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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찌 보면 이 몸이라는 것이, 몸이 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이 몸이 말을 만들어내는 거면 내가 딱 죽어도 말을 할 수 있어야 돼요. 몸이 말을 하는 거니까. 그런데 내가 여기서 갑자기, 사실 딱 죽고 나면 몸이 있는데 목청이 있는데 말이 안 나오잖아요.
내가 갑자기 실신을 하면 분명히 몸은 있는데 내가 죽지도 않았는데 말이 안 나와요. 완전 시체가 돼가지고 자는 사람한테, 완전 떡이 돼서 자는 사람이나 술에 취해서 자는 사람한테, 막 깨워도 말을 못 해요. 그냥 거의 죽어있지. 그러니까 목청이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말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 몸이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몸이 말하는 거면 몸이 제멋대로 말할 수 있어야 되는데, 몸은 말할 때도 있고 말을 못 할 때도 있습니다. 귀가 소리를 듣는다고 여기지만, 귀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고 못 들을 때도 있습니다. 새소리가 울리는 것을 제 얘기에 집중하다 보면, 분명히 들렸음에도 듣지 못할 수도 있거든요.
모든 걸 듣는 게 아니라, 듣는 것도 있고 안 듣는 것도 있는 것이지요. 귀가 듣는 게 아니라, 듣는 무언가가 있단 말이지요. 이걸 뭐 옛날 사람들은 영혼이니, 뭐 영(靈)이니,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불교에서는 불성이니 자성이니 이 시체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구이냐?
이 몸뚱아리를 끌고 다니는 어떤 무언가가 있으니까, 이렇게 몸뚱아리를 끌고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겠어요? 집에도 갔다가 절에도 왔다가 왔다 갔다 하는데. 내 몸이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그냥 몸이 집으로 가잖아요. 운전대에 앉으면 내가 막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운전을 하잖아요.
운전을 하다가 난 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앞에서 차가 확 끼어들면, 나도 모르게 그냥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자동반사적으로 핸들을 틀어서 내가 내 몸을 살립니다. 그게 내가 하는 걸까요?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의식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운전을 하는 걸까요?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몸이 하는 것도 아니고. 뭔지 모르지만 이 몸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어요. 뭔가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말도 나오고 행동도 나오고 모든 것이 나오는 것이지요. 이걸 이제 바다와 파도의 비유를 들어서 하나의 바다에서 수많은 물결이 나오듯이,
하나의 자성 하나의 불성 그걸 굳이 이름해서 우리는 불성이다. 자성이다. 본래면목이다. 보리이고, 열반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시체 끌고 다니는, 송장 끌고 다니는 놈.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어디서 왔을까요? 말이 나오기 직전에 말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습니까?
말이 목구멍에서 나왔다 이러지만, 진짜 말이 목구멍에서 나왔을까요? 생각, 어떤 특정한 생각을 합니다. 벚꽃이 확 피어있는 거 상상을 해보세요.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또 어디로 사라졌지요? 생각이 분명히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는 했는데,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고 어디로 간 지도 모르겠어요.
그것을 그냥 이 눈앞인 거 같단 말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그냥 목전이다. 당처,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냥 이 자리에서 어떤 특정한 생각이 생겨났다 사라집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지요? 어디에서 그 생각이 올라왔다가 사라졌을까요?
그 생각이 생겨나고 돌아간 자리. 생각이 생하고 멸한 자리. 생각이 온 자리. 생각이 돌아간 자리. 그 자리에서 말도 나오고 말도 ‘아’라고 하고 나서 ‘아’라는 말이 인연 따라 ‘아’라는 작용을 남기고 나서는 바로 사라져버립니다. 그럼 그 소리는 어디로 갔지요?
그 소리도 그 자리에서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 자리에서 왔다가 그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뭐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부모님께서 너를 태어나게 하기 전에 너의 본래면목은 무엇이냐? 너는 태어나기 전에 어디서 왔느냐? 죽고 나면 어디로 돌아갈 것이냐?
우리는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걸 내가 말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생각한다고 생각하니까 죽음이 두려운 겁니다. 오늘 49제가 있는데, 돌아가시고 나면 지옥 가시면 어쩌지? 안 좋은 데 가시면 어쩌지?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디서 온 줄 모르고 어디로 가는 줄 모르니까.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걸까요?
우리 오늘의 영가님께서는 도대체 어디서 오셔서 이 한 생을 살다가 어디로 돌아가신 걸까요. 조금 전에 벚꽃을 떠올리던 그 자리. 여기 어딘가에서 벚꽃이 떠올랐다가 떠오른 생각이 어디로 돌아갔습니다. 말도 지금 이렇게 나왔다가 말도 사라졌어요. 뭔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놈이,
여러분 몸을 이렇게 움직이면서 살고 있습니다. 배고프면 밥을 찾고 배부르면 화장실을 찾고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나이가 먹고 저절로 쭈글쭈글해지고 저절로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내가 한다고 무조건 생각했지만, 그게 진짜 내가 하는 것이냐?
그래서 어떤 스님들은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해요. 이 몸은 그냥 그야말로 송장과도 같다. 송장과도 같다. 몸을 움직이는 그 자리. 그 당처. 그 본래면목. 그 주인공. 그래서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나의 진짜 주인공이 따로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물론 그것이 따로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 그냥 같이 있으니까,
불이법으로서. 그런데 그 주인공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김새가 있는 것도 아니고, 크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색깔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안이나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하나의 이 부처 하나의 주인공을 같이 쓰고 있다.
이 우주법계 전체가 이 하나의 주인공이 이 우주법계 전체를 돌리고 있다. 운행시키고 있다. 그래서 대기대용, 거대한 이 우주법계라는 거대한 대기, 거대한 기관, 거대한 어떤 생명의 기관이 대용, 크게 한바탕으로 온 우주 전체를 굴러서 쓰고 있다. 우리의 본성, 우리 모두의 본성은 대기대용의 하나의 주인공이고 본래면목이고 불성입니다.
이 몸뚱이가 여러분이 아니고 그 참 주인공 불성 참 부처가 나의 주인공이라는 것이지요. 나를 이렇게 말하게 하는 놈. 움직이게 하는 놈. 살아있게 하는 놈. 숨 쉬게 하는 놈. 제가 말하면 여러분 이렇게 듣게 하는 놈. 그게 바로 여러분의 자성이고. 여러분의 본래면목이고. 진짜 내가 누구냐?
라고 했을 때 그게 바로 나이지. 몸뚱이가 내가 아닙니다. 왜? 몸뚱이는 왔다가 가는 거잖아요. 생겨나면 사라질 거잖아요. 영원하지 않습니다. 진짜 나의 주인공이 뭐냐? 진짜 내가 누구냐? 그걸 확인하기 전에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미래가 두렵습니다. 왜?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갈지 모르니까. 그런데 이 본래면목이라고 하는 좀 전에 그 생각이 왔다가 생각이 사라진 그 자리, 그 자리로 이 육신도 이 몸도 그 자리에서 왔다가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 자리가 어디 있어요. 지금 이 소리(죽비소리)를 듣는 이 자리에,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우리 영가님이 어디로 가셨을까요? (죽비소리)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오고 가는 게 아니에요. 삶은 오고 갈 수가 없습니다. 진실은 오고 갈 수가 없습니다. 겉껍데기는 오고 가는 것처럼 보이고 사람들도 왔다 가는 거같이 보이고 돈도 왔다가 가고 명예도 왔다가 가고 수많은 일들이 왔다가 가지만, 진정함 나의 본성 이건 왔다 갈 수 없어요.
여러분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옆에서 누가 소리를 냈는데, 안 들은 적이 없지요. 이걸(죽비소리) 듣고 있습니다. 이걸 듣는 그 자리. 이걸 듣는 그 작용을 하는 주인공, 그것은 늘 언제나 이 자리에 이렇게 있다.
그럼 옛날에 스님들은 그랬습니다. 당신의 은사 스님들이 열반하시고 나더라도 울거나 막 가슴 아파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쉽게 말해서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는 사실은 49제가 별 의미가 없지요. 어디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아니까. 그런데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돌아가신 그분도 무명 속에 헤매니까,
이 육신이 난 줄 아니까 죽고 나서 헤매는 것이지요. 내 몸이 없어졌구나. 내가 죽었구나. 그래서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한단 말이지요. 그래서 이런 법문을 들려드림으로써, 나의 본래면목 영가님의 본래면목 조금 있다 천도재를 하겠지만,
천도재에 나오는 한글의식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면 전부다 이 영가님에게 참 본래면목이 무엇인지 영가님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영가님이 진짜 내가 누군지를 알려주는 법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바른 법문을 들려드림으로써 우리 영가님은 우리 인간들보다 훨씬 의식이 맑다 그러지요.
우리는 잘 이해를 못 해도 이분은 훨씬 빨리 이해를 한단 말이지요. 그래서 바로 깨달아서 아,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구나. 여래여거. 여래라는 부처님의 다른 명호, 여래를. 여래여거를 여래라고 합니다. 즉, 여여하게 왔다가 여여하게 가는 분. 와도 온 바가 없고 가도 간 바가 없이, 늘 이 자리에서 왔다가 이 자리로 돌아간단 말이에요.
와도 온 것이 없고 가도 간 것이 없습니다. 그게 우리의 본성이에요. 그러니까 죽는다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장자는 자신의 아내가 죽었을 때 남들은 다 눈물 흘리면서 아내 죽은 걸 애도하면서 찾아왔는데, 본인은 표주박을 두들기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래요. 어디로 간 줄 아니까,
어디로 간 줄 분명하게 아는 사람에게는 죽음도 죽음이 아닙니다. 괴로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 유교적인 사고방식에서는, 유교의 제사는 영가님을 자꾸 부르는 거예요. 오십시오. 오십시오. 해서 우리 집에 자꾸 남아서 후손들을 돌봐주세요, 하고 자꾸 붙잡는 게 유교식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시고 나면 자꾸 곡을 하라 그러잖아요. 눈물이 안 나도 엉엉엉 하면서 곡을 하라고 하거든요. 왜냐하면 내가 울어야 곡을 해야 영가님이 후손이 우니까, 못 가는 거예요. 가슴이 아파서. 못 가게 붙잡아두는 걸 제사라고 그럽니다, 유교식.
그런데 불교의 천도재는 그게 아니에요. 옮길 천(荐) 자, 길 도(度) 자. 이곳에서 다른 본인의 갈 길을 가라는 거예요. 어디로? 어느 길이 본인이 갈 길일까요? 그 자성의 자리가 본인의 본래 갈 길이에요. 그런데 허망하게 중생이 나인 줄 알고 착각의 길, 분별 망상의 길에 놓여있지 말고 빨리 부처의 자리로 빨리 돌아가라. 그걸 극락왕생이라고 합니다.
어디 딴 세상에 극락 왕생하는, 저 서방정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자리에서 자기 성품을 깨달으면 그게 지금 이 자리의 극락왕생입니다. 그래서 아미타경이나 이런 경전에 보면 지금 이 자리에서 한발 내딛는데, 곧장 극락에 도착한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서방만 정토가 아니라, 동방 남방 북방 모든 곳이 다 정토다.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서방정토만 아미타 부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동방에도 동방의 부처님 서방에도 서방의 무수히 많은 부처님 온 우주 전체에 부처님으로 꽉 차있다,라는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이렇게(죽비소리) 부처님이 계시고. 이렇게 영가님이 이 자리에 함께 하고 계시고.
그래서 큰 스님들께서는 은사 스님이 열반하셨을 때 은사 스님은 열반하셨지만, 나에게는 은사 스님이 열반 한 바가 없다. 언제나 이렇게 함께 하고 계신다. 언제나 숨을 쉬면서 함께하고 있고. 말을 하면서 함께하고 있고.
무엇을 하든 일거수일투족에 이 본래 자리를 언제나 함께 온 우주법계 전체가 한마음으로 같이 쓰고 있으니, 어떻게 너의 자리 내 자리가 다를 수가 있겠습니까? 내 참 본성과 영가님의 참 본성이 다를 수가 있고, 여러분의 참 본성과 저의 참 본성이 다를 수가 있겠습니까?
저 안드로메다에 있는 우주인의 참 본성과 아프리카에 있는 짐승의 참 본성과, 새벽에 걸어가 보니까 우리 금련사 비석, 금련사 이렇게 쓰여 있는 그 빛 간판 좌위에 마치 좌 부처 우 부처 인양 까망 고양이 한 마리와 하양 고양이 한 마리가 요로고 저를 쳐다보고 있더라구요.
이 고양이들이 이렇게 금련사 좌우에 탁 있는데, 참 이거 무슨 좌우 보살님들이 이렇게 앉아있는 것처럼 따듯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 고양이들이 좌 부처 우 부처가 맞습니다. 고양이의 겉모습은 고양이지만 고양이의 참 본성은 부처가 아닌 바가 없다. 나와 둘이 아닌 한마음이고 하나로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이 나오면, 나오는 대로 어디서 말이 나와요. 이 자리에서 본성 자리에서 말이 나옵니다. 아버지라는 말도 본성 자리에서 나오고. 어머니라는 말도 본성 자리에서 나오고. 이 소리(죽비소리)도 본성 자리에서 나오고. 그래서 여기서(죽비소리) 본성을 확인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옛날 큰 스님들께서 딱 법문하실 때 주장자를 들고 (죽비를 세 번 설법대에 치면서) 이미 법을 설해 마쳤다. 여기에서(죽비소리) 진리를 확인하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법을 확인하라는 얘기입니다. 그래도 모르고 제자가 “달마가 동쪽에서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 혹은 “부처님의 법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이래 물어보면,
“뜰 앞의 잣나무다.” 뜰 앞의 잣나무를 떠올리라는 얘기가 아니고, 그건 뜰 앞의 잣나무라는 이미지를 따라가는 거잖아요. 이미지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어요. 그 말이 나온 자리. 마 삼근이라고 하든 무(無)라고 하던 뭐 성냥갑이라고 하든 호떡이라고 하든 아버지라고 하든 코카콜라라고 하든 시계라고 하든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그 말이 나온 자리로 돌아가면, 그게 바로 본성에서 나온 겁니다. 모든 말에서 자성을 확인할 수 있어요. 모든 움직임에서 이렇게 자성을 확인할 수, 이 손이 어떻게 움직여요? 이 손이 움직이는 걸까요? 손이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자성이, 자성이 이걸 움직이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에 누구지요? 손 하나를 들어서 법을 설했던, 누구 스님이에요? 법이 뭐냐고 물으면 항상 손가락만 들었던, 평생을 손가락만 들었단 말이에요. 제자들이 수없이 찾아와서 “법이 무엇입니까?” 이러면 손가락만 들었단 말이에요. 손가락을 드는 여기에 뭔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손가락을 들든 볼펜을 하나 들든 컵을 들어 보이든 차나 한잔하라고 하든 그 움직임이 나온 자리. 그 말이 나온 자리. 그 당처로 돌아가면 그 자리에서 법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법을 확인하지 못하는 이유는 말을 하면 말뜻을 따라가는 거예요. 뜰 앞의 잣나무다. 이러면 뜰 앞의 잣나무에는 뜻이 없어요.
뜰 앞의 잣나무가 아니라, 뜰 앞의 잣나무라는 말이 나온 그 당처. 그 자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중생들은 뜰 앞의 잣나무를 쫓아가서 잣나무를 뚫어져라 쳐다봐요. 거기 뭔 법이 있나? 하고. “도가 무엇입니까?” 하면 이게(죽비) 법이다 하고 하면, 이걸(죽비) 뚫어져라 쳐다봐요.
저 얘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보면, 언젠가는 이걸(죽비) 딱 들 때 바로 법이 확인되겠지. 이미 법이 이렇게 확인되고 있는데. 그렇게 하니까 진언이라는 방편을 써서 말의 뜻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여기 무슨 말의 뜻이 없잖아요. “법이 무엇입니까?” 수리 수리 해도 되고 사바하 해도 되고
옴 마니 반메훔 해도 되고 그 말뜻에 개념이 없으니까, 말이 나온 자리를 돌아보라는 거거든요. 회광반조 해보라는 겁니다. 말이 나온 자리. 내가 나온 자리. 내가 온 곳.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전혀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고 나서 지옥 간다?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소설입니다. 소설.
지옥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겠어요. 천상은 또 어떻게 있을 수가 있겠어요. 우리 온 자리가 이 자리인데. 그리고 늘 이 자리를 쓰고 있는데. 가도 그 자리로 가는 거지. 부처 자리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 자리로밖에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진정한 49제를 절에서 자꾸 하는 이유는 49제를 통해서 살아계신 분은 돌아가신 분을 서글퍼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마음에서 완전히 보내드려야 된다는 거예요. 돌아가신 영가님은 이 법문의 자리, 49제 막제의 49일 동안 법문을 꾸준히 들음으로써 법당에 모셔져 있음으로써 계속해서 법문을 들음으로써 아! 내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구나. 내가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다는 생각, 그 생각만 없으면 나는 그냥 본래 온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구나.
내가 본래 부처였구나.라는 사실에 눈 뜨고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그게 극락 왕생하는 거예요. 그럼으로써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도 가끔 한 번씩 천도재에 함께 동참함으로써 아, 내가 죽음 이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구나. 내가 죽더라도 죽는 게 아니구나.
실제 보면 아니타 무르자니,라는 그 홍콩에 있는, 싱가포르에 있는 사람인가요? 아주 죽을 병, 불치병에 걸렸던 어떤 여인이었는데, 그분이 죽었어요. 죽으면서 임사체험이라 이러지요. 죽음을 체험하고서 어떻게 신기하게 다시 죽지 않고 돌아왔어요. 돌아왔는데, 자신이 죽음 속에서 겪었던 것들을 글로 풀어서 책을 써서 이제 우리나라에도 번역돼 있는데,
그 책이 아주 감동스럽습니다. 그분은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도 아니고, 마음공부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죽고 나서 죽음의 세계를 적어놨어요. 이분만 이런 걸 쓴 게 아니라, 임사 체험한 사람들이 글을 써놓은 책들을 보면 다 이런 얘기, 다 똑같습니다. 그 책을 보면 한 편의 큰 스님 법문을 듣는 거 같애요.
나는 죽음이 아주 두려운 곳이고 무서운 곳이고 무슨 저 죽음의 저승사자가 나타나서 나를 끌고 가고 이럴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더라. 내가 지금까지 죽음을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죽음은 너무나도 어머니 품보다도 더 따듯하고 자비롭고도 무한한 어떤 자비와 광명 속에 내가 무한히 돌봐지는 것 같은,
우주법계의 그야말로 법신 부처님에게 무한히 돌봐지는 것 같은, 그런 놀라운 평화로움 놀라운 따듯함 놀라운 어떤 아름다움 모든 공덕과 장엄이 다 그 속에 깃들어 있었다. 그걸 극락정토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다시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내가 왜 지금까지 어리석게 살았을까를 돌아보게 되었다. 왜 지금까지 살면서,
웃음이 나왔다는 거예요. 살면서 돈이 중요하다고 느끼고, 남들이 나한테 얘기하는 평판이 중요하다고 느끼고 살았던, 남들에게 잘 보여야 돼 하고 살았던 그 모든 것들이 일시에 너무나도 웃긴, 너무나도 참. 내가 왜 그렇게 살았을까, 그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을. 이렇게 나의 본성은, 이렇게 무한한 우주인데.
내가 그 하찮은 몸뚱아리에 갇혀서 몸뚱아리가 나인 줄 알고, 그렇게 어리석게 살았던 그 지나온 삶이 한순간에 그냥 웃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더라. 그러면서 지극히 이렇게 평화로움. 삶을 내가 왜 그동안은 눈치채지도 못하고 살았는지, 어떻게 내가 늘 그 법속에 있으면서 진리 속에 있으면서 진리를 못 보고 살았는지, 너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음은 바로 이런 겁니다. 온 자리로 돌아가는 게 죽음이에요. 환지본처(還至本處)라고 하잖아요.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법당에 나오면 계속 이 얘기를 가르쳐주는 거예요. 절에 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삼배지요. 법회 할 때 제일 먼저 하는 게 삼귀의(三歸衣)입니다. 그럼 뭐예요?
삼귀의(三歸衣), 본래 내가 돌아온 본래 본성이 3가지라는 거예요. 불법승(佛法僧), 내가 본래 부처고. 본래 진리이고. 본래 청정한 진리를 닦아가는 수행자. 그게 나의 본성입니다. 그러니까 귀의(歸衣)라는 게 뭐냐면 귀(歸)가 돌아갈 귀(歸) 자예요. 본래 내가 온 자리가 불법승 삼보라서 내가 돌아갈 자리가 귀의할 자리. 돌아가서 내가 의지해야 될 자리.
결국에는 내가 의지해야 될 자리는 불법승 삼보 그 자리밖에 없다. 그리로 돌아가는 거밖에 없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삼귀의 할 수밖에 없는 본래 불법승 삼보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본래 부처들이지.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돈에 의지하고 남편에 의지하고 명예에 의지하고 집에 의지하고 자식에게 의지하고 수많은 것들에 의지하면 살았지만,
그건 진짜 의지할 게 못 되지요. 왔다 가는 거니까, 사라지는 거잖아요. 그건 진짜 의지할 바가 못 됩니다. 정말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삼귀의, 본래 왔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 본래 불법승 삼보라는 나의 본래면목으로 돌아가는 것. 그걸 계속 절에서 일깨워주고 있는 겁니다.
법회 시작하면서 일깨워주고. 법문을 통해서 계속 일깨워주고. 본래 이렇게 환지본처(還至本處)할 수밖에 없다. 본래 온 자리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불교에서 관세음보살님이 왜 관세음보살님이세요. 시무외자(施無畏者)가 관세음보살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계속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는데, 관세음보살님이 무얼 가르치는지 몰라요.
신묘장구대다라니 천수경 독송하잖아요. 신묘장구대다라니가 관세음보살님이 주신 다라니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다라니에요. 관세음보살님이 왜 시무외자(施無畏者)입니까? 무외(無畏), 두려움 없음을 보시하는 자가 관세음보살님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이 왜 두려움 없음을 보시할까요?
우리 중생들은 착각의 두려움에 빠지는 거예요. 내가 미래에 몸이 아프면 어쩌지? 죽고 나서 지옥 가면 어쩌지? 내가 나중에 잘못되면 어쩌지? 남편이 아프면 어쩌지? 자식이 잘못되면 어쩌지? 오만가지 두려움에 빠져 있는 겁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그런 건 없다.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모든 것은 허상이고 환상이고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분별 망상일 뿐이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분이 관세음보살님입니다. 아무런 두려워할 것이 없고, 완전히 자유롭게 완전한 행복 완전한 갖추어진 존재로서 당당하게 멋있게 삶을 하나의 유희삼매로써, 유희삼매 즉 즐거운 놀이로써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삶은 심각한 게 없어요. 잠깐 인연 따라와서 놀다 가는 곳이 이곳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실을 깨달으면 심각한 게 없지요. 인생에. 두려울 게 없지요. 어디로 가는지 뻔히 아는데,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재밌게 놀다 가면 된단 말이에요. 이 세상은. 그래서 유희삼매. 다툼 없는 무쟁삼매.
그 누구와도 다툴 필요 없고 두려워할 필요 없이 그저 즐겁고 재밌게 놀다 가면 됩니다. 삶을. 삶을 즐기다 가면 되는 게 삶의 본성입니다. 절에 오니까, 절에 와서는 항상 심각하게 진지하게 뭔가 막 긴장하고, 그래 있는 게 절이 아니에요. 노는 곳이 절입니다. 잘 놀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곳이 절이고.
그러니까 이완하고 릴랙스(relax) 하라고 자꾸 명상에서 가르치는 게 긴장할 필요가 없잖아요. 긴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삶의 본성을 알면 내가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아는데, 뭐 하러 긴장을 하겠습니까.
첫댓글 귀한법문 감사 합니다._()_
아무런 두려워할 것이 없고, 완전히 자유롭게 완전한 행복 완전한 갖추어진 존재로서
당당하게 멋있게 삶을 하나의 유희삼매로써,
유희삼매 즉 즐거운 놀이로써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삶은 심각한 게 없어요. 잠깐 인연 따라와서 놀다 가는 곳이 이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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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