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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는 사제들을 포함한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 '사도들의 제비뽑기'라는 것이 유행했던 모양이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성경>을 들고 아무 데나 펼쳐서 발견한 구절을 판단의 자료로 삼는 것이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도 이런 사도들의 제비뽑기로 자신의 생애를 결정했다. 보나벤투라의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 대전기>에 따르면, 프란체스코는 젊은 시절의 향락을 버리고 회심해서 프란체스코회를 세우기 전에 하느님이 자신에게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산 니콜로 성당에 가서 복음서를 세 번 펼쳐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찾은 구절이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나서 나를 따라오너라"(<마태오>19:21)와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지팡이나 식량자루나 빵이나 돈은 물론, 여벌 내의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루가>9:3)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오>16:24)라는 예수의 말이었다. 아무렇게나 펼쳐본 복음서의 구절들이 모두 청빈하게 자신을 따르라는 예수의 말이었고, 그래서 프란체스코는 그 구절들을 회칙으로 삼아 '작은 형제의 모임'을 창립했다. - <서얼단상>고종석
멩이 생각 : 제비뽑기에 대해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있었다. 그것이 권력 독점을 막고 평등을 실현시키는 가장 좋은 길이고, 또 오만에 빠지지 않고, 어떤 길이든 신 혹은 자연의 섭리가 마련한 길을 따라가는 태도가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인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투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에 있었던 것 같다. 주역이라는 것도 결국 제비뽑기와 같은 원리다. 우리는 우연이라 생각하지만 알만한 사람은 안다. 세상 모든 것이 필연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