무. 솜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한 이후에는 영국에서 복무했다. 1929년, 그때의 경험을 기록한 회고록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안녕』 출간.
J. R. R. 톨킨J. R. R. Tolkien (1892~1973). 『반지의 제왕』, 『호빗』 등으로 유명한 영국의 판타지 소설가. 1차 세계대전 당시 랭커서 퓨질리어 보병단 소위로 서부전선에서 복무. 1916년에는 솜전투에서 활약했지만, 참호열에 걸려 같은 해 11월 의병제대함.
C. S. 루이스C. S. Lewis (1898~1963). 『나니아 연대기』로 잘 알려진 아일랜드 출신 동화 작가.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머셋 경보병단 중위로 서부전선에서 복무. 1917년에 아라스 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영국에 돌아와 복무했다.
A. A. 밀른A. A. Milne (1882~1956). 『곰돌이 푸우』로 알려진 영국의 작가, 시인, 극작가. 1차 세계대전 당시 로열 워위크셔 연대에 소속돼 서부전선에 투입됐지만, 건강이 악화된 이후 통신대에서 복무.
서머셋 몸Somerset Maugham (1874~1965). 『인간의 굴레』, 『달과 6펜스』 등을 쓴 영국의 소설가, 극작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이미 마흔 살의 기성 작가였던 몸은 현역으로 복무하기에는 고령이었기 때문에 서부전선에서 구급차 운전병으로 일하는 동시에 비밀정보국에서 활동. 복무 틈틈이 소설 집필을 계속함.
↑ (위) 윌프레드 오웬, 시그프리드 서순
(아래) 카라바조의 그림 <이삭의 희생>
윌프레드 오웬Wilfred Owen (1893~1918). 영국의 전쟁 시인. 참호전과 가스 공격의 공포를 다룬 그의 충격적이고 사실적인 시는 친구이자 멘토였던 시그프리드 서순Siegfried Lorraine Sassoon(1886~1967)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으로, 당시 대중의 전쟁 인식이나 루퍼 브룩Rupert Brooke과 같은 초기 전쟁 시인들이 썼던 확신에 찬 애국시들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학교에서 영어와 불어를 가르치고 있던 오웬은 애초 참전할 의향이 없었으나, 1915년 예술가 장교교육단에 입대해 이듬해 맨체스터연대 소위로 배치됨. 포탄 구멍에 떨어져 뇌진탕을 일으키고 죽은 병사들 틈에서 깨어나는 등의 트라우마를 겪고 전쟁신경증으로 에딘버러의 군병원에서 요양 중 동료 시인 서순을 만난다. 1918년 8월 말 전방으로 복귀하지만, 종전을 일주일 앞두고 상브르 운하를 횡단하려던 중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노인과 소년의 우화>
윌프레드 오웬
하여 아브라함은 일어나, 장작을 패 떠났다.
불씨도 가지고 갔다, 그리고 칼도.
둘이 같이 머무를 때에
맏아들 이삭이 말했다. ‘나의 아버지여,
불씨와 쇠붙이, 준비물은 갖췄습니다.
하지만 번제燔祭를 드릴 양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아브라함은 소년을 가죽 띠로 얽어매고
그곳에 흉벽과 참호를 짓고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 했다.
그런데 보라! 한 천사가 하늘에서 그에게 소리쳐
말하기를,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아이에게 아무 짓도 말라. 보라,
저 양을, 그 뿔이 덤불에 걸렸도다.
아이 대신 '긍지의 양'을 바쳐라.
그러나 노인은 그러지 않고 아들을 죽이고
유럽의 씨의 절반을 하나씩 죽여 나갔다.
구스타브 홀스트Gustav Holst (1874~1934). <행성> 모음곡으로 유명한 영국의 작곡가, 음악교사. 1차 세계대전 당시 입대를 원했으나 시력, 폐활량 등의 건강 문제로 불합격된 후, YMCA를 통해 해외 파병 병사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아 봉사함. 홀스트의 본명은 구스타브 본 홀스트Gustav von Holst였는데, 전후 영국을 휩쓴 반독일 정서 때문에 이름에서 '본von'을 떼어내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부모는 독일인이 아니라 러시아 출신 스웨덴인들이었다고. (영국 왕가도 같은 이유로 1917년에 작센-코부르크-고타Saxe-Coburg and Gotha(독일어로는 Sachsen-Coburg und Gotha)였던 본래 가문 이름을 윈저 가House of Windsor로 고침.)
허버트 리드Herbert Read (1893–1968). 영국의 시인, 문학 및 미술 평론가. 1차 세계대전 당시 그린하워즈 연대에 합류해 서부전선에서 복무, 무공십자훈장과 수훈장을 수여받고 대위 계급까지 오름.
헨리 무어Henry Moore (1898~1986). 영국의 조각가. 전쟁 중이던 1917년에 18세가 된 무어는 영장을 받고 보병단에 입대, 서부전선에 투입됐다. 캉브레전투에서 독가스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회복 후 종전까지 훈련관으로 복무. 무어는 훗날 자신은 근 2년의 참전 기간 동안 "영웅이 되고 싶은 낭만적인 열정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는 겪지 않았다고 고백함.
↑ 허버트 리드
↑ (위로부터) 평상복과 군복 차림의 윈덤 루이스,
윈덤 루이스 작 <폭격 당한 포대>(1919), <T. S. 엘리엇의 초상>(1938)
윈덤 루이스Wyndham Lewis (1882~1957). 영국의 화가, 소설가 겸 평론가. 전쟁 직전에 '소용돌이파Vorticism'이라는 미래파 예술운동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17년에 왕립포병연대 소위로 서부전선에서 복무. 이후에는 전쟁화가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E. M. 포스터E. M. Forster (1879~1970). 『인도로 가는 길』, 『전망 좋은 방』, 『하워즈 엔드』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비록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1916~17년에 이집트의 적십자 군병원에서 자원 잡역부로 근무함.
↑ (위로부터) 베라 브리튼과 오빠 에드워드 브리튼, 1919년
간호사 시절의 베라 브리튼, 『젊음의 유언』 표지
베라 브리튼Vera Brittain (1893~1970). 영국의 문필가, 여권론자이자 반전론자. 『잃어버린 세대의 편지』, 『젊음의 유언』 등의 저서로 알려져 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학업 중이던 1915년 구급간호사로 자원. 전쟁으로 약혼자였던 시인 롤랜드 라이튼Roland Leighton과 총명했던 오빠 에드워드를 잃는 비극을 겪고 이후 강경한 반전론을 펼치게 된다.
T. S. 엘리엇T. S. Eliot (1888~1965). 『황무지』, 『네 개의 사중주』 등으로 유명한 시인, 극작가, 평론가, 출판가. 미국에서 태어나 1914년 영국으로 이주, 1927년에 귀화했다. 하버드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1908년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발견하고, 2년 뒤 파리로 가 소르본에서 유학하던 중 역시 상징주의 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장 베르드날Jean Verdenal(1890~1915)이라는 의대생을 만남. 1914년 엘리엇은 독일 마르부르크에서 공부할 계획을 세웠으나 전쟁 발발로 대신 영국 옥스퍼드행을 택한다. 청년들이 징병되어 한산한 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베르드날이 군의관 복무 도중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됨. 당시 베르드날은 스물네 살이었다.
공허한 도시,
겨울 새벽 갈색 안개 속을
런던 브리지 위로 사람들이 흘러갔다, 이렇게 많이
이렇게도 많은 사람을 죽음이 파멸시켰으리라 나는 결코 생각 못했다.
짧은 한숨을 이따금 내쉬며
각자 자기 발 앞을 주시하면서,
언덕을 올라가서 킹 윌리엄 가로 내려가
성 메리 울노스 교회가 죽은 소리로 아홉 시의
마지막 일타를 울려 시간을 알리는 곳으로.
거기서 나는 친구를 발견하곤 "스텟슨"하고 소리쳐 그를 멈췄다.
"자네 밀라에 해전 때 나하고 같은 배에 타고 있었지!
작년 자네가 정원에 심었던 그 시체가
싹이 트기 시작했나? 올해에는 꽃이 필까?
혹은 갑작스런 서리가 묘상을 해쳤나?"
- 『황무지』(1922) 중에서
↑ 오토라인 모렐 부인과 함께 있는 젊은 시절의 T. S. 엘리엇, 1920년경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등을 쓴 미국 소설가. 1954년 노벨상 수상. 스페인 내전에서 특파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시력 문제로 입대자격을 얻지 못한 그는 유럽으로 건너가 이탈리아 전선에서 적십자 야전의무대에서 복무하지만 그곳에서 산탄과 기관총에 심각한 다리 부상을 입음. 그 와중에 부상당한 이탈리아 병사를 전장에서 구해내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메달을 수여받는다. 밀라노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미국 간호사 아그네스 본 쿠로스키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때의 경험으로 『무기여, 잘 있거라』를 씀.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 (1888~1959). 『깊은 잠』, 『기나긴 이별』 등을 쓴 미국 범죄 소설/스릴러 작가.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캐나다 군대에 징병돼 영국 보병단과 함께 서부전선에서 싸웠다. 이듬해 영국육군항공대에 합류해 파일럿 훈련을 받던 중 종전을 맞는다.
대실 해미트Dashiell Hammett (1894~1961). 1930년대에 활약한 미국의 인기 탐정소설가. 작품으로는 『몰타의 매』, 『피의 수확』, 『그림자 없는 남자』 등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좌익 활동가 겸 미국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했으며, 1953년 맥카시 상원의원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해미트는 미군 야전의무대에서 복무했지만, 1918년 스페인독감에 걸리고 이후 폐결핵에도 걸리고 만다. 의사의 조언에 따라 아내와 두 아이에게 감염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그의 결혼생활도 간접적으로 전쟁의 여파를 입게 됨.
↑ (왼쪽부터) 거트루드 스타인, 피카소가 그린 스타인의 초상화(1909)
1918년, 포드 트럭 앞에 선 스타인과 앨리스 B. 토클라스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 미국의 작가, 시인, 극작가, 에세이스트. 오늘날에는 그녀 자신의 작품보다는 프랑스에서 있었던 초기 모더니스트 운동에서 활약했던 피카소, 브라크, 후안 그리스, 헤밍웨이 같은 일군의 화가와 작가들을 후원하고 독려했던 그녀의 역할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스타인과 그녀의 동반자 앨리스 B. 토클라스는 애초 스페인에 피신해 있을 생각이었지만 파리에 머물고 있던 친구와의 연락 뒤 마음을 바꿔 파리로 되돌아온다. 그녀는 포드 트럭을 한 대 구입해 토클라스와 함께 자원 운전기사로 활동하며 프랑스 군병원에 의료 물품을 나르는 일을 맡는다.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 (1896~1940). 양차대전 사이의 '재즈 시대'에 활약했던 작가이자 1920년대 '잃어버린 세대'라고 불렸던 미국 문필가 및 지식인들 중 하나. 『위대한 개츠비』, 『밤은 부드러워』 등을 썼다. 1918년 피츠제럴드는 프린스턴대학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미군에 입대하지만, 군사훈련을 채 다 마치기도 전에 정전협정이 맺어졌다.
존 더스패서스John Dos Passos (1896~1970). 『맨해튼 트랜스퍼』, 『미합중국』 삼부작으로 이름을 알린 미국의 소설가 겸 화가. 1차 세계대전 중 패서스는 서부전선에서 노튼아르제 SSU-60 야전의무대 운전병으로 복무.
E. E. 커밍스E. E. Cummings (1894~1962). 미국의 시인, 에세이스트, 극작가 겸 화가. 소설 『거대한 방』, 시모음집 『튤립과 굴뚝』 등을 발표했다. 커밍스 역시 1차 세계대전 중 서부전선에서 노튼아르제 야전의무대에서 복무. 파리에 들렀다가 프랑스 당국에 스파이로 오인돼 체포당하기도 했다.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1897~1962). 미국의 소설가, 시인이며 194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대표작으로는 『음향과 분노』, 『압살롬, 압살롬』 등이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캐나다로 건너가 영국육군항공대에 가담. 작가들 사이에서는 그가 과연 군사훈련을 어디까지 감내할 수 있을까, 심지어는 과연 그가 결국 징집될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고 한다. 포크너는 이후 자신의 복무 경험을 과장해서 이야기하곤 했다고. 분명한 사실은 그가 전투에 참가한 적이 없는 것은 물론 프랑스에 발을 디딜 기회도 없었다는 것.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 전쟁 직전에 동료 화가 피카소와 함께 큐비즘 화풍을 개진했던 프랑스의 모더니즘 화가. 1914년에 입대해 서부전선에서 복무하던 도중 심각한 머리 부상을 당했다.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 (1881~1955). 프랑스의 모더니즘 화가, 조각가. 큐비즘 운동에 참여했으며, 1900년대 이래 큐비즘 및 추상적 작품들을 발표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좀 더 부드러운 구상화풍을 발전시켰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군대에 동원돼 종전까지 서부전선에서 보병으로 복무. 1916년 9월 베르둥전투에서 독가스 공격에 부상을 입고 빌팡트에서 요양기간을 가졌다. 이후 그는 전방에 있었을 당시 "함께 있던 사람들의 순박함, 다양성, 유머, 순전한 완벽성"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1912~13년의 추상미술을 잊어버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고백. 종전 직후, 그는 사실적이고 보다 기계적인 화풍을 구사했다.
↑ (위로부터) E. E. 커밍스의 1917년 여권 사진, 1918년의 헤밍웨이
페르낭 레제 작 <카드 게임>(1917)
발레 뤼시의 니진스키Vaslav Nijinsky(1890~1950)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리스 라벨,
라벨과 니진스키 부부, 각각 1912~14년경에 파리에서 찍은 사진.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 <볼레로>, <거울>, <스페인 랩소디> 등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1차 세계대전 당시 왜소한 체구였던 그는 자신이 파일럿 훈련에 적합할 거라고 생각해 프랑스 공군에 입대하려 했지만 건강과 나이 문제로(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이미 39세였다) 좌절됨. 대신 군용차 운전병으로 서부전선 베르둥 지구에서 복무했다. 전쟁 중에 프랑스 음악 방위를 위한 국민연맹Ligue Nationale pour la Defense de la Musique Francaise이 결성되어 그에게도 동참이 요구됐지만, 라벨은 외국 작곡가들의 작품으로부터 고립된 고국의 음악은 퇴락하고 말 것이라며 가담하지 않았다.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1907~16년 파리의 큐비즘 및 추상주의 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시인, 작가, 평론가. 그의 예술평론에서 '초현실주의Surrealism'이란 말이 탄생했으며, 그 자신 피카소와 절친한 사이이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아폴리네르는 프랑스 보병단에 합류해 싸웠고, 1916년 머리에 심각한 산탄 부상을 당함. 시인 장 콕토는 1917년 자신이 쓰고 에릭 사티가 음악을 만든 오페라극 <퍼레이드>가 상연되었을 때, 흉터가 있는 민머리에 붕대를 감고 앉은 덩치 큰 아폴리네르가 거기 없었더라면 숙녀 관객들이 머리핀으로 관계자들의 눈알을 모두 뽑아놨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부상은 회복되는 듯 보였지만, 그로 인해 체력이 약해진 아폴리네르는 1918년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함.
장 콕토Jean Cocteau (1889~1963).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초현실주의 운동에 관여해온 프랑스의 작가, 시인, 영화감독, 극작가 겸 무대연출가, 평론가. 소설 <무서운 아이들>, 영화 <오르페우스>로 잘 알려져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콕토는 적십자 구급차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 (위로부터) 1910년, 피카소의 아틀리에에 있는 아폴리네르, 1917년경의 아폴리네르
어린 시절의 장 콕토,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콕토
오토 딕스Otto Dix (1891~1969).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활약한 독일 표현주의 화가. 전쟁과 현대 독일의 삶을 반영한 강렬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대형 유화 <참호전>에서 세계 대전의 공포를 소름끼치게 그려냈지만, 이 그림은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나치에 의해 불태워진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23세였던 딕스는 군에 입대, 야전포병여단에서 복무한 뒤 곧 기관총분대에 배치돼 1916년 솜전투에서 싸우다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1917년에는 동부전선에서 복무했고, 러시아가 항복한 이후 서부전선으로 돌아와 1918년 3월 공세에 참여했다. 철십자훈장을 받고 원사 계급에 오름.
막스 베크만Max Beckmann (1884~1950). 1920년대와 30년대에 활동한 독일 표현주의 화가. 1914년 군병원 잡역부로 자원해 야전병원과 전방에서 복무했지만, 이듬해 전투신경증과 신경증에 시달리다 제대함.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 독일의 초현실주의 화가, 판화가, 조각가, 시인. 1920년대와 30년대 유럽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미국으로 망명. 에른스트는 1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으로 복무했다. 참호에서 겪은 경험은 그를 크게 변화시켰으며, 그는 나중에 자서전에 이렇게 쓴다. "막스 에른스트는 1914년 8월 1일에 죽었다."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 (1887~1914). 독일 표현주의 및 1907~14년 독일과 프랑스에서 활약한 청기사에 속했던 화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케는 독일군에 입대해 서부전선에서 복무. 1914년 9월 26일 샹파뉴에서 전사했다.
↑ (위로부터) 오토 딕스 작 <참호전>(1932)
<자화상>(1913), <전쟁의 신으로서의 자화상>(1915), <전쟁포로로서의 자화상>(1947)
막스 에른스트 작 <살인 비행기>(1920)
아우구스트 마케 작 <녹색 재킷을 입은 여인>(1913), 전쟁 전의 마케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 1920년대와 30년대 독일 표현주의 운동에 속했던 화가, 판화가. 1937년 나치는 그의 그림들을 퇴폐예술로 규정하고 그 중 다수를 팔거나 파괴함. 그 이듬해 키르히너는 스스로 목을 끊는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키르히너는 군에 자원입대해 독일군 보병으로 서부전선에서 싸웠다. 1915년 전투신경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려 의병제한 뒤 이후 2년을 스위스의 요양원에서 보냈다.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1880~1916). 독일의 모더니즘 및 표현주의 화가. 세계대전 이전 새로운 회화 양식을 개척한 인물 중 하나. 1914년에 징병된 마르크는 독일 보병단에서 복무. 1916년 그의 이름은 국가 문화 보호 차원에서 군복무에서 제외할 자격이 있는 독일 예술가 및 문필가 명단에 올랐다. 그러나 제대 명령이 전방에 전해지기 전, 1916년 베르둥전투에서 마르크는 포탄 파편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바우하우스 운동과 연을 맺었던 독일 화가. 나치가 모국에서 권력을 잡기 직전이었던 1933년 스위스로 망명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클레는 운이 좋아 전방 복무를 피할 수 있었으며, 그 대신 후방에서 독일 군용기에 위장색을 칠하는 화가로 고용되었다. 그때 그가 한 작업은 이후 그의 작품 속 추상 요소에 영향을 미침. 아우구스트 마케, 프란츠 마르크와 절친한 동료 사이였던 클레는 그들의 때이른 죽음에 깊은 충격을 받는다.
카를 오르프Carl Orff (1895~1982). 칸타타 <카르미나 부라나>와 아동 음악교육에 대한 기여로 잘 알려진 독일의 작곡가. 1차 세계대전 중 오르프는 독일군 보병으로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 (위로부터) 프란츠 마르크 작 <말이 있는 풍경>(1910)
1913년경의 키르히너, 키르히너 작 <군인으로서의 초상화>(1915)
↑ 파울 클레 작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1920)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 독일의 시인, 극작가, 연출가. 『밤의 북소리』, 『서푼짜리 오페라』,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썼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16세였던 브레히트는 입대를 원했지만, 먼저 입대한 학교 친구들이 충격적인 속도로 죽거나 불구가 되는 것을 보고 마음을 돌린다. 부친의 조언에 따라 복무를 피하기 위해 뮌헨대학 의대에 입학. 그러나 1918년 후반에 결국 징집되어 상병 전문병원 잡역부로 일하게 되지만 한 달 만에 전쟁은 막을 내렸다.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 독일 건축가. 1920년대 바우하우스 예술 및 디자인 운동을 일으킨 창시자. 1차 세계대전 당시 그로피우스는 독일 보병단 원사로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전투 중 큰 부상을 입고 생사에 갈림길에 놓였으나 목숨을 건짐.
파울 비트겐슈타인Paul Wittgenstein (1887~1961). 한쪽 팔을 잃고 왼손만으로 혁신적인 연주 테크닉을 구사해 1920년대와 30년대 대단한 성공을 구가했던 오스트리아 출신 피아니스트, 음악교사. 유대계 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오스트리아가 나치독일에 합병된 1938년 미국으로 망명, 1946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파울에게는 네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둘은 1914년 이전에, 다른 한 명은 1차 세계대전으로 복무하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일하게 남은 형제는 유명한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차 세계대전 당시 파울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군대에 입대해 폴란드 침공에 참여했다. 전투 중 오른팔에 총을 맞고 러시아 군의 포로가 됨. 치료를 받긴 했으나 부상 부위가 감염되어 오른팔을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시베리아 포로수용소에서 그는 한쪽 팔만으로 연주하는 법을 터득해 음악을 계속하리라 결심하고, 자신에게 음악을 가르쳐준 옛 스승에게 한손으로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곡을 작곡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쓴다.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 초기 표현주의 운동에 속했던 오스트리아 화가. 결혼예정일 사흘 전이었던 1915년 6월 영장을 받았지만, 전방 복무에는 부적격 판정을 받고 1916년 러시아군 포로수용소 경비로 복무하게 됨. 1918년 10월 스페인 독감에 걸린 쉴레는 2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사흘 만에 아내 역시 같은 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표현주의 화가. 1913년작 <바람의 신부> 등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938년 나치를 피해 고국을 떠나 1946년 영국 시민이 됨.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군대에서 복무하던 중 부상. 의사들로부터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는 판정을 받고 제대.
↑ (왼쪽부터) 1917년 뮌헨 의대 학생 시절의 브레히트,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발터 그로피우스
1920년경의 코코슈카, 전쟁 이후의 파울 비트겐슈타인
↑ (위로부터) 동료 병사들과 함께 있는 에곤 쉴레, 쉴레 작 <러시아 전쟁포로>(1916)
움베르토 보초니Umberto Boccioni (1882~1916). 이탈리아의 화가 겸 조각가. 1907~14년 시기에 고국에서 작품을 선보였고, 강경한 반전통주의 노선을 취해 이탈리아 시각예술, 음악, 건축, 문학에 대혁명을 가져온 미래주의 운동의 중요한 일원 중 하나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보초니는 이탈리아 기병대에 징병됨. 1916년 8월 베로나 근처에서 훈련을 받던 중 말에서 떨어져 말발굽에 밟히는 사고를 당해 이튿날 사망했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 (1863~1938).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소설가, 시인, 극작가, 저널리스트. 소설 『쾌락』, 시 『소나무숲 속의 비』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파시즘 운동의 초기 멤버이기도 함. 1차 세계대전 당시 단눈치오는 이탈리아 공군 조종사로 활동하다 사고로 한쪽 눈을 잃는다. 오스트리아가 점령하고 있던 바카르 항에 대한 폭격을 이끌어 이탈리아 대중과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1918년 8월에는 9대 편대 비행으로 700킬로미터를 날아 비엔나에 삐라를 뿌리기도 함. 비행중대 지휘관으로 종전을 맞았다.
주제페 웅가레티Giuseppe Ungaretti (1888~1970). 미래주의, 상징주의, 다다 운동에 참여했던 이탈리아 시인. 그 역시 이후 파시즘 운동에 발을 들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군에 입대해 프랑스 국경에 면한 북이탈리아 지역에 배치됨. 참호에서 첫 시집을 썼다.
↑ (위로부터) 보초니 작 <동시적 시각>(1911),
파시스트가 되어버린 시인 단눈치오
다음은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컬러사진.
여러 곳에 다양한 사진이 올라와있는데, 위에 쓴 거 찾아 올리다가 지쳐버려서ㅋ
유명한 사이트 retronaut.com에 올라온 것 중에 몇 장만 골라볼게.
(끔찍한 사진은 하나도 없어. 여기 사진은 - 당시 사람들을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로 보게 해주는 - 아주, 아주 평온한 사진들 위주야.
하지만 찾아보면, 정말 끔찍한 사진들도 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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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라벨..
전쟁과 예술가들 뭔가 안어울릴것같으면서도 신기하다...담아갈게!!
삭제된 댓글 입니다.
난 귀한 댓글이 고맙다는ㅋㅋㅋㅠㅠ 이런 글을 그것도 낮에 올려서 흐지부지 묻혀버렸거든ㅠㅠㅠ 암튼 고마워^^
와 좋다 ㅠㅠㅠ 잘읽었어 여시야 ㅠㅠㅠ
연어! 두고두고 보고싶은 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