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지존파 납치 생존자의 증언] 5: 수사와 재판

[느갭화장실불끄면움]

어둑해진 차창 밖을 내다봤어요. 제가 탄 차도 서초경찰서에 돌아왔는데 경찰서 입구에 기자들도 많이 보였어요. 김은혜 당시 문화방송 기자(전 청와대 대변인)도 기억나요. 방송기자들이 텔레비전 모니터를 보고 멘트 준비하는 게 보였어요. 문화방송, 한국방송, 서울방송 다 봤어요. 어림잡아서 기자들이 10명 이상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벌써 이 사건이 그렇게 알려졌나?’라고 생각했어요. 형사가 잠깐만 차에 있으라고 해서 기다렸어요. 밖은 어두우니 제가 차에 있는 걸 기자들이 몰랐어요. 그들(지존파)이 내려서 들어가는 걸 보고, 기자들이 인터뷰하려고 다가가는 게 보였어요. 저도 차에서 잠깐 내려 문화방송 기자한테 다가가 명함을 한장 달라고 했어요. 혹시 연락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차 뒷좌석에서 3시간 이상 있었던 것 같아요. 영광에 내려갈 때 반바지로 갔기 때문에 추웠어요. 당시 저는 몸무게가 40㎏ 정도여서 추위를 많이 탔어요. 지금도 추위를 많이 타요. 형사한테 “추워서 옷을 좀 사야겠다”고 말했어요. 고병천 반장님 덕분에 담당형사 모두 제게 특별하게 더 잘 대해줬습니다. 형사가 트레이닝복을 한벌 사서 제게 줬어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차에 한 4시간 정도 있었죠. 밤 10시쯤 되니까 절친이었던 고교 친구는 일하러 가야 돼 제가 가라고 했어요. 친구는 더 있겠다고 했는데 친구한테 피해 주기 싫어서 일부러 신경질 내고 못된 말도 했어요. “너 이 상황을 즐겨?”라든지 “너도 겁나잖아, 여기 있기 싫잖아”라고 못된 말을 했어요. 그렇게 억지로 친구를 보내고 10시쯤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만난 가족, 언니>
갈 곳이 없었어요. 10시 반쯤 형사 한분이 “갈 데 있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없다고 했더니, 후배 형사 중에 분당에 사는 사람이 있어서 분당 형사님 집에 가서 1박을 했어요. 이튿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어요. 뉴스가 크게 나와서 경찰서장이 제게 감사패를 전달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어느 호텔에 갔더니 경찰서장이 있고 경찰서에 근무하는 카메라맨이 제 뒷모습 사진을 찍었어요. 제보에 대한 격려금 300만원도 받았어요. 다시 분당 형사님 집으로 돌아왔어요. 형사님에게 자녀가 둘 있었어요. 아이들 방 중에 한곳을 제게 주었습니다. 나올 때 형사님 부인에게 보살펴줘 고맙다고 100만원을 드리려 했더니 거절하셨어요. 애들한테 용돈으로 10만원씩 줬어요.


그날 오후에 형사님 집을 나와서 바로 위 친언니에게 연락을 했어요. 언니는 이미 보도를 통해 제가 피해자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근데 연락할 길이 없었던 거죠. 강남역 뉴욕제과 앞에서 언니가 달려왔어요. 제 손목, 얼굴에 상처를 보고 울었어요. 눈 밑은 까맣고 머리는 자르지 못해 계속 길었어요. 언니가 울면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는데 공직에 있는 가족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언니 집 근처 안전한 호텔에 묵겠다고 하고 호텔로 갔어요. 당시 제 가족들은 못난 저 때문에 많이 고통받은 걸로 압니다. 그날 밤 노트를 하나 사서 자물쇠를 전부 다 잠그고 방에 앉았어요. 기록을 하려고요.


그날 밤 호텔방에서 잠을 못 자고 계속 겪은 일을 써 내려갔는데 10여장 정도가 됐어요. 고교 친구를 통해 고 반장 후배 형사 3명이 호텔로 찾아왔어요. “너는 힘들겠지만 정식으로 조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해서 다시 서초경찰서에 갔어요. 조서를 쓴 건 지존파 아이들이 잡히고 4일이 지난 후예요. 그 전에 한 제 진술을 보강해야 한다고 했어요. 경찰서에서 조서 작성을 마치고 친한 친구 집에서 3일 정도 묵었어요. 그 친구는 밖에 소리만 나도 겁을 먹더라고요. 제가 “걱정하지 마라. 걔네들 다 잡혔는데 왜 난리냐”고 신경질을 냈죠. 그러다 “나 집에 갈래” 하고 제가 자취했던 방으로 돌아왔어요.


1994년 9월8일 잡혀서 13일쯤 탈출한 거니 2~3주 만에 간 거죠. 새벽에 나왔던 방 상태 그대로 있던 집에 들어간 거예요. 주방, 욕실, 싱크대, 방이 하나씩 있는 빌라였어요. 3층 건물에 2층이었습니다. 소주 두병을 사들고 약국에서 수면제를 샀어요. 캡슐로 된 신경안정제였어요. 한갑에 10개 들었는데 두갑은 안 팔았어요. 문을 잠그고 앉아 있는데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아무 느낌 없었죠. 별로 살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이렇게 눈감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시달리기도 싫고, 가족들도 못 볼 것 같고, 자의든 타의든 나 때문에 피해 본 사람들 가족들한테도 미안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침대 끝에서 술을 마셨어요. 원래 밥을 잘 안 먹었는데 탈출하고는 더 안 먹었어요. 트레이닝복이 너무 커서 허리끈을 묶어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자취방에서 소주를 따라 놓고 참치캔을 땄어요. 소주 한잔을 마시는데 눈앞이 핑 돌더라고요. 속이 너무 뜨거워지면서 그 한잔에 독이 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반병 정도 마신 걸로 기억해요. 술을 마시니 감정이 북받쳤습니다. 일하던 카페의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어요. “내가 아니었으면 너는 이런 험한 거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을 텐데 미안하다. 잘 지내고, 너는 효녀니까 엄마랑 동생이랑 행복하게 잘 살 거야”라고 말했더니 친구가 “정수야, 너 왜 그래? 어디야?”라고 말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가족 중 한명한테 전화를 해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집에서 나를 도와주려 노력했는데 내가 비뚤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칼로 왼 손목에 몇번 상처를 냈습니다. 다시 술을 더 먹고 수면제를 먹으려고 하는데 밖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알고 보니 그 친구가 고 반장님께 연락을 했어요. 수면제를 먹으려던 순간 밖에서 문이 쾅쾅거리더니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주방 유리창문이 깨지는 소리였나 봐요. 고 반장님 후배 형사 두분과 친구가 왔어요. 형사가 “어리석은 짓 하지 마라. 죽을 고비를 넘겨서 탈출했는데 왜 죽으려고 하냐”고 말했습니다. 밤 11시쯤이었습니다. 손목 상처가 다행히 꿰맬 정도는 아니어서 연고와 붕대로 치료를 하고 강남의 어느 호텔로 갔어요. 나중에 문병 온 고 반장님은 “너 이렇게 죽을 거면 거기서 죽지 뭐하러 나와서 죽으려고 하냐”고 화를 냈어요. 그날 밤새 아침까지 오바이트를 했어요. 그날 저녁 고 반장님과 형사들을 포장마차에서 만났어요. 제가 닫힌 곳을 싫어해서 거기서 만난 겁니다. 지존파 조사가 끝났대요.



<재판을 보러 간 목적>
고 반장님이 검찰에서 출석을 원한다고 전했어요. 다음날 밤 서울에 있는 검찰청에 갔습니다. 형사들이 앞에 기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뒷문으로 들어갔던 것 같아요. 7층인가 11층인가 둘 중 하나인데 정확히 기억이 안 나요. 검사실에 들어가니 책상이 3개 보였어요. 검찰 수사관이 “이정수씨는 피해자 신분이지만 진술에 거짓이 있으면 안 되고 저들(지존파)과 다 맞춰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첫 조사 뒤 2주쯤 지나 다시 검찰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전 10시께 두번째로 검사실로 갔습니다. 이번엔 검사가 앉아 있고 옆에 조사실이 있었어요. 옆방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가 움찔하니 검사님이 신경쓰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검사님 앞 명패에 이름이 한자로 적혔는데 ‘김’자와 끝에 ‘일’자는 알아봤는데 가운데 글자는 한참 생각한 뒤에 떠올랐어요. 김홍일 검사님(전 부산고검 검사장. 현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이었어요.


옆방에서 뭔가 소리가 계속 났습니다. 제가 검사님에게 “무서워요”라고 했더니 김홍일 검사가 “신경쓰지 마라.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어요. “저것들은 나쁜 종자”라고 말했고 또 “저들이 세상 밖으로 못 나가게 해줄 테니까 걱정 말고 살라”고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뒤에 간단히 보강조사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검사실 문이 열리면서 5m쯤 떨어진 철문이 열리고 김현양이 포승줄에 묶이고 수갑을 앞으로 찬 채 푸른색 수의에 고무신을 하고 형사와 함께 들어왔어요.


저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어요. 김현양이 저를 쓱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리며 씨익 웃었습니다. 검사가 “너 여기 어쩐 일이야?”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게 의문점이에요. 김현양이 그날 그 시간에 왜 갑자기 검사실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요. 김현양이 검사님에게 “인사드리러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길어야 1분 정도 같은 공간에 있었어요. 저는 서서 앉지를 못했어요. 김현양이 나갈 때까지. 무섭기도 했고 놀랐어요. 거기서 마주친다는 생각은 전혀 못 했어요. 탈출한 이후에 김현양을 처음 본 거였어요. 김현양은 해맑게 “안녕히 계십시오.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수고하십시오”라고 하고 나갔어요. 저는 흥분해서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이게 뭐예요. 더 이상 말 못 하겠다”고 항의했습니다.


김 검사가 “놀랐죠? 걱정하지 마라. 앞으로 저들을 두번 다시 보는 일 없을 거다”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게 “잘 지내시라. 더 이상 부를 일 없을 거다”라고 했습니다. 검찰 조사 뒤 절친으로 지내던 친구 집에 다시 들어갔어요. 추석 명절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친구 집에 더 머무르기 어렵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자취방에 돌아왔어요. 친언니가 찾아와서 “여기서 이렇게 살았어?” 하고 물어보더니 울었어요. 자취방을 빼기로 했습니다. 가족들도 원래 살던 집을 헐값에 내놨습니다. 아버지가 방을 구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서울에서 살기 싫었습니다. 친언니가 사는 지방에 방을 얻었습니다. 1994년 10월께 이사했습니다. 고 반장님이 그해 가을 지존파 재판이 잡혔다고 연락을 해주셨어요. 서초경찰서를 방문했습니다.



첫 재판 법정에 들어갔어요. 날짜는 기억 안 납니다.(※당시 <한겨레> 보도를 보면, 검찰은 1994년 10월6일 지존파 5명과 이경숙 등 6명을 구속기소했고, 다른 범죄로 이미 구치소에 있던 두목 김기환에게 혐의를 추가했다. 첫 공판은 10월18일에 열렸다.) 서초동 법원(당시 서울형사지법)이었습니다. 제가 형사님 옆 방청석에 앉아 있는데 지존파 애들 뒤통수만 쫙 보였습니다. 법정에서 검사가 질문을 하고 지존파가 답했어요. 묻고 답하는 시간이 길지 않았어요. 그들은 법정에서 자신들이 잡은 사람이 실제 목적엔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후회는 안 한다는 식으로 답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현양과 김기환은 “후회 안 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제일 많이 대답한 게 김기환과 강동은이었습니다. 강동은은 여자친구인 이경숙에 대해 “그 여자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문답이 길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김현양이 뒤를 싹 돌아봤습니다. 눈이 마주치진 않았습니다. 저만 김현양의 눈을 봤죠. 김현양은 저를 못 봤어요. 갑자기 옆에서 누가 아는 척을 했어요. 검사실에서 저를 처음 조사한 수사관이었습니다. “잘 계십니까”라고 인사했어요. 법정에는 김홍일 검사 말고 다른 검사가 나왔어요.


재판이 끝난 뒤 엘리베이터를 탔어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떤 기자가 “혹시 신고한 이정수씨 아닙니까?”라고 물었어요. 저는 “아닌데요”라고 했더니 기자가 “맞는데요, 뭘”이라고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 저는 대답을 안 하고 그냥 있었어요. “귀찮게 하지 마세요. 저 아니라고요”라고 했습니다. 다시 형사님 차에 올랐습니다. 재판을 보고 싶은 심리는, 김현양에게 궁금한 게 있어서였습니다. ‘나를 정말 살려주려고 했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제가 도망갈 수도 있었는데 왜 그런 모험을 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정말 제가 도망쳐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까 궁금했습니다. 법정에서 그런 말을 판사가 물어볼 줄 알았는데 안 물어보더라고요.


인질인 제가 도망쳤는데도 지존파가 아지트에 남아 있던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전해들었습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지존파는 제가 자신들에게 조금이나마 협조했으니 섣불리 신고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진술했다더군요. 또한 제가 탈주한 뒤 영광경찰서 앞에서 실제로 잠복했던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잠복 결과 경찰의 움직임이 평소와 똑같아서 마음을 놨다고 진술했다고 합니다. 즉, 제가 탈출해서 영광경찰서에 신고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영치금을 넣어주다>


항소심 재판은 1995년 1월쯤 열렸습니다. 두번째로 재판 방청을 했습니다. 다시 그들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판사가 “부르지 않으면 일어나지 마라”고 했던 게 기억납니다. 판사가 “뒤돌아보지 말고 묻는 말에 답하라”고 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김현양은 이번엔 뒤돌아보지 못했어요. 항소심 재판 방청이 끝나고 누가 제게 인사를 했습니다. 김현양의 여동생이었어요. 형사에게 저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고 전해들었습니다. 통통하고 저보다 더 작은 여자였어요. 머리에 가발을 하고 화장을 좀 진하게 하고 얼굴은 동그란 형이었습니다.

제게 인사를 하는데 굉장히 표정이 밝았어요. 저더러 “보고 싶었어요”라고 했는데 저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더러 오빠(김현양)가 저를 만나보라고 얘기했다고 전했습니다. 오빠(김현양) 면회를 갈 것이라고 제게 말하고 제 연락처를 물었어요. 제 연락처를 줬습니다. 궁금한 게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당시 가족 외에는 면회를 할 수 없었습니다. 경찰들도 절대 면회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김현양에게 꼭 묻고 싶었습니다. 여동생이 면회 가는 데 같이 가려고 마음먹었습니다. 1995년 3월쯤으로 기억합니다. 아침 일찍 수원에서 여동생을 만나 서울구치소로 갔습니다. 여동생이 경기도에 있는 전자회사의 부품라인에서 일하고 공장 기숙사에서 살고 있어서 거기서 만났습니다. 여동생의 주민등록증을 제출하고 몰래 면회장소에 들어갔습니다. 아침 9시쯤이었습니다. 6명에게 영치금도 조금씩 넣어줬습니다.


면회실에 들어갔는데 김현양이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구치소 면회실은 처음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구멍이 뚫려 있는 유리창 안에 김현양이 앉아 있고 한켠에 교도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어요. 김현양이 “아, 정수씨 왔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첫마디는 “미안해요. 몸은 아픈 데 없어요?”였습니다. 묻고 싶은 질문을 그날 못 했습니다. 묻지 못했어요. 김현양이 하는 얘기를 계속 듣고 있었습니다. 저더러 “살이 좀 쪘네요. 얼굴에 살이 좀 붙었네요. 동생 잘 좀 부탁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냥 “네”라고 답했습니다. 서로 존댓말을 했고 김현양은 저더러 누나라고는 안 부르고 “정수씨”라고 불렀어요. 면회시간이 끝났어요.
김현양이 말했고 저는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어요. ‘왜 저를 살려준 거예요? 저를 일부러 살려준 거예요?’라고 물어보고도 싶었는데 도저히 묻지를 못했습니다. 납치당했을 때 제게 언젠가 김현양이 “평범하게 사랑하는 여자랑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덧붙여 “그런데 내가 그러면 우리 가족들이 지존파 사람들에게 개죽음당할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대해서 ‘그러면 그때만이라도 그만두고 자수했으면 좋지 않았을까’도 묻고 싶었습니다. 자수했으면 그 뒤의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 거잖아요. 가족들이 죽을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도망치지 못했던 것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면회실에서 나와서 지방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동생은 제가 사는 곳을 묻더니 놀러 가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머리가 복잡하고 추웠습니다.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집에 와서 녹다운이 됐습니다. 친언니가 “어디 갔다 왔냐”고 물었습니다. 가족들은 제가 혹시 재판을 볼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그걸 막으려고 가족들이 애썼어요. 당시 자동차운전면허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면회 때문에 하루 빠진 사실을 언니가 안 겁니다. 언니의 강권으로 언니 집에서 밥을 먹었어요. 저녁 먹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생이 두마리를 샀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살아 있는 걸 키운 적이 없었어요. 물고기 한마리도요. 집에서 아빠가 새, 강아지, 병아리를 키우는 건 봤고 앵무새도 거실에다 키워봤는데 저는 관심이 한번도 없었어요.


<남생이 두마리의 죽음>
다음날에 일상이 시작이 되는데 계속 생각이 맴돌았습니다. ‘김현양이 날 고의적으로 살려줬나? 아니면 살려줄 마음도 없었으면서 나를 떠봤나?’라는 생각이요. 그걸 제가 알고 싶었던 이유가 뭐냐면, 제 마음을 스스로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는 그걸 알았어야 했어요. 만약 김현양이 저를 고의적으로 살려주려고 했다면 저는 김현양에게 미안해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걔가 나쁜 짓을 했어도 어쩔 수 없이 그 사람(김현양)에게도 미안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날들이 시작된 거죠.



첫번째 면회 때는 못 물어봤어요. 입이 안 떨어져서. 보는 것만으로도 떨렸어요. 다만 떨림이 공포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면회소에서 나와서 저를 어떻게 해코지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약간의 미안함이 있었습니다. 그가 납치 기간에 제게 해준 행동에 제가 그때 많이 심리적으로 기댔던 것 같습니다. 그가 눈에 안 보이면 불안감과 공포심이 들었어요. 밴드마스터가 죽은 뒤 저는 심리적으로 김현양에게 기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살려줄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설령 죽더라도 김현양이 처리해줬으면 싶었습니다. 왜냐면 제게 고통 없이 해주겠다고 말했으니까요.


두번째 면회는 1995년 5월쯤인 것 같아요. 왜냐면 더워서 제가 반팔을 입고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었던 기억이 나거든요. 여동생과 같이 갔습니다. 또 영치금을 넣어줬습니다. 당시 사형이 선고된 상태였습니다.(※서울고법은 1995년 2월 지존파 6명에 사형을 선고했다. 이경숙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영치금을 준 건, 그 심정을 저는 알잖아요. 죽을 날 받아놓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 심정을. 그래서 먹는 거라도 잘 챙겨 먹으라는 그런 심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존파 가족들이 영치금을 넣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단 부모들도 면회를 안 갔으니까요.


두번째 면회 때는 제가 “나 왜 살려줬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김현양은 “살려준 거는 아닙니다. 모르겠다”며 답변을 회피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면회실 문이 열리면서 교도소 쪽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여동생 명의로 면회를 한 건 위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날은 힘이 쫙 빠졌습니다. 묻는 말에 대해 답을 듣긴 했지만 몸에 힘이 쫙 빠지면서, ‘내가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라는 허탈감을 느꼈어요. ‘면회를 내가 왜 지금 다니고 있는가. 또 이걸 누군가(다른 지존파 범죄 피해자)가 알면 나는, 또 욕먹을 짓을 또 하고 있다. 내 가족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을 또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날 밤에 기르던 남생이 두마리가 다 죽었습니다. 먹이는 소고기 생고기를 사다 주곤 했습니다. 바윗돌 위에 올려두고 구치소에 가서 면회를 하고 돌아왔는데 그중 한마리가 죽었습니다. 죽은 남생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울었습니다. 다음날 동사무소에 일이 있어 갔다가 근처에 묻어줬습니다. 그날 다시 나머지 한마리도 죽었습니다. 두마리를 같은 곳에 묻어줬습니다. 그때쯤부터 여름이라 더운데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툭하면 몸이 아파서 냉기와 열나기를 반복하더라고요. 응급실도 가고 링거도 맞고 자다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기도 여러 차례예요. 이상한 건 병이 없었어요. 링거를 맞고 검사를 다 했는데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몸을 누가 때린 듯이 아프고 꼼짝을 못하고 허리를 못 폈어요. 걷지를 못하고 밥을 못 먹었어요.


언론에서는 지존파 재판을 계속 보도했습니다. 당시 언니가 임신했습니다. 어느날 밤 언니가 밤에 산통이 와서 병원에 형부와 함께 갔습니다. 언니는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언니가 몸이 약하기 때문에 미리 입원했습니다. 병원에서 제왕절개로 낳아야겠다고 결정하고 제왕절개 수술을 하는 날이 1995년 11월1일이었습니다. 언니가 수술을 마치고 몸이 약해서 입원실에 2일 아침 9시 반쯤 들어왔습니다. 아침 뉴스를 틀었는데 “오늘 지존파 전원에게 사형이 집행됐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아침 9시 뉴스였습니다.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는 그런 뉴스가 나왔습니다. 저는 동생이니까 언니가 젖몸살이 와서 굉장히 아파하는데도, 차가운 물수건으로 언니의 몸을 보살펴줘야 하는데 뉴스를 보고 멍하니 서 있다가, 물수건을 던지고 가서 근처 신문 가판대에 있는 신문을 보니 사형이 됐다고 나왔습니다. 저는 감정이 정리가 안 됐어요. 그들은 영원히 갔는데, 가기는 갔는데, ‘이렇게 빨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편 ‘어쩌면 잘됐다.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음이 어쩌면 잘됐다. 그런데 강동은은 사형을 받을 정도의 죄가 될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밴드마스터를 살해할 때나 중소기업 사장 부부를 살해할 때 둘 다 강동은은 가담하지 않았으니까요. 아침 9시 반쯤 대대적으로 뉴스가 나왔던 게 기억납니다. 김기환이 남긴 말이라며 “다시 태어나도 그런 짓을 하겠다.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얘기를 했다더군요. “동생들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는 얘기를 계속 재판중에도 했었고, 진술서에도 김기환이 했대요.



<사라진 증오심>
그때 지존파에 대한 증오심은 없었어요. 납치된 후 처음 이틀 동안은 그들에게 부정적이었는데 밴드마스터가 죽고 나서부터는 체념이랄까,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모르지만 될 대로 되겠지라는 심리였습니다. 그들(지존파)이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칼을 그 전에는 무서워했지만 나중에는 무섭지 않았습니다. 재판 이후에도 증오심이 없었어요. 그곳에서의 나 자신과 현실에서의 나를 합리화시키려 타협하기 바빴어요.


나중에 정신과 상담을 받을 때 정신과 의사가 제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너무 큰 일을 당하게 되면 뇌에서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마비된다는 거예요. 웬만큼 작은 일이어야 이성이 유지되지 너무 큰 일을 겪으면 판단력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뭐가 옳고 그르고, 뭐가 무섭고 안 무섭고에 대한 판단력이 없어진대요. 그게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중에 하나라고 그러더군요.


사형 뉴스를 들으면서 ‘그들이 다 죽어서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명이라도 남겨놨으면 제가 업으로 삼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들이 다 죽은 게 차라리 잘됐다, 그러면 나는 이제 후환이 없잖아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전에는 사형제도 같은 것에 전혀 관심도 없었고, 범죄자에 대해서도 아무 관심이 없었어요. 범죄는 다른 사람들의 상황이지 나하고는 별개의 그냥 뉴스거리라고 생각했어요. 무관심 그 자체였어요.


3일 후 언니가 퇴원을 했어요. 저는 언니를 제가 보살펴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엄마에게 전가하고 친구와 부산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그때가 12월이었어요. 2주 정도 못 마시는 술을 마시고 술집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술에 필름이 끊기는 현상에 중독되듯 그 상황을 즐겼어요. 1996년 신정 때 아빠한테 전화해서 울면서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평생 타인들에게 피해 안 주시며 강직하게 사시는 아버지였는데 나로 인해 평생 사시던 동네를 떠나셨어요. 여행 갈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홀가분한 것도 아니고, 그 사건의 주인공이 나라는 생각을 못 했고 제3자인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술집이나 식당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나는 사람이 죽는 데도 있어 봤고 죽이는 데도 있어 봤다”고 남의 경험 이야기하듯 떠들었어요. “나는 그런데도 있어 봤던 여자야. 겁나는 게 없다. 내 몸은 내가 지킬 줄 안다. 만약에 내가 어떤 피해를 당한다면 너를 죽여버릴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지냈어요.


<뇌가 멈췄다>
사형 집행 뒤 김현양의 여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1997년 겨울 김현양의 어머니를 보러 그 집에 방문한 적도 있습니다. 김현양의 어머니가 저를 보고 어떤 행동을 할 수도 있겠다고도 생각했지만 그것도 내 운명이라는 이상한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성적 판단이 마비되듯 머리가 멍한 상태였어요. 2000년대 초까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나, 뭔가 옳고 그른지 판단을 거의 못 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김현양 어머니를 만난 자리에서 제가 도리어 “죄송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저는 살아 나왔다는 개인적인 감정이 앞섰어요. 지존파에게 피해를 당하신 분들에 대한 인지가 많이 부족했어요. 김현양의 범죄를 다 떠나서 저는 살아 있고, 죽은 사람 중에 그분 아들도 속해 있는 거잖아요. 부모들은 그렇잖아요. 내 자식이 아무리 살인자라고 하더라도 죽으면 슬퍼하잖아요. 김현양 여동생이 엄마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을 때 ‘내가 왜 봐야 하지?’라는 생각을 못 했고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뇌가 멈춘 듯한 상태였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마 절대로 보러 가지 않았을 겁니다.


사건 이후 판단이 안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범죄를 겪은 사람은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피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게 없었어요. 지존파 사건 이후 택시정류장에 택시를 잡으려고 사람들이 줄 서 있는데 허름한 차림의 거지가 다가왔어요. 다른 사람들한테 가서 구걸을 하는데 다들 피하더라고요. ‘저 사람이 나한테 오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거지가 딱 제 앞에 왔어요. 지갑에서 2000원을 꺼내 주니까 이 사람이 고맙다고 하면서 돈을 받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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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12231.html#cb#csidx3b899e906871e3c86c9f975c01f203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