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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Clinton의 LDT를 적용하여 나의 지도력 발전 단계에 대한 연구 분석 보고
신성호(DGM, Doctor of Global Ministry)과정
이 글은 학위 공부를 할 때 과제로 제출한 것입니다. 한 주간 모여서 종일 함께 공부하고 밤에 급하게 작성하여 제출하였던 것이라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1. 서론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모든 현재의 현상은 과거의 결과일 뿐이다.” 이 진리는 한 사람의 지도자가 탄생하는데도 마찬가지이다. Robert Clinton은 한 지도자가 성숙되어 가는 과정을 주권적 기반 단계, 속사람 성장 단계, 사역 성숙 단계, 인간 성숙 단계, 본궤도 진입 단계 그리고 여운의 단계 이렇게 여섯 단계로 나눈다. 한 사람의 지도자는 이런 단계를 거쳐서 자신의 리더십 모습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Lobert Clinton의 LTD를 필자에게 적용하여 현재의 리더십 단계를 점검하는 과정을 통해서 과거에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만나며 또한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에 바르게 응답하며 나아가 지금까지 필자의 부족함과 나태함으로 좋은 리더가 되는데 있어서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 보완하여 지금보다 좀 더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2. 제1단계 주권적 기반
1) 출생과 신앙적 배경: 필자는 경북 의성군 단밀면 위중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집 바로 앞에 예배당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아주 보수적인 고신교회라 어릴 적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따라서 교회를 출석한 이후부터는 주일예배는 생명처럼 여겼고, 주일날 반드시 헌금을 정성껏 준비하여 드려야 했으며, 가문에 종손으로 어른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음에도 제사는 절대로 드리지 않았다. 이렇게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주일 출석, 암송, 전도, 성경 퀴즈에 늘 1등을 하여 성탄절만 되면 교회에서 받는 학용품 상품이 적지 않았으며 학교에 다니면서 따로 학용품을 산 기억이 별로 없다.
2)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여름이면 강에서 수영과 낚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오후에는 소꼴을 먹이러 산으로, 들로 다녔다. 우리 집은 대가족이라 식구들이 많았으나 종손인 나만 증조할아버지와 겸상을 받았고, 할아버지의 귀염과 관심을 받으면서 자랐다. 겨울에는 산으로 토끼몰이를 다녔고, 강에 얼음이 얼면 직접 스케이트를 만들어 탔으며, 팽이 돌리기를 하였고, 때로는 동네를 뛰어다니며 술래잡기 놀이를 하였다.
필자는 어릴 때에 체격이 좋았고, 공부도 비교적 잘 했었기 때문에 해마다 반장 아니면 부 반장을 했고, 6학년 때는 전교 어린이회장이 되어 전교생을 통솔했었다. 가끔씩 지난날 모아든 상장들을 보니 초등학교 때 받은 모범상과 우등상이 제법 많이 있었다.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고, 가난하긴 했으나 할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엄한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그럭저럭 착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아버님께서 은혜를 받으시고 신학교에 들어가셔서 전도사가 되셨으며, 그 일로 인해서 고향을 떠나 아버님이 섬기시는 교회가 있는 곳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아버님은 한 교회에 오래 머무시지 않으셔서 자주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 공부에는 지장이 많았지만 새로운 학교에 적응해야 하고, 새 친구들을 많이 사귀는 일을 통해서 선교사 훈련을 조금씩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3) 어린 시절 신앙성장: 필자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가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고, 여름 성경학교는 해마다 기다려지는 행사였다. 어릴 적에 한부선 선교사님이 우리교회에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셨고, 선교사님을 우리 집에 모셔서 숙식을 제공하였다.
필자와 동생이 모두 선교사가 된 후에 혹시 한부선 선교사님께서 필자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에 두 자녀가 선교사가 되도록 기도하신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아니면 선교사를 대접하여 선교사의 축복을 받은 것인가!
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학교에 가기 전에 먼저 예배당에 가서 기도를 드렸으며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늘 길에도 집보다 먼저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에 교회에 다니는 학생은 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당시에 시골교회는 이웃교회에 부흥회가 있으면 그 교회에 가서 일주일간 교인들의 집에서 숙식을 하며 말씀을 듣곤 했는데 필자는 중학교 때에 어른들을 따라서 이웃교회 부흥회에 간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 이렇게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한 탓인지 고등학교에 입학할 당시에 평생 주님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 기도를 드렸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거창에서 살았는데, 작은 시골교회라 일꾼들이 별로 없었으며 전도사의 아들이었던 필자가 교회에서 많은 일을 했었다.
미션스쿨이었던 거창고등학교에서는 반에서 종교부장을 맡아 수업 전에 학급 예배를 인도했었다.
거창 고등학교에서 받은 가르침은 필자의 인생의 가치관을 정립하는데 중심이 되었다. “많이 배워서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아라. 남들이 많이 가려는 좋은 곳보다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어려운 곳으로 가라.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양심을 저버리지 말아라 등…….”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친구들은 시골교회에 교사 지원을 나갔었고, 필자는 목회자가 없는 시골 마을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를 했다. 신학도 하지 않았으면서 거의 전도사 노릇을 한 것이다. 당시는 주일성수를 거의 율법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고3 이면서도 주일날은 절대로 공부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토요일 밤 12시가 되면 하던 공부를 놓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면 주일을 온전히 지키고, 자정이 지나 월요일이 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당시는 그것이 주일을 성수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3. 제2단계 속사람 성장
1)내정훈련-정직성 점검
거창고등학교는 무감독 시험을 치른다. 학교에서 정직훈련을 하는 것이다. 만약에 양심을 속이는 일을 하면 그 자리에서 퇴학이 된다. 학생들은 지켜보는 사람이 없어도 정직하지 못한 일은 하지 않는다. Cheating은 하나님과 선생님과 친구와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비록 평생 목회자가 되기로 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운동을 너무나 좋아하여 대학에서 체육을 전공한 후에 신대원으로 가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서울대 사범대 체육교육학과에 원서를 접수하였다. 학력고사 점수도 괜찮았고, 실기도 잘하였기 때문에 합격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면접이 문제였다. 앞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뭘 할 것인지를 묻는 교수들 앞에서 잠시만 “앞으로 신학대학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겠습니다.” 라는 말 대신에 “후진들을 양성하는 교사가 되겠습니다.” 한마디만 하면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해서까지 체육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2) 순종훈련과 집합적 훈련-말씀점검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필자는 예배를 생명처럼 여겼고, 주일날 예배를 빠지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필자가 군대에 입대를 앞두었을 때 제대한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을 만났는데, 군에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입대 전까지 계속해서 “아무리 훈련이 힘든 곳이나 위험한 곳이라도 좋으니 예배는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보내 달라”고 기도드렸다. 이런 마음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가평 제3야소교에서 3개월 운전 연수를 받을 때에도 행정병으로 뽑으셔서 모든 연수생들이 주일날 작업을 나가는 날에도 사무실에 남게 하셔서 기관병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할 수 있게 해주셨다.
자대 배치를 받은 후에도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예배를 빠지지는 않았다. 주일 오전, 저녁예배는 물론이고, 수요일, 토요일 성가연습까지 교회에 나갈 수 있도록 해주셨다. 예배당에 가는 일이 너무나 즐거웠고, 예배당에 도착하여 기도할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너무나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필자를 아예 군종병으로 임명하셔서 군대생활 절반 이상은 교회에서 생활하게 하셨다. 군종병이 된 후 저녁마다 산을 넘어 각 부대를 다니며 내무반에 장병들을 모아놓고 복음을 전하였다. 때로는 깊은 산속을 캄캄한 밤에 다니는 일이 무서운 일이지만 참으로 열심히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하나님께서 선교사로 쓰시려고 그렇게 훈련시켰던 것이 분명하다. 그 훈련을 통해서 요즘도 누가 시키는 사람이 없지만 5시간에서 10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다니면서 교회를 개척하고 설교를 한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미얀마 사역을 좀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3) 친구관계
필자에겐 좋은 친구들이 많은 편이다. 특히 대학교, 신학대학원 동기들 중에서 후원해주는 친구들이 많다. 그리고 함께 교회를 섬겼던 동역자들도 부목사 생활을 하다가 담임 목사가 되면서 선교비를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필자가 모금의 은사가 없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시고, 그들로 통해서 선교를 위해서 필요한 물질을 넉넉히 채워주시는 것을 보게 된다.
목회를 잘하고 있는 어떤 친구는 필자가 사역하는 사역지에 4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을 위해서 헌금해 주었다.
어떤 친구 목사는 자기 교회도 아직 건축하지 않았지만 필자가 사역하는 선교지에 예배당을 지어주고, 신학교 기숙사를 지어주고 있다. 한국 교회의 형편이 아주 바쁘지만 필자가 한국에 들어가면 꼭 함께 모여서 운동도 하고 식사를 함께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다. 필자는 친구를 아주 넓게 사귀는 편은 아니고, 한번 사귄 친구는 깊게 사귀는 편이다.
4)외적훈련
필자는 거창고등학교 다닐 때에 교역자가 없는 시골교회를 다니면서 설교를 하였고, 그 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가 들어가기 싫어하는 시골교회에서 목회할 것이라고 결심을 했었다. 하지만 신학대학에 입학을 하고, 군대를 졸업한 후에 한국의 목회현장은 많이 달라 있었다. 신학교에서 많은 신학생들이 배출되었고, 시골에도 목회자가 없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에 필자는 고신대학에서 아세아연합신학대학으로 편입을 하였고,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의 채플 시간에는 세계선교의 상황과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져가는 많은 민족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제3세계에서 유학 온 학생들을 통해서 선교지에 얼마나 많은 선교사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기도하는 가운데 이제는 내가 가야할 어려운 곳은 더 이상 시골이 아니라 선교지였고, 그 때부터 선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서 SVMM에 가입해 선교지와 선교사를 위해서 기도했고, 선교에 관한 책을 읽었다. 대학교 졸업논문을 선교에 대해서 썼고, 신학대학원 논문도 선교에 대해서 논문을 썼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선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위해서 최대한 선교지와 비슷한 상황인 섬 지역에 들어가 목회를 하면서 어려운 환경에 적응하는 훈련을 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고신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신학석사 과정을 공부하였고, 방학 때에는 고신선교 훈련원에 들어가 선교훈련을 받고 선교지로 나갈 준비를 하나씩 해 나갔다.
한산도 섬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큰 교회를 섬기시는 목사님의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목사님은 당시 선교학을 공부하시면서 미얀마에 대한 논문을 쓰려고 준비하고 계셨는데, 당시 미얀마에 대한 자료는 한국에 별로 없었으므로, 주로 영국에 선교 본부를 둔 선교부를 통해서 자료를 받아 논문을 준비하셨다.
목사님이 섬기시던 교회에 필자의 동기가 부교역자로 있었는데, 그 친구가 필자를 목사님께 소개하여 미얀마에 대한 영문 자료를 한글로 번역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사실은 당시에 필자는 신학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큰 교회는 아니더라도 혼자 교회를 섬기다보니 새벽 기도회를 비롯해서 수요일 설교, 주일 오전 오후 설교, 구역예배 설교, 심지어 주일학교와 중, 고등부까지 혼자 다 해야 했으므로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대 선배님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 가 없어서 미얀마에 대한 자료를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목사님께서 번역을 부탁한 자료가 얼마나 많던지 수 개월간 그 자료를 번역하면서 필자는 미얀마에 대한 정치, 경제, 문화, 역사, 종교 등 거의 대부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1995년 1월에는 논문을 쓰기 위한 최종 목적으로 미얀마에 두 주간 들어가서 직접 리서치를 하고 싶다면서 필자에게 통역을 부탁하셨다. 미국 유학을 위해서 준비해 둔 영어를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는 기회였고, 선교를 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필자에게는 한 나라를 둘러볼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기회로 필자는 가난한 섬 교회에서 섬겼지만 큰 교회의 목사님의 통역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돈 한 푼 내지 않고 미얀마를 2주간 둘러볼 수 있었다. 미얀마는 필자가 태어나 처음으로 땅을 밟은 외국이자 선교가 절실히 필요했던 나라였다. 특히 얀곤 시내에 있는 쉐다곤 파고다를 둘러보고 있을 때 얼굴이 새까만 깡마른 한 여인이 뜨거운 태양빛 아래서 두 손을 하늘로 높이 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고, 미얀마 정탐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필자의 마음 한 구석에는 이미 미얀마가 깊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4. 제3단계 사역성숙
신학교를 다니면서 전도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 다닐 때에 서울에 있는 모 교회를 섬겼는데 그 교회는 다른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 새롭게 개척된 교회였다. 어른들은 그런대로 한 마음이 되어서 교회를 잘 섬겼지만 중, 고등부 학생들은 어른들에 대한 반항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친구들이 많이 있는 처음 교회에 다니고 싶은데 부모님들이 새롭게 개척된 교회에 출석을 강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 전도사님이 그 중고등부를 맡았으나 삐뚤어지고 사나와진 학생들은 그 전도사님의 지도를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전도사님께 반항을 하였다.
그 교회를 담임하시던 목사님께서는 필자가 운동을 좋아하고, 찬양 인도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학생들과 잘 어울릴 것이라고 판단하여 필자를 그 교회로 초빙했다.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가고 싶었던 필자에게는 그 교회로의 부임이 아세아연합신학대학으로 편입을 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필자가 그 중고등부를 맡아서 섬긴지 1년도 안되어 수 적으로 배가 되었고 필자는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과 성도님들께 아주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담임 목사님은 현재 큰 교회를 맡아서 시무하시는데 필자를 신뢰하고 여러 면에서 적극적으로 돕고 계신다.
부산에 있는 고신대학원에 입학을 한 후에 부산에 있는 모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기 위해서 서울에서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고 있었을 때였다.
필자의 친구가 전에 전도사로 섬겼던 삼랑진에 있는 모 교회에서 주일설교를 부탁하였다. 그 교회를 담임하시던 목사님께서 갑자가 사임을 하시게 되어 주일날 설교자가 없었고, 전에 그 교회에 전도사로 섬겼던 친구에게 설교자 한 사람을 좀 섭외해서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필자의 대학 입학 동기였던 그 친구는 필자가 아직 새로운 교회에서 사역하기 전이라 설교를 부탁했던 것이다. 주일날 맡은 일이 없으니 설교를 사양할 이유가 없었고, 그 교회를 찾아가 주일 예배를 인도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장로님과 집사님 한분이 나를 찾아와 죄송하지만 다음 주에도 한 번 더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알고 보니 그 교회는 전임 목회자와 약간 갈등이 있었던 교회였다. 담임 목사가 떠나간 후 교회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었으며 교회를 안정시킬 사람이 필요했었다. 한 번 더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설교를 마친 후에 다시 장로님과 집사님 한분이 내가 식사를 하고 있는 방으로찾아와 무릎을 꿇고 “전도사님, 목자 잃은 양과 같은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 새로 목사님을 청빙할 때까지 계속 설교를 해 주십시오. 당장 다음 주부터 설교할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때 장로님은 연세가 많으셨고 필자는 겨우 대학원 1학년생이었다. 이미 부산에 있는 모 교회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 참으로 곤란했다. 한참 고민을 하다가 필자가 가기로 한 부산에 있는 교회는 당시 부산에서 가장 큰 고신교회라 필자가 가지 않아도 갈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 교회는 당장 다음 주에 설교할 사람이 없는 실정이다.
평소에 거절을 잘 못하는 편이고 상처받은 교인들을 몰라라 하고 내 살겠다고 도망가는 것은 앞으로 목사가 될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담임 경험도 없는 신대원 1학년 전도사가 혼자 장년 100명, 학생회 30여명, 주일학생 80여명이 되는 교회를 혼자 맡아서 설교를 하려니 설교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학교 채플 시간에 교수님들이나 목사님들이 하는 설교를 받아 적고 그것을 참고하여 다시 본인의 설교로 약간 수정하여 열심히 설교를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회복시키시고 부흥시켜주셨다.
그런데 문제는 몇 달이 지나도 장로님은 새로운 담임 목사님을 청빙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 상태로 오래 갈 생각이었다. 전도사가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히 설교하였더니 교인들도 좋았던지 필자에게 그 교회를 맡아 줄 것을 제안했다.
하루는 장로님께 “이 교회를 섬김 목사님을 빨리 청빙하십시오. 제가 여기서 언제까지나 있을 수 없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저는 목사님이 오시던 오시지 않던 떠나야겠습니다.” 급하게 새 목사님을 청빙하는 작업을 하였고, 새 목사님이 오시기 바로 전에 필자는 그 교회를 떠났다. 지나고 보니 그 교회에서 6개월을 섬겼고, 그 어려웠던 교회는 안정을 되찾고 새로운 목사님을 모시게 되었다.
선교지에서 제1기 사역을 마치고 지친 상태에서 한국의 후원교회 중 마지막으로 필자가 사역지로 나가기 전에 섬겼던 교회에서 사역보고를 하였다. 그 때 그 교회의 한 집사님이 필자를 찾아왔다. 손위 동서가 장로로 섬기고 있는 뉴질랜드 한인교회의 목사님이 갑자가 사임하게 되어 급하게 임시로 설교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년으로 쉬고 있는 필자에게 "그 교회에 가서 주일 설교를 하고 뉴질랜드에서 좀 쉬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선교보고를 마쳤기 때문에 좀 쉬어야 하는데 뉴질랜드에가서 쉬면 되겠다는 생각에 흔쾌히 허락을 했다. 주일날 하루만 섬기고 주중에는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그 교회 담임 목사가 평범하게 사면을 한 것이 아니라 교인들과 많은 갈등을 겪고 나가셨으며 교인들에게도 큰 상처가 있는 어려운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주일 하루만 섬겨서는 안 되고 완전히 담임 목회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게 아닌데 나는 좀 쉬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늦었다. 심신이 지쳐있어서 쉼이 필요했는데 하나님은 나를 또 어려운 교회 속으로 몰아넣으셨다. 장로님으로부터 그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그 교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교회의 회복을 위해서 섬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긴 시간 비행길를 타고 뉴질랜드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부터 교회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다. 그 때까지 담임목사와 사모님 그리고 장로님만이 기도한 교회라 새벽 기도회에 사람들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필자는 초신자들도 편안하게 참석할 수 있도록 기도회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처음에는 숫자가 많지 않아 장로님 집 큰 거실에 둥글게 앉아 간단하게 말씀을 나눈 후 각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 기도회를 마친 후에는 함께 간단하게 간식을 나누면서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뉴질랜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기도회는 한 사람씩 늘어났고, 나중에는 장로님 집에서 다 모일 수 없어서 주일날 예배 장소를 빌려 쓰는 뉴질랜드 교회를 빌려서 새벽기도회를 했다. 한 달 후에는 중, 고등학생들을 포함해 전 교인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였다. 필자는 새벽기도회 설교에 각별히 신경을 써서 준비하였고, 그 새벽기도회를 통해서 교회는 점점 회복되었고,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교회에서 6개월간 사역을 마치고 다시 사역지로 돌아올 때쯤 되어서 그 교회는 아주 건강한 교회로 회복되었고, 좋은 조건으로 한국에 계시는 목사님을 청빙하였다.
장로님 부부를 비롯해서 온 교인들이 필자에게 그 교회를 맡아서 섬길 것을 제안했지만 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신 미얀마에 할 일이 많았기에 청빙을 정중히 거절했다.
위의 사실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에 처한 교회를 다시 새롭게 하는데 필자를 자주 사용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어렵고 힘든 곳으로 가서 그들을 섬기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던 것일까?
지금 사역하고 있는 미얀마 이주근로자들도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태국에 있는 미얀마 사람들은 대부분이 경제 난민이거나 정치 난민들이다.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들, 부모와 친척과 친구들을 뒤로한 체 언어가 다른 나라 태국에서 태국 사람들이 힘들어서 하지 않는 3D 업종에 종사하는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며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어루만지도록 필자를 이곳으로 보내셨다. 계속해서 어려움에 처한 교회를 회복시키도록 훈련시키신 하나님께서 필자를 통해서 상처 입은 미얀마 영혼들을 어루만져 주시길 원하신다.
5. 제4단계 삶의 성숙
1)유학의 길
아세아연합신학대학으로의 편입은 미국 유학을 위하여 선택한 것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유학을 가려고 영어 공부를 했었고, 토플 시험도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국 유학을 위해서 영어공부를 좀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들어간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서 유학의 꿈을 접게 하시고, 선교사의 길로 들어서도록 도전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확신 가운데 유학의 꿈을 접고 선교를 준비했었다. 그리고 미얀마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미얀마의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Th. M 학위를 가지고는 좀 모자란다는 생각이 들어서 총신대학연장교육원에 들어가 DGM 공부를 시작하였다. 나중에 미국 미시시피 주 잭슨에 있는 리폼드 신학교로 편입을 하게 되어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대학을 마치고 유학을 가서 아무런 목회경험이 없이 이론만 배워 학위를 받는 것보다는 선교지에서 오랜 경험을 쌓고, 필자가 사역하는 사역의 결과를 정리해서 학위를 받은 게 얼마나 더 값진가를 생각하며 감사하였다.
이미 리폼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학교명이 국제총신대학원에서는 필자에게 계속해서 수업에 대한 정보를 메일로 보내주었고, 늘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았던 필자는 필요한 수업이 있을 때마다 공부에 참석하여 본인의 부족함을 조금씩 메워 나가고 있다. 교회개척과 함께 신학교 사역도 하고 있기 때문에 학위는 높을수록 학교에 대한 평가가 좋아질 수 있기 때문에 필자는 가능한 상위 학위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노력하고 있다. 지도자는 남들을 지도하기 전에 끊임없이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2)생활의 어려움
시골교회 목회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가정이 늘 어려웠다. 욕심이 많아 배우고 싶은 것은 많았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 내가 원하는 만큼 배우지 못함이 아쉬웠으며 그래서 평소에 배우고 싶었던 피아노나 기타, 영어회화는 모두 학원에 한 번도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배웠다.
부친이 서울에서 개척교회를 하실 때 사택이 따로 없었고, 예배당과 사택이 함께 붙어 있었다. 공부는 하고 싶은데 늘 집에 사람들이 왔었기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없었다. 독서실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했더니 돈이 없다는 아버님의 말씀에 정말 화가 났었고, 부친이 그렇게 무능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대학을 다닐 때나 대학원을 다닐 때에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을 한꺼번에 다 내어보지를 못했다. 필자가 사례를 받아서 매달 조금씩 갚아나갔다.
3) 결혼
내 아내는 필자가 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의 권사님 딸이다. 필자가 그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을 때 권사님은 필자를 좋게 보고 막내딸과 결혼을 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셨다. 권사님에게는 딸이 셋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교역자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생각했는데, 첫째는 의사와 결혼을 하였고, 둘째는 사업가와 사귀고 있었고, 막내만 남았다. 이북 출신의 장모님은 새벽 기도회 때 그 교회에서 가장 늦게까지 남아 기도하시는 분이셨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었겠지만 장모님은 날마다 딸이 필자와 결혼하도록 기도하셨고, 그 결과 평소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그 권사님 딸이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기도의 능력은 참으로 무섭다. 아가씨가 유달리 많았던 그 교회에서 필자가 그 권사님의 딸과 결혼하게 된 것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어려운 섬 사역을 한다고 할 때도, 아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땅, 살기 힘들고 가난하다고 알려진 땅 미얀마 선교사로 나간다고 할 때에도 반대하지 않았었고, 전기가 잘 들어오지 않고 그렇게 더웠던 미얀마의 생활 가운데서도 불평을 한 적이 없다. 그리고 필자가 판단해서 옳다고 결정하고 추진하는 일에 대해서는 늘 믿어주고 도와주었다. 물론 아내에게 부족한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필자가 선교를 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필자의 부족함을 가장 잘 채워줄 수 있는 사람으로 적합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셨다.
4) 기도훈련과 체험
필자의 기도훈련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필자는 새벽 4시30분이면 일어나 자취집 부근에 있는 교회의 새벽기도에 참석을 하였다. 고2학년부터 시작한 새벽기도는 군대생활을 제외하고는 선교사로 나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요즘도 그레이스 선교부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원인은 바로 기도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처음 개척한 치앙마이 은혜교회는 아침 9시에서 10시까지 사역자 기도회를 한다. 수요일 오전 10에는 수요 기도회가 있는데 꽤 많은 청년들이 참석하여 함께 기도를 드린다. 치앙마이 지역에 있는 현지인 사역자와 선교사는 금요일 오전은 12시까지 함께 기도회를 한다. 메솟 지역은 토요일 오전에 선교사와 사역자 기도회를 한다. 그리고 토요일은 그레이스 선교부 선교사 부부 기도회가 있다. 평소에 기도 훈련을 했었기 때문에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많은 기도회를 만들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다. 그레이스 선교부는 이 기도에 힘입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미얀마 영혼들을 위해서 힘 있게 사역을 확장하고 있다.
치앙라이 교회를 개척할 당시에 그 교회에 출석하는 세 부부가 임신을 못하여 선교사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수요예배를 마친 후에 필자는 교인들과 함께 통성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제안했고, 필자가 마무리 기도를 드렸다. 얼마 후 그 세 부부는 모두 아이를 갖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아이라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른다. 그 일로 인해서 교회는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교인들의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보았다.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부터 대학교 선교 동아리에 들어가서 선교지에서 오는 선교사님들의 선교 편지를 읽고 기도해주는 시간이 있었다. 선교사들의 편지에는 선교사들과의 갈등, 현지인 동역자과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있었다. 그 때부터 필자의 기도 제목에는 선교지에 나갔을 때 좋은 동역자들을 만나게 해 달라는 기도제목이 추가되었고, 오랫동안 그 기도를 했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고, 좋은 동료 선교사와 수십 명의 미얀마 현지인 동역자들을 준비해 주셔서 감사하고 있다.
5) 설교 훈련과 책임
고등학교에 시골에 목회자가 없는 교회에 다니면서 설교를 했는데 주로 주일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했기 때문에 쉬운 설교를 준비했었다. 그 후 군에서 군종생활을 하면서 주일날 뿐 아니라 저녁에 자주 각 부대 내무반을 다니면서 많은 장병들 앞에서 많은 설교를 하였는데 그 때도 대부분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아주 쉽게 재미있게 설교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대학원을 다니면서 전도사 생활을 할 때에 필자가 섬기던 교회는 담임 목사가 주일 오전예배는 고정으로 하셨고, 주일 오후예배,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철야기도회는 모든 교역자들이 교대로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였다. 따라서 필자에게도 설교를 할 기회가 아주 많이 주어졌었다.
신대원을 졸업한 후에는 약 3년간 섬에서 단독 목회를 하였기 때문에 모든 설교를 필자 혼자서 다해야만 했다. 많은 설교를 준비 해야만 했지만 그렇다고 대충 준비해서 하지 않았고, 모든 설교에 심혈을 기울였었다. 뿐만 아니라 섬 교회라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많아서 설교를 쉽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이런 노력 덕분으로 요즘도 설교가 쉽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신앙의 기초가 없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쉽게 진리를 선포해야 하는 선교지에서 그 때 쉽게 설교하려고 노력했던 것들이 아주 유용하게 사용된다는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이런 것까지 배려하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6) 떠나는 훈련
필자는 아버님의 목회지를 따라서 많이 이사를 했고, 그 때마다 정든 학교와 친구들을 떠나야만 했었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았으나 차츰 그것이 익숙해져 고등학교 때 부모님을 떠나 자취생활을 했었다. 그 후에 대학교에서 기숙사 생활, 군대생활 그리고 대학원까지 방학 때만 집에서 지낼 수 있었을 뿐 집을 떠나서 생활 했었다. 이것은 선교사로서 떠나는 훈련의 한 과정이었는지 모르겠다. 필자는 떠나는데 익숙해져 있었고, 혼자서 결정하고 추진하는 것이 낯설지가 않았다.
최근 선교학계에서는 선교지에서의 리더십 이양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되고 있다. 선교지 교회가 자립, 자치, 자전하는 교회로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선교사에게 있는 리더십을 적절한 시기에 현지인에게 잘 이양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선교사들이 리더십을 이양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현실을 자주 본다.
필자는 거창고등학교의 특별한 가르침의 영향과 늘 떠나야만 했던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영원한 내 것은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던 것 같다. 그래서 개척한 교회는 경제적으로 자립이 되고, 목회자의 리더십이 어느 정도 세워지면 바로 현지인에게 리더십을 이양하고 있다. 현재까지는 리더십을 이양한 교회들이 더욱 건강하게 잘 성장하고 있다. 태국에 온 후에 개척한 교회들 중에는 대부분이 3-4년 사이에 자립을 하였고, 리더십도 대부분 현지인 목회자에게 이양한 상태이다.
7) 학문과 실재 적용
필자는 97년에 선교지로 파송 받아 약 14년간 사역하였다. 1기 사역은 미미 했지만 언어훈련과 미얀마의 문화를 익히는 시간이었고, 미얀마 상황에서 어떤 것이 가장 좋을까를 고민하며 이런 저런 사역을 시도해 본 기간이었다. 우리 교단의 선임 선교사가 없었으므로 처음 선교지에 도착한 사람으로서 치러야하는 대가는 모두 지불한 것이다.
제2기 사역부터는 자신감이 붙었고, 하나님께서 많은 일거리와 동역자들을 보내 주셔서 필자가 감당할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많은 사역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간 대학교 다닐 때부터 선교를 준비하며 읽었던 그 많은 책들과 선교에 대해서 쓴 대학졸업 논문, 대학원 졸업 논문들도 큰 도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선교지에서 혹시 가르치는 사역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Th. M을 공부하면서 선교학을 전공한 것도 선교에 대한 원리를 이해하면서 사역하게 만든 것이다. 1기 사역 때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면서 상위 학위의 필요성을 느끼고 총신대선교사연장 교육원에 입학하여 DGM(Doctor of Global Ministry) 공부를 하면서 계속해서 자신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었고, 다른 지역에서 사역하시는 많은 분들의 사역 형태나 그들의 고민 등도 학위 공부와 함께 필자의 사역에 실재로 적용하여 많은 도움이 되었다. 리더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말은 틀림없는 진리이다. 필자가 다른 선교사들과 8년간 동역하면서 큰 갈등이 없이 사역을 하고 있는 것도, 현지인 교회를 빨리 자립시키고, 현지인 사역자를 양육하여 리더십을 빨리 이양하는 것도 좋은 선교사가 되기 위한 계속해서 공부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6. 제5단계 본 궤도 진입
필자는 지금까지 교회가 없는 지역에 30개 교회를 개척하고 유치원, 초등학교, 고등학교, 신학교 사역을 하고 있다. 개척한 교회 중 11개가 자립을 하였고, 여러 교회는 이미 리더십을 이양하였다. 아직은 부족한 점도 많고, 성숙의 자리까지 나가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사역의 본 궤도에 진입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많은 사역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첫째, 팀사역 때문이다. 필자는 사역이 많아지면서 그레이스 선교부를 만들고 다른 선교사님들과 팀으로 사역을 한다. 현재는 우리 선교부에 다섯 가정이 사역을 하는데 네 가정은 목사이고, 한 가정은 장로이다. 우리 팀의 특징은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사역비를 공유한다. 사역비는 동일하게 책정된 것이 아니라 선교사의 능력에 따라 낸다. 모든 사역도 공유한다. 따라서 팀 원중 한가정이 안식년을 가도 팀원들이 조금 더 바빠질 뿐 선교 사역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시스템이다. 또한 팀으로 하는 협력사역의 단점을 보안하여 그레이스 선교부의 부장은 1년씩 돌아가면서 한다. 많은 선교부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팀을 시작한 사람이 계속해서 팀장으로 있으며 나중에 오는 사람은 부교역자 비슷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나중에 온 선교사들은 주인의식을 갖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레이스 선교부는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언어 훈련이 끝난 선교사는 모두가 차례로 선교부장이 된다. 또한 우리 선교부의 특징은 처음 그레이스 선교부와 함께 사역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경우에 1년간은 수습 기간을 갖는다. 함께 동역하고 싶은 선교사도 1년간 그레이스 선교부의 선교사들이 끝까지 함께 동역할 수 있는 선교사들인지 살피고, 그레이스 선교부 선교사들도 수습기간에 있는 선교사를 살펴서 1년 후에 만장일치의 동의를 받아야 신임 선교사는 그레이스 선교부의 정식 선교사가 될 수 있다. 이런 제도를 만든 것은, 처음에는 서로 좋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서로에게 실망하여 팀을 나가게 될 경우에 서로가 겪게 될 아픔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그레이스 선교부의 특징은 타교단과의 협력이다. 현재 고신3가정, 합동 2가정으로 초교파적으로 모인 선교부이다. 선교지에는 교단을 전파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전만 같으면 타교단도 얼마든지 함께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협력 사역을 함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선교사의 재능이 아니라 성품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성품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에서 선교를 볼 수 있어야 팀 사역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팀으로 사역할 때 어느 정도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혼자 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좋은 팀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쉽게 팀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엄청난 손해가 된다.
7. 제6단계 여운
이 단계는 선교지의 모든 것을 이양, 이임한 선교사들이나 은퇴한 선교사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 부분이라 필자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8. 결론
지금까지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셨고, 보내셨으며 사역할 일거리와 함께할 동역자들을 보내주셨다. 또한 선교에 필요한 재정도 빈틈없이 채워주셨다. 하나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실 순종했고, 기도를 요구하실 때에 기도하면서 열심히 달려온 것 밖에 필자가 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은 없으나 순종하고 꽤를 부리지 않는 모습을 보시고, 많은 일을 맡기셔서 일을 이루시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져 가는 모습을 현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특권을 필자에게 주셨다. 이 엄청난 특권을 주심에 늘 감사할 뿐이고, 현재의 사역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 나라가 굳게 세워지며 많은 영혼들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필자의 지도력 개발을 연구 분석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었다. 이 분석 과정을 통해서 필자는 현재 제4단계인 삶의 성숙과 제5단계인 본궤도 진입 중간에 있다고 판단된다.
끝으로 이 과정의 공부를 통해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어서 감사하고 이번에 공부한 모든 것이 필자를 더욱 성숙하고 좋은 리더가 되도록 만들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
첫댓글 저절로 고개 숙여집니다. 신앙의 기초가 없는 저로서 늘 부끄럽고, 가끔 신앙의 기초도 없는 제가 선교지의 자립을 주장하는것도
주제 넘는것 같아서 수없이 회계하며 보냅니다. 순수한 선교 보다는 자신의 해외 진출과 보조자로서 선교지의 자립을 돕는 기업선교라는 두마리의 토끼을 잡으려는 생각으로 수년을 성과 없이 흘려보냈습니다.
말이 먼저가 아닌 행동이 먼저여야 함에도 늘 말이 먼저 앞서서 오히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경솔함..등등 이 글을 되새기며 한나씩 조금씩 고쳐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