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재(木浦齎)
충주석씨 시조 석린(石隣)의 13세손인 석인(石麟)이 조선 성종 25년 (1494)년에 의령으로부터 창녕군
남지읍 고곡리에 입(入)창녕하여 二代를 살다 명종 5년(1494)에 석인(石麟)의 자부 은진 송씨(宋氏)
가 아들 근주(根柱)를 데리고 이방면 옥천리로 이주 하였다. 아들 근주는 안동 김씨를 부인으로 맞이
하여 아들 삼형제를 낳아 창녕의 석씨일가를 형성하여 대합면 매탄과 이방면 우만으로 분산하여 살며
1921년에 건립한 충주 석씨의 대종재실 이다.
경의사(景義祠)
충주석씨 시조 석린(石隣)의 7세손인 천을(天乙)과 8세손인 여명(汝明)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에향사를 올리는 사당이다.
어필각(御筆閣)
충주석씨 시조 석린(石隣)의 6세손 석양선(石良善)은 태조 이성계의 이모부이다. 태조 이성계 탄
생다섯달만에 태조의 모 의혜왕후가 죽으니 어린 이성계는 이모 최씨의 젖을먹고 자랐다.
후일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올라 이모부인 석양선(石良善)은 홍양부원군 으로 이모
최씨는 경창옹주로 봉했으며, 석양선(石良善)의 아들인 석천을(石天乙)은 중랑장으로 임명하고
태조즉위 이듬해 원단에 (1393) 천을이 입시하자 태조가 같은젖을먹고 자란 형제의 우의를 잊지
못하여시를지어 하사하였으니 이것이 어필이다. 1945년에 우만 문중에서 어필각을 건립하여 어
필과 더불어시조 석린(石隣)의 8세인 석여명(石汝明)의 왕지(王旨 임금이 내린 교지) 를 소장하
고있다.
.........................어필(御筆) 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크도다 석천을이여 제사를 받들어 지내라고 허락한지 몇년인고?
.........................같은 젖을 먹고 자란 형제의 깊은우의는 산과같고 바다와같은 은혜로다
.........................후손은 자손대대로 오직 공부와 그외 요역을 면하고 배움이 가득할수있도록하라.
.........................하늘과 땅의 기운이 충실하고 해와 달이 밝게 빛나니
.........................고금을 돌이켜 보아도 이 같은 경우는 없었을것이다.
........................위의 말을 침노하거나 빼았고 어기는 모든 벼슬아치는 즉시 파직될것이고
.........................꾸짖음을 면하기 어려울것이다.
.........................이모 최씨께서 어릴적 젖먹여 키워준 연고로 이러한 시를 내 직접지어 주노라
.........................통훈대부 중랑장은 대대로 받들어 모시도록 하라.
.........................1393년 1월 1일 이성계
.........................작성자: 창녕군 문화관광 해설사 성득용
목포제 경의사 어필각.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