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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
□ 본문 □ 마가복음 7 : 24 ~ 30
1. 예수님이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셨는데 -- ‘거기’는 갈릴리 주변 지역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만나서 — 이들과 논쟁을 벌이시고 있다.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람들로서 — 유대인들 가운데서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었다.
이 유대인들은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자기들이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 유대인들 가운데 잘난 사람들과 말씀을 나누시고 나서 -- ‘두로 지방으로’ 가시고 있다.
두로 지방은 갈릴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서 있는 항구도시이다.
예수님은 이 항구 도시의 한 집에 들어가셔서 아무도 모르게 계시려고 했지만 —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어디 계시다고 하는 소식이 들리게 되었다.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게 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리고 있다.
이 여자를 소개하는데 다소 장황하다.
우선 이 여자는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라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항구도시에는 어중이떠중이가 많이 모여드는 것이다.
여기 항구도시인 두로 지방에도 마찬가지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모여 들어 있었다.
이 여자는 귀신 들을 어린 딸을 두고 있었는데 — 온전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여자로 보여지지가 않는다.
남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 그 어린 딸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가 아닐까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 여자는 ‘헬라인’인데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한다.
혼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헬라인이라면 로마가 이 지역을 통치하기 이전에 이 지역을 통치하던 사람들이었다.
이 여자는 이전에 통치하던 사람인 헬라인과 — 이 지역에 원래 살고 있던 토착민인 수로보니게 족속의 혼혈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자는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사마리아 사람들보다 더 부정한 사람들로 여기는 이방인들 가운데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여기에 오기 전에 유대인들 가운데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였는데 —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예수님에게 꼬투리를 잡아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그 유대인들 가운데 유대인들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지점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저 유대인들은 남자였고 — 이 사람은 여자이고 — 이방인들 가운데 이방인이었다.
게다가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두고 있었다.
이 딸은 또 어떤 족속의 사람과의 사이에서 낳았는지 알 수 없는데 — 로마가 다스리던 시기였으니 로마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일 수도 있는 것이다.
1. 사회적으로 보면 이 여자는 완전히 하층민이고 — 떠돌이이고 — 사람들에게 멸시당할 수 밖에 없고 — 기피 대상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 종교적으로도 이 여자는 가장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1. 그런데, 이런 여자가 예수님에게 와서 발 아래 엎드리고 있다.
- 예수님은 한 집 안에 계셨고 — 될 수 있으면 소문 내지 않고 조용히 계셨는데 — 이 여자는 거기를 찾아간 것이다.
- 이렇게 용기를 내서 찾아갔고 — 어렵게 예수님 앞에까지 가서 —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1. 이렇게 어렵게 예수님에게 온 이 여자에게 예수님은 다소 의외의 대답을 하시고 있다.
- 2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먼저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여자가 자기 딸의 문제로 왔는데 — 예수님은 ‘자녀’를 비유로 들어서 말씀하시고 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하라’는 이 말은 이 여자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여자에게 ‘자녀’는 자기 딸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네 딸을 먼저 배불리 먹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기 딸이 먹을 가져다가 개들에게 던져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고 — 이 여자의 경우도 자기 딸이 먹을 것을 가져다가 개에게 던져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와 여자의 귀신 들린 딸을 ‘개들’에 빗대서 말씀하시고 있다.
이 여자와 그 딸은 이 당시에 이 항구도시 두로에서 실제로 ‘개들’이라고 불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여자에게 여러 이민족의 피가 섞여 있고 — 딸은 더러운 귀신이 들려 있으니 — 이 험악한 항구에서 사람들이 이 여자와 그 딸을 ‘개들’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이 험악한 항구 사람들의 거친 입담을 닮아서 이 여자와 그 딸을 ‘개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시치미를 뚝 떼시면서 — 항구 사람들의 험한 말을 그대로 흉내내면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 아마도 당장 예수님이 뺨이라도 맞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1.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너무나도 모욕적인 말을 들은 이 여자는 —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를 하고 있다.
28절,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이 여자는 예수님이 자기와 자기 딸을 ‘개들’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 예수님이 ‘개들’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 다른 사람들이 ‘개들’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여자는 ‘주여 옳소이다’ 라고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자기들은 ‘개들’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
개들이라고 해도 — 먹을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이들이 먹을 것을 개들에게 주지는 않지만 — 개들이라고 해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수님과 이 여자의 대화는 — 서로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의 대화인 것이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으면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갈 수 없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 매우 서민적인 모습인 것이다.
예수님은 엄숙하고 근엄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 시장바닥에서 농담을 주고받는 장사꾼처럼 말씀하시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는데 ‘술꾼의 친구’라고 하는데 — 예수님은 실제로 하층민의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셨고 — 그들과 실없는 농담도 주고받으시면서 그들의 삶과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깊이 아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이해하고 — 그들의 삶 깊숙이 들어 가셔서 그들과 함께 사셨던 것이다.
이 여자와 주고받는 이 대화에는 예수님의 진심이 숨겨져 있고 — 이 여자는 그 숨겨진 예수님의 진심을 훤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숨어 계셨는데 — 이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 온 것처럼 이 여자는 숨겨진 예수님의 마음을 찾아낸 것이다.
예수님의 진심을 알았기 때문에 — 예수님과의 대화는 즐겁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종의 ‘해학미’를 느낄 수 있다.
판소리 사설을 들으면 웃으면서도 거기에서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데 — 여기에서도 그러한 해학미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인데 — 비린내가 진동하고 — 이국 사람들이 지저분한 시장바닥을 활보하고 — 입이 건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마구 지껄여대는 곳에서 예수님은 이 분위기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대화를 나누시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이 여자의 대화는 — 처음 읽으면 황당하지만 -- 몇 번 읽어보면 이처럼 진실하고 간절한 내용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대답을 듣고 나서 말씀을 해주시는데 — 2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이 말을 하였으니’ 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여자가 한 말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장단을 맞추면서 ‘이 말’을 했으니 — 예수님의 뜻을 잘 알고 예수님과 통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여자가 간구하던 일이 해결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집에 돌아가 보니 — 과연 딸에게서 귀신이 나간 것을 보게 된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자는 사실 믿음을 가지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환경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 자기의 간절한 소원을 아뢰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표현에 구애받지 않고 —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의 본질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가오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즐기면서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우리 모두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고 — 예수님의 말씀과 그 깊은 뜻을 알고 믿음으로 그 크신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님 사이의 깊은 신뢰는 어떠한 말에도 상처받지 않고 본질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저도 주님과 어떠한 난관이 있어도 끝까지 신뢰하며 나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