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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25일에도 북한신문들에는 윤기권의<광주봉기의 잊을수 없는 최후의 밤>이라는 제목의 수기가 실렸다. 이 수기에 실린
단어들도 광주사태를 북한 세력이 배후 조종하였다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 글에서 윤기권은 계엄군을 계속 '파쑈계엄군'으로 부른다. 우리는 한국
군인을 지칭하였을 때 국군이라 불렀다. 광주사태 당시에 계엄군이란 용어가 가끔 사용되었어도 우리는 '계엄군'이라 불렀지, 결코
'파쑈계엄군'이란 말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윤기권이 어째서 오직 '파쑈계엄군'이란 말만 사용하는가? 이 경우 '파쇼'는 북한의 대남공작
용어이다. 우리는 파시즘이란 말을 사용하지만 북한에서는 파시즘이란 말을 쓰지 않고 파쇼라는 말만 사용한다. 원래의 파시즘의 의미대로라면
북한의 전체주의가 파시즘에 해당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남한 정부를 지칭할 때만 '파쇼'라는 단어를 쓴다. 따라서 북한 사람들 귀에는 '파쇼'와 한국 정부는 동의어이다. 따라서 윤기군이 '파쑈계엄군'이란 말을 쓸 때 북한 독자들에게는 '남한 계엄군'의 의미가
분명하다. 그러나, 윤기권이 단지 북한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런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습관적인 표현이었다.
1980년 5월 21일 북한군이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한 후 광주 시민둘에게 무기 분배를 하던 중 북한군이 20대 중반의 여성에게
무기를 들라고 하자 그 여성은 무기를 받을 생각을 안 하고 복면하고 있는 북한군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자 그 북한군은 "쌍간나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안잡고 뭐하고 서있니?"라고 말한 일화가 있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p. 330). 이 경우 '쌍간나새끼'는 뚜렷한
북한말이다. 북한에서는 상대방을 비하할 때 '쌍간나새끼'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한국 정부를 비하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파쇼'였다. 그래서 한국 정부를 지칭하는 '파쇼'는 대남공작 용어였으며, 남파공작원들이 사용하는 단어요, 남민전에서 쓰던 단어였다.
그런데, 1980년 당시 광주운동권 사이에 이 단어가 퍼져 습관화되어 있었다. 윤한봉과 김상윤과 윤상원과 황석영 등 모든 광주운동권이 남민전
이념 서적들을 읽고 있었다.
광주매일이 1995년에 발간한 『正史 5·18』 프롤로그는 간첩들과 남민전 전용어였던 '파쇼'라는 단어가 광주시민군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음을 1980년 『월간중앙』을 인용하며 이렇게 스스로 폭로한다: "광주시민들에게 총이 있어야 하는데, 아니 글쎄 파쇼집단의
계엄군들이 광주시내의 경찰서 총기들을 이미 모조리 빼내가버렸어요." 자, 이것이 평범한 시민군이 불평이었는가? 아니다. 누구든 대한민국
편에 서있는 사람들은 국군을 '파쇼집단의 계엄군'이라고 호칭하지 않는다. 누가 광주에서 '파쇼'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가? 단지 두 부류가
있었을 뿐이었다. 한 부류는 대남공작원들이었으며 다른 한 부류는 오로지 남민전 이념 서적만 읽던 광주운동권이었다. 그리고 윤기권은 후자의
경우에 속하였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강진우의 두 실존인물 중 한명인 윤기권의 모교 대동고교 학생들이 영화에서 광주사태의 한 주역으로
등장하는 까닭이 있다. 그 학교 운동권 교사들이 '양서조합'이라는 위장명칭을 걸어놓은 지하써클에서 학생들에게 남민전 이념서적을 읽게 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윤기권이 시민군이 되었으며, 1991년 수억원의 보상금 수령후 월북하였으며, 2000년의 5.18수기에서 입버릇처럼 '파쇼'라는
용어를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사태의 이야기는 극장 주역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윤기권이 언제 월북하였는가? 광주운동권 황석영이 김일성의 지령으로 북한에서 그
대본을 쓴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가 한창 상영되기 시작할 무렵 때맞추어 월북하였다. 월북 당시 윤기권의 직업이 무엇이었던가? 광주시내 모
극장에서 선전간판 그리는 직업이었다. 그가 1980년 5월 18일 동명동 파출서를 때려 부수고 여러 명의 경찰을 인질로 납치하여 광주사태에
기여하던 날 무슨 일이 있었는가? 황석영이 동명동에 있는 동리라는 이름의 자기 극장 직원들을 광주사태 선동 대원으로 총동원하였다. 영화
'화려한 휴가'도 극장이야기로 시작된다. 주인공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을 때 광주사태가 일어났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서는 주인공들이
황셕영의 극장 개관 기념 공연 연습을 하고 있었을 때 광주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이, 그리고 황석영이 자기 극단 단원들을 총동원하여 유언비어
퍼뜨리며 광주사태를 선동하였기 때문에 광주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면 황석영의 극단 광대는 뭐하는 집단이었던가? 광주운동권
문화선전대로서 조직된 집단이었다. 즉, 광주운동권 중에서 황석영의 역할은 연극을 통한 프로파간다였던 것이다.
1980년의 광주 극장의 주역은 황석영이었다. 황석영은 광주운동권 문화선전대 대장이었다는 점에서 주역이었다. 그 황석영이 1989년
2월 광주청문회가 끝나자마자 김일성의 부름을 받고 월북하여 북한의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 씨나리오를 썼다. 그 영화가 상영될 무렵
또 한 명의 광주 극장 주역이 월북하였다. 그는 북한의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에서도 훗날의 남한의 5.18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도 대표적인 시민군이라는 점에서 광주 극장 주역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월북 당시 그의 직업이 광주 극장 선전간판 그리는 일이었다.
이처럼 황석영과 윤기권의 공통분모가 문화선전이었다. 그리고 황석영도 윤기권도 북한에서 김일성을 위해 문화선전을 하였다.
윤기권이 광주 극장의 주역이었던 이유는 윤기권의 월북 사실을 광주시민들이 평양방송으로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1년 3월8일자
광주의 일간지들은 [3월4일, 광주 5.18항쟁 부상자인 윤기권(광주 두암동)이 위대한 수령님과 참조국을 찾아 의거 월북했다...] 고
평양방송을 인용하여 보도하였다. 사실 시민군 윤기권의 월북은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이것은 광주시민들만 아는 사실이었으며, 여태껏 대다수 국민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 광주시민들은 어떻게 그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는가? 평양방송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때 광주시민들이
평양방송을 듣고 있었을까? 비록 모든 시민들이 평양 방송을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겠으나, 광주운동권 황석영이 그 시나리오를 쓴 북한의
5.18영화가 상영될 무렵이라 관심을 갖고 평양방송을 듣는 이들이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광주사태 당시에는 훨씬 더 많은 광주시민들이 평양방송을 듣고 있었으며, 그때 광주방송과 평양방송이 주객이 전도된 몇가지 사실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광주시민들이 북한방송으로 광주사태 소식을 듣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북한이 전라도 전 지역에서 청취될 수 있는 주파로
광주사태를 생중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당시 조선대 약대생으로 20일 옥과에 있었던 안은경은 이렇게 증언한다: "20일 저녁쯤에 광주 소식을
들을까 해서 이리저리 라디오 채널을 돌리는데 우연히 북한방송이 잡혔다. 거기서 언뜻 들리는 얘기가 광주시내를 시민군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광주민중항쟁과 여성 p. 155). 전남대 학생회 총무였던 양강섭도 그의 증언록 "고통을 넘어 부끄러운 나의 5월"에서 돌산 방죽포
임해연구소 옆집에서 학생회장 박관현과 더불어 북한방송을 듣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당시 대동고 학생으로서 수류탄을 들고 다녔던 김지호도 그의
증언록 "피를 나눈 5월"에서 20일 동운동 주민들이 북한방송으로 광주사태 소식을 듣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광주공원 시민군 500 여명이 21일 오후 5시 반 경에 도청을 접수하였다. 그런데, 또 다른 시민군 병력이 그 날 저녁 광주에
있었으며, 그들은 북한방송을 듣고 있었다. 그 사실을 당시 전남대 상대생으로서 시민군이었던 유승규는 그의 증언록 "무기반납을 반대했지만"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그분과 함께 작은 군용차를 타고 광주공원으로 갔다. 가는 도중 우리 방송은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 아저씨는 북한방송을
틀어놨다. 공원에는 총과 실탄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사실 유승규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이 시민군은 북한군이었을지 모르는 인물이다. 우연히
북한방송을 들은 것이 아니리. 북한방송 채널을 알고 있었다. 그 날 역시 북한방송을 들었던 시민군 이용일의 경우에는 우연히 들은 경우였다.
그는 그의 증언록 "잊을 수 없는 일들"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래서 라디오를 이러저리 틀고 있는데 잡음이 섞인 광주소식이 들렸다.
알고 보니 북한 방송이었다. 차라리 북한방송은 거의 광주의 상황을 그대로 보도했다."
광주사태 때 광주방송과 평양방송이 주객이 전도되었던 또 하나의 사실은 남한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북한 방송국이 안방 취재하듯
취재하였으며, 북한주민들이 안방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하였다는 사실이다. 남한에서는 광주사태 초기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광주사태가 일어난 줄
모르고 있었다. 아주 역설적인 진실은 대다수 광주시민들은 광주사태가 끝난 후에야 광주사태 소식을 들었다. 금남로 일대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었지만 20일에 방송국이 불탄 후 광주의 타 동네 사람들은 전혀 뉴스 시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80만 광주시민들 중에 광주사태
현장을 한번이라도 목격한 이는 절반을 훨씬 밑돈다. 시민군으로 위장했던 불순세력을 제외하면 실제 시민군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18일부터
광주사태 전개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종일 TV로 샅샅이 볼 수 있었던 북한주민들과 달리 대다수 광주시민들은 광주사태 광경을 전혀 보지
못했다.
5월 19일 폭력시위대가 MBC 취재차 5대를 불태웠다는 것은 광주사태 취재 및 보도를 못하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지 말라는
위협이기도 했다. 오후 1시 반 경 카톨릭센터 차고에서 3대의 MBC 취재차를 끌어내 의자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경찰공격용 화공무기로
사용하던 난동자들은 두시간 후 문화방송 쪽으로 몰려가 "MBC 안으로 들어가 유리창과 기물을 파괴, 취재차 2대와 승용차 3대를 끌어내 방화,
그 옆의 MBC 사장 직영의 전자제품 상점인 문화상사에 방화"하였다 (1980年代 民主化運動 VI. p. 70). 사건 규모에 비해 의외로
광주사태 기록 영상물이 희귀한 이유는 난동자들이 19일에 방송국 취재차량들을 불태운데 이어 그 다음날에 방송장비와 방송국 건물까지 불질렀기
때문이다. 18일에 화염병으로 파출서들과 페퍼포그차에 방화한데 이어 19일에는 기름을 이용하여 방송국 차들에 방화하였다. 어째서 시위대가
방송국 차들만 골라 탈취하여 의자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달리는 폭탄으로 사용하였는지는 정말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이 수수께끼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 즉 북한 방송국 취재장비를 실은 차는 안전하였다는 사실과 맞물려 있다.
광주사태 때 북한 방송국 차는 광주 시가지를 종횡무진 누빌 수 있었으나, 남한 방송국 차들은 다닐 수 없었다. 광주사태 때 북한
방송요원들이 광주에 침투해 있었는가? 광주사태 때 이미 여러 명의 광주시민들이 광주에 간첩이 침투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북한 라디오가
광주사태를 온종일 연일연야 정확하게 보도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사실 평상시에는 북한의 방송 요원들이 광주시내를 촬영하고 북한 TV방송국이 그
장면들을 생방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직접 지휘하면 충분히 가능할 수 있었다. 조총련이 한국을 안방
드나들 듯 드나들 수 있었다. 김정일이 광주사태를 총지휘하였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은 사실이다. 그것은 북한이 5월 18일부터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광주사태 내내 온종일 광주사태를 생중계 방송하였다는 사실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광주사태 때 무장시민군이 장갑차를 몰고 다녔다는 것은 북한에서는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심지어 광주시민들
중에서도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도청광장에서 시민군 장갑차가 군인을 깔아죽이는 장면을 영화 "화려한 휴가"가
보여주는가? 사실 그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는 광주사태 때 무장시민군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는 국민이 대다수였다. 우리는 시민군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전혀 몰랐다가 2003년에 비로서 몇 장의 시민군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되기 시작하자 극소수의 관심있는 네티즌들만 시민군 사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복면 쓰고 총 든 광주시민군 모습을 누구나 TV와 비디오로 보았다.
북한에서는 어떻게 5월 18일부터 광주사태를 생방송으로 방송할 수 있었으며, 또 어떻게 북한세력은 광주사태 사건 현장들을 샅샅이 촬영할 수 있었는지는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이다. 가장 빨리 달려왔다는 외신기자 힌츠페터도 5월 20일 오후 늦게야 광주에 도착하였는데, 어떻게 북한세력은 광주사태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광주에서 대기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때 광주는 폭력시위대가 방송국 차량에 불을 질러도 경찰이 전혀 보호해 줄 수 없는 곳이었는데, 오히려 북한세력의 영상장비를 실은 차들은 북한 방송국 차는 안전하게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은 좀처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별난 일이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시민군이 기자들의 취재를 얼마나 심하게 통제하였는지 보여주는 한 예가 바로 한 일본인 사진기자의 현장 목격기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21일 오전 11시 45분에 환희에 찬 시위대가 도청광장에서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잘 가세요 잘 가"를 부른다. 그 직후 벌어진 전투에 승리한 시민군이 도청을 점거하자마자 기념사진 촬영을 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그날 외국인 기자조차 도청 시민군 사진을 찍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바로 그 시각 11시 45분에 현장을 목격했던 일본인 사진기자 風間公씨는 신동아 1985년 7월호에 기고한 "일인(日人)사진기자의 현장 목격기"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11시45분, 데모대가 운전하는 장갑차 한대가 운집한 군중들을 갈라 세우면서 최전열로 진출해 왔다. 그러자 군중들이 일제히 군인들을 향해서 투석을 시작했으며, 군인들은 별수 없이 후퇴할 뿐이었다. 내가 촬영하고 있던 건축현장에도 십여명의 시민들이 달려와서는 커다란 나무기둥과 콘크리트 덩어리를 집어올려서 군인들의 머리 위로 마구 내던지고 있었다.
화염병과 쇠파이를 휘두르는 젊은이를 대여섯명 태우고 있던 장갑차가 군이 바리케이트로 치고 있던 버스를 밀어제치면서 군인들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대세는 완전히 데모군중들의 손에 장악되고 있었다. 그런데 군중 속의 한 사람 "저기에 기자들이 있다"고 외쳐대자 돌팔매가 일제히 우리들을 향해 날라왔다.
아래여서 공중 높이 날려보내는 돌팔매여서 맞아도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드가 너무 격렬했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던 광주시 유일의 호화 관광호텔의 옥상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뒷문으로 들어서자마자 그곳 종업원으로부터 "만약 이 빌딩에서 사진 촬영하는 놈이 한 놈이라도 발견되면 당장에 불을 놓고 말겠다는 통고가 있었으니 제발 다른 곳으로 가달라"고 했다. 그때 독일인으로 보이는 남자 여행객 한사람이 완전 소등되어서 깜깜해진 건물 안으로부터 커다란 백을 메고 나왔으며, 그는 호텔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마치 탈출의 길이라도 재촉하듯이 총총히 밖으로 사라져갔다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1권 p. 243).
"만약 이 빌딩에서 사진 촬영하는 놈이 한 놈이라도 발견되면 당장에 불을 놓고 말겠다"는 시민군의 통고가 있었기에 외국인 전용 관광호텔에서조차 기자들이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었다. KBS의 "푸른눈의 목격자" 영상물을 본 시청자들은 어째서 힌츠페터가 시민군의 도청 점령이 초읽기에 들어갔던 21일 오후의 이 중요한 사건을 전혀 촬영하지 않았는지 의아해 했으리라. 그를 광주로 데리고 온 조총련 세력은 그 시간에는 엉뚱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다니고 있었다. 그날 여대생 신분으로 장성으로 가는 무기탈취 특공대 차에 승차했었던 안은경은 장성에서도 외국인 기자가 시민군 사진을 찍으면 시민군 차로 받아내려 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차가 장성으로 무기를 가지러 간다며 시외로 나갔다. 가는 길에 비아에 들러 알아보니 비아에서는 이미 무기를 가져갔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장성으로 갔다.
우리가 탄 차가 장성 고려시멘트에 도착하자 고려시멘트 직원들이 나와 시원한 음료수와 먹을 것을 차에 올려 주었다. 그러는 사이 어떤 외국 기자는 우리들의 모습을 취재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가 탄 차의 운전수가 "취재만 하지 사실을 사실대로 알리지 않는 저놈도 똑같이 나쁜 놈"이라고 하면서 차를 몰아 그 외국인 기자를 받아내려고 했다. 불시에 습격을 당한 기자는 깜짝 놀라 혼비백산해서 도망가 버렸다 (광주민중항쟁과 여성 p. 156).
이처럼 외국인 기자조차 무장시민군의 무장봉기 장면을 촬영할 수 없었던 때에 북한 중앙텔레비전은 어떻게 자유로이 촬영할 수 있었는가? 전 러시아 벌목공인 한 탈북자는 그가 강원도 고산군 포 사격장에서 포 사격 훈련을 받다가 훈련을 중단하고 광주 시내의 전투장면들을 보게 된 경위를 이렇게 회상한다: "정치부에서는 무기전투기술기재를 정비하면서 텔레비전에서 하루 종일 내보내는 남조선 광주의 소식을 시청하라고 지시하였다. 우리는 중대별로 병실에 모여 앉아 중앙텔레비전에서 내보내는 광주 시내의 전투장면들을 보면서 겉으로는 말을 못했지만 속으로 많아 놀랐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p. 281). 전 조선동맹작가인 한 탈북자도 그가 "5·18 굉주와 북한"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증언록에서 "유선방송과 TV수상기 앞에는 항시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수시로 아나운서가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라고 하며 광주의 실상을 동영상으로 내보내 시청자들의 마음을 부글부글 끓케 하였다"고 증언한다 (상게서, pp. 308-309).
전 북한 김형직사범대학 학생은 "'광주의 영웅' 나의 친구의 아버지"라는 제목의 증언록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평양으로 불려 올라간 영호는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받았고 집에서 부양가족으로, 가정주부로 살아오던 영호의 어머니가 함흥시 양복점 초급당비서로 발령을 받았다. 그 당시 북한의 텔레비전에서도 광주봉기에 대해서 거의 매일같이 톱뉴스로 장시간을 중계하곤 하였다.
몇 시, 몇 분에는 전라도 광주의 도청을 봉기군이 장악하였고, 또 어디 어디를 장악하였다고 하면서 시시각각으로 특종보도를 진행하였다 (p. 343).
북한 텔레비전은 "몇 시, 몇 분에는 전라도 광주의 도청을 봉기군이 장악하였고"라고 생중계방송할만큼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는 순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의 방송국 차도 방송국 건물과 장비도 모두 불탄 남한에서는 텔레비전 방송은커녕 신문기자들의 취재조차 불가능하였다.
조선일보 서기자는 오후 3시에 "12시40분쯤 도청에서 5백m 떨어진 금남로에서 시위대가 차 몰고 도청 향해 진격. 군경 3명 사상설. 자세한
상황 모른다. 무서워 나갈 수 없다"를 끝으로 그날의 송고를 중단하였고, 김영택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도 "김충근기자와 함께 오후 5시 25분
도청 직원들을 따라 도청 뒷담을 넘어 바로 뒤에 있는 동국여관으로" 들어갔으나 "학생들이 TNT로 도청을 폭파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빨리
피하라"는 메가폰소리가 들려 허둥지둥 황금동으로 몸을 피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p. 113). 그때 김영택 기자만 몸을 피하였던 것이
아니라, 인근 주민이 모두 대피하느라, 주민들조차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는 순간을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 따라서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는
순간이 여전히 남한에서는 베일에 싸여있으나, 북한주민들은 실시간으로 그 광경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전 남포시 농촌경영위원회 지도원은 "대학시절부터 알고있는 5.18광주의 무장폭동"란 제목의 그의 증언록에서 "남한에 와서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5·18사건이 한창이던 그때 남쪽에서는 광주인민봉기의 장면들을 전혀 중계하지 않아서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몰랐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어떻게 돼서 바로 다음날부터 남조선의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대로 텔레비전의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중계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고 그의 의문점을 표현한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pp. 398-399). 요컨대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어떻게 광주방송과
평양방송이 이처럼 주객이 전도되어 북한에서만 중계방송을 할 수 있었느냐에 대한 의문이다. 사실 그 점이 우리에게도 수수께끼였으나, 왜 그런
주객전도 현상이 일어났는지 이제 설명이 가능하다. 19일 광주에서 북한군이 남한 방송국 차들은 눈에 띄는 대로 불에 태워 화공무기로 사용하고,
20일에는 방송국 건물들과 장비들까지 불질렀다. 그러나 북한의 영상장비들이 실린 차들은 북한군의 보호를 받았다. 물론 누가 방송국 차들을
탈취하여 불을 지르고 폭파시켰는지는 우리가 아직 알 수 없으나, 광주시민이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하지 아니한가. 그리고 우리가 객관적으로 분명히
아는 사실은 광주의 방송국 차도 방송국 건물도 방송장비도 모두 불에 탔기에 남한에서는 중계방송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20일 MBC 방송국에
불지르기 직전이었던 8시 30분에는 폭력시위대가 KBS 방송국을 점거하고 방송기재를 파괴하여 방송이 중단되었다 (1980年代 民主化運動 VI.
p. 78). 그러나 방화범들이 북한 방송국의 영상장비가 실린 차들은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처럼 광주사태 기간에 광주방송과 평양방송의 주객이 전도되는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중계방송되었던 광주사태 장면들이
모두 실제 장면이었는지의 의문이 여전히 남아있다. 북한이 광주사태를 현장에서 취재하여 중계방송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북한의 목적은 진실
보도가 아니라 선동이었다. 한 탈북자가 증언하는 대로 "북한으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떨어지면서 특수작전요원들은 시민군들 속에 위장 침투하여
본격적인 살인, 파괴활동을 조작하면서 광주시민들을 자극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p. 361). 광주에서 살인 사건을
조작하는 북한군 특수작전이 있었듯이 선동 방송을 목적으로 하는 조작 사건을 실제 광주사태 장면인 것처럼 상영한 화면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
조작사건 장소가 광주였다면 분명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사건이었다. 이렇듯 비록 북한 텔레비전에서 중계방송한 광주사태 영상물이 100 퍼센트
다큐멘터리였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많은 실제 장면들이 방영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한의 방송국 차량들은 시민군 테러
대상이었던 곳에서 북한의 영상장비들은 정밀 촬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주객전도였다.
[사진설명] 북한의 5.18 영화 "광주는 부른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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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아래 목차 중 <IV. C. 주객이 전도된 광주방송과 평양방송>입니다.
I. 1980년 봄 광주운동의 두 주체
A. 윤한봉과 탈북자 회고록의 일치점
B. 서울대 대자보에 박힌 북한말
구호
C. 광주사태 주동세력 광주운동권
D. 광주사태 선동한 황석영의 극단
광대
E. 광주사태 배후세력 남민전
1.
한명숙의
용공서클과 간첩 서경원
F. 광주사태 지원세력 북한군
II. 김대중의 내란으로서의 광주사태
A. 김대중과
광주운동권의 폭력시위 동맹
B. 김대중의 홍위병과 유언비어 대자보
C. 무장봉기 기획한 5.18 비밀문서
D. 김대중의 예비내각 명단
E.
무기탈취 특공대 중의 김대중의 사조직
III. 도시 게릴라 전으로서의 광주사태
A. 19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무장봉기
B.
무기탈취 이전의 도시 게릴라전 무기들
C. 경찰저지선 돌파를 위한 도시 게릴라 전술
D. 폭동강령 유인물과 북한군의 교란작전
E. 20일 등장한 정체불명의 무장단체
IV. 통일운동으로서의 광주사태
A. 5·18 광주의 영웅과 만난 문익환
목사
B. 북한에 먼저 알려진 무장봉기 음모
C. 주객이 전도된 광주방송과
평양방송
D. 시민군 도청 점거의 상징적 의미
E.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광주사태
☞ 보름
앞으로 성큼 다가온
광주사태 30주년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친미
유언비어와 반미 행동
MBC 방송국
전소시킨후
TV 본 5.18 치매증
광주사태 연구사료
북한군은 잠수함 타고 광주에 침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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