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한 직장의 중역 간부가 찾아와 진급에 대한 불안감에 대해 마음을 털어 놓으셨다. 그래서 조금 다른 질문을 드렸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시냐고. 지금 자신의 삶이 대체적으로 행복한가 하고. 과거에 생각했던 행복을 지금 이루었는가 하고 여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시더니 하는 말씀이 그러고 보니 자신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다.
처음에 오르고자 했던 자리에 지금은 이미 와 있고, 벌고자 했던 정도의 경제력을 지금 누리고 있고, 아내도 하고 싶은 일 하며 행복해 하고, 자식들도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릴적 자신이 생각했던 바로 그 행복의 삶이 어느 새 벌써 실현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지금껏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몰랐다. 왜 몰랐을까? 여전히 돈도 더 벌어야 하고, 진급도 더 해야 하고, 자식들도 더 잘 뒷바라지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부족하고 더 필요하고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꿈이 이루어진 바로 그 순간에 조차 여전히 그 행복을 누리기는커녕 더 높은, 더 많은, 더 큰 목적을 향해 내달리고자 하는 욕심과 집착 때문에 이미 찾아 온 행복을 스스로 걷어 차 버리곤 한다.
행복은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삶을 누릴 때 비로소 삶의 완전성이 드러난다. 본래부터 완벽했고, 완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행복은 어떤 완벽한 상황이 갖춰졌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행복을 누릴 때 바로 그 완벽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고, 어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왔던 것은 완전한 환상일 뿐이다. ‘행복하기 위한 어떤 특정한 조건’이라는 것은 없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행복지수를 보라.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는 그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러한 현실이 창조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릴 것인가? 무엇을 그릴지에 대한 토대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 토대의 생각을 ‘나는 부족하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실패할 지도 모른다’ ‘나는 근기 낮은 수행자다’ 라는 데 둘 것인가, 아니면 ‘나는 완전하다’ ‘나는 풍요롭다’ ‘나는 행복 그 자체다’ ‘삶은 언제나 성공적이다’ 라는 데 둘 것인가.
전자의,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음의 토대 위에서는 언제나 ‘더 필요하고 성공해야 하고 싸워 이겨야 하고 더 많이 벌어야 하며,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현실을 그려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은 곧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더 필요하다는 생각의 본질에는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고,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 이면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면 오히려 두려워하는 그것이 창조된다. 사실은 바로 그 토대의 생각을 그려내는 것이다.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은 세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토대는 어떤가? 완전하고 풍요로우며 행복하고 삶의 모든 순간이 그대로 성공이며 나와 너가 모두 부처라면 어떨까? 완전한 존재는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더 벌 것도, 바랄 것도, 욕망할 것도 없다. 언제나 충만한 행복과 만족과 풍요로움과 평화가 넘쳐 흐른다. 넘쳐 흐르는 그 행복을 나누어 주는 것, 바로 그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 밖에는 할 것이 없다.
나는 언제나 완전하다고 외치라. 지금 이 자리에서 풍요와 행복을 누리라. 아무리 작고 사소한 기쁨이라도 그것이 바로 완전한 행복임을 알아차리라.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평일 07:50~08:00) 방송중에서
첫댓글 감사 합니다. 스님.. 이렇게 좋으신 말씀 읽을 수 있는 이 자리가 너무 충만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완전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