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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조선시대에 한반도는 막조선, 국도는 예읍(춘천)이었다.
노중평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단군왕검이라 하는 분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니,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이다. 처음에 나라를 칭하였는데, 조선이라 하니, 삼한三韓, 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의 옥저沃沮, 동북의 부여夫餘, 예濊와 맥貊은 모두 그의 관경이었다.”1)
이 글을 풀어쓰기 전에 먼저 해설해야 할 것이 있다. 『태백일사太白逸史』는 ‘배달나라倍達那羅의 사라진 역사기록’이라는 뜻이다. 태백은 큰 산이라는 뜻으로 한웅천왕이 천평天坪에 세운 배달나라를 뜻한다. 신시神市는 배달나라의 정치체제를 말한다. 신정체제神政體制라는 뜻이다. 신시본기는 신정체제역사라는 뜻이다.
본문해석으로 들어간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아사달은 지금의 송화강 유역 어디엔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이 조선의 건국지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는 아사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무진년 제요도당 때에 단국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의 터에 이르니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2 예 지역과 아사달. 예 지역은 송눈 평원에서 송화강 유역까지이다.
이 글에 보면 단국의 동쪽 경계가 나온다. 단국의 제2세 홍제洪帝 8년에 제곡고신帝嚳高辛이 황하의 서북쪽 지류인 수분하綏芬河를 쳐들어왔을 때 곤오昆吾가 나가서 격퇴하였다.3) 단국의 영토는 서쪽 경계가 수분하였고 동쪽 경계의 일부가 송화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수분하는 단국의 국도가 있었던 곳이다. 단군왕검이 아사달로 오기 위하여 떠난 곳을 이곳으로 볼 수 있다. 단군왕검이 그가 단국의 2세 홍제로부터 인수한 단국의 시대를 마감하기 위하여 수분하를 떠나서 아사달에 도착하여 조선의 1세 단군으로 등극하였다. 수분하는 BC 2239년에 조선의 부루단군이 4제 부소를 수분하에 봉하여 구려왕을 삼은 곳이다. 그 후로 구려국이라 하였다. 조선에는 삼한三韓, 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의 옥저沃沮, 동북의 부여夫餘, 예濊와 맥貊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오51년(BC 2283)에 여수기余守己를 예국군濊國君으로 봉하여 흑룡강黑龍江에 있게 하여 예성濊城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들 인종이 조선시대에 맥국을 구성했던 민족이었다. 맥국은 막조선을 뜻한다. 그런데 조선이 진秦에게 BC 238년에 멸망한 후엔 맥국-막국-막조선이 어떻게 되었을까?
(노중평의 주,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막조선은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으로 나뉘었고, 이 안에 모두 72국의 소국이 있었다. 이들 소국들은 중원에 있던 모국母國이 춘추전국시대에 제국齊國, 노국魯國, 초국楚國 등에게 멸망하여 일부가 이민자移民者가 되어 한반도로 넘어온 사람들이 세운 소국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세운 나라 이름에 모국의 이름이 들어가 있거나 변음이 되어 있었다.)
이들 나라는 중원과 만주에 흩어져 있다가, 주루족 출신의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울 때 합류하였다. 고리高離는 고이高夷로 볼 수 있다. 고이는 고구려가 생길 때 고구려를 구성한 민족이었다. 이들에게 맥족과 예족이 합류하였다. 4) 고례高禮는 구려句麗의 변음으로 볼 수 있다. 신축원년(BC 2240)에 부루夫婁 단군은 제4제 부소夫蘇를 수분하로 보내어 구려왕句麗王을 삼았다. 이곳은 단국시대에 제곡고신이 쳐들어왔던 곳이다.5) 시라尸羅는 신라新羅의 본음本音이다. 시尸는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문자였다. 그러므로 시라는 칠성의 나라라는 뜻이다. 시라는 달리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남북의 옥저沃沮를 옥저玉猪로 보면 홍산紅山의 남북이라 할 수 있다. 동북의 부여夫餘가 있었던 곳이 눈수라 이곳은 조선의 중심지가 있었던 곳이다. 그러므로 부여는 멸망한 조선을 계승한 나라로 볼 수 있다. 부여라는 국명이 단군왕검의 제2차 부여의 이름을 쓴 점으로 보아서 조선을 계승했음이 확실하다 할 것이다. 이들 소국의 이름이 사서에 등장하는 때는 춘추전국시대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학계는 원삼국시대라 한다. 이 시대를 원삼국시대라하여 많은 소국들의 역사를 중국이 차지하게 하는 우를 범하였다.
『한단고기』의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사로斯盧(신라)의 시왕始王(박혁거세)은 선도산仙桃山성모聖母(파소)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夫餘帝室의 딸 파소婆蘇(박혁거세의 어머니, 소성족蘇姓族의 여자)가 있었는데, 남편 없이 아이를 뱄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嫩水(예맥족이 한반도의 춘천으로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곳)로부터 도망쳐 동옥저東沃沮(동옥저의 옥저는 옥저玉猪-옥으로 깎은 돼지로 볼 수 있다)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주, 눈수 출발 송화강을 거처 동해로 나와) 진한의 나을촌奈乙村(신라의 경주)에 와 닿았다.”
이 기록은 춘추전국시대에 지금의 중국대륙에 흩어져 있던 소국들이 이동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 문장에서 역사를 추론해 보기로 한다.
6부 촌장의 우두머리 소벌도리가 세워 신라의 시조가 된 박혁거세는 부여 제실의 딸 파소의 아들이다. 이 말은 파소가 부여 왕실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여는 단군왕검의 둘째 아들로 단군왕검이 돌아가시자 2세 단군으로 등극한 부루단군이 수분하에 봉하여 요서의 망구왕이 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부여는 부여가 요서에 세운 나라였고,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부여의 후손이었다고 볼 수 있다. 파소의 소蘇자는 씨칭氏稱으로 아버지의 조상이 소蘇씨라는 뜻이다. 소씨는 원래 기성己姓을 가진 풍豊이 단국의 2세 홍제洪帝 때 수분하를 침범한 제곡고신帝嚳高辛을 물리쳐 그 공으로 홍제로부터 소성蘇姓을 사성한 사람이다. 파소는 조상이 단국의 소풍이 된다. 파婆자는 파波+여女자로 바다를 건너온 여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가 눈수를 출발하여 송화강을 거쳐 한반도의 동해안으로 내려와 신라의 나을촌에 닿았다고 볼 수 있다. 송화강은 단군왕검이 단국의 국도인 수분하를 출발하여 도착한 곳으로 아사달이 있는 곳이다. 파소는 동옥저東沃沮를 거쳐야 하였다. 파소가 배를 타고 내려온 곳이라면 동해를 끼고 있는 나라로 볼 수 있다. 함경도와 강원도가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동옥저를 달리 볼 필요가 있다. 옥저가 물을 막는 곳이라는 뜻이 있으므로 동해를 끼고 있는 곳이 맞는다고 하겠는데, 혹시 옥저룡玉猪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옥저룡이라는 유물이 많이 출토된 곳을 적봉赤峰의 홍산紅山이라 하는데, 이곳에서 떠나온 이민자들이 정착한 곳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옥저와 인접한 서쪽을 동예東濊나 예맥濊貊이라 하였다. 동예라면 서예가 있다는 말이 된다. 서예에 해당할 수 있는 곳이 번조선 지역에 있었던 예왕국濊王國이었다. 또한 맥국貊國은 요서, 즉 망구국이 있었던 곳에 있었던 나라로 볼 수 있다.
예맥에 대하여 ‘백도검색창’은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濊貊[wèi mò] 是东北的古老的地区民族,又称貉、貉貊或藏貊,古文献称之为“白民”,“毫人”或“发人”。濊貊族是由濊人和貊人汇合而成,以农业城栅为特点,不同于游牧族。(以下 百度) 예맥은 중원의 동북쪽에 사는 오래된 고장의 민족이다. 맥, 맥맥 혹은 장맥이라 칭한다. 예맥은 예인과 맥인을 합해서 부른다. 농사를 짓고 성책을 두르는 특징이 있다. 떠도는 유목민족과는 다르다.
이상의 문장을 해설하면 다음과 같다.
예맥濊貊6)은 중원 밖으로 동북지역에 해당하는 만주지역에 살았던 민족으로 역사가 오래 된 고장에 살았던 민족이다. 이들을 맥貊(북방종족 mò,háo,he)́, 맥貉맥貊(mo, 북방 오랑캐), 장맥藏貊(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북방종족-어디론가 사라진 북방종족?)이라고도 칭한다. 고문헌은 예맥을 백민白民이라 하였다. 백민白民은 『山海經 海外西經』7)에 기록된 종족이다. 이들이 사는 나라를 ‘백민의 나라’라 하였다. 백민이란 피부색이 흰 민족이라는 말이다. 유럽의 고산족高山族과 외모가 닮은 민족을 말하는 것 같다. 유럽의 고산족은 머리가 검은데, 피부색이 흰 인종으로 한국 사람과 많이 닮은 민족이다. 濊族에 대하여, 『管子 小匡篇』은 북으로 송화강 상류에서 한반도 북부에 분포했던 종족으로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의 주인이라 하였다. 『呂氏春秋 侍君賢』에서 예濊는 東海之濱 朝鮮之地이라는 지명을 의미하였다. 『三國志전 扶餘傳』은 부여가 통치한 지역이 본래 예의 땅이었다고 하였다. 부여강역 중 동남부에 속했다. 『三國志 東夷傳』에서 예는 한반도 동북부에 있었다고 하였다. 『後漢書 武帝紀』는 인구가 28만여인万餘人이라 하였다. (최무장의 예맥) 송화강 상류라면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운 곳이다. 진조선을 세운 곳으로 볼 수 있다. 동해지빈은 번조선을 도읍한 곳이다. 그러므로 번조선지역이라 할 수 있다. 부여가 통치한 땅이 본래 예의 땅이었다고 했으므로 망국국과 동평국에서 시작된 진조선과 번조선 지역을 예의 땅이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의 땅이 아닌 맥의 땅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맥족貊(貉)族은 북방의 유목민을 지칭하였다. 사서史書에서, 맥계貊系의 부락을 북발北發, 맥국貊國, 백민白民, 고이高夷, 부여扶餘, 고구려高句麗, 양맥梁貊, 소수맥小水貊이라 하였다. 맥貊은 내륙 경계가 동쪽으로 농안農安, 요원遼源 서쪽으로 통유通楡, 심양瀋陽 남쪽으로는 본계本溪 , 단동丹東 북쪽으로는 제제합이齊齊合爾(지지할)에 이르렀다. 맥의 바깥은 동은 예濊, 서는 동호東胡, 남은 동이東夷(주, 원래 東夷가 濊貊으로 불렸다)였다고 한다. 『詩經 魯頌』은 淮夷蠻貊이라 하였다. 회이족은 만맥이라는 말이다. 회이는 만족 오랑캐이고 맥족 오랑캐라는 뜻이다. 『周禮』는 구맥九貊이라 하였다. 구맥은 구이九夷라는 뜻이다. (최무장의 예맥)
위 글은 농사짓는 인종을 예족이라 하였고 유목하는 인종을 맥족이라 하였다는 뜻이다. 만주의 드넓은 지역이 맥족의 관경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예와 맥을 다시 정리하면 예는 요서에, 맥은 요동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이동하여 한반도로 들어오는 인종들이 생긴다. 이들이 한반도로 들어와서 막漠이라 불리게 되었다. 막은 예와 맥의 의미가 합해진 문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애초에 예족이 떠나온 곳은 동평국이 있었던 산동반도였다. 요서는 맥족의 땅으로 산동반도를 떠나온 예족이 합류하게 된 곳이다. 예족이 산동반도를 떠나게 된 이유는 진에게 번조선이 멸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진을 멸망시킨 한은 진조선과 번조선을 합하여 진번이라 하였다.
예맥이 이동하여 한반도로 들어와서 춘천에 자리 잡고 의암호 남서쪽에 있는 중도中島에 집단으로 주거를 정했을 때는 이곳을 예읍濊邑이라 하였다. 이곳은 당시에 한반도의 중심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당시에 한반도를 삼조선 중에서 막조선漠朝鮮이라 하였다.
스미소니안 연구소의 알레스 흐들리카(Ales Hrdlicka) 박사에 의하면, “한국인은 신체적으로 백인의 특정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3가지 구분이 가능한 인종적 특질이 있다. 한 부류는 중국에 가장 인접한 지역에 살면서, 중국인과 비슷한 모습이다. 또 하나, 키가 작고 단단하고 피부색깔이 짙은 부류는 시베리아 토착민과 유사한 모습이다. 세 번째 부류는 한국민의 대부분을 점유하는데, 키가 더 크고 옅은 피부를 가졌다. 이 부류의 젊은 사람들은 뺨의 색깔이 홍조를 띠는데, 이는 몽고족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남성의 일부는 두부의 형상이 유럽의 고산족과 흡사하다. 이러한 백인과의 유사점은 한국인들의 조상 중에서 아시아계 백인의 계통이 숨어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인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는 안개 속의 미스터리이다. 그들은 선사시대에 인도 북부로부터 현재의 반도로 이주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나 중국인들의 역사에 의하면,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다.”(『부도지』 474~475쪽 윤치원)
서두의 인용문에서, 『산해경 해외서경』에 용龍과 물고기(魚)가 있다고 했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족표(인종 아이콘)가 용과 물고기라는 말이다. 백신피발白身披发은 피부색이 희고 옷을 입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을 호인毫人(가늘고 부드러운 털이 몸에 덮여 있는 사람), 혹은 발인发人(발해만에 살았던 동이족)이라 하였다. 용은 龍자가 제곡고신시대帝嚳高身時代에 나오기 이전에 파巴자로 썼다. 파는 풍이족의 임금(帝)이라는 뜻이다. 풍이족의 제라면 한국의 시조인 안파견安巴堅을 들 수 있다. 어魚는 조선朝鮮의 인종을 구성하는 어魚족을 말한다. 어족은 장자莊子가 주장한 사화이어巳化而魚라는 족표분화族表分化의 원리에서 보면, 사족巳族(풍이족)에서 나온 어족魚族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맥족은 풍이족과 풍이족에서 나온 어족으로 구성된 인종이라 볼 수 있다.
풍이족의 족표로 볼 수 있는 유물이 적봉시의 홍산에서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즉 저룡옥猪龍玉(돼지코를 가진 용 형상의 옥 조각)과 조옥鳥玉(새 모양의 옥 조각)이 출토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맥족은 풍이족과 조족으로 구성된 민족이라 볼 수 있다.
예맥족은 하夏나라와 상商나라 시대에, 요동반도 북쪽에서 송화강 유역에 걸쳐 광활한 지역에 널리 분포하였다. 예맥의 주체는 관동关东지역에 있다. 주周가 상商을 멸망시킨 이후에, 그 지역에서 점차 다른 동부지구로 축출되었다. 그 일부가 예맥인으로 남아 있고 고조선반도의 북부로 갔다. 멀리 한강 남북 양안에 예맥인의 족적이 남아 있다.
최근에 춘천의 중도에서 예읍의 집단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위에 인용한 글은 예읍의 집단거주지가 한강변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예맥을 달리 혜막惠漠8)이라고도 하였다. BC 1800년경에 숙신肅慎 이남을 혜惠라 하였다. 혜란 예濊를 달리 말한 것이다. 또 막漠이라고도 하였다. 막이 변음 되어 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좌전 소공 9년』에 숙신은 연燕, 호豪, 오吾의 북쪽 땅이라 하였다. 『후한서 동이전』은 읍루挹婁가 숙신국의 옛 땅이라 하였다.
막漠은 조선을 3조선으로 나누었을 때, 진조선眞朝鮮, 번조선番朝鮮, 막조선莫朝鮮 중에서 막조선을 말한다. 『단군세기」 44세 단군 구물에 나오는 막조선漠朝鮮의 漠은 막莫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한반도-즉 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단군세기』 44세 단군 구물 때 병진 원년(BC 425년) 3월 16일 단군 구물이 장당경에서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라 고치고,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 바꾸어 불렀다. 이는 막조선이 역사에 등장하는 공식적인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을 위서로 몰아 버린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중국의 사서에 漠이 나오기 때문이다.
BC 1800년경에 예맥 두 족속은 희도喜都(지금의 長春)으로 옮기고, 두 부족을 합하여 혜막惠莫(예맥濊貊)이라 하였다. 숙신왕은 나라의 이름을 덕혜德惠(득예得濊)라 하였다. 다시 희도를 합룡성合龍(합융合隆)城이라 고쳤다. 서한시대西漢時代에 부여국扶余國이 건국하였다. 부여국이 점차 동한과 문화를 교류하였다.
숙신은 현재 중국의 고대 동북민족이다. 현재 만족의 선조가 된다... 숙신이 분포한 지역은 장백산(백두산) 이북이다. 서쪽은 송눈松嫩평원에서 북쪽은 흑룡강黑龙江중하류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다. 숙신지역에서 정鼎(솥)과 격鬲(화로)이 발굴되었다.
숙신에 대하여 「부소보서」9)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일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진주소씨晋州蘇氏의 시조가 되는 태하공太夏公 곤오昆吾가 풍이인風夷人으로서 난하灤河 즉 숙신肅愼에 살았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에서 열쇠를 쥐고 있는 분은 곤오이다. 「부소보서」는 곤오가 원래 풍이족에서 갈라져 나온 사성巳姓(풍이족 장손의 족성)으로서 단국檀國의 홍제洪帝로부터 홍제 8년에 황하의 지류인 수분하綏芬河 동쪽에 침입한 제곡고신帝嚳高辛을 물리친 공으로 소성蘇姓을 사성賜姓한 분으로 기록하였다.
곤오는 치우, 황제와 함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를 연 분이다. 화이의 역사 기록은 그가 발명한 솥을 곤오구정昆吾九鼎이라 하였고, 그가 만든 검을 곤오검昆吾劍이라 하였다. 이들 유물이 고고학 유물로 중원에 지금도 전해 온다. 숙신지역에서 정鼎과 격鬲이 발굴되었다는 기록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춘천 중도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유적지에서 동부銅斧와 비파형동검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은 단군조선시대의 유물로 볼 수 있는 유물이다.
예맥인 족장이 막조선의 군장으로서 진조선 정부로부터 막조선의 한韓(임금, 혹은 왕검)으로 추인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단국의 곤오가 청동검과 청동정의 발명자이기 때문에, 홍제의 태자로서 단국이라는 국명을 조선으로 고친(BC 2333) 단군왕검이 이 청동기 유물을 막조선의 한에게 하사하였다는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
1). 『太白逸史』檀君王儉立都阿斯達 今松花江也 始稱國爲朝鮮 三韓高離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夫餘濊與貊皆其管境也 2). 『檀君世紀』 戊辰唐堯時來自檀國至阿斯達檀木之墟國人推爲天帝子 3).『朝鮮紀』己巳八年高辛氏名嚳卽軒轅之曾孫也擧兵侵境帝命力通拒守,庚午九年命蘇豊練兵于綏東. 蘇豊은 己豊昆吾를 말한다. 기풍 곤오가 홍제 8년에 綏芬河 동쪽에서 제곡고신을 물리친 공으로 蘇姓을 사성賜姓하였다.(「扶蘇譜序」) 4).高句麗人其實是在高句麗縣中發展的民族(主體是沸流國的高夷)融入貊人、濊人、一部分扶餘人,朱蒙未出現在卒本前-1990年代的《中国東北史》(遼寧人民出版社出版)等書否認渤海與高句麗及朝鮮民族有關連性) 5). 辛丑九年封第四弟夫蘇于綏芬河曰句麗王 6). 濊貊[wèi mò] 濊貊是东北的古老的地区民族,又称貉、貉貊或藏貊,古文献称之为“白民”,“毫人”或“发人”。濊貊族是由濊人和貊人汇合而成,以农业城栅为特点,不同于游牧族。(以下 百度) 7). 《山海经·海外西经》 白民[bái mín]:神话中古国名。《山海经·海外西经》:“ 白民之国 ,在 龙鱼 北,白身披发。” 郭璞 注:“言其人体洞白。”
歷史分布 濊貊族在夏商之际广泛分布于南起辽东半岛北至松花江流域中游的广大地区,濊貊主体在关东,周灭商后逐渐迁至其他东部地区,另有一部分濊貊人迁至古朝鲜半岛北部,最远到汉江南北两岸都有濊貊人的足迹 (바이두에서 인용)。 8). 惠漠: 公元前约1800年,肃慎以南的惠(濊)、漠(貊)两族逐渐迁徙在喜都(今长春)融合成为惠漠(濊貊)部族),为了纪念两大部族融入肃慎王国,肃慎王遂改国号为德惠(得濊),改“喜都”为“合龙(合隆)城”。西汉时期建立扶余国,渐与中原东汉文化交流。
肃慎,中国古代东北民族,是现代满族的祖先...其分布,大体在今长白山以北,西至松嫩平原,北至黑龙江中下游广大地区。黑龙江两省发现的肃慎典型器物 “石砮”,以及在上述肃慎人分布区内,普遍发现鼎、鬲等器物, 《左传.昭公九年》:“肃慎、燕、毫,吾北土也。”《后汉书·东夷传》:“挹娄,古肃慎之国也
「扶蘇譜序」9) 始出太夏公(昆吾)卽赤帝祝融之六十一世孫也 彼卽風夷人也 太夏公初居于灤河當肅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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