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우리나라에서도 아동학대로 인하여 사회가 들썩이며 아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였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기관에서의 학대도 문제이지만 부모에게서 받는 학대로 인하여 죽음까지 이르게 된 현실에 할 말을 잃고 비탄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짐승도 자기 새끼에게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목숨을 걸고 새끼를 지킵니다. 말 그대로 짐승만도 못한 셈입니다. 그런데 생각 외로 그렇게 잔인한 지경은 아니더라도 부모에게서 학대를 당하는 아이들이 꽤 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히 아동 보호를 위한 조치가 날로 강화되어 왔습니다. 우리도 조만간 서구사회 수준까지 이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서구사회 수준은 어떠할까요?
아이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은 부모의 보살핌 아래 자라는 것입니다. 생활 형편은 고사하고 일단 아이는 부모의 손안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러니 가능하면 부모의 손에 맡기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그 전후 사정을 확실하게 알아보는 작업도 필요합니다. 무작정 부모에게서 아이를 분리시키는 일은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한두 가지 나타난 정황만으로 일방적 조처를 행하는 것은 자칫 섣부른 판단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와 아이의 분리는 자연법칙을 깨뜨리고 인륜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일생일대의 상처를 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잘 살아보자고 이민을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가 소통에 지장이 없을 만큼 되었으니 시간도 얼마간 지났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일자리부터 안정되지 못합니다. ‘조타’는 임금도 제대로 못 받고 실직 중입니다. ‘벨라’가 가사도우미를 하면서 간신히 가정을 지키고 있지만 다섯 식구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아들은 겨우 십대에 들어섰으니 한창 공부해야 할 때입니다. 여섯 살 ‘루’는 청각장애인입니다. 사회복지과에서 마련해준 보청기를 사용하고 있지만 고장이 났습니다. 어쩔 수 없이 수화로 소통합니다. 이제 몇 개월 된 ‘제시’는 누군가 옆에 지켜줘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사회복지과에서 확인방문하고 있습니다.
사용하다 고장이 나면 그것도 복지과에서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트집 잡힐까 두려워 고장 난 사실을 숨기려 합니다. 어린이집에서 제대로 듣지 못하는 루가 설명을 하지 못하자 선생님은 아이를 살펴보다 멍 자국을 발견합니다. 복지과에 신고가 되고 복지과에서 집으로 들이닥칩니다. 변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부모와 아이들이 강제 분리됩니다. 아이들은 모두 복지과 직원들이 데려가 빠른 시간 내 입양 수속을 밟습니다. 변호사를 부를 만한 경제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행히 전 복지과 직원이었던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입양절차가 성공하면 복지과에 그만한 혜택이 주어진답니다. 어찌 보면 그들만의 사업이기도 하다 싶습니다. 그러니 그들도 자기네 실적 쌓기에 힘쓰겠지요.
얼마 후 면회가 허락됩니다. 면회 자리에는 복지과 직원이 배석합니다. 모두 반드시 자기네 언어, 영어만을 사용해야 합니다. 감시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루와는 수화밖에 되지 않는데 허락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알아들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면회는 강제 중단됩니다. 수화 통역사를 준비하든지, 복지과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자기 방침만 있을 뿐, 정작 도움을 필요로 하는 대상자의 편의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과연 ‘사회복지과’란 무엇을 하는 곳인가 묻고 싶어집니다. ‘복지’라고요? 누구의 복지를 위한 기관인가요? 내 자식인데 왜 너희들이 나서서 야단이냐고 아우성 쳐봐도 소용없습니다. 법이니까요.
비교적 똘똘한 아들 ‘디에고’가 제일 먼저 입양되어 갑니다. 그리고 어린 제시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루는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 입양하려는 사람에게도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남아 있습니다. 이민자의 약점 때문인지 재판도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행히 도움을 받아 벨라가 판사 앞에서 하소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그리고 루에게는 학대가 아니라 몰랐던 병이 있음을 알게 된 사실을 말합니다. 내 자식과 대화를 하려는데 소통할 수 있는 언어는 수화밖에 없는데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항변합니다. 어쩌면 복지과에서도 루는 처리 곤란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순순히 내주었겠지요.
참으로 답답하고 아픈 이야기입니다. 어린 제시는 아마도 새 부모에게 빨리 적응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무슨 복지가 이런 복지가 있는가 싶습니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이민자의 약점이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리고 복지과의 사업(?)이 연루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조직이 움직이는 것과 개인의 생활이 엇박자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개인은 감정과 정서로 움직이지만 조직은 규정으로만 움직입니다. 가능하면 조직과 대칭이 되는 일은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살아야 합니다. 영화 ‘리슨’(Listen)을 보고 생각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