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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이든 ,
한겨례 출판사
홍세화 에세이, 생각의 좌표
몰상식 127p~1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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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은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빨리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머리를 민 정신 나간 사람들."
"불교 믿는 나라는 가난하고 하나님 믿는 나라는 다 잘 산다."
다른 사회라면 '정신 나간' 보통 사람도 하기 어려운 말들이 한국 목사들의 입에서 나왔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서울 명동거리에서 마주치는 일부 광신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상에 엽기적인 일이 참 많지만 가장 엽기적인 일은
엽기적인 일을 엽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다.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차지하는 목사님들의 행태가 그런 예에 속한다.
일찍이 루소가 지적한
"자기가 믿는 모든 것을 믿지 않으면 선의의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모두에게 냉혹한 저주를 내리는"
불관용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불교를 믿는 나라는 가난하고 하나님 믿는 나라는 잘 산다"는
'맘몬의 신'이 지배하는 주류 개신교의 주장이다.
인구 중 63퍼센트가 가톨릭이고 2퍼센트가 개신교도로 구성원의 다수가 하느님을 믿는
프랑스는 잘 사는 나라에 속하는데,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피에르 신부는
"사람을 굳이 둘로 나누어야 한다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했다.
몰상식은 불관용을 낳고 불관용은 제어되지 않을 때 거침없이 폭력으로 나아간다.
이 사회에서는 차이를 용인하지 않는 몰상식이 용인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류를 차지한다.
종교의 차이에 대한 불관용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목사들이
주류를 차지하는 한국의 개신교는 이명박 정권에게
국가폭력 기관들을 맡겨두는 것에 비하면 덜 위험할까?
지금 그 둘은 한데 뭉쳐 있다.
한국의 종교계 인사들 중에서
"한국과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 갈등이 없었던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정말 한국사회구성원들이 유독 종교의 다양성만큼은 존중하는 것일까?
현상이 본질을 감추듯이,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이 절반 가까이 된다는 점.
그래서 어떤 종교도 절대 다수를
차지하지 않는 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
둘째 이유는 종교의 차이 말고도 사상, 이념의 차이와
지역차이로 편 가르기를 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구 기득권세력은 그들의
'잃어버린 10년'을 제외하고
사상, 이념의 차이와 지역차이로 편 가르기를 하여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성공했다.
극우 반공주의와 영남 패권주의는 사상, 이념의 차이와 지역의 차이를
차별, 억압, 배제의 근거로 삼는 강자, 다수에게 아주 편리한 무기다.
(..)
우리 사회에 아직 종교 갈등 양상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다른 종교를 용인할 줄 알아서라기보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원하여 효과를 본
사상, 이념의 차이, 지역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굳이 종교의 차이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없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앞으로 극우 반공주의와 영남 패권주의가 소기의 표과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할 때
종교의 차이도 동원될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그 전조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 시장으로 재직했을 때 서울시를 하나님에게 봉헌했던 이명박 장로 대통령에게
잘 보이려고 공직자들이 충성 경쟁에 개신교를 동원하고 있다.
경찰청장이 전국 경찰 부흥회 포스터에 등장하고
조계종 총무원장의 자동차를 조계사 들머리에서 불심검문한다.
(..)
공자는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고 했다.
군자는 하나로 획일화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데,
소인은 별 차이도 없으면서 불화한다는 것이다.
지상의 꽃들은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뿐
다른 꽃을 시샘하지 않는데,
소인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차이를 찾으려 애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같지 않다고 시비를 건다.
이 이중성은 남에 비해 자기가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만족해하려는 저급한 속성에서 비롯된다.
자기성숙을 모색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개인으로서 내세울 장점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속한 집단인 국가,민족, 종교, 지역, 혈연 출신 학교를 내세운다.
(..)
우리는 일생생활에서
'같다'의 반대말인 '다르다'와
'옳다'의 반대말인 '틀리다'를 뒤섞어 사용한다.
잘못 사용하는 줄 아는 사람들조차 잘못을 고치지 않고
계속 쓰고 있을 만큼 일상화되어 있다.
'다름=틀림' 등식은 한국 사회에서
'자유'의 반대를
'불안'이나 '무질서'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관철된다.
'자유'의 반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억압'이라고 정답을 내놓기도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자유의 반대가 마치
'불안'이나 '무질서'인 양 받아들인다.
그래서 용산 참사 사태나 쌍용차 노조 파업에서 보듯이
사회적약자나 소수자의 사회정의와 인권 요구를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데 동의한다.
'다름=틀림'의 등식은 다름의 관계를
'옳고/그름', '우/열'의 관계로 나아가
'선/악', '정상/비정상'의 관계로까지 증폭시킨다.
소수자와 약자는 소수자와 약자라는 이유로 차별, 억압, 배제당하고,
인권 침해의 대상이 된다.
(..)
차이를 차별, 억압, 배제의 근거로 삼지 말라는 성찰 이성의 요구가
똘레랑스라고 할 때,
한 사회가 보여주는 똘레랑스의 척도는 그 사회구성원들의
성찰 이성이 얼마나 성숙한가에 달려 있다.
성찰 이성에 눈뜬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 문화를 만날 때
서로 장점을 주고 받으려고 노력한다.
또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더 성숙하기를 기대하며 자기성숙을 위해 노력한다.
성찰 이상에 눈뜨지못한 인간은 자기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대신에
남과 비교하여 스스로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애쓴다.
자기 성숙의 긴장이없는 사람에게
우월하다고 믿게 해주는 것은
그의 소유물이며,
그가 속한 집단이다.
이 소유물과 소속집단은 인간 내면의 가치나 성찰 이성의
성숙과는 무관하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가난한 자,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 내국인의 우월성을
확인시켜주는 소수자, 약자가 돼줘야 한다.
(..)
성적 소수자들은 그렇게 태어난 존재이지만
이성애자들은 자신이 '정상'이라는 우월성을 확인하며
성적 소수자들을 억압하거나 차별하는 데 동의한다.
(..)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에게
"어이, 그래 한 달에 얼마 벌어?"라고
거리낌 없이
반말을 건네는 내국인들에겐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우월감이 있다.
(..)
선택할 수 없는 출생지를 두고 시비를걸고
특정 지역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사회에서,
궁극적으로 각자가 선택하는 사상과 신앙이 다르다고
시비를 걸고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유럽인들이 16세기에 같은 하느님의 자식이라면
신/구교로 분열되어 서로 잔인하게 죽이고 전쟁을 일으켰다면,
우리는 20세기에 같은 민족이면서 사상과 체제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잔인하게 죽였고 전쟁을 일으켰다.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있고
집단 광기에 몸을 맡길 수있는지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얼마나 반성적 성찰을 하고 있나.
나와 다른 상대방을 탓할 뿐이거나 기껏해야
전쟁 상황을 탓할 뿐이다.
(..)
20세기 초
유태인 청년은 자고 일어나는 아침마다
"아, 난 유태인이야"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지만,
게르만인 독일인은 자고 일어난 아침에
"아, 난 게르만이야"라고
확인하지 않는다.
아침마다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유태인에게 독일인들은 걸핏하면
"너, 유태인이지?"라고 말하는 반면에,
자고 일어나는 그 어느 아침에도 스스로
"아, 난 게르만이야"라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 없는 독일인에게
"너, 게르만이지?"라고 묻는 사람이 없다.
"나는 서울 사람이야",
"나는 경상도사람이야"라고 혼잣말하는
서울 사람이나 영남 사람은 거의 없지만,
"나는 전라도 사람이야"라고
혼잣말하는 호남 사람은 없지 않다.
또한 "너, 서울 사람이지?",
"너 경상도 사람이지?"라고
묻는 일은 거의 없지만,
"너 전라도 사람이지?" 라고
묻는 일은 이따금 일어난다.
한국사회에서
"너, 경상도 사람이지?",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는
두 개의 질문에
차이가 없을 때는 언제쯤 올까?
(..)
성 소수자들이 스스로
성 소수자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너, 동성애자지?"라는
물음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처럼,
소수자들은 소수자이기 때문에
소수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돌아보게 된다.
소수자에게 강요된 '자기 돌아봄'은
사회적으로는 천형天刑일 수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천혜天惠일 수 있다.
소수자들은 일상적인
'자기 돌아봄'을 통해
역지사지를 쉽게 익히지만,
다수자들은
자기 돌아봄도 부족하고 역지사지도 어렵다.
소수자에겐
자기성숙의 긴장이 살아 있지만
다수자는
다수파에 안주함으로써 자기성숙의 긴장을 놓치기 쉽다.
(..)
우리는 비교라는 말에 관해 성찰해야 한다.
남과 비교할 땐 서로 장점을 주고받기 위한 경우로 한정할 일이다.
나의 우월성을 확인하려는 비교는
멀리 하라는 것이다.
그런 비교는 자기성찰을 하지 않는
소인배들이 주로 즐기는 일인데,
다수자일수록 다수자에 속한다는 것에
자족하고 자기성숙을 게을리 할 수 있다.
남과 비교하는 일이 아닌,
어제의 나보다 더 성숙된 오늘의 나.
오늘의 관계보다는
더 성숙된 내일의 관계를 위한 비교에 머문다면
다수자, 소수자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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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독했어요!!!! 고마워!!!
좋은 글이야 고마워!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하면거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게 정말 많은 문제점을 발생시키네ㅠㅠ일상에서부터 노력해야겠어 오늘보다 나은 나를 위해서
연어하다가 왔어! 덕분에 좋은 글도 읽고 좋은 책도 알아가ㅎㅎㅎ내일 서점들러서 책 구입해야겠당! 좋은 글 써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