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이동진 블로그, 언제나 영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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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독일의 전설에 이런 게 있지요. 독일 바덴 지방의 어느 젊은 백작이 덴마크를 여행하다가 아름다운 성의 정원에서 놀고 있는 오라뮨데 백작 부인을 보고 한 눈에 반합니다. 그는 그 성에 머물며 남편을 잃고 아이들과 살아가던 오라뮨데 백작 부인과 깊은 사랑을 나눕니다.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을 때 그는 “네 개의 눈이 있는 한 당신을 바덴으로 데려갈 수 없다오. 네 개의 눈이 사라지면 반드시 당신을 데리러 오겠소”라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네 개의 눈이란 자신의 부모를 뜻하는 말이었지요.
집으로 돌아간 그는 수개월 뒤 반대할 줄 알았던 부모로부터 의외로 쉽게 허락을 받자 기쁨에 들떠 덴마크로 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오라뮨데 백작 부인이 아이들을 살해한 뒤 죄의식에 몸져 누운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백작 부인은 ‘네 개의 눈’이 새로운 사랑에 방해가 되는 아이들인 걸로 오해해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거지요. 자초지종을 알게 된 독일 백작은 말을 타고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그 처참한 사랑으로부터 말입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대학생 츠네오가 다리를 쓰지 못해 집에만 틀어박힌 조제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판자촌에서 살아가는 장애인 조제와 사랑을 나누다가 서로 다른 처지 때문에 헤어지게 된 츠네오는 조제의 할머니가 죽자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 함께 삽니다.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에게 소개시키기 위해 조제와 자동차를 타고 떠난 츠네오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갈 수 없게 됐다고 전화를 합니다. 전화를 받던 동생은 “형, 지쳤어?”라고 되묻지요.
그 여행 후 결국 츠네오는 조제와 헤어집니다. 영화 속 이별의 순간은 의외로 너무나 깔끔합니다. 조제는 담담히 떠나보내고, 츠네오는 별다른 위로의 말 없이 그냥 일상적인 출근이라도 하는 듯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섭니다.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옛 여자친구는 그를 만나자마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합니다. 묵묵히 들으며 함께 걷던 츠네오는 갑자기 무릎을 꺾고 길가의 가드 레일을 잡은 채 통곡합니다. 그 순간 츠네오의 독백이 낮게 깔립니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유는 여러가지 댈 수 있지만, 사실은 단 하나 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결국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우리가 도망쳐 떠나온 모든 것에 바치는 영화입니다. 한 때는 삶을 바쳐 지켜내리라 결심했지만 결국은 허겁지겁 달아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처참한 결말을 논외로 두고 사랑 자체의 강렬함만으로 따지면 오라뮨데 백작 부인 만큼 온 몸을 던지는 사람도 없겠지요. 정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조제만큼 절박하게 사랑이 필요한 경우도 드물 거고요. 공포 때문일 수도 있고 권태나 이기심 탓일 수도 있겠지요. 동생이 되물었듯, 츠네오는 그저 지쳤던 것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떠나갑니다.
모든 이별의 이유는 사실 핑계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긴, 사랑 자체가 홀로 버텨내야 할 생의 고독을 이기지 못해 도망치는 데서 비롯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게 어디 사랑에만 해당되는 문제일까요. 도망쳐야 했던 것은 어느 시절 웅대한 포부로 품었던 이상일 수도 있고, 세월이 부과하는 책임일 수도 있으며, 격렬하게 타올랐던 감정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결국 번번이 도주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벗어냅니다. 그리고 항해는 오래오래 계속됩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길. 이 아름다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깨끗하게 묶은 조제의 뒷모습처럼, 결국엔 우리가 두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진 않기를.
#옛글 #조제호랑이그리고물고기들 #시네마레터 #새삼돌아보니10년이정말훌쩍지나갔네요
요즘 내 상황에 많은 위로가 돼서 여시들에게도 도움이 되고자 글 가져왔어. 게다가 센치한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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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십번봐도 안리는 작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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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첫 애인이랑 이별여행 갔을때 같이 보려 했는데 도입부부터 슬퍼서 포기했어 여시 커플이 이별 바라보고 있는게 아니더라도 첫사랑 생각나는 영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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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영화보고 개썅놈이라고 욕했는데 이 글 보고 내가 차이고 차고 시간 지나고 보니까 이해가 되더라
에휴 이 영화 너무 좋아 이별할 때 조제나 츠네오처럼 담담하다가 결국 츠네오가 울 때 나도 무너지는 기분이 들더라ㅠ 누굴 탓하겠음....
2007년인가 한참 힘들때 이 영화보고 한 3일동안 잠을 못잣어...너무 가슴이 먹먹하고 슬퍼서
지치고 마음식는걸 누굴 탓하랴.
옛날에 볼 땐 별로라고 욕했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까 이해된다 평론가님 글 읽고보니 나도 내가 도망쳤던걸 들춰내는 기분이 싫어서 영화가 싫었던것같아
공감
공감함..
한번 보고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오래 전 일이라 이유가 뭐였는지 기억이 안나네
이 글 보니까 다시 보고 싶다 무의식 중에 날 불편하게 했던게 뭐였는지 이런거 너무 좋아 새로운 시선을 줘서 내가 그 시선으로 다시 한 번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는 거
마지막 츠네오가 무릎을 꿇고엉엉 울 때 나도 막 터져나왔거든. 조제가 너무 담담해서 ..조제가 얼마나 그동안 힘들게 참아왔을까 싶어서... 츠네오가 엉엉 울었던건 그때 영화감독이 하라고 한게 아니라 자기가맘이 무너질 듯 너무 힘들어서 엉엉 울었던게 영화에 나왔다고 그때 인터뷰에서 본거 같아 그래서 그때 츠마부키사토시 연기 잘하네 생각햇던 기억이 나네.. 한국 조제도 저런 플로우로 가려나 저 영화 너무 좋았는데 두번은 못봄 ㅠㅠ
여섯번째 문단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와 글 진짜 잘써.. 같은걸 보고서도 이렇게 글로 표현할 수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