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본성과 양성평등
2005-10-19
“안돼요돼요돼요” vs. “No means No”. 1
콘센트와 맥도날드.. 2
강간을 정당화한다?. 2
좋은 사회를 위해서는 인간본성을 이해해야 한다.. 3
“안돼요돼요돼요” vs. “No means No”
여자가 안돼(No)라고 말할 때 남자들은 흔히 그것을 여자의 내숭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도
하고 싶으면서 괜히 튕긴다는 것이다. 또는 여자는 튕겨야 맛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남자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입증하기도 했다. 여자가 그냥 호의의 표시로 또는 예의상 미소를 지어주면 남자는 그것을 추파로 해석한다.
남자의 이런 사고가 본성인가 아니면 교육의
결과인가를 두고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남자의 이런 사고 왜곡 또는 자기 기만이
이기적 유전자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하며 타고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은
교육이나 환경을 탓한다.
나는 사회생물학자들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믿지만 이 글에서 그에 대한 과학적 논증을 펼치지는 않겠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데올로기적 함의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단지 여성 문제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사회생물학자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선천적 악마성 모두에 거의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도시의 아이들에게는 진화론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보기에는 신기한 습성이 있다. 정말로 위험한 콘센트와 자동차 등에는 공포를 느끼지 않는 아이가
전혀 위험할 것이 없는 텔레비전 속의 뱀이나 사자에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자가 보기엔 이것은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진화한 대부분 시절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가 뱀이나 사자를 보았다면 그것은 진짜로 뱀이나 사자였다. 남자가
텔레비전 속의 예쁜 여자를 보면 침을 흘리는 것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수십만 년 전에는
전기도 자동차도 없었다. 따라서 콘센트에 대한 두려움이 진화할 이유가 없었다.
어떤 부모가 그런 아이에게 콘센트에 대한
두려움을 주입하지 않아서 다른 말로 하면 아이들이 전기를 조심해서 다루도록 교육하지 않아서 아이가 전기에 감전돼 죽었다고 하자. 나는 이때에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이 콘센트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는 것이 인간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생물학자들을 비난할지 궁금하다. 아마 이런 논리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콘센트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는 것이 인간본성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생물학자들은 감전사를
정당화한다.”
사람들은 햄버거, 피자, 콜라 등을 아주 좋아한다.
왜냐하면 사냥-채집 사회의 인간에게는 소금, 지방, 당이 아주 귀한 자원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아주 좋아하도록 인간이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는 짜고, 달고, 기름지게 음식을 만들어 팔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같은 사회에서
이것은 비만과 성인병으로 이어진다. 이번에도 ‘진보적인’ 사람들은 사회생물학을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생물학이 맥노날드와 성인병을 정당화한다.”
강간을 정당화한다?
사회생물학자들은 강간이 이기적 유전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남자에게는 강간하려는 성향이 선천적으로 있다고 믿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이 이에 발끈한다. “사회생물학자들은
강간을 정당화한다.” 이들은 설명과 정당화를 구분하지 못한다.
마르크스가 “자본가가 착취율을 높이려 하는 것은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다. 착취율 증가는 자본가의 이해관계에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말할 때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마르크스가
착취를 정당화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설명하면 설명이고 네가 설명하면 정당화인가?
페미니스트는 남자가 강간을 하는 것은 성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강간이 이기적 유전자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며 강간 피해자가 주로 젊은 여성 즉 가임기의 여성임을 지적하는 사회생물학자에게 분노한다. 강간본능(거칠게 말하자면)이
있다고 가정하면 강간의 필연성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생물학자가 결국은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강간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환경적인 요인 즉 교육 때문에 강간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만약 페미니스트가 일관성 있게 사고한다면
페미니즘의 논리도 강간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강간자는
“나는 내 본성
때문에 강간했으니 무죄다”라고 사회생물학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받은 교육 때문에 강간했으니 무죄다”라고 페미니즘의
논리를 이용할 수도 있다.
좋은 사회를 위해서는 인간본성을 이해해야 한다
환경 결정론의 실증적 난점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실천적인 문제를 다루어 보겠다. 환경 결정론자들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인간은 원래 선하다는 성선설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현재의 자본주의(또는 가부장제) 사회는 성차별적인 편견을 주입한다.
따라서 만약 성차별적인 편견을 주입하지 않으면
성차별적인 편견은 사라질 것이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사회생물학은 그런 낭만적 성선설을 믿지 않는다. 내버려두는 것으로는
즉 편견을 주입하지 않는 소극적 조치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감전사를 막는 공포 메커니즘이 없다.
따라서 내버려두면
아이는 감전사한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지방, 설탕, 소금을 좋아한다.
따라서 내버려두면
사람들은 맥도날드를 드나들다 성인병 걸린다.
남자는 원래 “안돼요돼요돼요”의 논리를 받아들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편견을 주입하지 않아도
남자들은 편견을 품는다.
사회생물학은 적극적 조치를 요구한다. 자식이 감전사하기를 원하지 않는 부모는 콘센트의 위험을 자식에게 주입해야 한다. 비만과 성인병을 줄이길 원하는 국가는 맥도날드의 광고를 금지하거나
햄버거에 “햄버거는 비만과
성인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라는 경고 딱지를 붙이거나 맥도날드를 폐쇄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양성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자들이 원래 싸가지 없이 설계되었음을 인식하고 “No means No”임을 적극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또한 남자에게 “만약 여자가 그냥 내숭을 떠는 것 같다고 판단되더라도 그것은 당신의 뇌가 그런 식으로
판단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성차별주의자가 되지 않으려면 당신의 그런 판단을 믿지 말라”라고 가르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