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3일(금) 오후8시~9:30 법문
경전의 가르침과 수행은 같은가, 다른가?
정사유(正思惟, samma sankhappa, 좋은 의도)란 무엇인가?
①내려놓기(let go): 몸과 마음을 내려놓으라. 잡고 있는 것-집착, 기억, 상처를 내려놓으라.
②자비와 친절(compassion, kindness): 당신의 몸과 마음에 친절하라.
③온화하고 유연하게(gentleness):억지로 하지 말고, 인내를 가져라. 기다려 주라.
(참고) 아래 각묵스님의 번역과 아잔브람스님의 이해방식을 비교해보고 그 맛을 느껴주세요.
대념처경(D22)에 나오는 바른 사유(正思惟)에 대한 정의:
"비구들이여, 바른 사유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出離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에 대한 사유, 이를 일러 바른 사유라 한다." (각묵스님 번역)
<우화>당나귀는 어떻게 해서 당근을 먹을 수 있을까?
당나귀는 고집 센 동물이라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당나귀는 당근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으로 당나귀를 움직일 수 있다. 주인이 당나귀 목에다 줄로서 막대기를 묶어 당나귀 머리 위까지 오게 한다. 그리고는 그 막대기에다 실을 묶고 그 끝에다 당근을 매단다. 그러면 당나귀 눈앞에 당근이 어른거리게 된다. 당근을 본 당나귀는 먹으려고 자꾸 목을 앞으로 뺀다. 그러면 먹을 앞으로 뺀 만큼 당근이 멀어진다. 따라서 당나귀는 자꾸만 몸을 앞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제 걷기 시작한 당나귀 당근을 먹을 욕심으로 더 빨리 달리게 된다. 그러나 당근은 항상 눈앞에 있을 뿐 먹을 순 없다. 욕심에 눈 먼 당나귀는 눈앞의 당근을 먹을 수 없다. 타는 목마름으로 당근을 향해 달려가지만 달려간 만큼 당근은 멀어진다. 갈망에 의해 이끌려지는 중생의 삶이다. 그러면 어떻게 당근을 먹을 수 있을까?
불자 당나귀는 내려놓고 멈추면 이익이 있다는 가르침을 기억해낸다. 멈추면 얻는다는 것을 알았다. 달리다가 갑자기 멈춘다. 눈앞에 있던 당근이 순간 휙 앞으로 날아간다. ‘아차, 당근을 놓쳤구나!’ 하는 사이 그대로 기다린다면 앞으로 밀려갔던 당근이 되돌아온다. 그리고 입만 벌리고 있으면 입안으로 쏙 들어온다. 콱 맛있게 씹어 먹는다. 이것이 불자 당나귀가 내려놓음으로서 당근을 먹는 소식이다. 그대들은 어떤가? 내려놓으면 선정과 해탈이라는 최고의 당근을 먹을 수 있다. 몸과 마음을 그대로 내려놓으라. 그리고 충분히 기다려주라. 당근이 저절로 입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연꽃의 비유>
명상을 닦는다는 것은 햇빛이 연꽃을 비출 때 연꽃잎이 차례로 벌어지는 것과 같다. 몸과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고 편안히 앉는다. 그러면 연꽃을 피울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호흡에 주의를 준다. 이것은 햇빛이 비쳐오는 것과 같다. 호흡이 미묘해지면서 시간과 공간의 느낌이나 몸의 존재감이 서서히 사라진다. 이제 미묘한 호흡, 저절로 이루어지는 호흡, 그리고 무한한 공간에 한 점으로 느껴지는 호흡만 남는다. 이제는 감미롭고 아름다운 호흡(delightful breathing)의 단계에 접어든다. 거기에서 찬란한 빛이 나타난다. 명상 중에 나타나는 빛은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것을 니밋따, nimitta, sign이라 한다)이라, 신비한 체험이다. 아침햇빛이 하얀 연꽃 봉우리를 비치면 연꽃의 맨 바깥, 거칠거칠한 부분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속에 있던 하얗고 부드러운 한 겹의 꽃잎이 벌어진다. 그리고 햇빛이 또 안쪽을 비추면 그 속의 더 부드럽고 섬세한 연꽃잎이 벌어진다. 또 그 안쪽 꽃잎, 또 안쪽 연잎...이런 식으로 가장 중심의 꽃잎이 벌어진다. 그러면 완전한 개화이다. 이것은 비유이다. 연꽃봉오리의 제일 바깥 쪽 외피는 몸이다. 제일 거친 부분이다. 그 다음 꽃잎은 초선정이다. 초선정(1st Jhana)에서 5감(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몸의 촉감을 느끼는 작용)이 사라진다. 의식만 밝고 명료하게 남는다. 그리고 지극한 고요와 평화, 기쁨과 행복이 있다. 그 안쪽의 미묘한 꽃잎은 제2선정이다. 여기서는 의지가 사라진다. 고요함과 평화, 기쁨과 행복감이 더 미묘해진다. 그 안쪽에 더 섬세한 꽃잎이 열린다. 제3선정이다. 지복감만 남는다. 빛나는 의식이 독존한다. 또 그 안에서 최고로 미묘한 꽃잎이 벌어진다. 제4선정이다. 평정한 마음, 부동의 금강과 같은 경지에 든다. 그리고 사선정에서 명상의 대상을 바꾸기만 하면 4무색 성취(Arupa samapatti)을 경험하게 된다. 선정의 결과는 무엇인가? 해탈과 열반이다. 이것이 완전한 개화이다. 놀라운 축복이다. 불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이다. 그래서 티베트 만트라 가운데 ‘옴 마니 반메 훔,Om Mani Padme Hum’이 있다. ‘연꽃 속에 보물이여’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몸과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놀라운 보물인 열반을누리시라. 모두 당신 것이다.
*5월24일(토) 오전10시~11:30 법문
위빠사나 명상을 통찰명상 Insight Meditation이라 한다. 고요함과 통찰 Calm & Insight는 함께 가야한다. 고요해질수록 맑아지고 밝아져 더 많이 보인다. 무한 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가 이렇게 이야기 했다. 인간이 무한 한 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The only way to understand infinity is to see the stupidity of human nature. 인간의 어리석음은 무한하다. 인간이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작고 무력한지 이해한다는 말이다. 특히 자신의 욕구불만과 번뇌를 대면할 때 인간은 얼마나 무지하고 무력한가? 몸과 마음을 내려놓으면 고요해진다. 그러면 자신의 내면을 더 잘, 더 많이 보게 된다. 이것이 자기를 내려놓는 길이요, 자기를 아는 길이면서, 자기에게서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소유자로 살기 보다는 방문객으로 살아라. Live like a visitor rather than an owner.>
저는 보디야나 사원(호주 퍼쓰Perth에 있는 아잔브람 스님의 절)의 주지입니다. 주지로서 할 일이 번잡하여 쉴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나도 방문객처럼 살아보자 하고 일주일 동안 주지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도량에 치울 것이 보여도 ‘흠, 난 뭐 주지가 아니라, 방문객이니까, 다른 스님들이 알아서 치우겠지.’ 내버려 둡니다. 신도들이 찾아와서 주지를 찾아도 ‘아, 주지스님은 잠깐 외출 중입니다.’ 이렇게 하니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홀로 있을 시간도 많아졌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오너로 살기 보다는 방문객으로 살아보세요. 당신의 몸도 소유하려하지 말고 잠깐 동안 몸을 방문하는 중이라고 생각하세요.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을 어찌어찌 해보려고 하지 말고 가족을 잠시 방문하는 중이라고 생각하세요. 이 세상도 마찬가지예요. 이 세상을 잠시 여행하러 와서 방문하는 중이라고 여기세요. 그러면 뭐, 크게 신경 쓰거나 상심할 필요가 있겠어요. 휠씬 여유로운 마음으로 더 관대해져서, 더 잘 용서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원하는 것에서 옵니다. Suffering is wanting something the world can not give you.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영원한 것, 완벽한 것, 항상 하기를 바라는 것, 오래도록 가지길 원하는 것,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안 됩니다. 세상이 그것을 줄 수 없어요. 다른 사람도 모두 그걸 원할 텐데, 세상이 그 요구를 다 들어주려면 세상이 지금 보다 엄청나게 커지거나 무한하게 바꾸어야 하겠죠. 그건 불가능해요.
<올챙이의 비유>
올챙이가 연못에 살았습니다. 올챙이는 그 연못이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이었죠. 올챙이는 그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올챙이가 평생을 물속에 살아도 물을 알 수는 없습니다. 올챙이가 아무리 오래도록 살고 멀리 까지 헤엄쳐보지만 물을 떠날 수 없으니, 물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영역내부에 사는 존재는 그 영역의 한계를 벗어나 자기가 속해 있던 영역을 되돌아 바라볼 때만 그 영역이 어떠한지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올챙이가 자라나서 개구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풀쩍 뛰어 연못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연못을 바라보니 이제야 ‘물이란 저런 것이구나.’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통찰지혜도 그렇게 옵니다. 여러분이 선정에 들었다가 나왔을 때(出定출정) 반조해봅니다.
어떤 것이 사라졌는가? 아까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것이 무엇인가?
그러면 초선정에 들었다가 나와서는 이렇게 탁, 하고 알아집니다. 아하, 5감이 사라졌었구나. 의식만 남았었구나. 그러니 오감은 항상 있는 게 아니고, 없어질 수 있는 무상한 것이구나. 제행무상. 오감은 없어질 수도 있으나 ‘나’가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며, ‘나의 자아’도 아니다.
2선정에 들었다 나와서는 이렇게 반조합니다. ‘아하, 의지-내 뜻, 내 맘대로 한다는 것-이 사라졌었구나. 의지라는 것, 자유의지라는 것, 자유선택이라는 것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닌 무상한 것이구나. 의지력will power이 센 사람은 에고가 강한 사람입니다. 의지, 그것이 윤회를 만들어가는 원인제공자입니다. 그런데 의지, 그거 별 거 아닌 겁니다. 의지는 ‘나’가 아니며, ‘나의 것’도 아니며, ‘나의 자아’도 아닙니다. 이렇게 견고해 보이던 것, 자명해 보이던 것들, 나의 정체성이라 여겨졌던 것들이 하나하나씩 해체되어 떨어져 나갑니다. 시원해집니다. 통쾌해집니다. 가을바람에 날리는 명주실처럼 가벼워집니다.
첫댓글 Veritas lux mea 眞理는 나의 빛,
The truth will set you free 眞理를 알지니 眞理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satyam eva jayate 眞理가 승리하리라.
Om Mani padme Hum
Om Shanti ! Shanti ! Shanti !
마치 아잔브람 스남의 친절하게 해주시는 법문을 그대로 듣고 있는듯.. 더 명료하게
자상하게 그 가르침 다시 일러 주시니... 동참의 아쉬움이 봄눈 녹듯 합니다. 스승님 감사합나다. 문아 합장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