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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출처: http://contrite.tistory.com/entry/%E6%8F%9A%E5%B7%9E%E5%8D%81%E6%97%A5%E8%A8%98%EC%96%91%EC%A3%BC%EC%8B%AD%EC%9D%BC%EA%B8%B0-%E4%B8%8A
揚州十日記(양주십일기)
明 :王秀楚 (명나라 사람 왕수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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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記 형식의 본 글은 청나라 군대가 산해관을 넘어 북경에 입성한지 대략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645년 봄에, 중국 양주성(揚州城)에서 열흘 동안 일어난 일의 기록이다.
-日記의 필자 왕수초(王秀楚)는, 그 당시 그곳 양주사람이다.
-‘揚州十日’은 ‘嘉定三屠(가정삼도)’와 더불어, 청나라가 중원을 접수한 후 저지른 각종 학살 사건 중에서 가장 유명한 두 사건이다.
(王秀楚) 1645년 順治(순치)2년 己酉(기유)년 夏(하) 4월14일(음력임), 督鎭(독진;관직명 ≒사령관) 사가법(史可法)이 백양하(白洋河) 방어전에 실패, 황급히 퇴각하여 양주(揚州)에 도착. 즉시 성문을 굳게 닫고 양주성 결사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뒤이어 적이 도착하였고, 城을 공격하였으나 4월24일이 되도록 城을 깨뜨리지 못하였다. 이때의 양주성 안은, 수비는 삼엄하고, 각 성문은 모두 수비병이 있었다.
우리집은 西城(서성 ;성곽도시라 西門 일대 지역을 西城이라 불렀다?)에 있었는데, 楊(양)씨 성의 장교 관할이었고, (우리집 부근에는) 그의 手下의 관원 병졸 등이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집) 전후좌우에 병졸이 좍 깔렸는데, 우리집에도 병사 둘이 묵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무슨 법도랄 것이 추호도 없어서, 마구 유린하고 손해를 끼치는 등 못 하는 짓이 없었다. 나는 매일 천 냥이 넘는 돈을 바쳐야 했다. 계속 이러기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쩔 수없이 左右 옆집과 상의하여, 세 집 공동으로 그들의 楊장교를 술을 곁들인 식사에 초대하였다.
술자리에서, 나는 억지로 공경을 다하며, 거나하게 대접하며 비위를 맞추었다. 楊장교는 기분이 좋아졌고, 그들 병사 몇에게 여기에서 멀리 옮기고 더는 소란을 부리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楊장교는 보아하니 음률을 좋아하고, 비파도 튕길 줄 아는 듯했다. 그는 우리에게, 양주 현지의 名妓(명기)를 수배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드러냈는데, 군무 중 한가할 때 쉬면서 즐긴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에, 그가 답례로 나(와 일행)를 초대하였고 함께 술을 마셨다. 원래 나는 작정을 하고 실컷 놀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督鎭(독진) 사가법이 보낸 쪽지가 술자리에 전해졌고, 楊장교는 펴보더니, 낯빛이 확 변해서, 급히 몸을 일으켜 城으로 올라갔다(민간인 집에서 나와 성벽 위로 올라갔다). 우리 일행 또한 흩어졌다.
이튿날 아침(25일 ;10日 중 첫날)이 지나, 督鎭(독진) 사가법의 말씀패(牌諭패유)가 전해졌는데 그 안에는, ‘나 한 사람이 감당한다. 백성은 연루시키지 않는다’란 말이 적혀있었다. 이를 전해들은 자 감격하여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또, 순찰 돌던 아군이 적군에게 가벼운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얼굴이 펴졌고, 서로 축하했다.
오후에, 나의 처갓집사람 하나가, 적에게 투항해 반란군이 된 興平伯(흥평백 ;칭호)고걸(高杰)의 패잔병을 피하여, 과주(瓜州)에서 양주로 우리집까지 왔는데(흥평백고걸은 적에게 투항하여 반란군이 되었고, 사가법이 방을 붙여 그를 수배하였으며, 때문에 양주에서 멀리 도망쳤다), 나의 아내는 이 친정붙이와 헤어진 지 오래라, 두 사람은 만나자 탄식을 그치지 못했다.
이때 바깥에서는, 적병이 이미 입성했다는 얘기가 파다했는데, 한두 사람이 이미 나에게 일부러 와서 그 소문을 알려주었더랬다. 그래서 나는 급히 바깥으로 나가서 소식을 탐문하였는데, 또 누군가 말하기를 :“적군이 입성한 것이 아니고, 靖南侯黃得功(정남후황득공)이 이끄는 援兵(원병)이 왔다는 겁니다.(靖정:亂을 가라앉히다, 정남후란 인물의 이름은 黃蜚황비) (당시 淸軍이, 황비가 이끄는 원군을 가장하여 수비군을 속여 성문을 열고, 양주 성내로 공격해 들어갔다고 한다. 사가법은 경솔히 믿다가 기만당했다고)”다시금 성벽 위의 수비군을 쳐다보니, 여전히 엄정하고 일사불란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헌데 대로에 도착하자, 사람들 하는 말이 흉흉했다. 돌연 흙먼지가 일면서, 맨발에 머리를 풀어헤친 자들이 미친 듯이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그들에게 물었으나, 전부들 다급하고 숨이 차서 누구하나 제대로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홀연, 騎馬(기마) 수십 기가 북에서 남으로 질주, 낭패한 모습으로 달아다는데, 그 기세가 마치 파도가 밀려가듯 급박했다. 그 중에,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인 한 사람이, 바로 督鎭(독진) 사가법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원래 東城(동성 ;대도시라 同門 일대 지역을 東城이라 불렀다?)으로 달려가서 포위를 돌파할 생각이었으나, 만주군의 차단이 엄밀하여 돌파 불가능이라서, 남문으로 나가 포위를 뚫고자, 남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온 것이었다. 이때에 드디어, 적병의 입성이 의심할 여지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때, 또 기마 하나가 북에서 남으로 가는데, 고삐를 당겨 느릿느릿 걸어갔다. 말 위의 사람은 고개를 젖히고 슬피 부르짖었다. 말 앞에는 병졸 둘이 말의 굴레를 끌며 곁에서 못내 떨어지지 않았다. 이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선한데, 그 당시에 다가가서 성명을 묻지 않았던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 기마가 차츰 멀어진 후, 성을 수비하던 병정들이 죄다 투구갑옷 병기 등을 내팽개치고, 줄지어 성벽에서 뛰어내려 달아났다. 어떤 병사들은 뛰어내리다 머리가 깨져 죽거나 혹은 다리가 부러졌다. 다시 고개를 돌려 성루를 쳐다보니 이미 텅텅 비어 쥐새끼 하나도 없었다. (상자글 아래에 계속)
(譯註 ;이하 글은, 원저자/출처 불명으로서, 중국 웹 百度백과 ‘揚州十日記’ 部에, 각각 ‘屠城實錄(도성실록)’ ‘역사淵源(연원)’이라는 부제목으로 함께 실린, 두 글의 일부임. 성 함락 순간/직후의 묘사로서, 揚州十日記에 없는 내용 또는, 중복되나 다른 내용 또는, 중복되며 같은 내용 등이다. 양주십일기 내용의 보충 삼아 일독.)
다탁(多鐸 ;淸軍 총사령관)의 병사가 일단 이 重砲(중포)의 사정거리 내에 진입하면, 곧바로 수백 천의 사람이 대포에 맞아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다탁은 놀라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자기 쪽 대포부대를 지휘하여 성벽 서북쪽 모퉁이에 포격을 가했다. 뒤이어 淸軍 보병이 대포의 화력망을 가로질러 물밀듯이, 곧바로 성벽 아래로 들이닥쳤다. 거기에서, 사가법은 또 순간적인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의 활射手들이 성 아래의 이들 공격자들을 直射(직사)하였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다탁이 그의 병사들에게 어떤 대가를 무릅쓰고라도 서북 모퉁이를 뺏으라고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淸兵 하나가 화살에 쓰러지면, 곧바로 다른 하나가 그 자리를 메웠다. 순식간에, 시체가 쌓이고, 갈수록 높아졌다. 어떤 淸兵들은 심지어 사다리도 없이 성벽에 기어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성벽 위로 올라간 淸兵은 갈수록 많아졌고, 이 바람에 수비병들이 공황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성벽 방어시설 언저리의 수비병들은 앞을 다투어 나무 砲臺(포대)에 뛰어올라, 가장 가까운 집 지붕에 기어올랐고, 그대로 내뺐다. 곳곳에서 포대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렸고, 城을 방어하던 병사들은 만약 깔려죽지 않으면, 뒤이은 육박전에서 죽임을 당했다.
뒤이어, 이런 류의 공황이 성내에 만연하기 시작했다. 이는 叛徒(반도)들의 선동질 때문 말고도 어떤 뜬소문 때문이기도 했다(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수비군은 만주군을 황득공장군이 보낸 증원부대로 생각했다 한다), 순식간에 주요 성문이 나 몰라라 방기되었다. 뒤이어 淸軍이 물밀듯이 들어왔고, 南明의 사병들은 투구와 창을 버리고, 낭패 가득한 모습으로 남문으로 달아나, 그쪽 방향으로 도주를 시도했다.
다른 일부 사람들은, 이 도시가 이미 완전 포위됐음을 알고, 차라리 어떠한 희망조차 품지 않았다. 일찍이, 뒤이어 일어난 재난을 日記로 적은 왕수초가 기억하기를 :“바로 이때, 또 기마 하나가 북에서 남으로 가는데, 고삐를 당겨 느릿느릿 걸어갔다. 말 위의 사람은 고개를 젖히고 슬피 부르짖었다. 말 앞에는 병졸 둘이 말의 굴레를 끌며 곁에서 못내 떨어지지 않았다. 이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선한데, 그 당시에 다가가서 성명을 묻지 않았던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림이 흐릿하면 딸깍) 淸軍 서북 모퉁이 공략, 성공, 南明 수비군 동문으로 도주 시도,.. 실패, 남문으로 도주 시도...성공? 실패??... 뒤에 나오는데 本 日記를 쓴 ‘王씨’란 인물의 집은, 집 바로 뒤가 성벽이라 하며, 그 지역이 西城이라고 앞에서 나온바 있다. 王氏집, 대략 초록색 점선 구역 어디쯤.
그리하여 성을 방어하던 병사들이 투구갑옷을 버리고, 급히 城 내의 민가로 들어가 몸을 숨길 곳을 찾던 그 순간에, 사가법은 그가 있던 城 북문의 砲臺(포대)를 떠나, 말을 타고 內城(내성)을 가로질러, 곧바로 남문으로 달려갔다. 그는 그곳으로부터 나가서, 만주군 옆날개를 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버려서, 이미 청군이 城 남문에 도달해버린 상태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가법은, 그가 양주성을 이미 잃었으며 더 이상의 저항은 그 의의가 전혀 없게 되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하루이틀 전에, 사가법이 장자고(莊子固)에게 직접 물었던 바, 만약 양주성이 함락된다면, 자네는 爲主盡忠의 준비가 되었는가(爲主盡忠위주진충, 문맥상 여기서는 -나를 죽여주겠는가). 장자고가 망설임 없이 답하여 말하기를, 그러겠습니다. 이 시각, 사가법이 정말로 莊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구한다. 허나 막상 때가 닥치자 장자고는 모질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가법은 별안간 자기 칼을 빼어 목을 그었다.
그러나 그는 치명상을 입지 않았고, 장자고의 품에 넘어져 피만 계속 흘릴 뿐이었다. 사가법은 큰 소리로 양아들을 불러 빨리 죽도록 도와달라고 하였지만, 사득위(史得威or德威)는 두세 차례 망설이다 손을 쓰지 못했다. 그 결과 성 북문으로부터 도망온 패잔병들이 그들을 휩쓸어갔다. 그 뒤를 만주인이 포기하지 않고 바짝 쫓았다. 혼전 중에, 장자고가 죽음을 당했고, 사가법은 그를 알아본 어느 淸軍 장교에게 사로잡혔다. 사가법은 자신을 그들의 지휘관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달라고 요구하였다.
사가법은 즉각 豫王(예왕) 다탁이 있는 곳으로 보내졌다. 豫王 다탁. 몸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호신 갑옷을 입고, 타는 말은 화려한 장식에, 수행원 여럿, 비록 만주인이지만, 신체용모가 심히 위용 있으며 俊秀(준수)하고, 턱이 튀어나왔고, 이마가 넓고, 수행원 중에는 만주인이 여럿. 만주인 총독(總督 ;총사령관)이자 황제의 숙부.
다탁이 20일(;5월20일 = 음력4월25일) 사가법 심문에 어떤 차림을 하였는지, 이 자료로는 우리가 알 수 없다. 다만 이 점 하나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즉 훤칠한 몸집에 화려한 옷차림의 만주족 王公(왕공)과, 튼실한 몸집에 어두운 얼굴빛에 핏자국이 묻은 옷을 여전히 입고 있는 중원의 장군 간에, 참으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겠음을. 그들의 만남에 대한 온예림(溫睿臨)의 기재에 의하면, 예왕은 사가법을 매우 호의적으로 맞이했다 한다.
다탁 :“전에 서신으로 간청했는데, 선생이 따르지 않았소. 지금에 충의를 이미 이뤘으니, 마땅히 중임을 던지고, 나와 함께 강남을 수습합시다.”
사가법이 답하여 말하기를 :“이 마당에 뭐가 있겠소. 오로지 죽음을 구할 뿐이오.”
다탁이 묻기를 :“그대는 홍승주(洪承疇)를 보지 않았소? 투항인즉 부귀올시다.”
사가법이 답하여 말하기를 :“그는 先帝의 깊은 은혜를 입고도 죽음으로 節義(절의)를 지키지 못했소. 나아가 그대 朝廷에 몸을 담은 그 불충은 해처럼 밝소. 내가 어찌 그를 본받겠소?”
그리하여 다탁은 의이돈(宜爾頓)장군에게 명하여 사가법이 굴복토록 ‘권유’하였으나, 사흘이 지나도록, 사가법은 여전히 투항을 거절하였다. 결국 명을 내려 그를 살해하였다.
사가법의 私人 막료 19인은 혹은 자살 혹은 시가전에서 피살 혹은 사로잡혀 처형, 그들 전부가 난을 피하지 못했다고 한다.
(상자글 위에서 계속)
저번에, 독진 사가법이 성벽 윗부분(의 폭)이 너무 좁아 대포 설치가 곤란하다 하여 영을 내려, 성벽 돌출부에 목판을 설치하여, 한쪽은 성벽에 걸치고, 다른 한쪽은 민가에 잇닿도록 하여, 여유공간을 만들어, 대포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헌데 그 공사가 이제껏 미완성이었고, 먼저 올라온 적군 병사들이 병기를 휘둘러, 창칼이 난무하였고, 성을 지키던 兵民들이 어지러이 도망치다 한곳으로 몰렸고, 그래서 성벽 위의 도로가 즉각 막혔으며, 그러자 사람들은 목판 위로 뛰어올라, 기어올라가서, 민가 지붕으로 도망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목판이 견고하지가 않아서, 사람 수가 일단 많아지자, 바로 붕괴해버렸고, 사람은 낙엽처럼 추락하였고, 죽은 자가 십중팔구였다 ;민가 지붕에 도달한 사람들이, 지붕에서 내달리며 기와를 밟아 깨뜨렸고, 쨍강,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또는 우박이 쏟아지는 소리 같기도 했는데, (그 소리가) 도처에 끊이지 않았고, 집안의 사람이 놀라 어찌할 바 모르는 온갖 모습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집들의 객청과 안방내외에서부터 침실까지에는, (지붕으로 내빼지 않고) 집안으로 내려온 수비군 兵民들이, 허둥지둥 빈틈이며 숨을 곳을 찾아 몸을 감추고자 하였고, 주인이 큰 소리로 꾸짖고 욕을 해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때 양주성 내 집들은 전부가 문이 닫혔고, 사람들은 죄다 찍 소리도 내지 않았다.
우리집 後廳(후청)은 바로 성벽을 마주한다, 창틈으로 밖을 엿보니, 城 위에 병사들이 남쪽에서 서쪽으로 행진하는 것이 보이는데, 보무가 엄정한 것이, 설령 폭우 속이라 한들 조금도 어지러워지지 않을 듯했다. 속으로 짐작하기를, 기강이 엄하고 절도 있는 군대구나. 조금 안심되었다.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웃사람이, 우리 의논하여 壇(단)을 차려 향을 살라서 王師(왕사 ;王의 군대)의 도착을 영접하자, 감히 대항하지 않음을 보이자는 것이었다. 비록 그렇게 한들 별 소용없음을 내 알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중론을 거스를 수도 없으니, 예예 일단 따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옷을 갈아입고, 모여서 목을 빼고 군대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군대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또 집 후청으로 가서 창문으로 성벽을 엿보았는데, 만주군 행렬이 좀전보다 조금 드물어졌고, 행렬이 가다 서다 했다. 돌연 눈에 띄는 것이, 만주군 병사들이 부녀자들을 에워싸고 어울려 가는데, 부녀자들의 옷차림을 보니, 모두가 양주 현지 풍속이었다.
이제 나는 크게 놀라게 되었고, 고개를 돌려 마누라에게 말하기를 :“군사들이 입성하였으니, 만약 무슨 나쁜 일이 생기면, 당신은 스스로 끝을 내어(자살하여 치욕을 면해)야 할 것이오.” 아내는 말하기를 :좋아요! 그리고 목이 메어 말하기를 :제가 이전에 주머닛돈을 좀 모았어요, 지금 당신에게 드리니 알아서 처리하세요,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는데, 이런 재물을 남겨서 어디다 쓰겠어요? 그리곤 울면서 돈을 다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바로 이때, 누군가 들어와서 급하게 고함을 쳤다 :왔소! 왔소! 나는 급히 뛰어나갔다. 저 멀리 북에서 오는 기마 몇 기가 보이는데, 고삐를 살며시 잡고 천천히 다가왔고, 王師(왕사 ;왕의 군대)를 맞이하는 자들과 맞닥뜨렸고,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 뭔가를 말하는 듯했다. 이때에, 全 양주성 사람들은 낌새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기 시작했고, 왕래가 끊어졌으며, 그래서 지척지간에도 숨소리 하나 안 들렸다.
그들이 더 가까이와서야, 결국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바로 집집을 돌며 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허나 그래도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는데, 조금이라도 소득이 있게 되면, 더 캐묻지 않고 그만두었으며, 간혹 불응하는 자가 있다 해도, 비록 칼을 휘둘려 위협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해하진 않았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누군가 헌금 만 냥을 바쳤는데, 그럼에도 갑자기 죽임을 당했다고, 이는 양주 현지인 내통자가 초래한 일이라 한다. 우리집 차례가 되었을 때, 만주군 기병 하나가 나를 콕 집어 가리키며 뒤쪽의 기병에게 말하기를 :“이 쪽빛 옷을 입은 사람에게 돈을 받아내 가져오라.”
뒤쪽 기병이 막 말에서 내렸을 때, 이미 나는 잽싸게 멀리 도망쳐버렸다. 그는 나를 포기하고 말에 올라 가버렸다. 나는 속으로 따져보기를 :“내 옷차림이 남루해서 시골뜨기 같은데, 왜 하필 나에게 그러지?”때마침 아우가 왔고 큰형님 또한 왔기에, 함께 의논하기를 :“제가 사는 집 좌우가 모두 富商(부상)이라, 그들이 저까지 富商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어떡하지요?”
모두들 초조 불안하였고, 가능한 한 빨리 이동하기로 결정, 그리하여 큰형님이 집안 부녀자 등을 이끌고 외진 좁은 길로 비를 무릅쓰고 둘째형님 집으로 가게끔 맡겼다. 둘째형님이 사는 곳은 何씨가문묘지 뒤로서, 좌우가 모두 가난뱅이 주거지라, 더 안전할 것이다. 나는 뒤에 혼자 남아 동정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큰형님이 와서 말하기를 :“大路 상에는 이미 만주군이 도륙을 시작했다, 여기에 남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우리 형제들은 함께 있자, 태어남과 죽음을 함께 하면, 비록 다 죽는다 해도 한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先祖(선조)의 神主(신주)를 모시고 큰형님과 함께 둘째형님 집에 도착하였다. 당시 큰형님과 아우, (둘째)형수 및 조카, 또 집사람과 아들, 두 처제, 처남 하나, 총 12인이 둘째형님 집에 피난 중이었다.(12人 =11人+뱃속아이)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고, 적군이 사람 죽이는 소리가 문밖에 울려퍼졌다. 놀란 집안사람들은 도저히 집안에 있지 못하고 지붕으로 피해 올라갔다. 비가 갈수록 세차졌고, 십여 人이 뭉쳐서 담요 한 장을 같이 덮었고, 온몸이 빗물에 폭삭 젖었다. 바깥의 애통한 비명소리는 머리카락이 쭈삣하도록 파고들며, 혼백이 나가게 만들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차츰 조용해졌고, 그때서야 처마를 붙들고 내려와, 돌을 두드려 불을 피워 밥을 지었다.
이때, 城 곳곳에 불이 났는데, 가깝게는 십여 곳, 멀게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붉은 색 火光이 서로 비추는 것이 마치 번개가 번쩍이는 듯했고, 타닥 타다닥 소리가 끊임없이 귀를 울렸다. 거기다 공격당해 부상 입은 자들의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끊어지다 이어지다 하는 애처로이 돌보는 소리들, 그 처참함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밥이 익었으되, 사람들은 서로 멀뚱멀뚱, 겁에 질려 누구 하나 젓가락을 못 들었고, 아무도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내 아내가, 저번에 나에게 주었던 주머닛돈을 가져가서, 네 뭉치로 나누었고, 형제들이 각기 하나씩 숨겼는데, 상투며 신발이며 허리띠에 챙겼다. 아내는 또 헤진 옷과 낡은 신발을 찾아서 나를 가난뱅이로 변장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은 뜬눈으로 밤을 샜고, 아침을 맞았다.
그날밤에, 기괴한 새들이 공중에서 마치 생황(笙簧, 피리 종류) 같은 울음소리를 내었고, 또는 으아 어린애 울음 비슷한 소리도 내고, 죄다 사람과 들짐승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인 듯했다. 후에 물으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가 들었다 한다.
26일(10日 중 이틀째), 城 내 불길이 급속히 약해졌다. 하늘이 차츰 개었다. 우리들은 다시 지붕으로 기어올라가 숨었고, 이미 십여 사람이 지붕과 지붕 사이의 배수통 안에 엎드려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돌연, 동쪽채에서 사람 하나가 벽을 기어 집 위로 올라 내뺐다, 병사 하나가 칼을 들고 바짝 쫓는데, 마치 나는 듯했다,
그러다 멀리 우리들을 발견하고, 쫓던 사람은 팽개치고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놀라고 당황하여, 즉각 지붕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큰형과 둘째형이 뒤를 이었고, 아우 또한 뒤를 이었다. 우리들은 백여 걸음을 달린 후에야 멈추었다. 이리하여 처자식과 헤어졌고, 그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때, 교활한 병사들이, 사람들이 다들 숨어버릴까 걱정하여 거짓으로 소리쳐 사람들을 속이기를, 순순히 나오는 자에겐 安民符節(안민부절 ;부절이란 일종의 증표)을 주고 건드리지 않는다, 더 이상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그러자 숨어있던 사람들이 다투어 튀어나와 그들을 따라가는데, 다 모이니 오륙십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에 부녀자가 반이었다. 둘째형님이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고작 네 사람이니, 만약 흉폭한 병사라도 만나게 되면, 요행을 얻기 어려울 터, 저 사람들 떼에 묻어감이 낫다. 그러다 보면 도망치기도 더 쉬울 것이고, 설사 불행을 당한다 해도, 우리(형제)가 생사를 같이 함이니, 한스러울 것이 없으리라.”
이 당시, 우리는 죄다 마음이 어지러워져, 그 외의 목숨을 구할 좋은 방책을 찾을 수 없었고, 예예 다들 동의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도 나와서 사람들을 따라갔다. 우리를 호령하는 사람은 세 만주병이었다. 이들은 먼저 모든 사람들의 재물부터 뺐었다. 나의 형제들은 죄다 탈탈 털렸고, 나 한 사람만 (그들이 빼먹어서) 수색을 면했다.
갑자기 부인네 중에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쳐다보니, 나의 친구 주서(朱書)兄의 두 첩실이었다. 나는 급히 그들을 제지했다. 두 첩실은 모두 머리카락이 흩어졌고, 살이 밖으로 드러났고, 발은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 무릎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그중 한 첩실은 女아기 하나를 그때까지도 안고 있는데, 만주병이 발각하고서, 채찍을 휘둘러 아기를 때리고는 뺏어서 진흙탕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곤 그 부인을 쫓아내버렸다.
병사 하나가 칼을 빼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병사 하나는 긴 창을 가로쥐고서 뒤에서 몰고, 병사 하나는 중간에 자리잡고 사람이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수십 사람을 마치 양떼를 몰 듯, 조금이라도 주춤대면, 즉각 채찍질이요, 혹은 바로 죽여버렸다.
부녀자들은 긴 밧줄에 목이 매이어 줄줄이 구슬이 꿰어진 듯하고, (발이 작으므로) 한 발 걷고 한 번 넘어지고, 온 몸이 진흙투성이였다. 거리에는 온통 버려진 아기들 천지인데, 혹은 말굽에 짓밟히거나 혹은 사람 발에 밟히거나 하여, 肝腦(간뇌)가 쏟아져 온 땅을 덮을 지경이고, 울음소리가 온 들을 가득 채웠다. 개울 하나와 못 하나를 지나는데, 그 안에 시체가 쌓였고, 팔다리가 서로 포개졌고, 핏물이 흘러들어가 물빛이 울긋불긋 대여섯 갈래가 되었고, 못은 시체로 메워져 평평해졌다.
사람들은 어느 집 대문 앞에 이르렀는데, 원래 정위(廷尉) 영언요(永言姚)公의 거처였다. 후문으로 들어가니, 저택 깊숙하니 곳곳마다 시체가 있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여기가 바로 내가 죽을 곳이구나. 구불구불 더 나아가 앞채에 도착하여, 도로로 나가서 다른 주택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서양상인 교승망(喬承望)의 저택이었다. 이곳이 바로 세 병사의 소굴이었다.
문을 들어가니, 병사 하나가 보이는데, 미모의 여자 몇을 지키면서 광주리에 산처럼 쌓인 색무늬비단 의복을 뒤적이다가, 세 병사의 도착을 보고는 으하하! 웃었고, 우리들 수십 명 남자를 몰아 후청으로 갔다. 부녀자들은 곁방에 남겨졌다. 그 방에는 탁자 두 개가 있고, 옷 匠人(장인) 셋과 중년 부인 한 사람이 옷 만드는 중이었다.
이 부인은 양주사람이었는데, 짙은 화장을 곱게 하고, 산뜻한 색의 옷이며 화려한 장식에, 웃는 말로 지휘하는 것이, 자못 득의양양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값나가는 물건이 나올 때마다, 병사에게 애걸하여 수중에 넣는데, 갖은 아양을 떠는 것이, 수치를 몰랐다.
나는, 병사의 칼을 빼앗아 이 요사스런 물건을 베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여기 병사가 훗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고려를 정복할 때에, 고려 부녀자 수만을 포로로 잡았는데, 몸을 내맡기는 자 한 명도 없었다. 어찌하여 당당 중국이, 수치를 모르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나?” 오호라, 이게 바로 중국이 大亂(대란)을 당하는 이유이다. (병사가 말하는 ‘고려’란, 조선을 말한다. 정묘호란 또는 병자호란에 참전했던 병사이리라.)
(==> 下편)
하편
원 출처: http://contrite.tistory.com/entry/%E6%8F%9A%E5%B7%9E%E5%8D%81%E6%97%A5%E8%A8%98%EC%96%91%EC%A3%BC%EC%8B%AD%EC%9D%BC%EA%B8%B0-%E4%B8%8B
세 병사는 곧이어 모든 부녀자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젖은 옷을 벗도록 명령하였는데, 겉에서 속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였다. 동시에 옷 짓는 부인네에게 명령하여 각 사람의 길고 짧음과 넓고 좁음을 재도록 하여,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이들 부녀자들은 계속되는 위협에 못 이겨, 나체가 되어 마주보게 되고, 은밀한 곳이 다 드러나니, 그 죽고 싶을 지경의 치욕은, 말로 설명하기 곤란할 지경이었다. 옷을 다 갈아입힌 후, 병사들은 부녀자 몇을 골라 좌우에 싸안고 술을 마시며 즐기며,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 하나가 갑자기 칼을 빼고 일어서더니, 후청의 남자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오랑캐, 이리 와, 오랑캐, 이리 와!” 내 부근의 몇 명은 묶여서 움직일 수 없었는데, 그중에 우리 큰형님도 있었다. 둘째형님이 말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 무슨 말을 하리오?”내 손을 꽉 쥐고 앞으로 나아갔고, 내 아우 또한 뒤를 따랐다.
이때 그들에게 붙잡힌 남자들이 총 오십 여 人이었으나, 칼 든 병사의 한 번 호통에, 사람들은 혼백이 달아나서, 누구 하나 감히 앞으로 안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둘째형님을 따라 후청을 나오는데, 밖에서 병사가 사람을 차례차례 죽이는 것이 보였고, 사람들은 모두 차례대로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처음엔, 달게 죽자 생각했으나, 마치 신의 도움이 있듯이 불현듯 충동이 일어, 이때다 하고 몰래 달아나, 다시 후청으로 돌아갔다. 오십여 사람 중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청 뒷건물들 중 서쪽채에는 나이 든 부인들 몇이 아직 있었기에, 그쪽으로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중앙채를 가로질러 뒷채에 다다랐는데, 안에는 죄다 말이며 가축이었다. 여기를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갈수록 마음이 급해져서, 몸을 말의 배 밑으로 엎드려, 수 마리 말의 배 밑을 기어서 지났다.
만약 말을 놀라게 하여 이들이 조금이라도 날뛴다면, 나는 바로 밟혀서 짓이겨질 판이었다. 그곳을 떠나, 건물 몇 채를 더 지났지만, 어디에도 나가는 길은 없었고, 다만 근처에 후문으로 통하는 복도가 있었다. 그런데 이 복도의 문은 이미 병사들이 대못을 단단히 박아둔 상태였다.
그곳에서 뒤돌아 다시 앞으로 오니, 前堂(전당)에서 사람 죽이는 소리가 들렸고, 더 무섭기만 할 뿐 대책이 안 섰다. 왼쪽을 살펴보니 주방이 있었다. 안에는 네 사람이 있었는데 아마 이들 역시 붙잡혀와서 밥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나도 껴달라, 불을 피우고 밥 짓는 일을 같이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혹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 사람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하기를 :“우리 네 사람은 지정되어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람 수가 는 것을 만약 병사들이 알게 된다면, 이것들이 수작 부리나 하고 반드시 의심할 것이고, 화가 우리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내가 계속하여 읍소하였으나, 그들은 더 화를 내면서 나를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나는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갈수록 초조해졌다. 이때 계단 앞에 받침대가 보였다. 받침대 위에는 큰 독이 있었는데, 지붕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래서 받침대를 붙잡고 기어올라가서, 손이 막 독에 닿는데 그 순간 꽈당 몸이 자빠졌다. 아마도 빈 독인데다 내가 힘을 너무 세게 썼기 때문이리라.
어쩔 수 없이 아까 그 복도 문 쪽으로 급히 돌아갔다. 그리곤 두 손으로 문(의 빗장)에 박힌 대못(의 조금 덜 박힌 몸통 부분)을 붙잡고 죽자고 흔들었지만, 못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돌로 친다면 그 소리가 바깥뜰까지 들릴 것이고, 아마도 병사에게 들키리라.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있는 힘을 다해 흔들었다. 손가락이 찢어져 피가 철철 나와 팔뚝을 흘러 옆구리에 이르렀을 즈음에, 드디어 대못이 헐렁해졌고, 힘껏 뽑아, 드디어 못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리고 급히 빗장을 당기는데, 빗장이 무궁화나무라, 빗물에 젖어 불어서, 그 빡빡함이 대못 뽑기의 여러 갑절이었다.
나는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 되었고, 있는 힘껏 빗장을 뽑았으나, 빗장은 뽑히지 않고 느닷없이 지도리(문짝을 여닫을 때 문짝이 달려 있게 하는 물건 ;문짝의 회전축)가 부러져, 문짝이, 담장째 같이 무너졌고, 마치 벼락 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급히 몸을 솟구쳐 뛰어넘어갔는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큰 힘이 나왔는지, 재빨리 후문을 나갔다.
바깥은 성벽 아래였다. 병졸과 마필로 가득했다. 곳곳이 다 그러해서, 통과하기란 아예 불가능이었다. 그래서 喬씨 저택 왼쪽 집, 후문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런데 이 안에 숨을 만한 곳은 죄다 누군가 숨어 있고, 하나같이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걸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뒤쪽부터 앞쪽까지, 저택 다섯 칸 다 마찬가지였다. 결국 대문 앞에 이르렀는데, 여기는 이미 큰길에 맞닿는 곳이었다.
대로 上에는 만주군 병정들이 끊임없이 오고갔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 지점은 위험하다 여겨서 누구도 이곳에 숨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급히 들어갔다(어디로 들어가? 언급이 없음, 원작 자체가 그러함. ‘대문 근처 적당한 곳’이라 짐작). 침대 하나가 있었고, 침대 위쪽에 지붕보기가 있었다. 기둥을 잡고 지붕보기 위로 올라가서, 몸을 굽혀 안을 보고 누었다.
막 한숨 돌리는 찰나, 돌연 담 너머 아우의 애통한 울음소리가 들렸고, 또, 칼을 들어 내리찍는 소리가 들렸다. 도합 세 번 칼질 소리가 들리고는, 조용해졌다. 얼마 안 있어, 또 둘째형님의 애걸 소리가 들렀다. :“우리집 지하실에 돈이 있소. 날 풀어주시오! 돈을 가져와서 드리겠소.” 칼을 내리찍는 소리가 한 번 들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당시 나는 넋이 떨어지고, 가슴속이 불타는 듯하고, 눈물은 말라 흐르지 않고, 창자가 엉켜 끊어질 듯, 심신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 후, 병사 하나가 한 여자를 끼고 집 안으로 들어와서, 침대 위에서 여자를 강간하려 했다. 여자는 처음엔 한사코 반항하였으나, 병사의 폭압에 못 이겨 나중에는 굴복하고 말았다. 일이 끝난 후에 여자가 말하기를 :“이곳은 큰길에 가까워서 남 눈에 띄기 쉬워요. 오래 머무를 곳이 못 돼요.”병사가 여자를 데리고 다시 나갔다. 그동안 난 하마터면 발각될 뻔했다.
내가 누운 옆쪽으로 대나무자리로 만든 차폐층이 있는데, 사람 무게를 견디지는 못할 듯했다. 하지만 그걸 따라가서 들보를 잡을 수 있었고, 두 손으로 들보 위 도리를 붙잡고 기어올라, 두 발은 들보를 밟고 자리를 잡았다. 아래는 대자리가 가려주니, 들보 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잠시 후 병사 하나가 들어오더니, 창을 위로 이리저리 찔러보고는, 허공뿐임을 알고, 위에 아무도 없구나 생각하는 듯했다. 이후로 온종일 병사 한 사람도 맞닥뜨리지 않았다. 헌데 지상에선 칼에 맞는 자 그 얼마인지? 대로에 兵馬(병마) 몇이 지나갈 때마다, 반드시 수십 남녀의 애통한 울음소리가 뒤따랐다.
이날 비는 안 왔지만, 해도 뜨지 않았다. (칠흑 속이라) 아침인지 저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밤이 되어 兵馬가 다소 줄고, 좌우로 사람들 슬피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형제들 중 이미 절반이 해를 입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큰형님은 또 생사조차 점 칠 수가 없고, 아내와 자식놈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래 찾아보자, 어쩌면 한번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형님 아우가 죽음을 당했음을 알려줘야지.
그래서 들보를 따라 천천히 내려와, 살금살금 앞거리로 갔다. 길에는 시체가 이리저리 포개져 널려 있었다. 날은 저물어 누가 누구 시체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시체더미에 고개를 숙여 불러보았으나, 대답하는 자 하나도 없고 적막만 흘렀다. 멀리 남수(南首 ;지명)쪽을 보니 횃불 여러 개가 떼지어 몰려왔다.
나는 급히 자리를 피해, 성벽을 따라 달렸다. 성벽 아래에는 시체가 물고기 비늘만큼이나 빽빽이 쌓여 있었다. 몇 번을 시체에 걸려 넘어지고, 시체에 부딪쳤다. 발 둘 곳이 없어, 넙죽 엎드려 손을 발로 대신했다. 조그만 낌새에 놀랄 때마다, 시체처럼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한참을 그렇게 기어간 후에야 (다시) 대로에 당도할 수 있었다.
대로에는 앞 뒤 곳곳에 횃불 든 자가 대낮처럼 비추고 있었다. 나는 여러차례 멈칫멈칫 기회를 찾다가, 틈을 보아 대로를 가로질러 소로에 당도할 수 있었다. 소로를 가는데 캄캄한 밤이라, 누군가와 부딪칠 때마다 서로 간에 깜짝 놀라곤 하며, 백 걸음도 안 되는 길을, 酉(유)시에 시작하여 亥(해)시가 되어서야(4시간 걸려) 둘째형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문이 닫혔고 감히 즉각 두드리진 못하는데, 돌연 부인네 음성이 들려왔다. (둘째)형수임을 알고 그때서야 문을 가볍게 두드리니, 문을 여는 자가 바로 나의 아내였다. 큰형님이 이미 돌아왔고, 아내와 자식놈이 다 있었다. 나와 큰형님은 부여잡고 통곡했다. 헌데 아직은 감히 둘째형님과 넷째의 죽음을 알려줄 수 없었다. (둘째)형수가 나에게 물었고, 나는 거짓으로 답했다. 나는 아내에게 어떻게 다행히 화를 면했는가 물었다.
아내는 말하기를 :“그 당시 병사가 쫓아올 때에, 당신이 먼저 튀고, 뒤이어 다들 튀고 나서 저만 남았어요. 저는 팽아(彭兒)를 안고 지붕 밑으로 뛰어내렸는데 다행히 죽지 않았어요. 제 여동생은 다리를 다쳐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병사는 우리 둘은 데리고 어느 집에 들어갔어요. 집안에는 굴비처럼 묶인 남녀 수십 사람이 있었어요. 병사는 저를 (감시 임무를 맡은) 몇 부인네에게 맡기며 당부하기를 : ‘잘 지켜. 도망가게 하면 안 돼.’그리곤 칼을 들고 나가버렸어요.
잠시 후 또 병사 하나가 들어왔어요. 내 여동생을 끌고 갔어요. 한참이 지났어요. 그동안 안 보이던 아까 그 병사가 왔어요. 여러 부인네들을 나가게 했어요. 나와서 바로 홍(洪)할머니를 만났어요. 서로 붙잡고 여기로 왔지요. 그래서 요행히 화를 면했지요.”
洪할머니는 큰형님의 처가붙이이다. 아내가 나에게 경과를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해주었고, 둘이 한참을 탄식했다. 洪할머니가 남은 밥을 가지고 와서 권했다. 목이 메어 넘어가지 않았다.
밖에서는 또다시 도처에서 불이 나고 있었는데, 어젯밤의 갑절이었다. 나는 마음이 안정이 되지가 않아, 살그머니 집밖으로 나갔다. 근처 밭에 시체가 이리저리 포개졌는데, 아직 숨이 붙어 헐떡이는 소리도 없지 않았다. 멀리 何씨가문묘지가 보이는데, 수목이 으스스하니, 곡소리가 숲소리에 섞이고, 아비가 아들을 부르는 소리며, 지아비가 처를 찾는 소리며, 으아으아 아이 우는 소리며, 풀숲가며 시냇가며, 구석구석, 그 참혹함이 듣기가 괴로울 지경이었다.
둘째형님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나에게 말하기를 :“오늘 일에, 죽음만 있을 뿐이니, 때가 되거든 제가 먼저 죽게 놔두어, 절대 당신은 연루되지 마세요. 팽아가 있으니, 당신은 앞으로 잘 처신하셔야 해요!” 나는 아내가 과단성이 있어 생사에 연연치 않음을 알고 있었다. 生死 이별 앞이라, 밤새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동이 텄다.
27일(10日 중 사흘째), 아내에게 피할 곳을 물었다. 아내는 나를 이끌고 구불구불 가더니 어느 관 뒤쪽에 당도했다. 오래된 기와에 거친 벽돌, 인적이 끊어진지 오래인 듯했다. 나는 썪은 풀더미에 쭈그리고 앉아 팽아를 관 위에 내려놓고, 갈대자리로 덮었다. 아내는 앞에 움츠리고, 나는 뒤에 바짝 붙어 쭈그렸다. 머리를 들면 정수리가 드러나고 다리를 펴면 발이 보이니, 함부로 몸을 펼 수가 없었다. 숨을 죽이고, 팔다리를 싸안았다.
혼을 좀 진정시키는데 사람 죽이는 소리가 바싹 들려왔다. 칼이 향하는 곳에는 처참한 비명소리가 어지러이 일어났고, 이구동성 살려달라 비는 소리가 수십 혹은 백여 사람이었다. 병사 하나를 만나면, 南人(남인 ;明이 망하고 南明)은 많든 적든, 하나같이 머리를 늘어뜨리고 땅에 엎드려, 목을 빼고 칼을 받는데, 도망가는 자 한 사람이 없었다. 자식들이 잇달아 죽어가는 지경이 되자, 입 백 개가 서로 울며, 애통곡이 천지를 울렸다. 더는 말하기가 힘들다!
정오가 가까워지며 도륙 약탈은 더 심해졌고, 시체더미는 갈수록 많아졌다. 귀는 듣기가 힘들고 눈은 보기가 괴로웠다. 급기야 아내는 예전의 그날 밤을 후회했다. 남편 말을 오해했던 그때 그냥 콱 죽어버릴 걸. 다만 우리는 요행히 발각되지 않고 밤을 맞았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탐색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팽아는 관널빤지 위에 누워 달게 자고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울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또한 먹을 걸 보채지도 않다니 기특했다. 목이 마르겠다 싶어 기와조각을 집어 개울물을 떠 목을 축여주는데, 살짝 놀라더니 이내 잠들었다. 때가 되어 애를 불러 깨워서, 안고서 둘째형님 집으로 돌아왔다. 洪할머니도 벌써 와 있었다.
나는 또 둘째형수가 끌려갔음을 알게 되었다. 조카놈은 이제 고작 강보에 싸인 애기에 불과한데 그 소재조차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아아 괴롭구나! 고작 사흘 만에 둘째형님 부부 및 조카, 그리고 아우까지 넷을 잃었다. 애처로이 겨우 살아남은 자 고작, 나와 큰형님 그리고 내 아내와 자식놈 넷!
여럿이 절구에 남을 쌀을 뒤져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큰형님과 서로 다리를 베고 허기를 참으며 아침에 이르렀다. 이날밤 아내가 자살을 시도해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다행히 洪할머니 덕분에 화를 면했다.
28일(10日 중 나흘째), 나는 큰형님에게 말했다 :“오늘 누가 살아남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만약 형님께서 다행히 무탈하시게 되면, 팽아놈 한 목숨 숨이 붙어 있는 데까지라도 형님께서 좀 돌봐주셨으면 합니다.”형님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날 위로했다. 그리곤 헤어져서 각자 다른 곳으로 숨었다. 洪할머니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제 망가진 궤짝 안에 숨었거든, 온종일 아무 일 없었어. 오늘 자네와 바꿔서 숨지.” 그러나 아내는 한사코 원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와 함께 관 뒤로 가서 숨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병사 수 명이 들어오더니 궤짝을 부수고 洪할머니를 끌어내어서는, 주먹질 발길질 온갖 방법으로 구타했다. 洪할머니는 그러나 단 한 사람도 불지 않았다. 나는 깊이 감격했다. 후에, 둘째형님 재산 백 냥, 우리집에 남은 재산이 또 수 십 냥, 전부 다 洪할머니에게 드려, 감사를 표했다.
잠시 후, 병사들이 점점 많이 들어왔으며, 우리가 숨어 있는 곳에까지 오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집 뒤에까지 와서 멀찌감치 관을 보고는 곧 가버렸다. 홀연 병사 수십 명이 공갈 소리를 지르며 오는데 기세가 심히 맹렬했다. 갑자기 누군가 관 앞에 왔고, 긴 작대기로 나의 발을 찔렀다. 나는 놀라 튀어나갔다. 알고 보니 양주사람인 그때 그 내통자였다. 얼굴은 익은데 성명이 생각이 나지 않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사 빌었다. 그는 돈을 요구했고 돈을 받고선 나를 풀어주며 말하기를 :“네 마누라는 봐주마.” 여러 병사들에게 말하기를 :“잠시 내버려 두자.” 여러 병사들이 흩어져 갔다.
놀란 가슴이 진정하기도 전에, 갑자기 붉은 옷의 소년이 긴 칼을 쥐고 곧장 나 있는 곳으로 와서는, 큰 소리로 나를 불러냈다. 내가 나가니 소년은 칼끝을 들이댔다. 돈을 바치니, 이번에는 아내를 요구했다. 이때 아내는 임신 9개월이라, 땅바닥에 죽어라 엎드려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말하기를 :“제 아내는 임신한 지 몇 달이나 됐습니다. 어제는 더구나 지붕에서 떨어졌고, 그 때문에 뱃속아기가 잘못되어서, 앉기조차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어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붉은 옷 입은 자는 믿지 않고, 아내의 옷을 들추어 배를 보고는, 또 저번에 피가 묻은 바지까지 보고는, 더는 살피지 않고 가버렸다.
이 소년이 노획한 사람은 젊은 부인 한 사람, 계집아기 한 사람, 어린애 한 사람이었는데, 어린애가 엄마에게 먹을 것을 보챘다. 병사가 노하여 퍽 내지르니 머리가 터져 죽었다. 그리고는 부인과 아기를 끌고 갔다.
나는 아내에게, 이곳은 사람들에게 발각되기 쉽다, 더 이상 머무를 만한 곳이 못 된다, 적당한 곳으로 옮겨서 숨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내는 한사코 죽으려 했다.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 둘은 밖으로 나와, 나란히 대들보에 목을 맸다.
그런데 목에 맨 밧줄이 동시에 끊어졌고 둘은 나란히 땅바닥에 떨어졌다.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병사들이 가득 대문을 들어와서 곧장 堂上(당상 ;正堂이라고도 함 ;몸체의 대청)으로 몰려갔다. 미처 곁채까지는 오기 전이었다. 나는 아내와 급히 문밖으로 달려 나가 어느 초가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창고 안은 빽빽이 부인네들이었는데, 그들은 내 아내는 받아들이고 나는 내쫓았다. 나는 급히 내달려 다른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풀더미가 천정까지 쌓여있었고, 나는 그 꼭대기로 올라가서 머리를 숙이고 엎드려 숨었다. 다시 헝클어진 풀로 위를 덮고, 이제 안심이구나 생각했다.
잠깐만에 병사가 들어오더니 풀더미 위로 뛰어 올라와서는, 창으로 아래쪽을 마구 찔러댔다. 나는 풀더미 사이에서 나와야 했고, 또 살려달라고 빌면서 돈을 바쳤다. 병사는 풀더미를 더 수색했고 몇 명을 더 찾아냈다. 죄다 돈을 바치고 화를 면했다. 병사가 가고난 후 사람들 몇은 다시 풀더미 사이로 들어갔다.
나는 그 안을 살펴보았는데, (벽 앞에) 큰 사각탁자 여러 개를 놓고 주위를 풀로 둘러치니 탁자 아래가 널따란 빈 공간이 생겨서 2,30명이 족히 들어갈 만했다. 나도 비집고 들어갔고 ‘됐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썩은 벽이 중간 부분이 부서져버리니, 구멍이 생겨서 뻥 뚫려버렸다. 밖의 병사들이 안을 들여다보고선 구멍으로 장창을 찔러댔다. 구멍 쪽에 있던 자들은 큰 부상을 입지 않은 자 하나도 없었고 나 또한 뒷허벅지를 다쳤다. 그리하여 구멍 근처에 있던 자들은 무릎걸음으로 틈새를 나가서 죄다 포박을 당했고, 뒤쪽에 있던 자들은 뒤로 물러나서 풀더미를 헤치고 도망갔다.
나는 다시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내와 부인네들은 죄다 땔감더미 위에 바짝 엎드려 있었는데, 피로 온몸을 칠하고 숯검정을 머리칼이며 얼굴에 발라 귀신처럼 꾸미고 있어서, 목소리로 겨우 사람을 분간할 수 있었다. 나는 부인네들에게 애걸하여 풀더미 밑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위를 부인네들이 우루루 누웠다. 숨이 막혔으나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고 거의 숨막혀 기절하려는 차에 아내가 대나무대롱을 줘서, 한쪽 끝을 입에 물고 반대쪽 끝을 위로 내놓고서야 숨이 통했고,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당시 집밖에는 병사 하나가 있었는데, 사람 둘을 죽였다. 그 일이 심히 괴상한 일인데, 글로 실을 수가 없다.
풀더미 위의 부인네들은 하나같이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갑자기 대거 비명소리가 들렸다. 병사가 집에 들어온 것이다. 병사는 다시 성큼성큼 나갔고, 돌아오지 않았다.
날이 또 점점 저물었고, 여러 부인네들이 몸을 일으켰다. 나는 비로소 풀더미 밖으로 나왔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밤이 되어 아내와 함께 다시 洪할머니 집에 당도했다. 洪노인 洪할머니 다 있었고 큰형님 역시 와 있었다. 큰형님 말인즉, 낮에 끌려가서 짐꾼 노역을 하였는데, 보수로 천 돈(1냥 =10돈 =100푼)을 주고 令旗(령기)를 주며 풀어 주더라는 것이다.
도중에 목격한 것이, 어지러이 널린 시체가 산더미요, 핏물이 시냇물처럼 흐르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참혹한 지경이라 한다. 또 들은 얘기가 王씨 성의 어떤 군관어르신이 우리동네 소양(昭陽)李씨 집에서, 돈 수만으로 매일 난민을 구조하고, 그 부하들이 살인할라치면 왕왕 말리곤 하여, 그런 식으로 살려낸 자가 상당수라 한다. 이날 밤 슬피 흐느낀 끝에 잠에 깊이 빠져들었다. 다음날, 29일(10日 중 닷새째)이 되었다.
25일부터 시작하여 오늘까지 벌써 5일, 어쩌면 요행히 사면 받을 수 있을지(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다. 城 내 전체를 쓸어버린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城 내의 남은 민초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줄을 매달아 성벽을 내려간 자들이 태반이요, 이전까지 있던 垓字(해자 ;성 주위에 둘러 판 못)는 이미 막혀서 불통이라 지금은 평탄도로가 되었으니, 성벽을 내려간 자들이 낮에는 잠복하고 밤에 움직이며 도피하는데, 이 바람에 오히려 엉뚱한 재앙을 당하니, 城밖 불한당들이 城 중의 재물을 탐을 내어, 연일 작당을 하여 밤이면 垓字에 들어가 잠복을 하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잡아다 추궁을 하고 금은을 찾아 뒤지곤 하니, 당하는 사람이 감히 반항을 못했다.
나와 아내의 생각에, 어차피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도망갈 순 없다, 큰형님 또한 나 때문에 매정하게 혼자 가지를 못했다. 새벽녘이 되면서 그 생각을 완전히 버렸다.
원래의 은둔처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한 까닭에 번번이 위험을 넘겨온 터라, 나 혼자만 못가의 풀숲 깊숙이 숨고, 아내와 팽아는 그 위쪽에 싸안고 누웠다. 병사 몇이 왔고, 약탈하러 나갔다가 다시 왔고, 돈을 조금 주면 다들 받고 갔다.
이어서 흉악한 병사 하나가 왔는데, 쥐머리상에 매눈으로 그 용모가 추악했다. 이놈이 아내를 끌고 가려 했다.
아내는 노곤하니 일어나지 않고 이전 그 말(;임신)을 그에게 해주었다. 그는 듣지 않고 억지로 아내를 일으키려 했다. 아내가 땅바닥에서 빙글빙글 돌았고, 한사코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병사는 칼등으로 아내를 난타했다. 피가 옷에 뿌려지고 안팎이 푹 젖었다. 저번에 아내가 나에게 신신당부하기를 :“ 만약 불행한 일이 있게 되면, 저는 반드시 죽을 것이니, 당신은 부부의 연 때문에 애걸하다 당신까지 연루되지 말기 바랍니다 ;제가 죽는 즉 반드시 당신 눈앞에서 죽어서, 당신이 (저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단념케 할 것입니다.”
이 당시 나는 멀리 풀숲 속에서 마치 남의 일인 양 방관했고, 아내가 곧 죽임을 당할 것이다 짐작했다. 그러나 병사는 결코 포기하지도 죽이지도 않고, 아내의 머리칼을 끌어 모아 팔뚝에 몇 바퀴 감더니 성난 호통을 치며 질질 끌고 갔다. 밭가 길에서 골목까지 화살처럼 똑바로 가서, 구불구불 돌아서 대로에 나왔다. 도중에 몇 걸음에 몇 번씩 아내를 가격했다.
그러다 갑자기 기마 여럿을 만났고 그중 한 사람이 병사와 만주어로 뭔가를 얘기했고, 곧바로 아내를 내버려두고 가버렸다. 아내는 그제서야 엉금엉금 기어서 돌아왔고, 대성통곡을 했다. 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
갑자기 또 사방에서 맹렬한 불길이 솟아올랐다. 何씨가문무덤 앞뒤로 초가집이 다수 있었는데, 옮겨 붙어 타고 즉각 재가 되었다. 그 사이사이 한 뼘 틈새 땅에는 그물을 빠져나간 자 한둘이 있었는데, 불길에 쫓겨, 사방으로 튀지 않는 자 없었다. 그러나 나오는 즉각 화를 당하니, 백에 하나도 예외가 없었다. 거기다 차라리 문을 닫고 스스로 타죽는 자 수 명에서 수백 명이니, 집 하나 안에 얼마나 많은 인골이 쌓였는지 진정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대략 이때에는 피할 곳도 없고, 피할 수도 없고, 피해도 일단 걸리면, 돈이 없으면 죽고, 돈이 있어도 죽고 ;오직 방법은 길가로 나와서, 혹여 시체들 속에 섞여들어갈 수 있다면, 오히려 生死를 운에 걸어볼 수도 있었다. 나는 아내와 애와 함께 봉분 뒤쪽으로 가서, 진흙으로 얼굴과 다리 등에 발랐다. 꼴이 거의 사람 꼴이 아니었다.
이때 불길이 갈수록 세차지면서, 무덤가 나무들이 죄다 타들어가고, 화광이 마치 번개처럼 번뜩거리고, 우르르 소리가 마치 산이 무너지는 듯하고, 구슬픈 바람이 노여운 소리를 지름에, 입이 딱 벌어질 지경, 붉은 태양이 어두침침해져 빛이 사라졌다. 눈앞 광경이, 마치 지옥에서 수많은 야차 마귀가 수백 수천 사람을 때려죽이고 쫓아가고 하는 듯했다. 너무 놀라 얼이 빠지니, 머리가 어질어질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이 몸이 아직 인간 세상에 있는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저벅저벅! 급속히 커져오는 걸음소리가 갑자기 들렸다. 이어지는 처참한 비명소리에 가슴이 떨렸다. 담장가로 돌아보니, 큰형님이 또다시 붙들린 것이었다. 멀찌감치에 큰형님이 병사와 대치 중이었다. 형님이 원래 힘이 세서, 병사를 팽개치고 벗어나 도망쳤다. 병사는 밭으로 샛길로 쫓아갔고,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가슴이 한창 두근두근거리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쪽으로 달려왔다.
맨몸에 머리가 풀어헤쳐진 사람인데, 살펴보니 다름 아닌 큰형님 아닌가. 그리고 큰형님을 추격하는 병사가, 바로 저번에 내 아내를 끌고 가다 중간에 버리고 간 그자가 아닌가. 큰형님은 병사의 위협에 못 이겨, 할 수없이 나에게 목숨을 구할 돈을 요청했다. 나에겐 은자가 한 덩이밖에 없었는데, 꺼내어 병사에게 주었다. 그런데 병사는 성내길 그치지를 않고, 칼을 들어 형님을 내리쳤다. 형님은 땅바닥에 굴렀고, 피가 흙모래를 적셨다.
다섯 살짜리 팽아가 병사의 옷을 끌며 울면서 용서를 구했다. 병사는 아이 옷으로 칼에 묻은 피를 닦고서는 재차 내리쳤다. 형님이 곧 죽을 판이었다. 병사를 돌아서서 내 머리칼을 당기며 돈을 요구하면서, 칼등으로 마구 때리며 그치질 않았다. 나는 돈을 다 써버렸다고 호소하며 말하기를 :“반드시 돈밖에 안된다면 죽을 수밖에 없소. 다른 재물이라면 바칠 수 있습니다.”
병사는 내 머리칼을 끌고 洪할머니 집으로 갔다. 내 아내의 옷가지며 패물은 큰 독 두 개에 넣어 계단 아래 엎어두었다. 죄다 꺼내어 바쳤다. 병사는 온갖 금붙이며 보석 종류는 빠짐없이 챙기고, 옷가지는 일부만 골라서 챙겼다. 다 고르고 나서, 우리 아이 목에 걸린 은으로 된 패(:銀鎖은쇄 ;長壽장수, 부귀 등을 기원하는 문구를 새겨 아이 목에 걸어주는 패)를 보고선, 칼로 끊어 가져갔다.
그는 떠날 때에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널 죽이지 않는다, 어차피 누군가 널 죽여줄 터이다.” 앞서 城을 몰살시킨다는 소리가 있었는데 이제 확실해졌다. 짐작컨대 반드시 죽게 되리라.
아이를 집에 두고, 아내와 급히 나가 형님을 살폈다. 목 앞뒤 전부 칼을 맞았는데 1촌 남짓 들어갔다. 가슴은 더 심각해서 상처가 벌어져 오장육부가 보일 지경이었다. 우리 둘이 형님을 부축하여 洪씨 집에 들어가서, 형님에게 물어보니, 고통조차 못 느끼고,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형님을 안돈해놓고 우리 부부는 다시 아까 그곳으로 숨었다.
부근에는 널린 시체들 사이 죽은 척 누운 사람들이 많았다. 홀연 시체들 속에서 (아는) 사람 목소리가 나왔다 :“내일 반드시 몰살 작전이 있을 터, 싸그리 죽일 겁니다. 당신 아내는 내버려두고 나와 함께 도망갑시다.” 아내 역시 강권했다. 허나 큰형님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판인데, 어찌 내가 모질게 떠나버린단 말인가? 또한 이때까지 믿을 구석은 오로지 남은 돈밖에 없는데, 지금에 돈마저 다 써버렸으니 아마도 살아남기란 불가능하리라. 순간 극통이 엄습하면서 기절했고, 한참 후에야 깨어났다.
불이 차츰 꺼졌다. 멀리 대포소리가 세 번 들렸고, 왕래하는 병정도 점점 줄어들었다. 나와 아내와 팽아는 변소 밑바닥에 들어가 앉았고, 洪할머니 역시 와서 서로 의지했다. 얼마 후, 부인네 네댓을 노획한 병사 몇이 보이는데, 나이든 부인네 둘은 흑흑 울고, 젊은 둘은 희희낙락 태평스러웠다. 뒤이어 병사 둘이 쫓아와서 부인네들을 뺏으려 들었다. 그리하여 병사들끼리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다 한 병사가 만주말로 화해를 권하여 끝이 났다.
갑자기 병사 하나가 젊은 부인을 안고 나무 밑으로 가서 야합했고, 나머지 두 부인네 역시 욕을 당했다. 노부인은 울며 안 된다 애걸하였으나, 두 젊은 부인네는 태연스럽게 수치를 몰랐다. 수십 명에게 간음을 당했고, 게다가 나중에 추격해온 두 병사와도 교접했다. 그리하여 그중에 젊은 부인 하나는 걷기조차 힘들 지경이 되었다. 나는 이 여자가 焦(초)씨 집 며느리임을 알아보았다. 그 집이 평소 한 짓을 생각해보면 이런 지경에 이름이 마땅하리니, 나는 놀란 와중에도 탄식을 금치 못했다.
순간, 붉은 옷을 입고 칼을 찬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만주모자를 쓰고 검은 신을 신었고, 나이가 서른이 채 안 돼 보였으며, 시원스럽고 수려한 용모였다. 시종이 하나인데, 황색 옷에 갑옷을 둘렀고, 역시 훤칠한 용모였다. 뒤에는 南人(남인 ;南明人) 몇이 짐을 지고 따랐다.
붉은 옷을 입은 자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보아하니, 넌 이들과 한패가 아닌 듯한데, 네가 누구인지 바른대로 대라.” 나는 머리를 굴리기를, 때로 잘난 체하여 만사 보전하는 자가 있지만, 잘난 체하다 목이 달아나는 자 또한 있다, 그런 생각에 감히 이실직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붉은 옷을 입은 자는 크게 웃으면서 황색 옷을 입은 자에게 말하기를 :“자네 승복하겠나? 나는 이미 이 오랑캐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또 洪할머니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나에게 물었다. 다 말해주니 붉은 옷을 입은 자 왈 :“내일 왕야가 영을 내려 칼을 봉하리라(살륙을 멈추리라). 자네들은 살았음이야! 그러니 행여 자멸하지 말라.” 그리곤 따라온 부하에게 명하여 옷 몇 벌과 금 한덩이를 나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넌 며칠 동안 못 먹었는가?”5일이라고 답하니 :“날 따라오라.” 나와 아내는 따라가면서도 한편으론 의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또 감히 안갈 수도 없어서 따라갔고, 어느 집에 다다랐다.
비록 집은 작았으나 어육이며 양식이며 장작이며 없는 게 없이 풍부했다. 할머니 하나와 열 두셋 돼 보이는 아이 하나가 있는데,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서는, 땅바닥에 머리가 닿도록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붉은 옷을 입은 자는 말했다 :“네 목숨을 잠시 맡아두겠다. 너는 날 대신하여 이 네 사람을 돌보아라. 제대로 못하면 널 죽이겠다. 네 아들은 내가 데려간다.”그리고선 나와 작별을 고하고 그 아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할머니란 사람은 鄭씨 성이었다. (아들 때문에 불안해서) 나와 붉은 옷을 입은 자가 친척인지 궁금해하기에, 당신 아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오, 어거지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날이 저물었다. 듣기로 처남이 재차 병졸에게 끌려갔다 한다. 살았을지 죽었을지? 때문에 아내는 크게 상심했다. 잠깐 사이 할머니가 생선 반찬에 밥을 가져와 먹게 해주었다. 이 집에서 洪할머니 집이 멀지 않았기에, 내가 밥반찬을 가져다 형님에게 먹여주는데, 형님이 목을 다쳐 삼키지를 못해서 몇 젓가락 만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형님의 머리칼을 닦고 피를 씻어내는데, 가슴이 만 갈래 찢어지는 듯하다!
이날에, 붉은 옷을 입은 자가 나에게 한 말을, 아직 城을 나가지 않은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주었고, 민심이 어느 정도 진정되기 시작했다. 다음날은 5월 초하루(10日 중 엿새째)이었는데, 공포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긴 하였으되, 그래도 역시 살인이 없지 않았으며, 노략질 역시 없지 않았다.
오히려 으슥한 외진 곳이 조금이나마 더 안전하지, 富豪大家(부호대가)는 역시나 싸그리 털리고, 그 자녀는 육칠 세부터 여남 살까지 강탈을 당해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이날, 흥평백 군사(적에게 투항한 군대임)들이 재차 양주성에 들어왔고, 그나마 헝겊반조각쌀한톨까지 싸그리 범 아가리에 들어가버렸다. 앞에 놈이 얼레빗으로 빗고 나중 놈이 참빗으로 빗나니, 세상사 必有 곡절이라.
초이틀(10日 중 이레째), 전해지기로, 官府(관부)에서 각급 행정구역에 이미 관리를 배치하였고, 관리가 安民패를 쥐고 두루 백성에게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한다고 한다. 관리들은 또 알리기를 각 절의 승려들은 쌓인 시체들을 불사르라 명하였다. 절에 숨었다가 돌아온 부녀자 또한 적지 않고, 공포와 기아로 죽은 사람 또한 다수였다. 시체를 불사를 때 작성한 장부에 기재된 숫자를 뒤져보니, 전후 합계 약 80만 여, 우물에 떨어져 죽거나 강에 빠져 죽거나, 문을 닫아걸고 스스로 불에 타죽거나, 외진 곳에 가서 목매달아 죽은 자는 포함하지 않는다.
이날, 솜을 태운 재 및 인골을 태운 재를 가지고 형님 상처를 치료했다. 저녁에, 그때서야 둘째형님과 아우의 죽음을 큰형님에게 울면서 알렸다. 형님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초삼일(10日 중 여드레째), 양곡 창고를 열어 난민 구제에 나선다는 布告가 떴다. 나는 洪할머니와 함께 결구관(缺口關 ;地名 또는 00)으로 가서 쌀을 받았다. 쌀은 독진(督鎭 ;총사령관 사가법)이 비축했던 군량미였고,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러나 이 수천 석 쌀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싹 없어졌다. 헌데 쌀을 지고 오가는 자 하나같이 얼굴이 엉망이고, 팔이 잘린 자 다리가 부러진 자, 온몸에 칼자국이고, 핏물이 젖어 엉겨 붙었으며, 얼굴이 온통 촛농 자국 같은 것이 줄줄 그려졌고, 옷은 너덜너덜 누더기이고, 비린내 더런내가 코를 찔렀다.
허다한 사람들이 작대기를 짚고 풀 포대를 옆에 끼고, 딱 신묘 안에 지옥에서 뛰쳐나온 원귀 꼴인데 :그나마 조금 보기 괜찮은 자라고 해도 거지꼴에 지나지 않았다. 쌀을 받다 서로 빼앗는데, 이때는 친척이고 친구고 상관하지 않으며, 강자는 받고 갔다가 다시 와서 또 받아가고, 약자는 온종일 한 되도 얻지 못했다.
초4일(10日 중 아흐레째),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도로에 쌓인 시체들이 빗물에 젖어 불기 시작했다. 시퍼런 살가죽은 몽고북 가죽처럼 되었으며, 속의 혈육 또한 썩어들어갔다. 악취가 코를 찔렀고, 거기다 햇빛에 굽히자, 냄새는 더욱 심해졌다. 전후좌우 곳곳에 시체를 불살랐고, 그 연기로 실내까지 자욱해져 안개가 낀 듯했으며, 비린내가 100리까지 뻗어갔다. 이곳 백만 생명이, 하루아침에 횡사를 하니, 아마 설령 천지 귀신이라도,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초5일(10日 중 10日째), 깊숙이 숨었던 사람들이 드디어 살그머니 나오기 시작하니, 매 상봉마다, 죄다 눈물 흘리며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다섯 사람은 설령 조금 안정을 되찾긴 하였으나, 그래도 감히 집 안에 오래 있지 못하고, 새벽에 일어나 일찌감치 밥을 먹고, 바로 야외로 나갔다. 옷차림과 꾸민 행색은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난리 틈을 타 오가며 양식을 터는 자, 아마도 수십 패거리 아래는 아닐 것이다.
비록 창칼만 안 들었지, 공갈 협박하고, 재물을 갈취하고, 그때마다 몽둥이에 맞아 죽는 자가 생기곤 했다. 어쩌다 부녀자를 만나면, 희롱하고 강탈하고 겁탈을 하곤 하니, 처음엔 이것이 청나라 군대인지 양주성 방어병인지 난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날, 큰형님이 결국 부상이 심하여서, 칼에 베인 상처가 터져서 죽었다. 비통!하구나. 말할 수 없이 괴롭다. 돌이켜보니, 우리가 처음 피난할 당시에, 형님 아우 조카 나 아내 자식놈 모두 여덟 사람, 지금 고작 세 사람이 남았다. 처제들은 셈에 넣지도 않았다. 양주사람 중에 우리집 같은 집이 도대체 몇이던가? 여러 번을 죽을 뻔,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다행이겠건만 죽지를 않았다. 나와 아내처럼 요행히 살아남은 자 극소수이리라. 그러나 이 백만 천만 고뇌를 어이하리!
4월25일부터 시작하여 5월5일까지, 총 10일. 그동안 직접 겪은 바를, 직접 눈으로 본 바를, 고대로 이렇게 붓 가는 대로 적는다. 멀리 풍문에 들려오는 소리는 적지 않았음이라. 후세 사람이 다행히 태평세월에 태어나, 난리 걱정 없이 사는 복을 누린다면 ;스스로 갈고 성찰하지 아니하고, 무턱대고 삶을 낭비하는 자, 이것을 읽고 마땅히 두렵게 여겨 경계할지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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