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김환영
다시, 그림
을유년에 시작하여 정유년 3월 31일에 그림을 마무리하였다. 중간에 평화 그림책으로 골머리를 앓기도 했으나 햇수로 12년 만에 넘긴 셈. ‘빼떼기’를 그려 보겠다고 닭을 먹이기 시작하였고, 암탉이 알을 품어 병아리들이 늘면서 많을 때는 이백 마리에 가까웠다. 놓아 먹인다고는 하지만 사료 값도 장난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나는 닭을 그리는 게 아니라 닭하고 사는 양계장 주인이 되고 말았다. 이사 나오면서 그동안 닭을 잡아 주던 앞집에 남은 닭들을 모두 드리고야 양계장 집 주인 신세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작년 말 홍성으로 이사 온 선배네서 병아리 두 마리를 얻어 다시 기르게 되었다. 그 가운데 수놈은 도둑고양이에게 채여 암평아리 한 마리만 남아 혼자 겨울을 나며 그림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빼떼기」를 그리려다 얻은 부수입도 적지 않았다. 닭들의 생리를 꽤 많이 알게 되었고, 몇 편의 시와 숫자 그림책 더미가 뜻하지 않게 만들어졌다. 생명을 기르는 일은 무엇보다 생명 자체의 이해를 도왔다. 암탉이 알을 낳고 나면 날개를 끌며 한동안 모이조차 넘기지 못한다는 게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지난겨울, 골짜기를 떠돌던 길고양이가 눈 깜짝할 사이 수평아리를 채어 갔을 때 남은 한 마리가 밤새 잠을 못자고 울어 대는데 도무지 미안해 나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춥고 귀찮기도 했지만 녀석을 품에 안고 졸면서 군불을 때고는 하였다. 병아리는 이내 골골대며 졸았다. 위로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맞닿아 팔딱거리는 심장 소리로 느낌이 전해졌다. 위로는 생명에 대한 예의를 넘어 생명을 가능하게 하고 존속시키는 힘의 원천이었다.
이 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계절의 묘사이다. 수없이 읽어도 계절의 실감들이 생생하게, 외롭고 찬란하게 전해져 온다. 또한 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정교하게 짜인 것인지 나는 이제 알 수가 있다. 심지어 작은 오류와 그 시절과 이즈음 닭의 차이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부수적인 것이고, 「빼떼기」 를 통해 권정생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림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나는 핵심 단어 두 개를 떠올렸다. ‘생명’과 ‘평화’. 이 둘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몸체이기도 하였다. 권정생 문학을 관통하는 단어이자 주제이긴 해도, 이 동화는 불에 덴 작은 생명체를 통해 생명과 평화에 대하여 매우 세밀하고 절절하게, 절박하게 말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키우던 식구들이 주인공을 잡아먹는 동화가 또 있는지 모르나, 내게는 ‘빼떼기’의 죽음까지도 그랬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빼떼기가 아닌가. 그 눈으로 그동안 그려진 그림들을 다시 보았고, 그 눈으로 마무리할 수가 있었다.
『마당을 나온 암탉 』(사계절, 2002)은 도시에 살 때 그린 거라서 닭이나 오리의 형태나 배경들이 취재에 의해 보강된 거라면, 이 책은 시골에 들어와 닭을 먹이며 그려진 것이니 이 둘은 다를 것이다. 나는 이제 예전의 그림으로 돌아갈 수 없다. 둘 사이에는 서로 다른 시간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또 시의 시간들이 있다. 그 경험들이 그림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갈지 나로서는 아직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전처럼 보지도 느끼지도 않는다. 사실 확인이 필요한 부분은 사생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화면만 보며 그림을 그린다. 그리는 방식도 다른 것이다.
순진이네 집이 초가삼간이라는 것, 닭장의 형태와 위치, 닭장 사다리가 외사다리에 새끼를 감친 것인 줄을 할아버지가 그려 주어 알았다. 각시를 처음 보시던 할아버지의 따듯한 눈길과, 둘이 부부냐고 물어 그렇게 보이냐며 되묻자 끄덕이시며 수줍게 웃으시던 모습도 생각난다. 오리고기를 사 주시고 그 집 아주머니가 넘겨준 양파 한 다발을 우리에게 꼭 같이 나눠 먹으라 하시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빼떼기」와 「무명저고리와 엄마」를 해 보려고 안동에 내려가 말씀드린 게 십 년이 넘었고 이제 할아버지는 그곳에 안 계신다. 이 그림을 보시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몇 해 전 동시집을 퇴고하면서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림도 아닌 시를 쓰다가 죽는 게 나는 좀 서운하였다. 이번에는 그림을 마무리한다고 온종일 귓속에선 매미가 울고 편두통에 시달리자니 그런 느낌이 다시 찾아들었다. 앞으로 그릴 것들이 태산이지만, 그림을 그리다 죽으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나만의 그림을 그릴 것이다.
첫댓글 김환영 선생님, 전시회에서 뵀어요. 그림이 넘넘 좋아서 넋놓고 봤는데 샘을 직접 뵈니 그림이 딱 선생님을 닮았더라구요. 그림을 위해 살던 곳도 옮길 수 있는 열정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언제나 응원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