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열/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법무석사과정 5기
“원고 황상기, 이선원에 대하여 한 각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을 취소한다.”
인사를 마치고 받은 첫 번째 서류는,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는 내용을 담은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을 취소한다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판결문”이었다.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들의 눈물, 그들과 함께한 이들의 투쟁이 만들어낸
판결문을 보며, 참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던 것 같다. ‘끈질긴 싸움으로 많은 것들이 변화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부터,
‘앞으로도 이러한 결과를 받아들 수 있을까’하는 비관적인 생각까지.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들의 싸움에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여러 자리에서 노동자의 편에 서는 척 ‘이야기’하는 것은 실로 쉬웠으나,
짧은 기간이나마 관련된 ‘일’을 하며 노동자들의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사건 상병과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는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실무수습에 참여한 2주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일은 “재해경위서” 작성이었다. 피해를 입은 노동자 한 분씩을 맡아
관련 서류들과 연구들을 접했다. 전문적인 내용이 많아 쉽게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지만 최선을 다해 내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상담 자료를 읽으며 노동자가 일했던 환경 속으로 들어가 보았고, 관련 연구를 읽으며 그 환경이 어떤 위험성을
지녔는지를 파악했고, 진료 기록을 보며 그 위험성이 만들어낸 병마를 확인했다. 비록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나,
어느덧 우리 모두는 그들 옆에 서 있었다. 생생하게 자료에 담겨 있는 그들의 삶을 건조한 문장으로 한 줄 한 줄 재해경위서에
옮기며, 문체 때문에 너무나 사무적으로 그들의 상황이 전달되지 않도록, 온전하게 전달되도록 노력했다.
처음 접해보는 일들이라 너무나 서툴렀고, 그래서 활동가님들의 여러 조언과 지도를 통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던 점은
매우 다행이었다.
“모든 노동자들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지혜롭고 현명한 판결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둘째 주에는 부산에서 반달 공동행동을 함께 했다. 얼마나 더 죽어야 하냐는 절규를 담은 현수막이 지하철 역사에 내걸렸다.
노동자들의 얼굴과 외침 앞에 사람들이 멈춰 섰다. 다가가 사안을 말씀드리고 “탄원서” 서명을 부탁드렸다.
탄원서에는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유해 물질에 노출된 이들이 걸린 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해달라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요구가 담겨 있었다. 누군가는 우리에게 욕설을 하며 지나갔고, 누군가는 곰곰이 설명을 듣고
서명을 위해 테이블로 향했다. 처음 해보는 선전전인 까닭에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사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기에 어색함을 이유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더 많은 이들이 피해 노동자들의 손을 잡아줄 때 절망적이었던 세상이 비로소 긍정적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동행동이 진행되는 두 시간 남짓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여러 시민들에게서 소중한 마음을 받았다.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수습 마지막 날,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이윤성님의 재판 결과를 담은 “또 하나의 판결문”을 마주했다.
판결문은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의 염원과는 정반대로, 이윤성님의 질병은 산업재해로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고 있었다.
한숨을 쉬게 했고, 눈물이 나게 했다. 여러 번 보아온 결과였겠지만, 이를 마주할 때의 감정이 쉬이 무뎌질 수는 없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나마 활동가들을 보아온 우리 역시 무겁고 답답한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수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꼈던
2주일을 기쁜 소식과 함께 마치고 싶었지만, 앞으로 갈 길은 여전히 ‘가시밭길’이나 마찬가지고,
세상은 쉽게 ‘동화같은 끝맺음’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판결문, 재해경위서, 탄원서, 그리고 “또 하나의 판결문”.
열흘 남짓한 시간동안 네 가지의 서류들과 함께 부대끼던 시간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즐겁기만 한 시간도, 행복하기만 한 시간도, 비장하기만 한 시간도, 절망적이기만 한 시간도 아니었다.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연대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어떤 민중가요의 가사처럼, ‘함께하는 사람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권리를 찾는 길은 ‘어쩔 수 없이 정말 추운’ 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미숙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리던 시민들, 어려운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활동가들을 보며,
비록 매서운 추위는 어찌할 수 없더라도, 옆에서 노동자들의 손을 잡고 함께 추위에 맞서주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무수습생들을 포함한 더 많은 자원활동가들이 <반올림>의 문을 두드릴 것이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네 가지의 서류들을 마주할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이 이 서류들을 접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러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손을 잡을 때, 그리고 그들의 권리를 위한 외침을 함께할 때,
따스한 바람을 가로막고 있는 저 벽도 언젠가 무너질 테니까.
* 이번 실무수습은 서울대 로스쿨 산소통 학생 다섯 명과 연세대 로스쿨 한 명이
8월 12일(월)부터 8월 24일(금)까지 2주 동안 반올림 활동에 결합해 반올림 소송의 쟁점 학습,
반달공동행동 참여, 재해경위서 작성 등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