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과 실험을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관찰은 실험도 포함한다. 실험을 하는 이유도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관찰하기 위해서다. 관찰 없는 실험은 무의미하다.
전자 현미경이 발명되기 전에는 원자를 관찰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원자론에서 출발한 예측이 놀랍도록 정확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에 원자론이 과학계에서 인정을 받았다. 어쨌든 “원자는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론적 구조물에 불과한 것일까?”라는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전에는 관찰할 수 있는 것과 관찰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있지만 관찰할 수 없는 것은 설사 놀랍도록 정확한 예측으로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구분에 따르면 관찰할 수 없는 것은 잘 해 봤자 이론적 구조물에 불과하다. 물론 훌륭한 이론적 구조물일 수는 있지만 그 존재가 관찰에 의해 확실히 입증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제 전자 현미경으로 원자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확실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자 현미경이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원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전자 현미경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확실한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전자 현미경은 이런 저런 이론에 의존한다. 그 이론들이 틀렸다면 전자 현미경이 보여주는 원자 이미지는 실제 원자의 이미지가 아니라 전자 현미경의 “상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의심하다 보면 천체 망원경도 의심하게 된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천체 A를 천체 망원경으로 관찰했다고 하자. A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천체 망원경의 “상상”에 불과한 것일까? 천체 망원경은 광학 이론에 의존한다. 만약 광학 이론이 틀렸다면 천체 망원경이 보여주는 상도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전자 현미경이 보여주는 원자의 상이나 천체 망원경이 보여주는 천체의 상도 이론적 구조물이다. 이론이 배제된 “순수한” 관찰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육안으로 보이는 달, 해, 사자, 눈송이, 사람, 토끼는 어떤가? 옛날에는 육안으로 보이는 것은 순수한 관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적어도 현대 생리학, 심리학, 진화 생물학에 비추어 볼 때에는 육안으로 관찰하는 것도 “이론적” 구조물이다. 세상은 3차원이지만 망막은 2차원이다(생리학). 인간의 뇌는 망막에 맺힌 상에서 출발하여 3차원 공간을 재구성해낸다(심리학). 그리고 인간이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자연 선택에 의해 망막과 시각 처리 뇌 회로가 진화했기 때문이다(진화 생물학).
뇌 속에 있는 시각 처리 기제가 일종의 이론에 의존한다고 본다면 우리가 보는 세상도 이론적 구조물이다. 이런 경우 “이론”이라는 용어가 부적절하더라도 시각상이 “뭔가를 거쳐서” 생긴 것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인간의 시각 기제는 완벽하지 않다. 사실 논리적으로 볼 때 완벽할 수가 없다. 3차원 공간에 대한 정보가 2차원인 망막에 맺히는 과정에서 정보 손실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뇌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3차원 공간에 대한 정보를 완벽하게 재구성해내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자연 선택이 완벽한 기제를 만들어내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리하여 육안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 현미경이나 망원경 등의 도구를 이용해서 관찰할 수 있는 것, 그런 식의 관찰이 불가능한 것 사이의 구분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애매해졌다. 이론을 완전히 배제한 순수한 관찰은 없다. 인간은 자연을 직접 대면할 수가 없다. 항상 뭔가를 거쳐야 된다. 그리고 뭔가를 거치는 과정에서 왜곡이 전혀 없다는 보장이 없다.
이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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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