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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 바라밀, 우리도 부처님 같이... 불자님, 이제 우리불교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새로 개척해야 합니다. 지금의 반붓다적인 교단의 행태로는, 무지한 지도자들의 행태로는, 추종자로 전락한 재가자들의 행태로는 2천년간 민족사의 등불이 되어온 한국불교는 머지않아 이 강토에서 쇠망할 것입니다. 불교의 쇠망은 곧 민족사의 쇠망이 아닙니까. 불자님, 이제 우리불교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새로 개척해야 합니다. _()_ 김 재영 박사의 현장불교 50년 붓다 스터디 "만인견성-만인해탈" 「화엄코리아」출간 - 온갖 잡것들(雜華)이 함께 깨닫는다 - ‘까맣게 망각해버린 화엄불국토의 꿈․열정 세계를 비추는 우리시대의 「화엄코리아」로 살려낸다’ (김재영 저 / 동쪽나라) [이 책의 소개] Ⅰ. 이 글의 취지 1. 이 글의 성격 1) 이 글은 많은 사람들(bahujana)들이 둘러앉아 함께 하는 부처님 공부, 붓다-스터디(Buddha-study)의 학습자료, Text로 쓴 것이다. 2) 이 글은 학문적 연구와 실천적 체험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일종의 연구서-논서(論書), 또는 강의록으로 쓴 것이다. 3) 따라서 이 글은 철저하게 붓다의 직접적인 가르침, 곧 초기경전에 근거하고, 불교학적 논의에 입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초기불교를 주장하지 않는다. ‘모든 불교가 본질적으로 대승이다.’라는 기본적 입장에서, 초기․부파․대승․중국선(禪)불교를 ‘화엄(華嚴)’이라는 광활한 광장에서 한마당으로 용해시켜, 우리시대 ‘우리들 불교’로 새롭게 창안해내고 있다. ‘화엄(華嚴)코리아’라고 했지만, 이것은 화엄경 사상을 천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온갖 잡것들(雜華)들이 한데 어우러져 함께 깨닫는 만인견성-만인해탈’의 불교 본연의 이상(理想)을 화엄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4) 이 글은 철저하게 비판적 성찰과 희망적 개척의 관점에서 전개하고 있다. 붓다 석가모니께서 피땀 흘리시며 몸소 해내신 ‘붓다의 불교’에 근거하여, 2천 7백년 불교사와 우리불교의 현실을 냉철하게 비판하고, 그 기초 위에서 폭력과 집단살육의 공황 속에서 황폐해져가고 있는 우리시대의 지구촌을 살려내려는 화엄불국토-화엄코리아의 꿈과 열정을 구체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5) 이 글은 시종일관 출가우월주의(出家優越主義)를 문제 삼고 그 출구를 찾고 있다. 우리불교, 세계불교가 오늘날 이 긴박한 세계사적 위기 속에서 아무 역할도 못하고 변방의 주변종교로 밀려난 것은 기본적으로 출가우월이라는 비(非)붓다적 왜곡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부처님도 함께 둘러(pari) 앉아(sā) 함께 토론하고 합의하는(sammannati) 불교 본연의 빠리사적(Parisā的) 전통, 대평등(大平等)의 이념을 상실하고, 지금 절대다수의 우리 불교도는 한갓 단순 추종자로 전락하여 무의미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수많은 시민들, 동포들이 불교를 버리고 떠나고 있다. 한국불교도 ‘일천만 불교도의 신화’가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 엄중한 현실 앞에 직면하고 있다. 민중을 잃고, 대중을 잃고 무슨 수로 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우리불교가 살아날 수 있겠는가? 인도불교의 쇠망, 실크로드 불교의 쇠망이 남의 일일까? ‘삼보비방’이니 ‘승보비방’이니 하는 법에도 없는 오기를 극복하고, 출가-재가가 서로 먼저 인사하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북돋우며, 한데 둘러앉아 토론하고 합의하고 함께 울력하는 불교 본연의 大빠리사 운동으로 개척해갈 때, 비로소 희망의 출구는 열려오는 것이다. 2. 이 글의 주제, 희망의 키-워드 1) 온갖 잡것들(雜華)들이 한데 어우러져 함께 깨닫는 ‘만인견성-만인해탈의 화엄불국토, 화엄코리아’가 이 글의 주제다. 2) 'Buddha Sati Parisā로 따뜻한 연민(Buddha) 고요한 관찰(Sati) 자유로운 토론(Parisā)으로 현장직시와 대중적 합의, 열정적 실천의 불교적 합리주의(合理主義)로- ’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새로운 개척운동의 키-워드이다. 우리불교 살려내고, 우리 동포들 살려내는 희망의 키-워드다. 따뜻한 연민에 기초하는 관찰과 토론의 합리주의가 불교의 대전제(大前提)다. 붓다 석가모니께서 몸소 살아내신 ‘붓다의 불교’, 그 대전제다. ‘따뜻한 연민, 고요한 관찰, 자유로운 토론- ’ 이것이라야 지금 위기의 우리불교 살려낼 수 있다. 아니, 위기의 지구촌 동포들 살려낼 수 있다. 이것은 ‘불교’ 아니다. ‘불교’를 넘어서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게임-룰(Game-rule)'이다. 좌파․우파, 기독교․이슬람교, 흑․백, 금수저․흙수저, 남․북 함께 살려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Ⅱ. 이 글의 개요 희망적 파괴와「우리들 불교」의 개척 1. 허상(虛像)의 늪에 빠진 ‘빛나는 불교’ 1) 이제 우리 한국불교는 세계사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세계로 향하여 나가야 하고, 그 이상(理想)은 이 땅에, 이 세속현장에 ‘화엄불국토’를 실현하는 것이다. 까맣게 망각해버린 우리 선대들의 ‘화엄불국토’의 꿈과 열정을 우리시대와 세계를 비추는 한국불교로 다시 드러낼 때 ‘화엄코리아’가 되는 것이다. 2) 우리는 철저하게 기성불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전제로 하고 있다. 「부파․대승․중국 선(禪)불교」를 대변하는 ‘무아․공․마음’은 수천 수백 년 전 우리 선대들 시대의 요구에 의하여 창안된 사상이다. 우리 선대들은 이 사상으로 훌륭하게 그 시대를 제도하였다. 그러나 수천 수백 년이 지나면서 이 사상들은 이미 용어가 되고 개념이 되고 고정관념이 되고 허상(虛像)이 되어 생명력을 상실하였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이 허구적 사상들을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절대적 진리’, ‘불멸(不滅)의 법인(法印)’으로 집착하며 한 발짝도 못나가고 있다. 오로지 거기 매달려 해석하고 머리 굴리는 데 열중하고 있다. 해탈, 반야바라밀, 보현행원, 직지견성을 머리로 입으로 다하고 있다. 중생구제, 정토장엄, 이론으로 말로 다하고 있다. 이렇게 지금 우리는 허상에 빠져 눈앞 현실도 보지 못한다. 빈곤과 질병, 폭력으로 수없이 죽어가는 사람들 보고, ‘공이다, 본래청정이다, 고통도 죽음도 본래 없는 것이다.’, '본성을 깨달으면 만고광명이다.’, 이렇게 헛소리 하고 있다. ‘고통이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외친다고 눈앞의 이 첩첩한 고통이 없는 것이 되는가? 틀고 앉아 마음 찾는다고 동포들의 이 절절한 고통이 해결되는가? 그래서 불교-불교도는 이 치열한 역사의 현장, 인류 고통의 현장에서 아무 역할도 못하고, 수많은 민중들이 이 무기력한 불교에 등 돌리고 떠나가고 있다. 한국불교, 아니 세계불교가 날로 망각돼가고 있다. 민중들의 맹목적 기복(祈福)으로 우상화 되고, 학자들의 고매한 사상, 학문으로 박제화(剝製化) 되어, ‘빛나는 우리 불교’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우리들 불교」, 철저하게「붓다의 불교」에 기초하다 4) 갈아엎고 새 씨앗을 뿌려야 할 때다. 이제 이 묵은 땅(大地)을 갈아엎고 새로운 우리시대「우리들 불교」를 열어가야 할 때다. 부파, 대승, 중국 선(禪)불교의 시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우리시대의 동포들을 구제할「우리들 불교」개척할 때다. 「우리들 불교」의 대의(大義)는 거룩한 붓다의 가르침을 좇아서, ‘온갖 잡것들(雜華)들이 함께 깨닫는 만인견성 - 만인해탈운동’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5) 그러나「우리들 불교」는 누구들의 특별한 주장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의 일시적 감흥이나 자의(恣意)대로 하려는 것 아니다. 몇몇 뛰어난 도인(道人)들의 신비적 체험을 추종하려는 것 아니다. 새로운 종파나 신(新)대승운동을 벌이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만 불교 하려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불교, 지금 우리 동포들이 요구하는 현장의 불교, 삶의 불교를 하려는 것이다. ‘부파다.’ ‘대승이다.’ ‘남방이다.’ ‘북방이다.’ ‘선이다.’ ‘교다.’- , 무엇이란 이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름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저「우리들 불교」라 이름 하는 것이다. 6) 따라서「우리들 불교」는 철저하게 ‘붓다 석가모니’를 대전제로 삼고 있다. 우리는 철저하게 붓다께서 몸소 하신「붓다의 불교」,「본래불교」를 전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초기경전」속에 매장돼 있는 붓다의 생생한 삶을 발굴해서, 그것에 근거하여 ‘만인견성의 화엄불국토’를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붓다 망각, 붓다 석가모니의 삶(Buddha-cariya, 佛本行) 망각’, ‘단순 소박한 사제팔정도의 삶 망각’, ‘초기경전 망각’- , 이것이 오늘 우리불교를 이 지경으로 몰고간 가장 큰 원인으로서 신랄하게 비판되고 있다. 7) 전법고행 45년, 붓다의 삶이 최선의 Dhamma다. 순간순간 피땀 흘리는 붓다의 현실적인 몸(生身) 그대로, 삶 그대로 불멸의 법신(法身)이다. 법신 비로자나불이 따로 있는 것 아니다. 붓다의 몸, 붓다의 삶을 떠나 반야바라밀이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우리가 만분의 일 부처님같이 살아가려고 애쓸 때, 우리 스스로 법신이 되고, 이러한 삶 자체가 대각(大覺)이고 견성이다. 대각, 견성이 따로 있는 것 아니다. 그래서 만인견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허구가 되버린 (no more than a fiction)' 아바타 부처님(化身佛)을 타파하고, 피땀 흘리는 인간 붓다의 현장에 서서 이 ’화엄코리아‘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3.「우리들 불교」, 철저하게 민중적 토론과 합의에 기초하다 8) 불교는 처음부터 민중적 토론과 합의의 과정이다. 불교는 신(神)의 계시가 아니라 전승(傳承, Āgama)이다. 전승이란 많은 사람들(bahujana), 시민들, 동포들의 토론(parisā)과 합의(sammata/삼마따)를 전제로 한다. 불교경전 자체가 많은 사람들의 합송(合誦, saṅgitī), 합의(合議)를 통하여 결집된 것이다. 깨달음 또한 민중적 토론과 합의의 과정이다. sambodhi/삼보디(正覺)의 ‘sam', sammata/삼마따의 ‘sam'은 '바른(正, right)'인 동시에 ’함께(together)'다. 바른 깨달음은 곧 만인이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견성, 만인견성이다. 9) 붓다의 깨달음도 이러한 민중적 합의의 산물이다. 부처님 혼자 힘으로 깨달은 것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깨달음, 집단지성(集團知性)을 전제로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대각(大覺, Mahā-bodhi)이다. 독각(獨覺) 아니다. 불교의 깨달음은 이렇게 처음부터 사회적, 민중적 각성운동으로 추구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민중적 각성을 전제할 때 비로소 깨달음은 역사적 정당성과 사회적 효용성을 담보한다. 부처님 홀로 깨달아서 이 세상 문제 해결되는 것 아니다. 도인(道人) 혼자, 나 혼자 깨달아서 우리시대의 죽음, 고통 해결되는 것 아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여전히 십 년 이십 년 홀로 깨닫기에 매달려 있다. 그래서 참으로 바른 정각자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10) 따라서「우리들 불교」는 어떤 형태의 차별적 우월주의, 선민(選民)주의도 거부한다. 우리는 마땅히 출가승들을 존중하고 공양하지만, 세속의 삶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이 우월하고 해탈 견성의 바른 길이라는 낡은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몇몇 상근기의 도인이 나타나서 우리를 구제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붓다의 본의(本義)에 어긋나는 사견(邪見)이다. 스승은 우리들과 함께 가는 좋은 벗(善友, kalyānamitta)이며 동행자일 뿐이다. 어떤 경우, 어떤 명목으로도 우월적 개인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수행이 부족한 이 중생적 상황을 좋은 조건으로 삼아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마을에서 절에서, 함께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고 합의하고 조그맣게 조그맣게 사회적 헌신의 삶을 사는 것으로 가장 뛰어난 만인견성의 길로 삼는다. 이 험한 세파 속에서 무거운 세속의 짐 짊어지고 나누고 섬기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이 땅의 작은 동포들을 가장 거룩한 성중(聖衆)들로 받들어 귀의하며 불교운동의 당당주역으로 높이 일으켜 세운다. ‘중생 곧 부처’가 이런 것 아닌가? 4. ‘관찰(sati)과 토론(parisā)', 이것이 불교다 11) ‘붓다(Buddha) 사띠(Sati) 빠리사(Parisā)’ 이것이 우리들의 키–워드(key–word)다. ‘우리도 부처님같이-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Buddha) 들숨 날숨 헤아리며 눈앞 현실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Sati) 평등공동체 우리 빠리사에 둘러(pari) 앉아(sā) 함께 토론하고 공감 합의하고 피땀 흘리며 울력하여 전법개척의 길 가고 또 가고 (Parisā) - ’ 이것이 우리들이 추구하는「만인견성-우리들 불교」의 실천전략이다. 이것이 우리들이 추구하는 ‘만인견성-화엄코리아’의 건국전략이다. ‘관찰(sati)과 토론(parisā)', 이것이 불교다. 이것이 붓다께서 확립하신 불교의 근본대도(根本大道)이다. 이것 벗어나면 ‘불교 아닌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12) ‘눈앞 현실, 눈앞 상황 있는 그대로 지켜보기 허리 곧게 펴고 들숨 날숨 헤아리며 마음 집중하여 신(身)․수(受)․심(心)․법(法)의 사념처(四念處)를 통하여, 눈앞 현실 안으로 밖으로 안팎으로 대면하여,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 것이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바르게 아는 것(正念正知, sati-sampajaññā) - ’ 이것이 사띠다. ‘마음 지켜보기’, 곧 관찰이다. 붓다의 관찰법이다. 흔히 ‘통찰이다.’ ‘반야다.’ ‘반야바라밀이다.’ 하면서 신비화하지만, 그럴 것 없다. ‘관찰’로 족하다. 허리 곧게 펴고 들숨 날숨 헤아리며, ‘이것은, 이 상황은, 이 고통은 끊임없이 변하고 사라지는 것’, 이렇게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 , 사띠는 이렇게 단순명료하고 일상적이다. 이것으로 족하다. 이 속에 다 있다. 위빳사나와 사마타, 지관(止觀), 정혜(定慧), 삼매와 지혜/반야- , 이 단순한 사띠 과정 속에서 다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이 사띠 한 과정이다. ‘지(止)다.’ ‘관(觀)이다.’ ‘삼매다.’ ‘반야다.’ ‘돈(頓)이다.’ ‘점(漸)이다.’- , 이렇게 구분할 것이 아예 없는 것이다. 평지풍파다. 13) 「기원전 545년경, 붓다 80세, 열반의 땅 구시나가라로 가는 길 죽음을 목전에 두고, 붓다 석가모니께서 이렇게 회고하신다. “아난다여, 나는 전에 수백 개의 캇띠야 빠리사(khattiya–parisā, 전사/戰士 빠리사/공동체)를 만나러 가서, 거기 함께 둘러앉았고, 대화하고 토론하였음을 알고 있느니라. 아난다여, 나는 전에 수백 개의 브라만 빠리사(brāhmana–parisā, 성직자/지식인 빠리사/공동체)를 만나러 가서 … 수백 개의 가하빠띠 빠리사(gahapati–parisā, 거사/상인 기업가 빠리사/공동체)를 만나러 가서 … 수백 개의 사마나 빠리사(samaṅa–parisā, 사문/출가유행자 빠리사/공동체)를 만나러 가서, 거기 함께 둘러앉았고, 대화하고 토론하였음을 알고 있느니라.” (D Ⅱ p.109 ; 디가니까야 16, 대반열반경 33, 21–23) 불교는 이렇게 한 마디로 빠리사(parisā)다. 깨달음은 이렇게 한 마디로 빠리사를 통한 민중적, 시민적 대화와 토론, 합의의 과정이며 민중적, 시민적 자각이다. 붓다 석가모니께서도 몸소 찾아가 둘러(pari) 앉아(sā), 서로 먼저 인사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이 평등공동체 빠리사(parisā)가 불교운동의 중심이며 주체다. 전사(戰士, 武士)들․지식인들(바라문)․상인 기업가들(居士)- , 이 수백 수천의 재가(在家)빠리사 - 시민빠리사들이 불교운동의 주역이며 개척자들이다. 14) 위, 아래 없이, 신분적 차별 없이, 함께 둘러앉아 대화하고 토론하고 합의하고 개척해 가는 빠리사의 이 자유분방한 자발적 동기와 목숨 걸고 수레를 몰아 황량한 벌판 달려가는 상인(商人)들의 거친 개척정신이 2천 7백년 불교사의 동력이며, 광막한 실크-로드 대륙에 기적 같은 불교세계를 이룩해낸 불교적 에너지의 원천이다.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의 사부대중(cataso-parisā)도 이 빠리사 정신의 한 영역이다. 함께 둘러앉아 서로 먼저 인사하고, 자유롭게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이 사부대중의 본분이다. ‘내가 삼보다, 내게 먼저 절하라- ’, 이것은 불교사에 일찍 없는 일탈이다. 부처님도 먼저 찾아가 따뜻한 미소로 인사하신다. 기원전 544년 마지막 돌아가시는 날, 급한 병에 걸려 피를 쏟으면서도 구시나가라 숲속 외롭고 궁핍한 동포들 찾아가 인사하고, “모든 생명들이여, 부디 행복하소서- ”, 이렇게 축복하신다. 그래서 부처님이고 삼보다. 5. 시급히 불교적 합리주의를 확립하는 것, 이것이 화엄코리아 개척의 유일한 출구다 15) ‘ “무아 ․ 공 ․ 자성” 등 일체의 고집을 벗어던지고 들숨날숨 헤아리며 눈앞 현실문제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함께 둘러앉아 자유롭게 대화하고 토론하고 합의하고 대중울력으로 힘 모아서 전법 개척하고 이 세상을 정의롭게 평화롭게 변화시켜가고- ’ 이것이 불교적 합리주의다. 이것이 붓다께서 확립하신 불교운동의 바른 길이다. 이 뛰어난 불교적 합리주의를 상실하고, 고집과 허상에 빠지고, 신비한 수행법에 빠지고, 출가우월주의에 빠지고, 절대다수의 재가들 민중들은 아웃-사이더로 소외되고- , 이렇게 해서 오늘 우리불교가 동력을 상실하고 세계역사의 현장으로부터 밀려나고 있다. 이 위급한 인류사적 상황에서 아무 역할도 못하고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16)「우리도 부처님같이- 세상에 대한 뜨거운 연민으로 서로 먼저 다가가 따뜻한 미소로 인사하기 작은 것 하나라도 함께 나누기 오계 굳게 지키며 절제하며 살기 순간순간 허리 곧게 펴고 들숨날숨 헤아리며 눈앞 상황 있는 그대로 지켜보기 ‘제행무상(諸行無常)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 것이다.” “내 잘났다.”, 고집할 것이 없고 “이것이 진리다.”, 고집할 것이 없다.’, 이렇게 지켜보기 가정 직장 마을 절- 도처에 평등한 ‘우리들 빠리사’ 만들기 함께 둘러앉아 자유롭게 수다 떨고 대화하고 토론하기 대중울력으로 피땀 흘리며 전법개척의 길 가고 또 가기- 」 이것이 우리시대「우리들의 팔정도」다. 이 팔정도가 거의 유일한 출구다. 불교적 합리주의를 확립하고, 활화산처럼 솟아오르는 불교적 동력을 부흥시키는 거의 유일한 출구다. 이 쓸쓸한 일몰(日沒)의 벌판에 찬란한「화엄(華嚴)코리아」,「온갖 잡것들(雜華)들이 함께 깨닫는 화엄불국토」세우는 거의 유일한 출구다. 다시 한 번 우리 불교도들이 동포들 앞에 민족사의 주역으로 가슴 활짝 펴고, 우리 출가승들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고 공경 받는, 아름다운 부처님 나라 세우는 거의 유일한 출구다. 지금 일몰(日沒)이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일몰이 아닐 것이다. 내일 아침, 광명찬란 동해일출(東海日出), 다시 밝아올 것이다. (끝) 2017년 9월 9일(토) 오후 안성 죽산 도솔산 도피안사 玉川山房에서 김 재영 저자 약력 無圓 김재영(金再泳) 1938년, 마산 출생 마산상고(현 용마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과 동국대학교대학원 불교학과 (김동화 박사에게서 사사, 문학석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불교학박사) 학위논문 ; 「초기불교의 사회적 실천에 관한 연구」 1970년 동덕불교학생회 창립 1972년 남산 대원정사학생회-청년회 창립 1976년 창신동 청용사에서 청보리학생회-청년대학생회 창립 ‘우리도 부처님같이-’ 내세우며 지금까지 청보리운동 전개중 1983년부터 지금까지 동방불교대학 교수로 ‘현대포교론’ 강의중 1981년 국제NGO-구호단체 자비수레꾼 창립(공동대표), 캄보디아 어린이 학교보내기운동 전개중, 국내에서는 남지심 보살 중심으로 탈북대학생 장학사업 전개중 2013년 1월 16일부터 27일까지 12명의 청보리순례단 이끌고 인도 팔대성지 친견고행 2014년 이 순례자료를 중심으로(촬영 석명룡 화백) 부처님생애 영상작품 10부작 「붓다 석가모니」기획․제작하여, 10월 28일 조계사 지하법당에서 교계시사회와 붓다-스터디 개최(포교원 후원, 30개 불교단체 공동주최) 2014년 불교개척자학교 창립하여 1기생 19명의 개척강사 배출 현재 안성 도피안사(주지 송암 스님)에서 수행정진중 #저서 룸비니에서 구시나가라까지 (불광출판부) 은혜 속의 주인일세 (불광출판부) 무소의 뿔처럼 (불광출판부) 우리도 부처님같이 (불일출판사) 민족정토론 (불광출판부) 365일 부처님과 함께 (불광출판부) 초기불교개척사 (도서출판 도피안사) 붓다의 대중견성운동 (도서출판 도피안사) 광덕 스님의 생애와 불광운동 (불광출판부)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간다 (도서출판 도피안사) 초기불교의 사회적 실천 (민족사) #수상 제20회 사회교육상 (교육부장관) 조계종 포교대상 (2회, 6회) 제12회 불이상 (불이회) 제4회 대원상 대상 (불교진흥원) 제7회 원효학술상 우수논문상 (불교진흥원) 2012년 올해의 불서 대상 (조계종, 불교출판협회) (끝) |
첫댓글 내용이 너무 좋은것 같아서 천천히 읽어보겠니다 ()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