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의 말씀
남북형제의 사모곡 합창
-오승재 작가의 『분단의 아픔』을 읽으며
이 명 재
바야흐로 하늘 푸르고 녹음 짙은 6월입니다. 이런 계절에 모처럼 오승재 교수께서 펴내는 책자를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필자는 오승재 교수(작가)와 동향인 데다 우리문학을 전공한 문학도로서 작가의 아우인 오영재 시인의 한겨레문학사적인 비중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이번 오승재-오영재 형제분께서 함께하는 『분단의 아픔』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미 9년 전에 세상을 뜬 아우의 귀한 작품과 친지들의 사연을 모아서 엮은 내용으로써 소중한 선물입니다. 금년은 마침 우리 한반도에 뼈아픈 상처를 남긴 전쟁 발발 70주년에 이르는 해이기에 더 뜻깊게 생각됩니다.
오승재(吳昇在) 교수는 195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제3부두」로 당선된 작가로서 강의와 창작을 겸해온 우리 문단의 원로입니다. 미국 유학에서 귀국한 전후부터 모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대학원장도 역임했습니다. 정년 이후에는 특히 칠 남매의 맏이로서 북녘에서 외롭게 살며 큰 시인으로 활동해온 2년 터울의 아우를 잊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서로 헤어진 반세기 만의 2000년 여름, 제1차 이산가족 상봉 때 서울에서 잠시 만났던 10여 년 후인 2011년 가을에 76세를 일기로 평양에서 먼저 세상을 뜬 영재 시인을 위해 이 책자를 엮어낸 것입니다. 실로 60여 년 동안 떨어져 살며 생전에 부모님 임종도 못하고 떠난 아우가 백조의 노래처럼 부르다 남긴 사모곡들을 여기에 싣고 있습니다.
오영재(吳映在) 시인은 1935년 11월에 전남 담양에서 오씨 집안의 둘째로 태어나 자랐습니다. 중학생 때 만난 6·25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16세 의용군으로 입북하여 60년을 가족과 떨어져 살며 전시의 병사시절과 전후의 노동생활을 거쳐서 북한문단의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런 사실은 필자가 펴낸 『북한문학사전』(1995년 국학자료원) 등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첫 작품 「갱도는 깊어간다」 (1953) 이후 1960년에 대학과정인 작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천리마시대의 노동을 형상화한 서정시 「조국이 사랑하는 처녀」(1961), 서사 시집 『철의 서사시』, (1981), 혁명과 건설의 심화 발전상을 군중 예술론으로 형상화한 대동강 편답의 기행체 장편서사시인 『대동강』(1981~1985) 등을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1989년에 영예로운 북한의 계관시인이 되고 1995년 말에 ‘노력 영웅’ 칭호로써 북한의 최고 훈장을 받은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생각하면, 2000년 8월 15일에 김포공항 도착한 다음 나흘 동안 제1차 남북 이산가족 100쌍이 서울에서 가진 극적인 만남은 일시적인 감흥으로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에 견주어 이 책자에다 모은 자료들은 어머니 가신 지 5년 뒤에야 2000년 여름에 형제들이 상봉한 여느 작품보다 극적인 실화로서 이산의 아픔을 겪은 분단 한반도를 실증한 이야기입니다. 남북한의 당사자들은 물론 미국이나 그 밖의 외국 지성인들도 함께한 인간드라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울러 한 남측 소년이 북측에 살면서 남북을 거족적으로 아우르는 통일 조국의 한 모델이기도 합니다.
이 책자에 실린 인간 본연의 시편을 비롯하여 소감이나 편지 사연 등은 소중한 글로서 뭉클한 감동을 줍니다. 여기에는 「여기에 광부들의 일터가 있다」(1965) 등의 작품에서 못다 토로한 목마른 사랑의 욕구를 담고 있습니다. 전란기에 훈련받던 소년이 강진 운동장 옆의 탱자 울타리 곁에서 한 살배기 여동생 영숙을 업고 먼 길을 걸어와서 아들을 만나고 무더위 속 저녁 길로 떠나던 어머니 모습을 잊지 못해 토하는 목맨 울음만이 아닙니다.
3부의 사모곡 「아, 나의 어머니」에서는 실로 40년 만에 칠순 노모가 고향에 살아 계시다는 소식에 울부짖는 소리가 가슴을 울립니다. 「고맙습니다」 「아들의 심정」 「부르다 만 그 이름」은 고향의 모정에 목마른 인간의 울부짖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진을 또 보며」 「목소리」 등에 이어서 「늙지 마시라」는 구구절절 인용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5부 추모곡과 소원시에서는 극적인 상봉이 있기 다섯 해 전에 돌아가신 모친 소식에 향한 피맺힌 갈구를 봅니다. 「무정」 「다시는 헤어지지 맙시다」 「슬픔」 「기어이 안기고 싶어」 등이 제목부터 감동을 줍니다.
이 책자는 남측의 작가 형과 북측의 시인 동생이 한 가족 그대로 만나 한겨레의 간절한 사랑과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형제의 합창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내외에서 성원하는 여러분이 이 사모곡의 합창을 통해서 나비효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가슴 저리고 뼈아팠던 분단 75년의 아픔을 치유하고 우리 남북 당사자를 비롯해서 이웃의 열강들도 화해, 협력해졌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2005년 말 이후 서울 친척과 평양 가족 사이에 끊긴 서신 교류는 물론 남북을 왕래한 인편으로 음성녹음이며 귀한 옷감선물로 노모께서 팔순 잔칫상을 전해 받던 남북 화친이 복원 진전되길 바랍니다.
아무쪼록 이 형제의 절절한 사모곡이 쓰라린 분단의 아픔을 넘은 한겨레 모두의 디아스포라적인 가족사를 통해서 화평한 한반도 통일기원의 소중한 울림으로 울려 퍼지길 기원합니다.
1939년 전남 함평 태생,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문학평론가 활동.
중앙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학장 겸 복지대학원장 역임, 현 명예교수. 북한문학사전,
한국현대민족문학사론, 세계문학 넘어서기 등 저서 다수.
머리말
저는 2000년 8월 15일 제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만 열다섯 살에 헤어져서 예순다섯의 나이가 되어 내려온 동생을 만났습니다. 헤어진 지 반세기만입니다. 얼굴에 굵은 주름이 잡히고 손은 거칠고 두툼한 농군의 손 같아서 마치 형을 만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북에서 유명한 계관 시인인, 오영재라는 것입니다. 중학교 3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던 그는 인민군을 따라 이북으로 후퇴해서 소식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 어린 나이로 소백산맥, 태백산맥을 넘는 험난한 싸움터에서 살아남아 이북 땅에 뿌리를 내리고 생존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가 사라진 처음 얼마 동안은 아랫목에 밥 망을 씌운 밥그릇을 늘 넣어 놓고 기다렸습니다. 다음엔 휴전이 되자 포로교환자 명단에 혹 있을까 하고 신문을 훑었습니다. 이내 포기하고 있는데 1966년 12월 방첩대에서 동생이 이북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우리는 제발, 그가 대남간첩으로 내려오지 말라고 기도했습니다. 당시 이북은 우리나라의 주적(主敵)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공분실의 감시대상이 되었습니다. 연약한 순 같은 어리던 동생이 민들레 씨앗처럼 날아가 일가친척이 하나 없는 이북 땅에 홀로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한 가족을 이루어 살았다는 것은, 눈물겹게 감사한 일이었는데 우리에게는 그 당시 감사를 가슴 조이며 받아드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1990년 9월 4일 한겨레신문을 통해 동생을 만났다는 자유기고가의 글이 실렸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실향민이 되고, 가족과 헤어지고, 납북자가 생기고, 탈북자가 생기고, 내 동생처럼 쓰나미에 휩쓸려 이산가족이 된 많은 사람이 아픔을 안고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이산가족뿐 아니라 온 국민이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으며 통일을 염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헤어진 한쪽을 이렇게 애타게 그리워하며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을 알자 캐나다에서, 일본에서 또 미국에서 재외 교포로 사는 분들이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습니다. 우리 가족만을 위한 것이었겠습니까? 우리를 통해 그들의 염원도 이루기 위한 것이었겠지요.
우리나라 정부도 우리의 소원을 알고 있었습니다. 군사독재라고 알려진 박정희 대통령도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이북으로 보내어 김일성 주석과 비밀회담을 하고 돌아와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조국 통일 원칙을 포함한 7개 항)을 발표했습니다. 그때는 이북이라면 그 단어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간첩 외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땅이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때도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고향 방문’이라는 명칭으로 1985년 9월 20일부터 3박 4일로 서울과 평양에서 행사를 치른 바가 있습니다. 노태우 정부 때는 남북 축구팀이 통일축구대회를 하고, 일본 지바에서 열리는 세계탁구 선수권대회에 남북 단일팀이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적으로 화해 무드가 점차 열리었습니다. 드디어 김대중 국민의 정부에 이르러서는 6·15 남북 공동 선언을 하고 본격적으로 광복 55주년을 기해 제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했습니다.
첫 감격의 행사가 끝난 지 20년이 되는 지금, 이 행사의 수혜자인 저는 허탈합니다. 꿈속에서 어쩌면 외계인을 만났던 것처럼 사라져간 그는 또 언제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통일원 창구에는 상봉 신청을 한 사람이 13만여 명에 달하고 그중 생존자는 5만 7천여 명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단 한 번이라도 만나보고 싶다고 기다리고 있는 인원입니다. 한편 통일원은 과거에 한 번 만난 가족에게는 다시는 서신 교환이나 전화 통화나 이산가족의 생사를 알아보는 창구를 열어주지 않습니다. 생존자 5만여 명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그들의 급선무입니다. 그 사명이 끝나면 우리의 통일의 염원도 끝나는 것일까요? 이제 제1세대 생존자도 80은 넘었을 테니 몇 년이면 이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실효가 끝날 것입니다.
한국전쟁을 휴전한 지 67년이 되어갑니다. 직접 혈육이 찢기는 아픔을 겪은 제1세대는 거의 단절되어갑니다. 제2세대, 제3세대들은 꼭 만나야 한다는 당위성을 못 느끼거나 무관심할 때가 되었습니다. 분단의 통증은 여기서 끝나는 것일까요? 이산 1세대가 다 묻혀간다고 할지라도 지금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입니다.
이 고통의 역사는 그냥 없어지는 과거는 아닙니다. 누군가는 이 역사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통일을 소망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물입니다(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저는 이산가족 상봉의 행사는 사라져도 우리의 소망인 통일은 믿음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도기에 이산가족이 겪고 있는 통증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누군가가 공감하고 간직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도 공감해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 형제와 그 식솔들, 내 친척, 그리고 내 친구만이라도 이 아픔을 오래 간직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것은 분단된 이 나라의 한 가족이 겪는, 속이 타는 가족사라고 불 수도 있지만, 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민족의 고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통일의 믿음을 잃지 않으면 하나님의 때를 오래 참고 견디는 자에게 하나님이 새 일을 시작하시리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데 언제나 기쁘게 윤문을 해준 동료 김균태 교수, 표지 디자인을 도와준 오근재 동생께 감사합니다. 특히 이 출판을 맡아준 북랩에 감사를 드립니다.
2020년 4월 鷄龍山麓에서
오승재
첫댓글 가족의 역사와 분단의 슬픔을 안고 사는 한 민족 대한민국 남한과 북한의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책을 출판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로님의 모습에 크게 감동하면서 이런 귀중한 책을 출판하시기까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닮는 헌신의 실천적 신앙을 보여주신 아름다움을 모든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서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책의 제목 <분단의 아픔> 부제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와 함께 역사적 기록으로서 그 속에 담긴 소중한 사진들은 글의 내용과 함께 예술작품으로서 걸작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도 사료되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유무에 관계 없이 한반도에 사는 남북한 백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보기를 기대하면서 감히 추천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