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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과 초기불교사상 각묵 스님 (초기불전연구원)
1. 들어가는 말 ▲ 위로
① 인도 역사가 배출한 가장 탁월한 한 분을 들라면 역시 석가모니 부처님을 들 수밖에 없다. 먼저 석가모니 부처님 편에서는 그분의 생애를 초기불교의 자료들을 토대로 간략하게 살펴본다. ④ 교학과 수행으로 정리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당연히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그분의 가르침의 목적은 무엇인가?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실현하는 것[離苦得樂]이다. 초기불교의 목적 편에서는 초기불교의 소의 경전인 니까야를 토대로 이 문제를 살펴보았다.
2.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 ▲ 위로
부처님[佛]으로 옮겨지는 붓다(Buddha)라는 술어는 문법적으로는 √budh(깨닫다, to be enlightened)의 과거분사에 해당하는데, 이것이 남성명사로 쓰여서 ‘깨달은 분[覺者]’이라는 뜻이 된다. 중국에서 붓다(Buddha)는 佛陀, 勃陀, 勃馱, 步他, 沒度, 沒馱, 浮圖, 浮屠(불타, 발타, 발타, 보타, 몰도, 몰타, 부도, 부도) 등으로 다양하게 음역되다가 불(佛)이나 불타(佛陀)로 정착이 되었으며, 한국에서는 부처님으로 정착이 되었다.
⑴ 불은상기게(佛恩想起偈) ▲ 위로
成道摩竭陀(성도마갈타) - 마갈타에서 깨달으셨으며 說法婆羅奈(설법바라나) - 바라나에서 설법을 하셨고 入滅拘尸羅(입멸구시라) - 구시라에서 열반에 드셨다. 여기서 가비라(迦毘羅)는 까삘라왓투(Kapilavatthu)의 음역이고 마갈타(摩竭陀)는 마가다(Magadha)를 바라나(婆羅奈)는 바라나시(Bārāṇasi/Vārāṇasi)를 구시라(拘尸羅)는 꾸시나라(Kusinārā)를 음역한 것이다. 이 불은상기게는 부처님의 마지막 발자취를 담고 있는「대반열반경」(D16)의 세존의 말씀과 일치한다. “아난다여,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네 가지 장소가 있다. ‘여기서 여래가 태어나셨다.’ … ‘여기서 여래가 위없는 정등각을 깨달으셨다.’ … ‘여기서 여래가 위없는 법의 바퀴를 굴리셨다.’ … ‘여기서 여래가 무여열반의 요소로 반열반하셨다.’ ― 이곳이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장소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네 가지 장소이다.”(D16 §5.8) 불교 2600년사의 흐름은 모두 이처럼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 즉 고따마 싯닷타(Gotama Siddhatta, Sk. Gautama Siddhartha) 그분으로부터 출발한다. 후대의 모든 불교는 그분이 깨달으시고 45년간 설법하셨던 그 가르침을 뿌리로 해서 전개된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한불교 조계종 종헌 제1장 종명 및 종지 제2조도 “본종은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한 근본교리를 봉체하며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함을 그 종지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종헌 제2장 본종, 기원 및 사법 제4조에 “본종은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헌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득하여(교학) 이를 바탕으로 수행과 전법에 전념하는 것을 종지로 밝히고 있다.
⑵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분이다 ▲ 위로
<주해2> 룸비니의 아쇼카 석주(The Ashokan Pillar)는 BC245년(?)에 아소카 왕이 부처님 탄생지를 참배하고 세웠다. 전체 높이 7.2m(땅속 3m), 지름 70cm, 지상높이 4.11m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Devana Piyena Piyadasina lajina vīsativasābhisitena (1) atana āgāca mahīyite hida Budhe jāte Sakyamunī ti (2) silāvigad*ābhīcā kālāpita silāthabhe ca usapāpite (3) hida Bhagavam* jāte ti Lum*mininigāme ubalike kat*e (4) at*habhāgiye ca (5)”(A.C. Woolner의 『Asoka Text and Glossary』 참조) 한글로 직역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들의 사랑을 받는 삐야다시 왕(아소카 왕의 다른 이름)은 (1) 즉위 20년이 지나 몸소 여기에 와서 참배하였다. (2) 여기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2) 그래서 돌로 말의 형상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도록 하였다. (3) 여기서 세존께서 탄생하셨다라고 경배하기 위한 것이다.(4)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하고 생산물의 1/8만 거둔다.(4-5)"
⑶ 부처님의 출가 – 버리고 떠나기 ▲ 위로
<주해3>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기간으로 나누어 보는 전통적인 방식을 대승불교에서는 팔상성도(八相成道)라 한다.(『화엄경소』 등) 그것은 다음과 같다.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 도솔천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모습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 룸비니에서 태어나신 모습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사대문을 통해서 각각 노인/병자/죽은 사람/출가자를 보신 모습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 성을 나와 출가하신 모습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설산에서 수행을 하신 모습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실현하신 모습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 바라나시의 녹야원에서 최초설법을 하신 모습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서 반열반에 드신 모습
부처님이 왕자로서 누렸던 영화로운 삶은『앙굿따라니까야』「편안함경」(A3:38)에 묘사되어 나타난다. 부처님은 이러한 영화로운 삶을 사시면서도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통찰하셨고 그래서 젊음과 건강과 장수에 대한 자부심이 다 사라져버렸다고 토로하고 계신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영화를 누렸고 이와 같이 지극히 편안했던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자기 스스로도 늙기 마련이고 … 병들기 마련이고 … 죽기 마련이고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죽은 사람을 보고는 자신도 죽기 마련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죽음을 싫어하고 혐오스러워한다. 나도 또한 늙기 마련이고 … 병들기 마련이고 … 죽기 마련이고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죽기 마련이고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채 다른 죽은 사람을 보고는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스러워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적절치 않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숙고했을 때 젊음에 대한 … 건강에 대한 … 장수에 대한 나의 자부심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A3:38) 생노병사는 괴로움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괴로움을 자각하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저 해탈열반과 그에 도달하는 길을 찾는 것이 출가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왓차여, 재가자의 삶의 족쇄를 버리지 않고도 몸이 무너진 뒤에 괴로움을 끝낸 재가자는 아무도 없다.”라고 단언하신다.(M71) 그리고 부처님은 사유하신다. “재가의 삶이란 번잡하고 때가 낀 길이지만 출가의 삶은 열린 허공과 같다. 재가에 살면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소라고둥처럼 빛나는 청정범행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이제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하리라.”(D2; M27 등)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탄생과 출가는 중생에 대한 대비원력(大悲願力)때문이라고 강조한다.(華嚴經 등) 죽음으로 대표되는 괴로움은 나 하나에게만 닥쳐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이 대면해야만 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대표되는 괴로움은 죽어야만 하는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일체 중생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죽어야만 하는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중생에 대한 연민의 마음(大悲心)이 출가의 근본이다. 초기불전의 도처에서도 중생에 대한 자애․연민․같이 기뻐함․평온의 사무량심은 강조되고 있다.
⑷ 부처님의 수행과정 – 길 찾기 ▲ 위로
“이 법은 염오로 인도하지 못하고, 탐욕의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M26; M36) 당대에 삼매 혹은 선정수행으로는 최고의 경지라 할 수 있는 비상비비상처에까지 오른 세존이 더 닦으실 삼매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삼매의 경지가 부처님이 추구하시는 궁극적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제는 삼매수행과는 저 반대편에 있다 할 수 있는 고행을 떠나신다. 6년간 혹독한 고행을 했지만 역시 세존께서 원하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시지 못한다. 이렇게 사지가 메마르고 문드러져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서 부처님께서는 고행에 대한 반성을 하시면서 다른 수행법이 없을까 깊은 사유를 하신다.
이렇게 깊은 사유와 반성의 끝에 세존의 사유는 어릴 적 농경제 때 체험한 삼매의 경지에 다다른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고찰하신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신다.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가 [즉시에] 일어났다.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M36 §31)
“‘깨달음을 위한 길’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길[道, magga]’이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초선(ānāpāna-ssati-paṭhama-jjhāna)이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길이라는 말씀이다.”(MA.ii.291)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결론지으신다. ‘나는 감각적 욕망들과도 상관없고 해로운 법들과도 상관없는 그런 행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32) 그리고 이제 드디어 음식을 드시리라고 대결단을 하신다. ‘이렇게 극도로 야윈 몸으로 그런 행복을 얻기란 쉽지 않다. 나는 쌀밥과 보리죽 같은 덩어리진 음식을 먹으리라.’(§33)라고. 여기서 인용한 이 구절들은 고행에 대한 부처님의 반성이 깊이 담겨 있는 사유이면서 부처님의 발상의 대전환을 볼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⑸ 아니면 버려라 – 버리기 ▲ 위로
⑹ 부처님의 성도(成道)과정 - 깨닫기 ▲ 위로
이 네 가지 禪은 부처님이 새로 터득하신 禪이요 ‘감각적 욕망들과도 상관없고 해로운 법들과도 상관없는 행복’이요, ‘깨달음의 길’이다. 초선부터 제4선까지는 불교의 경전에만 나타나는 불교의 삼매이다. 이 새로운 삼매를 바탕으로 하여 부처님께서는 제4선의 경지에 드셔서는 평온을 통해서 마음챙김을 완성하시고(upekkhā-sati-pārisuddhi) 이를 토대로 밤의 초경에 숙명통(宿命通, pubbenivāsa-anussati-ñāṇa, 전생의 삶들을 기억하는 지혜)을 증득하시고, 밤의 이경에는 천안통(天眼通, dibba-cakkhu-ñāṇa, 신성한 눈의 지혜)을 증득하신 뒤, 마침내 밤의 삼경에는 누진통(漏盡通, āsavakkhaya-ñāṇa, 번뇌를 소멸한 지혜)을 체득하셔서 사성제를 꿰뚫으시고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실현하셨다. 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누진통을 정형화하여 말씀하신다. “그런 나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다.
② 무엇을 깨달으셨는가?
⑺ 부처님의 전법과정 – 함께 나누기 ▲ 위로
“그분은 법을 설합니다. 그분은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며, 의미와 표현을 구족하여 법을 설하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을 설합니다.”(A3:65 등)
⑻ 법으로 부처님을 봐야한다 ▲ 위로
“형색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삿된 길을 걸을 뿐 여래 볼 수 없으리.[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법으로 부처님들을 보아야 한다.(dharmato Buddhā draṣṭavyā) 참으로 스승들은 법을 몸으로[法身] 하기 때문이다.”
3. 초기불교
부처님께서는「대반열반경」(D22)에서 “법(法)과 율(律)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D16 §6.1)라는 유훈을 남기셨다. 그래서 부처님의 직계제자들은 부처님 입멸 후 2개월 만에 일차합송(一次合誦, 一次結集, Paṭhama-saṅgīti)을 가졌다. 이 일차합송에서 부처님이 제정하신 교단의 규범인 율(律, vinaya)은 우빨리(Upāli) 존자가 읊어서 율장(律藏, Vinaya-Piṭaka)으로 결집되었다. 법(法, dhamma)은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모은 것인데 이것은 약24년가량 부처님의 시자 소임을 보았으며 부처님의 사촌동생인 아난다(Ānanda) 존자가 외워서 경장(經藏, Sutta-Piṭaka)으로 결집되었다. 이처럼 빠알리 율장과 경장에 나타나는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초기불교라 한다.
⑵ 초기불교의 소의경전은 무엇인가? ▲ 위로
여기에다『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āya, 小部)의 7가지 경들, 즉『숫따니빠따』(經集, Suttanipāta),『법구경』(法句經, Dhammapāda),『자설경』(自說經, Udāna),『여시어경』(如是語經, Itivuttaka),『장로게』(長老偈, Theragāthā),『장로니게』(長老尼偈, Therīgāthā),『본생담』(本生譚, Jātaka)은 당연히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인 초기불교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 특히 ‘말씀을 모은 것(經集)’으로 직역되는『숫따니빠따』는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모은 가장 권위 있는 경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불교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인도의 여러 바라문 가문들은 각 가문이 속하는 문파에 따라서『베다 본집』(本集, Saṁhitā)과『제의서』(祭儀書, Brāhmaṇa, 브라흐마나)와『삼림서』(森林書, Āraṇyaka, 아라냐까,)와『비의서』(秘義書, Upaniṣad, 우빠니샤드)를 모아서 노래의 형태로 전승해 오는 전통이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전체 10장(만달라, Maṇḍala)으로 구성되어 있는『리그베다』(Ṛgveda의 2장부터 7장까지는『리그베다』파에 속하는 바라문 가문들에서 전승되어 오던 찬미가(sūkta)들을 각각 가문별로 모은 것이다. 예를 들면『디가 니까야』제1권「암밧타 경」(D3 §2.8)에서 언급되고 있는 유명한 바라문 가문들 가운데 하나인 웻사미따(Sk. Viśvāmitra)는『리그베다』3장을 암송(합송)으로 전승해 온 가문의 이름이며, 와마데와(Vāmadeva)는 4장을, 바라드와자(Bharadvāja)는 6장을, 와셋타(Sk. Vasiṣṭha)는 7장을 암송하여 전승해 온 가문의 이름이다. 그리고 8장은 깐와(Sk. Kaṇva)와 앙기라스(Sk. Aṅgiras) 두 가문의 전승을 모은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디가 니까야』를 아난다 존자의 제자들이 합송하여 전승하고,『맛지마 니까야』는 사리뿟따 존자의 제자들이,『상윳따 니까야』는 깟삿빠 존자의 제자들이,『앙굿따라 니까야』는 아누룻다 존자의 제자들이 암송하여 전승해온(DA.i.15) 초기불교교단의 니까야 전승 방법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리그베다』9장은 제사에서 아주 중요한 소마(Soma) 즙에 관계된 찬미가들을 모은 것이다. 1장과 10장은 일종의 잡장(雜藏)인데 가문과 관계없는 시대적으로 조금 더 늦은 찬미가들을 모아서 구성한 만달라이다. 인도 종교계의 사정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불교교단도 부처님 말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방법론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특히 부처님의 상수제자였던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와 마하깟사빠 존자 같은 바라문 가문 출신들에게는 자연스런 추세였을 것이다. ③ 아함이란 무엇인가?
이들은 한문 번역본인 아함(阿含)만 남아있다. 한문 번역본의 저본이 되었을 범본 아가마(Āgama)는 극히 일부 단편만 발견되었을 뿐 지금은 소실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들은 한문으로 축약되어 번역되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초기불교의 일차자료가 되기에는 불충분하다 할 수 있다. 물론 니까야와 비교 가능하기 때문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편『청정도론』과 여러 주석서와 복주서 문헌들에서는 니까야와 아가마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4부 니까야를 4가지 아가마(catu Āgama)로 부르고 있으며(DA.i.2 등)『디가 니까야』를 ‘디가 아가마’로(DA.i.2)『맛지마 니까야』를 ‘맛지마 아가마’로(MA.i.1)『상윳따 니까야』를 ‘상윳따 아가마’로(SAṬ.i.6)『앙굿따라 니까야』를 ‘앙굿따라 아가마’로(AA.i.3) 부르기도 한다.
⑶ 왜 초기불교가 중요한가? ▲ 위로
모든 나무에 뿌리가 있듯이 불교 2600년의 전개에도 그 뿌리가 있다. 뿌리를 거부하고 나무가 살아남을 수 없듯이 뿌리를 모르는 불교는 역사를 아는 이 시대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다.
무엇이 불교고 무엇이 불교가 아니냐는 판단을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은 불교의 뿌리인 초기불교가 될 수밖에 없다.
부처님의 원음을 통해서 중국불교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원효 스님 등이 추구했던 자주불교의 전통을 오늘에 구현할 수 있다.
4. 초기불교의 사상
① 초기불교의 교학은 온․처․계․근․제․연(5蘊․12處․18界․22根․4諦․12緣)의 6가지 주제로 집약된다.
『청정도론』에서 붓다고사 스님은 “여기서 무더기[蘊, khandha], 감각장소[處, āyatana], 요소[界, dhātu], 기능[根, indriya], 진리[諦, sacca],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 등으로 구분되는 법들이 이 통찰지의 토양(paññā-bhūmi)이다.”(Vis. XIV.32)라고 정의하여 불교교학의 근간을 온․처․계․근․제․연의 여섯으로 설명하고 있다. 논장의 두 번째인『위방가』(분석론, Vbh)에도 제1장부터 제6장까지의 주제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불교에서 조석으로 독송되는『반야심경』에도 기본교학은 온․처․계․제․연의 다섯으로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 ② 초기불교의 수행은 사념처․사정근․사여의족․오근․오력․칠각지․팔정도의 7가지 주제로 구성된 37보리분법(조도품, 助道品)으로 정리되고 이것은 다시 계․정․혜(戒․定․慧, 계행․삼매․지혜) 삼학과 사마타․위빳사나[止觀] 등으로 체계화되기도 한다. 정리해 보면, 불교의 목적은 행복의 실현이며 특히 궁극적 행복으로 불리는 열반의 실현이다.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부처님께서는 법을 강조하셨으며 법은 이론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을 갖추고 있다. 이론적 측면을 교학이라 부르고 실천적 측면을 수행이라 일컫는다. 교학의 주제는 온․처․계․근․제․연의 여섯 가지로 정리된다. 수행의 주제는 37보리분법을 구성하는 일곱 가지이요 이는 계․정․혜 삼학으로 귀결되며 정은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성취되고 혜는 위빳사나 수행으로 완성된다.(A2:3:10) 온․처․계․근․제․연으로 정리되는 교학은 다시 제(사성제)로 축약되고 37보리분법으로 정리되는 수행은 8정도로 귀결된다. 그리고 사성제의 도성제는 8정도를 뜻하고 8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바른 견해)은 사성제를 아는 것으로 정의된다.(S45:8) 그러므로 사성제와 팔정도는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구조이다. 즉 교학(이론)에는 수행(실천)이, 수행에는 교학이 포함되어 이론과 실천이 함께한다. 부처님의 최초설법인「초전법륜경」(S56:11)은 바로 이 사성제와 팔정도를 천명하시는 가르침이다.
⑵ 초기불교 교학의 주제, 온․처․계․근․제․연(蘊․處․界․根․諦․緣) ▲ 위로
부처님께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는 ① 오온(五蘊, panca-kkhandha)이라 말씀하셨다. 나라는 존재는 물질(몸뚱이, 色), 느낌[受], 인식[想], 심리현상들[行], 알음알이[識]의 다섯 가지 무더기[蘊]의 적집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능력을 ② 22가지 기능[根]으로 정리하여 말씀하셨다. ‘세상 혹은 일체(존재하는 모든 것)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③ 12처(혹은 6내처와 6외처)와 ④ 18계로 말씀하셨다.
⑶ 5온․12처․18계․22근․4제․12연의 개관 ▲ 위로
⑷ 초기불교 수행의 주제 ▲ 위로
초기불전에서 바와나(bhāvanā)는 다양한 문맥에서 나타난다. 37보리분법을 닦는 것으로도 나타나고(D27 §30) 감각기능을 닦는 것(indriya-bhāvanā)으로도 나타나며(M152)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닦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M118) 그 외 여러 문맥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석서도 다양한 설명을 하고 있다. 37보리분법을 수행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AA.i.81)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닦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기도 하며(AA.i.82)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citta-vūpasama) 즉 삼매수행을 지칭하기도 하고(SA.i.106) 자․비․희․사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닦는 것도 수행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석서의 여러 군데서는 향상(vaḍḍhi, vaḍḍhana)을 수행이라고 설명하고 있다.(MA.iii.243 등) 그러므로 향상하는 모든 노력이나 행위를 수행(bhāvan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상식적이면서도 적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⑸ 37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菩提分法] ▲ 위로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대답이다. 무엇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 다섯 가지 기능[五根], 다섯 가지 힘[五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다.”(「까뀌 자루 경」(S22:101) §4)
5. 초기불교의 목적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경제행위, 정치행위, 문화행위, 철학행위, 의술행위, 종교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불교도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한역된 많은 경론에서도 불교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 즉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나타나고 있고(『大般若波羅蜜多經』『大方廣佛華嚴經』『大智度論』등) 성철스님을 비롯한 한국의 많은 스님들도 불교의 목적을 이렇게 표현하여 왔다.(『백일법문』성철스님, 장경각, 1992 참조) 초기불전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것을 간추려보면 ① 금생의 행복 ② 내생의 행복 ③ 궁극적 행복이 된다.(혹은 인간의 행복, 천상의 행복, 궁극적 행복, SA.i.328 등)
⑵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 ▲ 위로
“많이 배우고 기술을 익히며 계행을 철저히 지니고 고운 말을 하는 것,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라네. (Sn {261}) 베풀고 여법하게 행하며 친척들을 보호하고 비난받을 일이 없는 행위를 하는 것,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라네.”(Sn. {263})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탈것과 화환과 향수와 화장품과 침상과 숙소와 등불을 보시한다. … 그의 마음은 낮은 곳으로 기울고 높은 [도과를 위해] 닦지 않아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부유한 끄샤뜨리야들이나 바라문들이나 장자들의 일원으로 … 삼십삼천의 천신들의 일원으로 … 야마천의 천신들의 일원으로 … 도솔천의 천신들의 일원으로 … 화락천의 천신들의 일원으로 … 타화자재천의 천신들의 일원으로 … 범중천의 천신들의 일원으로 태어난다.
⑶ 열반의 실현이 궁극적 행복이다 ▲ 위로
“엄격한 삶을 살고 청정범행을 닦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보고 열반을 실현하는 것 —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로다.”(Sn. {267})
⑷ 깨달음과 이고득락(離苦得樂)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 위로
괴로움[苦]에 사무치고 괴로움의 원인[集]을 밝히고 괴로움이 소멸된 궁극적 행복인 열반[滅]을 천명하고 열반에 이르는 길[道]을 드러내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진리는 괴로움을 여의기 위한 것[離苦]이고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궁극적 행복인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得樂]이다. 그러므로 이고득락이라는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의 구체적인 내용이요 불교의 진리인 사성제와 같은 내용이 된다. 한편 생․노사로 대표되는 괴로움의 발생구조를 밝히는 12연기의 유전문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을 드러내는 고성제와 집성제에 배대가 되며, 생․노사로 대표되는 괴로움의 소멸구조를 밝히는 12연기의 환멸문은 괴로움이 소멸된 경지인 열반[滅]과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道]을 천명하는 멸성제와 도성제에 배대가 된다. 그러므로 12연기의 가르침도 사성제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며 이것은 12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에 배대(配對)가 되고 동시에 이것은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열반)을 실현하는 것[離苦得樂]이라는 불교의 목적과도 같은 내용이 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강조하여 말하면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고 행복을 강조하여 말하면 이고득락이요 궁극적 행복인 열반의 실현이 불교의 목적이 되며 이 둘은 결국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⑸ 초기불교의 특징은 해체해서 보기이다 ▲ 위로
초기불교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해보라면 주저 없이 ‘해체해서 보기’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해체(vibhajja)’라는 용어는 이미 초기불전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으며(S8:8) 주석서는 “부분(koṭṭhāsa)으로 존재를 해체하는 것(vibhajanta)”(SA.i.279)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해체는 vibhajja(vi+√bhaj, to divide)를 옮긴 것인데 이 위밧자(vibhajja)라는 술어는 빠알리 삼장을 2600년 동안 고스란히 전승해온 상좌부 불교를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밧자와딘(Vibhajja-vādin, 해체를 설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다.(VinA.i.61; Vis.XVII.25 등)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고유성질(sabhāva)을 가진 법들로 해체해서 보는 것이야말로 아비담마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러면 무엇을 해체하는가? 개념[施設, paññatti]을 해체한다. 인간은 실로 개념의 동물이다. 인간은 수많은 대상을 대하면서 무수한 인식이나 관념들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 요소를 뽑아내어 종합하여 특정한 개념들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런 개념을 만들어내면 우리는 즉시 그것에 의미부여를 하게 되고 그것을 실체화하여 그것에 속아버리게 된다. 개념들에 묶여있는 한 진정한 자유, 진정한 해탈이란 없다. 이처럼 해체의 궁극적 지향점은 개념[施設, 假名, paññatti]의 해체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명칭이나 개념에 속게 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의 도처에서 강조하신다.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면, 형성된 모든 존재들[有爲法, saṅkhata-dhammā]의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함으로 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離欲] 그래서 해탈․열반․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초기불전의 도처에서 강조되고 있다. 특히『상윳따 니까야』의「무더기 상윳따」(S22)나「감각장소 상윳따」(S35)나「인연 상윳따」(S12) 등의 많은 경들은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상윳따 니까야』「와지라 경」(S5:10)에서 와지라(Vajirā) 비구니 스님은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읊고 있다.
마라여, 그대는 견해에 빠졌는가? 단지 형성된 것들[行]의 더미일 뿐 여기서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도다. 마치 부품들을 조립한 것이 있을 때 ‘마차’라는 명칭이 있는 것처럼 무더기들[蘊]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인습적 표현이 있을 뿐이로다.”(S5:10)
해체해서 보기의 가장 좋은 비유로는「대념처경」(D22)에 나타나는 백정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마치 솜씨 좋은 백정이나 그 조수가 소를 잡아서 각을 뜬 다음 큰길 네 거리에 이를 벌려놓고 앉아있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요소(界)별로 고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고.”(D22 §6; M10 §12)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무슨 뜻인가? 백정이 소를 키울 때도 도살장으로 끌고 올 때도, 끌고 온 뒤에 묶어서 둘 때도, 잡을 때도, 잡혀 죽은 것을 볼 때도, 그것을 베어서 부분마다 나누지 않고서는 그에게 ‘소’라는 인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뼈로부터 살을 발라내어 앉아있을 때 ‘소’라는 인식은 사라지고 ‘고기’라는 인식이 일어난다. 그는 ‘나는 소를 팔고, 그들은 소를 사가져 간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고기를 팔고, 그들은 고기를 사가져 간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이 비구가 이전의 재가자이었거나 출가를 하였어도[명상주제를 들지 않는] 어리석은 범부일 때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덩어리를 분해(해체)하여 요소별로 따로따로 반조하지 않는 이상 그것에 대해 중생이라거나 사람이라거나 인간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DA.iii.770; MA.i.272)
⑹ 열반을 실현하는 세 가지 교학적인 단계 ▲ 위로
그리고『청정도론』을 위시한 주석서 문헌에서 무상․고․무아는 ‘세 가지 해탈의 관문(tividha vimokkha-mukha)’이라 불리고 있다.(Vis.XXI.67) 무상을 꿰뚫어 알아서 체득한 해탈을 ‘표상 없는 해탈[無相解脫, animitta-vimokkha]’이라 하고, 고를 꿰뚫어 알아 증득한 해탈을 ‘원함 없는 해탈[無願解脫, appaṇihita-vimokkha]’이라 하고, 무아를 꿰뚫어 알아 요달한 해탈을 ‘공한 해탈[空解脫, suññata-vimokkha]’이라 한다.(Vis.XXI.70)
이것이 초기불전의 도처 특히『상윳따 니까야』에서 중점적으로 설해지고 있는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세 가지 교학적인 단계이다. 본서의 제2장 초기불교 교학에 실린 5온․12처․18계의 가르침은 이 세 단계가 그 핵심이 됨을 강조하고 싶다.
6. 맺는 말 ▲ 위로 이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과 초기불교사상’이라는 주제를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와 초기불교와 초기불교사상과 초기불교의 목적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해 보았다. 소납은 인도에서 10년 유학을 하면서 베다와 제사학(미맘사, Mimāṁsā)을 전공하였다. 학교 수업 외에는 10년 동안 은퇴하신 노교수님들을 방문하여 개인교수를 받으면서 리그베다와 초기 우빠니샤드들과 자이나교의 교전들을 범어로 읽었다. 특히 3년에 걸쳐서 인도 제사학의 기본이 되는『샤따빠타 브라흐마나』(Satapatha Brāhmaṇa)를 산스끄리뜨 원전으로 다 읽었는데 초기불교의 중요 술어들이 아주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인도사상 특히 제사학과 초기 우빠니샤드와 초기불교를 비교해서 하고 싶은 말들이 적지 않다. 불교와 자이나교를 포함한 인도 종교와 사상 전반에서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주제는 ① 신 혹은 절대신 혹은 신들(brahma, devatā)의 문제 ② 윤회(saṁsāra)의 문제 ③ 해탈(mokṣa)의 문제의 셋으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도 이 세 가지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절대 신의 문제와 윤회의 주체 문제와 진정한 해탈의 문제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① 초기불교에 의하면 절대 신은 없다. 신들은 인간들보다 뛰어난 존재이지만 이들도 윤회한다. 그리고 윤회의 주체(ātman)는 없다. 범아일여가 되는 것 혹은 아뜨만에 계합하는 것은 진정한 해탈이 아니라고 여긴다. 자아가 있다는 인식이나 해탈했다는 인식에 사로잡힌 것일 뿐이다. 그리고 절대 신의 문제는 인도철학 안에서도 달라진다. 신은 인간에게 감응을 하는가? 인간에게 복을 주는가? 복을 준다면 어떻게 주는가? 인간은 신 혹은 신들이 될 수 있는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 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육파철학과 자이나교와 불교에서 다 다르다. 예를 들면 8세기에 베단따의 거장 상카라(Saṅkara)는 절대적 신성이라 할 수 있는 브라흐만을 니르구나 브라흐만(nirguṇa brahman)으로 설명한다. 절대적 신성은 이법이나 진리이지 어떤 공덕이나 공능을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11세기에 라마누자(Rāmanuja)는 브라흐마는 복덕을 구족하였고(saguṇa brahman) 그래서 인간에게 감응을 한다고 주장한다. 14세기에 마다와(Madhava)는 완전한 이원론으로 브라흐마를 설명하였는데 브라흐마는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단독자로 이해하였다 한다. 그의 사상은 인도를 정복한 이슬람교도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② 그러면 윤회의 주체가 없는데 어떻게 윤회하는가? 14세기에 마다와(Madhava)가 인도철학을 베단따 철학의 입장에서 정리한 사르와다르샤나 상그라하(전철학강요, Sarvadharśana-saṅgraha)에서도 이것을 들어서 불교를 공박하고 있다. 심지어 요즘의 불교학자들 조차도 이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하기도 한다. 초기불교의 주석서들은 한결같게 오온의 흐름으로 윤회를 설명한다. <주해4> “5온․12처․18계(蘊․處․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을 윤회라 한다(khandhānañca paṭipāṭi dhātuāyatanāna ca abbhocchinnaṁ vattamānā saṁsāro ti pavuccati).”(DA. ii.496; SA.ii.97) “윤회란 오온 등이 끊임없이 전개되어가는 연속이다.(khandhādīnaṁ avicchinna-ppavattā paṭipāṭi)”(SA.ii.156) 상호의존적인 흐름[相續, santati]을 강조하는 이러한 초기불교의 입장은 오히려 문자적으로 함께 흘러감을 뜻하는 삼사라(saṁ+√sṛ, to flow)의 언어적 의미에 더 가까운 설명이라 할 수 있다. ③ 인도의 모든 철학 혹은 종교체계는 해탈(mokṣa)을 설한다. 이것은 인도철학의 가장 큰 특징으로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주제이다. 그러면 해탈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불교의 가장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주제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해탈은 착각일 뿐이고 견해일 뿐이라는 것이 불교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탐․진․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해체해서 봐야 하고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꿰뚫어 봐야 하며 그래서 염오가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해탈(vimutti)이라고 강조한다. 인도사상과 불교사상을 비교하기 위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본 강의를 마무리하게 되어 개인적으로는 아쉽게 생각한다. 미진한 소납의 강의를 들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이 인연으로 금생에 진정한 해탈을 실현하는 튼튼한 토대를 만드시기를 기원한다.
A. Aṅguttara Nikāya(앙굿따라 니까야, 增支部) AA. Aṅguttara Nikāya Aṭṭhakathā = Manorathapūraṇī(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 D. Dīgha Nikāya(디가 니까야, 長部) DA. Dīgha Nikāya Aṭṭhakathā = Sumaṅgalavilāsinī(디가 니까야 주석서) Dhp. Dhammapada(법구경) Jā. Jātaka(本生譚, 자따까) M. Majjhima Nikāya(맛지마 니까야, 中部) MA. Majjhima Nikāya Aṭṭhakathā(맛지마 니까야 주석서) S. Saṁyutta Nikāya(상윳따 니까야, 相應部) SA. Saṁyutta Nikāya Aṭṭhakathā = Sāratthappakāsinī(상윳따 니까야 주석서) Sn. Suttanipāta(숫따 니빠따, 經集) Thag. Theragāthā(장로게) Vin. Vinaya Piṭaka(율장) Vis. Visuddhimagga(청정도론, 위숫디막가) 『디가 니까야』 각묵 스님 옮김, 초기불전연구원, 2006 『맛지마 니까야』 대림 스님 옮김, 초기불전연구원, 2012 『상윳따 니까야』 각묵 스님 옮김, 초기불전연구원, 2009 『앙굿따라 니까야』 대림 스님 옮김, 초기불전연구원, 2006~2007 『청정도론』 대림 스님 옮김, 초기불전연구원, 2004.
[출처 : 초기불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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